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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우리나라 좋은 나라(2)
-나균용 목사님의 설교를 일고-
(시편 33:8-12)
(8) 온 땅은 여호와를 두려워하며 세계의 모든 거민은 그를 경외할지어다. (9) 저가 말씀하시매 이루었으며 명하시매 견고히 섰도다. (10) 여호와께서 열방의 도모를 폐하시며 민족들의 사상을 무효케 하시도다. (11) 여호와의 도모는 영영히 서고 그 심사는 대대에 이르리로다. (12) 여호와로 자기 하나님을 삼은 나라 곧 하나님의 기업으로 빼신 바 된 백성은 복이 있도다.
우리나라는 참 좋은 나라라고 생각합니다. 지구상에는 많은 나라들이 존재하지만 한국만큼 살기 좋은 나라는 드물다고 봅니다. 오늘 날 대한민국이 단 기간 내에 이만큼 성장하여 살기 좋은 나라로 될 수 있었던 것은 여러 이유 중에 하나로 말한다면 우리 선조들의 정신과 우리 민족만의 가지고 있는 특성이 아닐 까 생각합니다. 설교 말씀을 통해 이조 500년의 역사를 볼 때 왕으로써 존경을 받은 인물은 세종으로만 알고 있고 대다수의 왕들은 국정 운영을 비롯한 백성의 삶과는 다소 차이가 있어 현재까지 한국사에서 호평을 받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역사의 과정을 볼 때 적지 않은 우여곡절이 있는 것은 부정 할 수 없지만 우리민족이 가진 재능과 슬기 또한 타인을 배려하는 마음은 역사적 사료를 통해서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나라는 언제부터 좋은 나라라고 인정 되었을까 생각 해 볼 수 있습니다. 누구나 알고 있듯이 불과 몇 십 년 전만 하더라도 우리나라는 세계 최대 빈곤 국가인 가나 보다 못사는 나라였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필리핀으로 간 분들도 있었습니다. 그 때는 전쟁을 겪은 이후라서 어쩔 수 없다고 한다면 일제 강점기 또는 그전 조선 말기는 살기 좋은 나라였을까요? 그렇지 않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프랑스 혁명 이후 계몽주의 시대로 접어들면서 산업화로 인간의 존엄과 삶이 향상 되던 서방사회와는 달리 한국은 외부의 문을 굳게 닫고 있었습니다. 산업화로 강대국들은 칼과 창이 아닌 총과 대포로 침략을 감행하였기 때문입니다. 대표적으로 아편전쟁으로 청나라가 영국에 패하면서 우리나라는 외부로 부터의 접근을 막고 경계를 하였던 것입니다. 반대로 일본은 “메이지 유신으로” 근대화에 접어들었고 이것을 토대로 한국을 침략하는 발판을 마련하였던 것입니다. 이 땅에 처음으로 복음을 들고 들어왔던 선교사들이 봤을 때 한국은 좋은 나라라고 생각 했을까? 생각해보게 됩니다.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한국 생활에서의 그들의 고통은 이미 역사적 자료를 통해 알려져 있습니다. 때문에 오늘 날 우리가 잘 살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이 이 땅에 선교사들을 보냄으로 우리 민족이 복음에 대하여 알고 자유에 대하여 알게 되어 말씀과 기도로 이 나라가 건국 되어져 오늘의 부강한 나라, 살기 좋은 나라로 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최근 들어 한국 사회가 자유민주주의 근간이 흔들림으로 여러모로 불안함의 목소리가 높아지는 것을 우리는 목도 하게 됩니다. 한국사회의 정치적 갈등과 외부로부터 받는 압력은 국민들로 하여금 분열과 증오로 치닫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미 역사외곡을 통하여 건국 대통령을 부정하고 산업화를 이루어낸 대통령을 역사의 죄인으로 낙인을 찍으려는 시도가 계속적으로 자행 되고 있습니다. 이어서 반미, 반일 감정을 고조시켜 주한 미군 철수 주장이 그 어느 때보다 높아지고 있고 중국의 한반도 역사외곡과 문화 침략, 그리고 막대한 자금 유입으로 한국을 완전히 장악하려고 함을 직관접적으로 느끼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로운 삶은 절대 댓가없이 주어진 것이 아님을 모든 국민들이 깨닫기를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하며, 끝까지 우리나라를 지켜 북한의 주민들에게 진정한 자유를 주어 주님 안에서 행복하게 살기를 기도합니다.
33. 선민의 옷 - 백의민족(白衣民族)
(계시록 7:9-14)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옷을 입고 손에 종려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양 앞에 서서, 큰 소리로 외쳐 가로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있도다.” 하니 모든 천사가 보좌와 장로들과 네 생물의 주위에 섰다가 보좌 앞에 엎드려 얼굴을 대고 하나님께 경배하여 가로되 “아멘.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능력과 힘이 우리 하나님께 세세토록 있을지로다. 아멘.” 하더라. 장로 중에 하나가 응답하여 내게 이르되 “이 흰옷 입은 자들이 누구며 또 어디서 왔느뇨?” 내가 가로되 “내 주여. 당신이 알리이다.” 하니 그가 나더러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설교 말씀을 통해서 우리 민족을 왜 백의민족이라고 하는지 잘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 민족을 백의민족이라고 지은 부른 사람들도 19세기에 들어온 선교사들로부터 지어진 이름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단순히 흰옷을 입은 사람들이라고 그렇게 부를 수 있지만 여기에는 우리 민족만의 정신과 전통이 있습니다. 최남선은 <조선식문답>에서 “조선 민족이 백의를 숭상함은 아득한 옛날부터 그러한 것으로 수 천 년 전의 부여 사람과 그 뒤 신라와 고려, 그리고 조선의 역대 왕조에서도 한결같이 흰옷을 입었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민족이 백의를 숭상하며 입은 것은 종교적인 부분이 더 짙다고 볼 수 있습니다. 과거부터 광복 전까지 백의 금지령 또는 흰옷을 입는 것을 반대하는 학자들도 있었지만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13세기 후반 고려 충렬 왕 때 백의금지령이 내렸으나 잘 시행되지 않았고,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도 태조 7년, 태종 원년, 세종 7년, 연산군 11, 12년, 인조 26년, 현종11,12,17 숙종 2년과 17년, 그리고 영조 때 여러 차례 백의금지령이 내렸으나 바뀌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와 같이 우리민족이 예로부터 흰옷을 입는 것은 하나의 문화 또는 색깔에 무지해서가 아니라 깨끗함을 추구하는 종교적성을 강조하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백의민족의 습속이 단순히 옷감 때문에 우연히 선택 색감인 것이 아니라 하늘과 땅을 숭배하는 민족 교유의 신앙에 부리를 두고 있다는 것이 가장 정확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본문 말씀처럼 백의민족과 성경 본문이 맞닿아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억지로 짜여 맞추었다고 할 수 있지만 태어나 요람에서부터 죽을 때 입관까지 흰옷을 입는 민족은 우리 민족밖에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흰옷의 의미는 어린양의 피로 씻어 희어졌다는 것으로 깨끗함을 의미합니다. 때문에 우리나라를 동방의 예의지국이라고 불리운 것은 그에 충분함이 있다고 보며, 이것을 통하여 하나님의 선택된 민족으로써 깨끗함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34. 천국의 열매 맺는 백성
(마태복음 21:42-44)
(42)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 함을 읽어 본 일이 없느냐? (4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 (44)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저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천국 백성으로 성령의 열매를 맺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 즉 성도라 함은 그리스도를 통해 거듭 났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여 성령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성도의 열매에 대하여 예수님은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라고 요한복음 15장에 포도나무 비유를 통해 열매에 대하여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즉 우리가 예수님 안에 거하면 반드시 열매를 맺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말하면 열매를 맺지 못한다는 것은 자신이 현재 예수님 안에 있지 않다는 방증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성령의 9가지 열매 맺는 일은 성령이 아니면 절대로 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의 노력과 최선으로 많은 사람들의 호평을 받으며 봉사하고 헌신을 해도 마음에 성령이 없다면 그것은 사람의 의로 될 뿐 성령의 열매와 전혀 무관하다고 봅니다. 때문에 진정한 성령의 열매를 맺으려면 성령으로 거듭 날 때만이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성령으로 거듭난다는 것은 진정한 그리스도인, 성도가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것이 쉽지 않다고 합니다. 그것은 세상의 많은 유혹과 시험이 성도들로 하여금 성령의 열매를 맺지 못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성령 안에 거할 때면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이 쉽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연약하기 때문에 넘어질 수 있습니다. 때문에 매일 회개하며 통회하고 자복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7장에서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오로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람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아마도 이 세상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바울에 비교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 바울이 이런 고백을 했다면 우리의 심령은 더 말 할 수 없을 것이라 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예수님이 살아 계실 때에는 그들이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세상 사람들과 똑 같은 모습이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성령이 임한 후에야 예수님이 가르치신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하시고 그 이후로 열매를 맺게 되었습니다.
설교 말씀을 통해 천국 열매 맺는 백성으로 살아가는 것이 어떤 것이며,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분명히 알게 되는 은혜의 시간이었습니다. 모든 삶에서 열매 맺는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35. 회복된 시온의 영광
(이사야 60:1-7)
(1)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 (2) 보라. 어두움이 땅을 덮을 것이며 캄캄함이 만민을 가리려니와 오직 여호와께서 네 위에 임하실 것이며 그 영광이 네 위에 나타나리니, (3) 열방은 네 빛으로, 열왕은 비취는 네 광명으로 나아오리라. (4) 네 눈을 들어 사면을 보라. 무리가 다 모여 네게로 오느니라. 네 아들들은 원방에서 오겠고 네 딸들은 안겨 올 것이라. (5) 그 때에 네가 보고 희색을 발하며 네 마음이 놀라고 또 화창하리니 이는 바다의 풍부가 네게로 돌아오며 열방의 재물이 네게로 옴이라. (6) 허다한 약대, 미디안과 에바의 젊은 약대가 네 가운데 편만할 것이며 스바의 사람들은 다 금과 유향을 가지고 와서 여호와의 찬송을 전파할 것이며 (7) 게달의 양 무리는 다 네게로 모여지고 느바욧의 숫양은 네게 공급되고 내 단에 올라 기꺼이 받음이 되리니 내가 내 영광의 집을 영화롭게 하리라.
설교를 통해 이사야의 예언이 한반도를 의미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한국에 전 세계에서 유래 없는 복을 주시였습니다. 그 복은 근원은 이 땅에 선교사들의 순교의 피가 뿌려져 있고, 그들의 기도가 응답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나라에 복을 주신 이유는 단순히 그동안 가난하고 핍박을 받던 우리가 잘 먹고 잘 살아 이 땅에서의 행복을 누리라는 의미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대한민국을 세우심으로써 더 낳아가 전 세계에 하나님이 함께 하심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려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때문에 우리나라가 선교사 파송 순위 2위 국가까지 되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한국은 그 힘과 능력을 잃은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현 세대는 우리가 어떻게 이런 복을 받았고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 알지 못하며 관심도 없는 것 같습니다. 오직 살아가는 곳에만 몰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곳곳에서 동성애를 비롯한 페미니즘 등 젠더 갈등, 온갖 반 기독교적 문화와 정서가 판을 치고 있고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비난을 받고 있습니다. 거기에다 교회는 세상의 눈치를 보며 바른 말 한마디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미 그 능력을 상실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교회가 비난을 받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비난을 받는 것이며, 하나님의 영광이 가려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설교를 묵상하면서 현재 대한민국을 보니 성경에 한사람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삼손입니다. 삼손을 보면 사사시대에 이스라엘이 얼마나 타락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고 선택된 민족이라고 하지만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들보다 더 죄악 된 삶을 살던 시기가 사사시대였습니다. 삼손도 하나님의 은혜로 엄청난 능력과 힘을 가지고 있었고 많은 일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의 정욕과 그의 고집 타락함으로 그는 블레셋인들에게 끌려가 다곤 신상 앞에서 눈알이 뽑히고 온갖 조롱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의 조롱은 인간 삼손의 조롱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이 짓밟히고 그 영광이 조롱당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죽는 순간 하나님께 자신의 마지막 영혼을 다해 부르짖음은 자신을 이 블레셋인과 함께 죽여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에게 못 견디게 괴로웠던 것은 자신이 조롱당하며 죽은 것보다 하나님의 능력이 이방인들과 우상 앞에서 능욕 당하는 것이 괴로웠던 것입니다. 그는 자신을 죽여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 달라고 합니다. 그리하여 그곳의 다곤 신전의 기둥과 블렛인들을 전부 죽이게 됩니다. 그래서 성경은 삼손이 살아 있을 때 죽인 자보다 죽을 때 죽인 자가 더 많다고 합니다. 오늘 날 한국 교회도 머리 깎인 삼손과 같이 하나님의 이름이 길 바닥에 내동이 쳐지고 그의 영광이 밑까지 추락하여 능력도 힘도 전혀 없음이 느껴집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이 회복되고 그 영광이 드러나도록 부르짖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즉 우리가 죽어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 날 수 있도록 기도해 한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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