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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보종찰 경남 합천 가야산 해인사를 찾아서 ③ (法寶宗刹 慶南 陜川 伽倻山 海印寺 參訪)
-대적광전(大寂光殿)과 대비로전(大毘盧殿)- 구광루 옆 계단에 올라 문을 통과하니 해인사의 주전인 극락보전이 웅장한 모습을 나태내 었습니다. 그 앞에는 삼층석탑과 석등이 고색창연하게 서 있었습니다.
대적광전(大寂光殿) 경남유형문화재 제256호
해인사는 화엄경을 중심 사상으로 하여 창건되었으므로, 화엄경의 주불인 비로자나부처님 이 모셔져 있습니다. 그래서 법당의 이름도 대적광전(大寂光殿)입니다.
상징합니다. 그러므로 비로자나부처님을 모신 대적광전은 부처님의 진리의 몸이 화엄경 을 언제나 두루 설하는 대적광토(大寂光土)의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창한 건물로 원래의 이름은 비로전(毘盧殿)이었다고 합니다. 지금의 대적광전은 1818년 에 정면 5칸, 측면 4칸의 큰 규모로 다시 지은 것이며, 법당 안에는 일곱 분의 불상이 모셔 져 있습니다. 법당에 들어서 보면, 왼쪽부터 철조관음보살, 목조 문수보살, 목조 비로자 나불이 봉안되어 있고, 그리고 맨 가운데에 본존 비로자나불이 모셔져 있고, 다시 그 옆으 로 목조 지장보살, 목조 보현보살, 철조 법기보살이 차례로 봉안되어 있습니다.
대적광전은 건물은 사방에 편액을 걸었는데 정면인 남쪽엔 '대적광전(大寂光殿)', 서쪽엔 '법보단(法寶壇)', 북쪽엔 '대방광전(大方廣殿)', 동쪽에는 '금강계단(金剛戒壇)' 이라 걸려 있습니다. 주련은 고종과 대원군의 글씨라는데 주련은 나중에 살펴보겠습니다.
정면 남쪽의 대적광전(大寂光殿) 편액. 안평대군(安平大君)의 글씨.
서쪽 법보단(法寶壇) 편액. 해강 김규진(海岡 金圭鎭) 선생의 해서체 편액.
뒷쪽 북쪽의 대방광전(大方廣殿) 편액. 해강 김규진(海岡 金圭鎭) 선생의 전서체 편액.
동쪽의 금강계단 편액. 해강 김규진(海剛 金圭鎭) 선생의 초서체 편액.
서화가 해강 김규진(海岡 金圭鎭 1868~1933)에 대하여
『평남 중화 출생으로 본관은 남평(南平). 자는 용삼(容三), 호는 해강(海岡)ㆍ만이천봉주 인(萬二千峰主人)ㆍ백운거사(白雲居士).
8세 때부터 외삼촌인 서화가 이희수(李喜秀)에게 글씨를 배웠고, 18세 때 중국에서 8년간 서화를 공부하고 돌아왔다. 귀국 후 서울로 올라와 왕세자인 영친왕의 사부(師父)가 되어 글씨를 가르쳤고 1902년경 일본에 가서 사진기술을 익혀 1903년 소공동 대한문 앞에 '천 연당'(天然堂)이라는 사진관을 열었다.
그후 1913년 다시 그 사진관 안에 '고금서화관'(古今書畵觀)이라는 최초의 근대적 화랑을 개설하여 표구 주문과 함께 서화매매를 알선하기도 했다. 1915년 5월에는 '고금서화관' 신축건물에 다시 '서화연구회'(書畵硏究會)라는 3년 과정의 사설 미술학원을 열어 후진양 성과 전람회를 개최했다. 이때 학생들의 교재로〈서법요결 書法要訣〉·〈난죽보 蘭竹譜〉 ·〈육체필론 六體筆論〉등을 펴냈다. 한편 '서화미술회', '서화협회'에 창립발기인으로 참 가했으며 조선총독부 미술전람회의 서예부 심사위원을 맡기도 하는 등 근대서화계몽운동 에 적극적인 활동을 계속하다가 66세로 죽었다.
서예의 각체에 두루 능하며 특히 활달한 대필서로 이름을 날렸다. 금강산 구룡연의 20m에 달하는 미륵불(彌勒佛) 예서, 내금강의 천하기절(大下奇絶) 초서, 법기보살(法起菩薩) 해서 등 각서(刻書)가 남아 있고 전국의 궁전ㆍ사찰ㆍ현판에 많은 글씨를 남겼다. 그중에서도 해인사의 '가야산해인사'(伽倻山海印寺), 부벽루의 '금수강산'(錦繡江山), 서울의 '보신 각'(普信閣), '희정당대조전'(熙政堂大造殿) 등이 유명하다. 그림으로는 1920년 창덕궁 희 정당에 그린 벽화 〈총석정절경 叢石亭絶景〉과 〈금강산만물초승경 金剛山萬物肖勝景〉 이 있는데 화려한 색채와 사실적 묘사로 그의 대표작이라 할 만하다. 문인화가답게 호방한 필치가 돋보이는 묵죽(墨竹)이 뛰어나며 근대적 화풍이 엿보이는〈폭포〉·〈말〉등의 작 품도 있다.』 -백과사전-
비로자나불삼존상(毘盧遮那佛三尊像) 경남유형문화재 제38호.
비로자나불을 본존으로 좌보처 문수보살, 우보처 보현보살을 모시고 있습니다. 그 사이 사이에 작은 비로자나불과 지장보살을 모시고 있습니다.
보통 대적광전에는 삼신불(三身佛)을 모십니다.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을 본존으로 좌보처 원만보신 노사나불, 우보처 천백억화신 석가모니불을 모십니다. 혹은 좌우에 아미타불과 석가모니불을 모시기도 하고, 약사여래를 모시기도 하여 일정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해 인사의 경우는 문수보살과 보현보살 사이에 관세음보살 비로자나불 지장보살 법기보살 등 을 모시는 것이 특이합니다.
본존 비로자나불(本尊 毘盧遮那佛)
은 가운데의 본존불을 모시기 전까지의 본존불이었습니다. 이 목조 비로자나불상은 그 좌 우의 보현보살상, 문수보살상과 더불어 삼존불로서, 고려시대에 가지가 셋인 큰 은행나무 한 그루를 가지고 만든 것이라 합니다. 삼존불은 처음에는 경상북도에 있는 금당사에 모 셨다가, 지금은 터만 남아 있는 가야산의 용기사를 거쳐,1897년 해인사 대적광전에 모시 게 되었습니다. 그밖의 불상들은 조성 연대가 알려져 있지 않다고 합니다.
좌보처 문수보살(左補處 文殊菩薩)
문수보살 왼편에 철조 관세음보살(鐵造 觀世音菩薩)을 모시고 있습니다.
우보처 보현보살(右補處 普賢菩薩)
중앙의 보현보살(普賢菩薩) 좌우에 목조 지장보살(木造 地藏菩薩)과 철조 법기보살(鐵造 法起菩薩)이 모셔져 있습니다. 여기서 특기할 것이 법기보살(法起菩薩)인데 좀 생소하지 요? 그래도 언뜻 들어보시기는 하셨을 것 같습니다.
80권본 《화엄경(華嚴經)》권45 『제보살주처품(諸菩薩住處品)』에 "바다 가운데 금강산 (金剛山)이 있는데 예로부터 많은 보살 대중이 그 가운데 계셨다. 현재에도 보살이 있어 그 이름이 법기보살(法起菩薩)이니 일천이백 명의 보살권속과 함께 그 가운데서 항상 설법 하고 계신다." 하였습니다.
이 보살님은 법희보살(法喜菩薩)ㆍ법상보살(法尙菩薩)ㆍ법용보살(法勇菩薩) 등이라고도 합 니다. 이 보살님은 범어로 Dharmodgata인데 음역(音譯)하여 담무갈(曇無竭)이라 합니다. 《대품반야경(大品般若經)》에 담무갈이라는 보살이 중향성(衆香城)에 머물면서 항상 반 야바라밀을 설하는데, 상제보살(常啼菩薩)이 여러 부처님과 보살의 도움으로 이 나라에 도 착하여 이 보살에게 반야바라밀의 가르침을 받았다고 하였습니다.
화엄경에서 법기보살이 금강산에 상주하고 계신다고 했는데 우리나라 금강산은 예로부터 금강산ㆍ중향성으로 불리면서 법기보살의 주처로 여겨지고 있고 금강산에서 자주 법기보 살을 친견하는 일이 많았다고 합니다.
삼장탱화(三藏幀畵)
삼장탱화
이 삼장탱화는 지장탱화가 확대 발전하여 형성된 것입니다. 삼장이란 전장(天藏)ㆍ지장 (地藏)ㆍ지지(地持)보살의 3대보살을 지칭하는 것으로 이 세 보살의 법회를 동시에 도상화 한 것이 삼장탱화입니다.
이 탱화의 중앙에 지지보살(持地菩薩)이 위치하고 양 옆의 협시보살로는 대범천왕(大梵天 王)과 제석천(帝釋天)이고, 좌측은 천장보살(天藏菩薩)로 협시보살은 신중탱화의 상위 4보 살님들 중에 두 분을 모셨고, 우측에는 지장보살(地藏菩薩)로 협시보살은 도명존자(道明尊 者)와 무독귀왕(無毒鬼王)입니다.
지지보살(持地菩薩)은 지부중(地府衆), 천장보살(天藏菩薩)은 천부중(天府衆), 지장보살(地 藏菩薩)은 명부중(冥府衆)을 담당하고 계십니다.
신중탱화
벽화 1. 굶주린 호랑이에게 보시하다.
길어서 여기서 소개할 수 없네요. 자세한 내용은 불교이야기 방 참조하세요.
대적광전 벽화. 도림선사와 백락천
백락천(白樂天)은 당나라의 유명한 시인이요 뛰어난 경륜을 지닌 정치가이기도 합니다. 충만해 있을 때였습니다. 한 때 그가 항주(抗州)의 자사로 부임한 후의 이야기입니다.
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백락천이, 내가 한 번 직접 시험해보리라 작정하고 선사가 머물고 있다는 절로 수행원을 거느리고 찾아갔습니다.
도림선사는 청명한 날이면 경내에 있는 오래된 소나무 위에 올라가 좌선(坐禪)을 하곤 하 였습니다. 마침 백락천이 도림선사를 찾아온 날도 나무 위에서 좌선하는 중이었습니다. 백락천이 나무 아래 서서 좌선하는 스님의 모습을 올려다 보니 아슬아슬한 생각이 들어
"선사의 거처가 너무 위험합니다."
"자네가 더욱 위험하네."
"나는 벼슬이 자사에 올라 강산을 진압하고 또 이렇게 안전한 땅을 밟고 있거늘 도대체 무엇이 위험하단 말이오?”
이 기회에 교만한 마음을 깨우쳐주기 위해 곧바로 쏘아 부쳤습니다.
"티끌같은 세상 지식으로 교만한 마음만 늘어 번뇌가 끝이 없고, 탐욕의 불길이 쉬지 않으니 어찌 위험하지 않겠는가!"
백락천은 자기의 마음을 환하게 꿰뚫어 보는 듯한 눈매와 자기가 자사라는 벼슬에 있음을 알면서도 당당하게 자기 할 말을 다하는 기개에 눌려,
"제가 평생에 좌우명을 삼을 만한 법문 한 귀절을 듣고 싶습니다."
다.
"나쁜 짓을 하지 말고(諸惡莫作)
"그거야 삼척동자라도 다 아는 사실이 아니요?"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이지만 팔십 노인도 행하기는 어려운 일이네."
가 없습니다. 그 가르침을 실천하여 인격화되지 않으면 아만과 번뇌만이 더할 뿐 진리의 길에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한다는 것을… 그리하여 당대의 문장가 백락천은 그 자리에 서 도림선사에게 귀의하여 불법의 수행을 돈독히 하였다고 합니다.
삼층석탑과 석등
해인사 3층석탑 일명 정중탑(庭中塔) 경남유형문화재 제254호
『대적광전 아래에 서 있는 석탑으로, 넓은 뜰 한가운데에 자리 잡고 있어 일명 '정중탑(庭 中塔)'이라고도 불린다. 탑은 3단 기단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리고 머리장식을 갖춘 모습이다. 본래 기단은 2층이었으나 1926년 수리할 때 기단을 넓히고 한 층을 더 얹음으 로써 통일신라 탑의 전형인 2층 기단의 모습을 변화시켰다.
윗층 기단의 모서리 가운데, 탑신부의 각 층 몸돌 모서리에는 기둥 모양을 새겨 놓았다. 지붕돌은 밑면에 5단씩의 받침을 두었고, 네 귀퉁이가 약간 위로 들려 있다. 또한 각 지붕 돌에는 네 귀퉁이마다 바람에 흔들리는 작은 종이 매달려 있는데 이것은 후대에 와서 설치 한 것이다. 꼭대기에는 보반ㆍ보륜ㆍ보주 등이 차례로 올려져 머리장식을 하고 있다.
1926년 6월 탑을 수리할 때 위층 기단에서 아홉 개의 작은 불상이 발견되었는데 이 불상 들은 수리한 다음에 다시 석탑안에 넣어두었다. 탑은 원래 2층 기단이었다는 점과 5층의 지붕돌받침 등 통일신라 석탑의 기본형식을 충실히 따르고 있으나, 기단의 가운데기둥 조 각을 하나만 두는 등 각조각수법으로 보아 통일신라 후기의 것으로 추측된다.』
-전통사찰총서에서-
석등(石燈) 경남유형문화재 제255호
『석등은 부처님의 광명을 상징하는 동시에 사찰 경내를 밝히기 위해 만든 등(燈) 시설이 다. 해인사 석등은 우아한 조각 수법과 전체적인 양식으로 보아, 그 북쪽에 위치한 비로 탑과 동시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사각형의 대석(臺石) 위의 여덟 잎 복련(伏蓮)과 팔 각으로 된 화사석(火舍石) 아래의 앙련(仰蓮) 사이에 세운 팔각 석간(石竿)이 짧은 것은 1926년 석탑을 개축할 때 새로 보충하였기 때문이다.』 -안내문 옮김-
누구와 전화 중일까요?
미소님과 통화중이라고 하네요.
대비로전(大毘盧殿) 불기 2551년(2007)년 낙성.
대적광전 우측 옆에 지어진 이 대비로전은 원래 명부전, 응진전, 독성각이 있었는데 명부 전과 응진전을 대적광전 좌측(동쪽)으로 이건하고 불기 2551년(2007년) 11월 24일 낙성되 었습니다. 해인사 대비로전은 2005년 5월 목조비로자나불 복장불사를 준비하던 중 그동안 알려져 있지 않았던 명문이 발견되면서 국내 최고(最古)의 목불로 인정받게 됐으며, 마침 노무현 대통령 내외가 친견을 하면서 지원을 약속하여 신축되었습니다. 대비로전은 국가의 관심과 지원 속에 문화재 보호를 위한 최첨단 보안 설비를 갖추어 화재 시에 센서가 불꽃을 감지해 불상을 자동으로 지하 6m에 위치한 별실로 이동시켜 안전하게 보관하는 시스템을 갖추고 있습니다.
꽃살문
비로자나 동형쌍불(毘盧遮那同形雙佛) 경남유형문화재 제41호.
여기에 모셔진 이 동형쌍불(同形雙佛)은 그 동안 동형쌍불인줄 모르고 각각 장경판전의 법 보전과 대적광전에 모셔져 왔었습니다. 그러다가 2005년 법보전의 비로자나불을 개금불 사를 하기 위하여 복장을 개봉하여 묵서명이 발견됨에 따라 이 부처님이 동시에 조성되었 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대비로전을 신축하여 함께 모신 것입니다.
동형쌍불(同形雙佛)
두 비로자나존상이 같은 모양을 하고 있어 동형쌍불(同形雙佛)이라 합니다.
대비로전 앞에 안내문이 있어 옮겨 봅니다.
『비로자나불을 모신 법당을 비로전이라고 한다. 비로자나불은 왼손 집게손가락을 오른 손으로 감싸는 모습을 하고 있는데, 이는 중생과 부처, 번뇌와 깨달음이 본래 하나라는 것 을 상징 한다.
해인사 대비로전에는 9세기에 조성된,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동형쌍불 비로자나불이 모셔져 있다. 비로자나불 내부에서 나온 묵서명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쓰여져 있다. 이에 대하여 월간 해인지에 게재된 글을 옮겨 봅니다.
『2005년 6월 해인사에서는 국보 팔만대장경을 모셔놓은 전각의 법보전에 모셨던 목조 비로자나부처님 개금불사를 위하여 복장유물을 개봉하는 과정에서 불상 내면에 中和三年 (중화3년) (서기 883년)에 제작되었다는 연기문이 발견되었다.
부처님은 해인사 창건 당시에 조성된 국내 최고(最古) 통일신라 목조불상임이 밝혀졌다. 더불어 해인사 대적광전에 모셨던 비로자나 부처님과는 그 크기와 손가락 길이 등 전체적 인 모습이 완벽하게 일치하는 쌍둥이 부처님으로 문화재 전문가의 내부 벽면 명문 해석에 의하면 대각간 위홍과 진성여왕의 서원과 사랑과 염원이 담긴 불상으로 확인되었다. "서원합니다. 대각간님의 비로자나 부처님이시며 오른쪽의 부처님은 비님의 비로자나부처 님입니다. 중화3년 계묘년 여름 부처님을 금칠하여 이루었습니다. 불, 불국사 비로자나불과 같은 크기, 비례를 가진 8~9세기 신라의 전형적인 양식으로 그 모습이 근엄하고 아름답다. 따라서 당시 같은 양식의 불상이 석재, 금속재, 목재로 제작되 었음을 알 수 있게 되었다.
들었던 우리 민족의 예술적 기량은, 9세기에도 아름다운 목조불상을 제작하였다는 사실이 새롭게 확인됨으로서 한국 목조불상 연구의 새로운 지평을 열게 되었다. 이름이 만曼이다. 아버지 경문왕은 860년 9월에 헌안왕의 장녀와 결혼하여 왕자 정(晸, 헌 강왕)과 황(晃, 정강왕), 그리고 공주 만(曼, 진성왕)을 낳았다. 신라 49대 헌강왕의 여동생 인 진성여왕은 평생 결혼하지 못하는 신분으로 삼촌인 위홍과 사랑한 사이였다고 삼국사 기는 기록하고 있다. 진성여왕 2년에 위홍(魏弘)이 죽자 북궁해인수(北宮海印數)에 원당 (願堂)을 지어서 혼백을 살리고 비로자나 쌍둥이 불상을 조성하여 절에 시주하게 된다. 해 인사를 위홍의 원당으로 삼았기에 여왕은 왕위를 버리고 오직 위홍을 그리워하는 마음으 로 절에 몸을 의탁하고 마침내 이곳에서 죽었으니 죽어서도 함께 하고자 한 마음일 것이 다.』 -월간 海印지 2009년 11월호에서 옮김-
☞ 다음은 마지막으로 장경판전과 그 밖의 당우전각을 살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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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상세한 설명 감사합니다. 비니초님과 전화하는 미소는 누굴까요 _()_
감사합니다. 사찰을 갈 때는 미리 정보를 많이 알고 가야 의미를 더하게 됩니다. 이때도 많은 정보를 알지 못한 채 다녀왔는데 가서 안내글을 읽으며 많은 부분을 새롭게 알게 되었습니다. _()_
자세한 설명을 겯들인 해인사의 이모저모 잘 봤습니다. _()_
감사합니다. 해인사에 수 많은 전각이 있는데 일일이 다 담지는 못햇습니다. _()_
잘 보았 습니다. 감사 합니다. -()()()_ _()()()_
감사합니다. 해인사는 법보찰로 국보ㆍ보물ㆍ유형문화재가 많아서 모든 불자들이 수호해야 할 성지입니다. _()_
글을 읽다보니,,,해인사에 가고싶네요~~ㅎㅎ
많은 정보 알려주시는 백우님께 감사드려요 . _()_
감사합니다. 해인사 다녀오세요. 해인사 암자순례도 의미 있을 것 같습니다. _()_
해인사 와 화엄사 가실분 함께가요. 2월중''''
해인사, 화엄사라... 지리산 화대주 중 화엄사에서 노고단 구간이 남았는데... _()_
언제쯤 가시는데요_()_
곱게 늙어가는 절에서...차 한 잔 마시는 여유가 그리워집니다.
()()()
다음엔 좀더 많은 분들과 참배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_()_
세세한 설명 감사합니다. 와, 굉장하네요. 대적광전과 대비로전 그리고 해강 김규진선생 설명 누여겨 보았습니다. _()_
감사합니다. 자세히 보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