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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유학자 儒賢 스크랩 ?옻골 마을의 비보숲과 광양현감 최수학
이장희 추천 0 조회 41 14.05.27 23:06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옻골 마을의 비보숲과 광양현감 최수학

               -이정웅의 노거수와 사람들

 

  대구의 대표적인 반촌인 옻골마을은 경주 최씨 광정공파의 집성촌으로 조선 중기 성리학자 대암(臺巖) 최동집(崔東集 1586~1661)이 1616년(광해군 8년)에 개척했다고 한다. 대암산을 뒤로하고 동쪽으로는 검덕산이, 서쪽으로는 서산이 감싸 안고 남쪽은 탁 트여 농경지가 전개되다가, 금호강으로 이어지는 곳이다.

옻골마을의 비보숲

 

느티나무

 

회화나무

 

 

 

 

 

 

마을의 안녕을 바라는 마음으로 조성

 

 

   대암은 한강 정구에게 학문을 배워 진사시에 합격했으며 1639년(인조 17년)에 유일로 천거되어 참봉이 되고, 이듬해 봉림대군(효종)의 스승이 되었다.

   명(明)이 망하자 팔공산 부인동(현 용수동 일대)에 터를 잡고 숭정처사(崇禎處士)를 지칭하며 외부와 단절한 채 오로지 글 읽기와 후진양성에 전념했다.

   용수동 냇가의 큰 자연석 비에는 조선후기 명재상이었던 채제공이 찬한 비문이 전해오고 있으며 저서로 '대암집'을 남겼다.

  1630년(인조 8년)에 지은 종택의 안채는 대구에서는 가장 오래된 살림집으로 흔히 사랑채와 더불어 백불고택(百弗古宅)으로 불린다. 오른쪽에 1753년(영조 29년)에 지은 재실 보본당, 대암의 불천위 사당인 별묘(別廟)와 백불암 최흥원(1705~86)의 불천위 사당인 대묘(大廟)가 있다.

   안채, 사랑채, 재실, 대묘, 별묘 등이 조화를 이룬 큰 규모로, 특히 주택은 중국 명나라 건축양식으로 원, 사각, 팔각기둥을 배합하여 주역의 원리를 적용한 특이한 구조를 간직하고 있어 조선시대 양반 주택와 생활양식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사료가 되어 중요민속자료(제261호)로 지정되었다. 특히 낮으면서도 소박한 돌담은 전국 아름다운 돌담길 중 하나이다.

   그러나 대암이 개척한 이 마을이 오늘날 영남을 대표하는 전통마을로 자리 잡은 데에는 광양 현감을 지낸 증손자 최수학의 역할이 컸다.

   공은 아버지 선교랑 최경함(崔慶涵)과 어머니 영양이씨 사이에서 1652년(효종 3년)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거동과 모습이 거룩하고 타고난 성품이 아름다웠으며 윤리를 중시하며 돈과 재물을 경시했다고 한다. 효성도 지극해 부모를 극진히 봉양했으며, 이웃과 친척의 어려움을 돕는데도 힘썼다고 한다.

   1691년(숙종 17년) 무과에 급제하여 사헌부 감찰, 광양 현감에 제수되었다. 재임시 선정을 펼쳐 주민들이 세운 선정비가 있다. 특히 퇴계학파의 거두 갈암이현일(1627~1704)이 서인 안세징(1639~1702)의 탄핵으로 함경도 종성에 위리안치 되었다가 1697년(숙종 23년) 광양으로 이배되어 귀양살이를 할 때 잘 보살펴 갈암은 물론 아들 이재로부터 감사의 편지를 받기도 했다.

   이조(吏曹)의 한 벼슬아치가 연회장에서 분에 넘치는 무례한 행동을 하자 크게 나무라고는 그 길로 벼슬을 버리고 고향 옻골로 돌아와 자손들에게 학문을 가르쳤다. 그러나 그의 무단 귀향이 빌미가 되어 전라도 운봉으로 귀양을 가게 되었다.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그의 인간됨을 칭찬하며 나라에 진정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아 1714년(숙종 40년) 귀양지에서 별세했다. 향년 63세였다.

   공은 조경가이자 풍수지리에도 능한 분이었던 것 같다. 마을 중심부에 관료나 학자를 상징하는 회화나무를 심어 이곳이 선비들이 사는 곳임을 상징하고 또한 동구에 느티나무를 심어 사기(邪氣)가 들어오는 것을 막고 반대로 좋은 기운이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했다. 허한 서쪽에는 소나무 숲을 조성해 보완한 것이 그 예이며, 특히 못을 파서 마을 뒷산의 거북(生龜巖·살아있다고 여기는 거북모양의 바위)이 물에 머물면서 마을의 안녕을 지켜주기를 바라며 의도적으로 비보(裨補)숲을 조성한데서 알 수 있다.

   그 후 마을에서는 당대 유림의 종사(宗師)로 존경받는 백불암 최흥원을 비롯하여 영하3걸(嶺下三傑)의 한 분인 최식(崔湜), 성리학자 최효술(崔孝述), 국채보상운동 대구 대표의 한 분인 최시교(崔시敎), 독립운동가 최종응(崔鐘應) 등 많은 인재가 배출되었다.

   특히, 백불암(1705~1786)은 퇴계 이황(1501~1570)이 향촌사회를 교화하기 위해 만든 예안향악을 보다 현실에 맞도록 증보(增補)하여 대암이 은거했던 부인동에 동약(夫人洞 洞約)을 실시하여 주민들의 생활안정과 풍속순화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정조가 문효(文孝) 세자의 스승으로 전국에 어진 선비를 구할 때 좌익찬(左翼贊)에 천거되어 우익찬 순암 안정복과 인연을 맺어 사후 그가 묘지명을 쓰기도 했다. 또한 조정의 명을 받아 보본당에서 실학자 유형원의 '반계수록' 초고를 교정했다. 승정원 좌승지 겸 경연참찬관에 추증되고 저서로 '백불압집'을 남겼다.      

대구생명의 숲 운영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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