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엽의 있다! 없다?’라는 프로그램이 있다. ‘일자로 쭉 미끄러져가는 절구통 같은 몸매조차 S라인으로 드러나게 사진을 찍을 수 있는 비법이 있다! 없다?’ ‘7만7777원짜리 수표가 있다! 없다?’ 등 있을 것 같기도 하고, 없을 것 같기도 한 대상들의 존재 여부를 확인하며 반전과 충격을 꾀하는 것이 이 프로그램의 묘미다. 출연진들은 그 대상들이 있는지 없는지 맞추게 되며, 시청자들의 참여를 유도한다. 그런데 있다와 없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있으면 있는 것이고, 없으면 없는 것이지 아무런 문제가 있어 보이지 않는다.
이 질문과 관련해서 어떤 드라마의 유명한 대사 하나를 떠올리자. 남자가 여자에게 말한다. “내 안에 너 있다.” 참 감동적인 말이다. 누구나 이 대사의 의미를 알고 있다. 너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한 나이기에, 내 속엔 너밖엔 없다는 뜻. 내 안에 네가, 냉장고 속에 수박 한 통이 들어있듯이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누구나 다 안다. 이런 물음은 어떤가? ‘달나라에서 방아 찧는 토끼는 있는가? 없는가?’ 이에 대해 그 토끼는 상상의 나라, 동심의 세계 속에는 있지만 실제로는 없다고 할 것이다. 또 다른 질문 하나 더. ‘용가리 통뼈는 있는가?’ 일상 어법의 언어 속에 그것은 하나의 의미와 이미지로 있으나, 실제로는 없다고 할 것이다.
그렇다면 ‘실제로 있다’는 것은 또 무슨 뜻일까? 이제 있음, 존재를 이야기해보자. 그리스말로 있는 것, 있음을 ‘토온(to on)’이라고 한다. 그래서 있음·있는 것(to on)에 관한 철학적인 논의(logos)를 흔히 ‘존재론(ontology)’이라 한다.
여행을 떠나볼까 한다. 신비로운 존재론의 여행이다. 암말들이 ‘나’를 마차에 싣고 여신의 길로 데려간다. 태양신의 소녀들이 마차를 인도한다. 밤의 집을 떠나 빛을 향하여 가는 길이다. 그 길에는 밤과 낮의 길들을 나누는 문이 있으며, 그 문을 열 수 있는 열쇠는 정의의 여신이 가지고 있다. 소녀들은 솜씨 좋게 부드러운 말로 그녀를 설득하고, 그녀는 문을 열어준다. 마침내 여신을 만난다. 그녀는 내 손을 잡으며 말한다. “불사(不死)의 마부들과 동행하였군. 잘 왔어. 이 길은 인간들의 발자국으로부터 떨어져 있는 길이다. 이제 그대는 배워야만 한다. 설득력 있는 진리의 흔들리지 않는 마음을. 그리고 사람들의 의견들을.” 여기서 ‘나’는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파르메니데스(기원전 5세기)다.(‘조각글’ 1) 하지만 ‘나’는 글을 쓰고 있는 나일 수도 있고, 글을 읽고 있는 여러분일 수도 있다. 그리스 최초의 철학자들이 있는 모든 것들의 근본 요소, 아르케(arche)를 찾으려고 했다면, 파르메니데스는 있는 모든 것들의 ‘있음’ 자체를 찾는 여행에 우리를 끌어들인다. 우리가 여신에게서 배우는 것은?
있는 것은 있고, 없는 것은 없다
여행의 끝에서 만난 여신은 ‘나’에게 말한다. “자 이제부터 내가 말할 테니, 이야기를 듣고 잘 간직하라. 탐구의 길들 가운데 어떤 길을 생각할 수 있는지를. 그 하나의 길은 ‘있다’라는, ‘있지 않음은 있지 않다’라는 길인데, 진리를 따르는 설득의 길이다. 또 하나의 길은 ‘있지 않다’라는, ‘있지 않음일 수밖에는 없다’라는 길인데, 전혀 배움을 주지 않는 길이다.”(‘조각글’ 2) 그녀의 메시지는 매우 간단하다. 있는 것은 있고, 없는 것은 없다. 이 말은 더 따져볼 것도 없이 진리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한다. “있는 것을 있지 않다고, 있지 않은 것을 있다고 말하면 거짓(pseudos)이다. 하지만 있는 것을 있다고 하고, 있지 않은 것을 있지 않다고 말하면 진리(alethes)다.”(‘형이상학’ 1011b26-27) 하지만 이건 뭐 진리라는 거창한 이름 붙일 것도 없이 너무 뻔한 말이 아닌가! 사실 있는 것을 없다고 딱 잡아떼든가, 없는 것을 있다고 뻔뻔스럽게 우겨댈 때, 문제가 생기게 마련이다.
그런데 파르메니데스가 전하는 이야기의 결론은 우리의 기대를 훨씬 넘어선다. 그 결론은 우리가 모든 것을 오로지 정신(nous)을 통해 말(logos)로써 철저히 따져보고, 감각에 절대 속지 않을 경우에만 나온다. ‘있는 것은 있고, 없는 것은 없다’라는 말에서, 일단 있는 것은 생겨나지도 소멸하지도 않는다는 결론이 나온다. 왜냐하면 뭔가가 생겨난다는 것은 없었던 것이 있게 되는 일이고, 소멸한다는 것은 있던 것이 없게 되는 일인데, 없는 것은 없기 때문에, 없었거나 없게 됨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앞의 문장에서 연필로 ‘없음’이 표현된 것을 지워보라. 오로지 있음만이 남는다. 그래서 있는 것은 없다가 생겨날 수도, 있다가 없어질 수도 없다.
또한 있는 것은 운동도 할 수도 없다. 운동이란 한곳에 있던 것이 그곳을 떠나 그곳에 더 이상 없고, 전에는 없던 곳으로 가 있게 되는 일을 말하는데, 없음을 말할 수도 생각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다시 연필로 없음을 지워보라. 오로지 있음만이 남게 되고, 운동을 설명할 수도, 생각할 수도 없게 된다. 그래서 있는 것은 변하지 않고, 움직이지도 않으며, 생성소멸도 하지 않고, 오로지 꽉 찬 하나로만 존재한다. 있는 것이 하나가 아니려면 하나와 하나 사이에 ‘빈 공간’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빈 공간 속에는 무엇이 있는가? 아무 것도 없다 할 것이다. 아무 것도 없다면, 없는 것이 아닌가? 따라서 빈 공간은 있을 수 없다. 그것엔 존재성이 꽉 차 있다.
그런데 왜 우리들에게는 하나가 아니고, 여럿이 보이며, 없던 것이 생겨나고, 있던 것이 사라져 없어지는 것으로 보일까? 우리 앞에 드러나는 이 모든 현상들은 무엇이란 말인가? 여신은 말한다. 그것은 우리가 이성과 논리로 생각하지 않고 감각으로 판단하기 때문에, 속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일 뿐이라고. 현상 너머엔 정신과 논리로만 파악할 수 있는 진리의 세계가 있는데, 그 세계에는 단 하나의 존재가 생성소멸을 떠나, 변화와 운동을 떠나 존재할 뿐이라고. 그러면 우리는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지금 여기에 있다. 얼마 전에는 없었던 우리들이며, 얼마 후면 없어질 우리들이다. 없음과 없음 사이에 갇혀있는 있음이 우리들의 존재다. 그런데 여신이여, 우리는 있으니 없었던 적도 없고, 없어지지도 않는다는 말인가? 우리의 존재는 영원하다는 말인가?
있음과 없음에 관한 논의들의 격전
파르메니데스와 함께 하는 존재론 여행의 끝에는 숨 막히는 존재의 완전무결한 세계가 있다. 다양하고 변화무쌍한 현상은 모두 속임수로 버려진다. 유일무이(唯一無二)하고 부동불변(不動不變)한 영원한 존재만이 있는 세계. 나 자신도 신기루가 되어 버리는 신비로운 세계. 여기에 숨통을 트이게 하기 위해 레우키포스와 데모크리토스를 대표로 하는 원자론자들은 빈 공간을 인정하며 나선다. 물론 그들도 파르메니데스의 기본 명제를 존중한다. 있는 것은 있다. 그런데 그 있음의 세계에 아무 것도 없는(to me on) 빈 공간(kenon)을 있는 것으로 넣는다. 그들의 주장은 모순 개념을 엮어 놓은 기발한 문장으로 표현된다. 있는 것이 있지만, 있지 않은 것도 있는 것 못지않게 있다고.(아리스토텔레스 ‘자연학’ 187a1) 그들은 ‘있는 것’을 ‘꽉 찬 것’이며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원자(atomos)’라고 놓고, ‘없는 것’을 ‘텅 비어있는 공간(kenon)’이라고 놓고 들어간다. (‘형이상학’ 985b5) 빈 공간이 생기니, 하나 이상의 존재, 즉 여러 개의 원자들이 있을 수 있게 되고, 그 원자들이 빈 공간을 떠돌아다닐 수 있게 되었다. 그놈들이 서로 붙어 뭉쳐지거나, 떨어져 흩어지면서 생성소멸하고, 다양하게 변화하며 운동하는 현상이 가능하게 되었다. 현상은 이제 허상이 아닌 진상이며, 신기루가 아닌 실재 세계로 되살아난다. 이른바 ‘현상의 구제’가 이루어진다.
파르메니데스의 여신에 대한 반발은 상대주의와 회의주의로도 나타난다. 유명한 소피스트 프로타고라스는 말한다. “있는 것들에 대해 있다고 하고, 있지 않은 것들에 대해 있지 않다고 하는 것에 관한 한, 인간(또는 개인)은 모든 것들의 척도(metron)다.”(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 ‘유명한 철학자들의 삶과 사상’ IX.51) 그는 ‘있는 것은 있고, 없는 것은 없다’라는 문장에다, 그것은 인간, 또는 개인의 판단에 달린 것이라는 제한을 붙였다. 우리가 보기에 있는 것이 실제로는 없는 것일 수 있고, 없는 것이 있는 것일 수 있다. 우리는 사과 속에서 빨강을 보지만, 사과에 빨강이 진짜 있는 것인지 아닌지 우리가 어떻게 장담할 수 있는가? 잠자리의 눈에는 다른 색깔로 비칠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인간과 잠자리 가운데 누가 진짜 사과의 색깔을 제대로 파악한 것일까? 프로타고라스의 생각은 ‘있다 없다’의 진리에 관한 한, 상대주의적인 입장을 취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조건과 한계를 잘 보여주고 있다.
한편 또 다른 소피스트 고르기아스는 이렇게 말한다. “아무 것도 있지 않다. 있다고 해도 알 수가 없다. 있으며 안다고 해도 다른 사람에게 밝힐 수가 없다.”(‘있지 않은 것에 관하여’ 979a12) 그는 파르메니데스의 문장 가운데 ‘있는 것은 있다’마저 부정한다. 불변하며, 유일하고, 생성소멸하지 않는 영원한 존재, 그런 것이 있다고? 없다. 설령 그런 존재가 있다고 하더라도 인간이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좋다. 설령 알게 되었다고 치자. 그러나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고스란히 전할 수 있을까? 전한다 해도 전하는 내용을 듣는 사람이 조금의 오해 없이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절대적인 존재와 진리에 대한 깊은 의심. 인간 인식에 대한 깊은 불신. 참된 의사소통에 대한 절망감. 결국 고르기아스는 회의주의에 빠지게 된다.
‘있다, 없다?’에 대한 그리스 사람들의 철저한 반성과 논쟁. 이것은 유구한 역사를 통해 지속되면서 서구 사유에 존재론과 형이상학의 깊은 전통과 토대를 마련해 주었다. 있음과 없음에 관한 반성. 이것은 단순히 추상적인 이야기만은 아니다. 없었다가 지금 있는, 그리고 있다가 없어질 우리들의 존재 자체에 관한 절절한 이야기다.
〈김헌|서울대 협동과정 서양고전학과 강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