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탁.’ 소리에 잠을 깼다. 그녀가 우리 집 창문 너머에 붙은 콩밭으로 내려서며 목에 건 수건으로 흙먼지를 터는 소리였다. 이슬에 젖을까 방수복을 입고 발보다 큰 장화를 신었다. 나에겐 이른 새벽이었다. 잠을 깨웠다고 그녀가 미안해할까 봐 나도 가만히 창을 열었다. 눈이 마주친 그녀는 자루를 하나 들며 우리 집 대문을 가리켰다. 그리고는 이내 자루들이 실린 손수레를 끌고 갔다. 나는 손사래를 쳤지만 이미 그녀는 집으로 가는 살짝 언덕길을 넘어가고 있는 중이었다.
‘그냥 둘까, 주울까?’ 잠시 망설인다. 관절염으로 무뎌진 손끝을 떠나 콩이 쭈르륵 굴러갔다. 눈감아 줄까 망설이다가 낚아챘다. 한 개라도 악착같이 줍는 손끝이 매서웠다. 후덥지근한 날씨는 아침부터 연신 선풍기 날개를 돌렸다. ‘소나기라도 한바탕 쏟아지면 좋겠구나.’ 하면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흰 돌고래 한 마리가 푸른 바다를 헤엄치고 있다. 그녀의 콩을 처음 만나던 날, 알록달록한 무늬는 나를 탄복시켰었다. 맛은 더 좋을 거라며 수줍게 주고 간 콩이었다. 호랑이의 얼룩무늬를 닮은 콩은 전원생활의 풍요로움을 드러내는 듯 했다.
그녀의 덩굴손은 오늘도 씩씩하게 하루를 시작했다. 덩굴손은 넝쿨이 가뿐히 창공을 향해 몸을 곧추세울 수 있도록 단단히 잡아주었다. 모두가 잠든 밤에도, 한 뼘이나 콩 키가 컸다. 호랑이 콩은 부드러운 식감과 맛뿐만 아니라, 얼룩이 호랑이 무늬로 더 귀한 품격을 자랑했다. 또 영양소가 많다고 알려져 비싼 값으로 팔리기도 했다. 농촌의 중요한 소득원이었다.
추위가 막 지나가고 벚꽃이 질 무렵, 부부는 밭일을 시작했다. 땅을 비워두면 죄인인 양, 해마다 그들은 밭을 갈고 모종을 키웠다. 지지대를 세운 후, 덩굴이 타고 오를 지지대와 그물을 쳤다. 한 구멍에 서너 개씩 씨를 심었다. 싹이 나면 똘똘한 놈 하나만 남기고 속아주었다. 두어 달 동안 새벽부터 콩밭을 오가는 동안 그녀처럼 덩굴손은 콩 넝쿨을 굳건히 잡아주었다. 꽃이 하나둘 피고 2주쯤 더 지나자, 꼬투리가 주렁주렁 매달렸다. 더 똘똘한 열매를 위하여 덩굴손도 할 일이 많아졌다. 그녀도 콩 넝쿨 돌보는 일을 천직처럼 여겼다. 악착같이 울타리를 감아 올라가는 줄기를 볼 때마다 그녀가 호랑이 콩 덩굴손과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안개 잔뜩 낀 새벽이었다고 했다. 그날은 밤새 허리가 더 시큰거렸고 어깨가 쑤셨다. 그녀는 언젠가 싸 둔 작은 가방을 들었다. 꾸깃꾸깃한 만 원권 몇 장도 바지 주머니에 챙겨 넣었다. 어둠을 더듬으며 버스정류장으로 나갔다. 먼동이 트려면 한 시간쯤 남아있었다. 놀란 눈을 뜨고 쫓아올 남편 생각에 손끝이 바르르 떨렸다. 후들거리는 다리가 겹쳐 입은 바짓가랑이조차 떨게 했다. 눈앞이 희뿌옇게 보일 정도만 되어도 새벽 밭일을 나갔던 나날이 무성영화의 화면처럼 흘러갔다. 일 년 내내, 수년을 지속해 온 이 일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 당시, 도시는 환상이었다. 편하면서도 월급도 많은 일자리가 널렸다고 술렁거렸다. 너도나도 대도시로 향하던 시절이었다. 옆 마을의 친구도 5년간 벌어서, 새집을 짓고 있었다. 그녀는 지긋지긋한 노동에서도 해방되고 싶었다. 아이들과 웃음 가득한 광경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그때였다. “휘잉잉.” 한 자락의 찬바람이 볼을 스쳤다. 목덜미로부터 몸속으로 한기가 스미는 순간, 아이들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고 했다. 칭얼거림이 귓전을 때렸다. 남편의 당황스러운 표정도 스쳐 갔다. ‘엄마 없는 아이들이라고 손가락질받으면 어쩌나.’ 꾀죄죄한 옷차림으로 놀림 받는 아이들이 떠올랐다.
흐린 불을 켜고 첫 버스가 다가왔다. 버스 기사는 ‘안 타냐?’는 듯이 얼굴을 찡그리고, 빈 차로 정류장을 떠났다. 그녀는 그 길로 콩밭으로 달려갔다. 흐린 눈 때문인지, 어둠 때문인지 자꾸만 발이 밭두렁으로 미끄러졌다. 장갑도 없이 넝쿨을 감는 손이 다른 날보다 더 날랬다. 안개가 걷히고 있었다. 생채기 난 손으로 아이들을 깨웠다. “왜 밭에 혼자 갔었어? 같이 안 가고.” 남편의 투덜거림이 밉지 않았다. 처졌던 허리가 쭉 펴지고 어깨가 시원해졌다. 얼룩진 얼굴을 감추려고 서둘러 부엌으로 갔다.
그녀는 호랑이 콩처럼 앙증맞다는 감언에 홀려 시집을 왔다. 앙증맞다는 말은 콩의 덩굴손처럼 악착같은 농부의 모습이라는 뜻이었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다. 스물세 살이었다. 시부모와 시누이, 시동생들이 함께 살았다. 소도시에서 외동딸로 자란 그녀로서는 대가족과 함께 사는 결혼 생활이란 좌충우돌 그 자체였다. 남편은 고향을 떠날 생각이 없었다. 자식들이 태어나자 세월은 더 바삐 갔다. 하늘 한번 제대로 쳐다보지 못하고 논밭과 부엌을 오갔다. 그 사이, 자식 같던 시동생, 시누이 그리고 시부모도 하나둘 곁을 떠났다. 아이들도 제 나름의 길을 찾아 독립하였다. 육십이 넘자, 고운 정보다 미운 정이 든 이곳이 그녀의 고향이 되어 있었다.
꼬투리의 무게로 그물이 처지는 계절이 오면 이곳의 새벽은 더 빨리 열렸다. 사라지는 이슬을 벗 삼아 날마다 콩을 땄다. 이쪽 고랑에서 시작한 손 움직임은 이랑 끝으로 갈수록 더 바삐 움직였다. 손끝 상처는 챙겨볼 겨를도 없이 아물고 또 생겨났다. 땀 냄새 배고 질척한 등은 모기떼들의 성찬 거리였다. 그래도 몇 걸음 만에, 어깨에 진 자루가 묵직해지는 계절이기에 콩밭 일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땡볕에 더는 버틸 수 없을 때, 과감하게 밑동을 잘랐다. 새벽도 저녁도 없었던 석 달 남짓의 콩 생육 기간이 끝났다. 그렇게 한 해 한 해, 그녀의 쳇바퀴가 돌았다.
씩씩하게 소임을 다하는 덩굴손. 닮은 그녀를 보며 나의 폐도 따뜻한 숨을 쉬기 시작했다. 방향을 바꾸며 온 힘으로 줄기를 잡아주는 덩굴손처럼 드러나지 않는 묵묵함으로 삶을 지탱하는 지혜를 알려주었다. 사람도 콩처럼 저마다 자신만의 독특한 삶을 살아간다. 한 그루에서 나오는 콩도 모양이나 크기, 개수도 제각각이었다. 게다가 조금 더 크고 잘 익은 콩들은 빨리 선택받았다. 칭찬만큼 더 빨리 생을 마무리했다. 나의 일생도 자만과 욕심으로 성급했다. 그만큼 어깨는 굽었고, 속 쓰림이 심했다. 만성 염증과 두통에 시달렸다. 덩굴손 닮은 그녀는 시골로 피신해 온 나에게 ‘비움’을 알려준 큰 스승이었다.
택배차가 경적을 울렸다. 나는 콩을 까다 말고 택배기사가 그녀의 마지막 콩 상자를 싣는 광경을 바라보았다. 경매장으로, 아들딸과 친정, 지인들에게로. 마당에 수북이 쌓인 상자 더미가 탑차를 타고 사라지고, 그녀는 소쿠리와 채반, 남은 상자를 창고에 치웠다. 딴 살림 내주는 친정엄마처럼 시원섭섭한 표정이다. 마당 빗자루로 흘린 콩깍지를 한쪽으로 몰아놓고는 습관처럼 목에 걸린 수건으로 몸의 먼지를 딱딱 털었다.
이번 주말에는 나의 아들딸과 부모님의 밥상에도 촉촉한 맛이 가득할 것이다. 그들의 맛깔 나는 미소를 떠올리자, 욱신거리던 손가락 통증이 어느덧 사라졌다. 까다 만 꼬투리가 담긴 소쿠리 틈새로 여름 장마를 끌고 올 한 줄기 훈풍이 지나갔다.
첫댓글 맛있는 덩쿨콩, 악착스럽ㅋ는 늙은 농부의 손도 마찬가지네요ㅡ오랜만에 많은 수필 오리시고 회장님화이팅입니다.
그 악착스러움이 삶의 열정이겠지요? 가평의 텃밭에도 농부의 손길이 가득하겠네요~~
전원생활의 풍요로움 어디에서 비롯됐는지 깨닫게 합니다. 거친 농부의 손이 덩굴손을 맞잡고 보낸 시간의 산물이 호랑이콩입니다.
거칠어진 농부의 손에서 핏기가 비춰도, 입속에 들어가는 자식들의 식사 시간이 그 고통을 줄여줄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코로나 다 나으셨지요? 가족 모두 건강하시길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