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릇 역사를 정확히 기록하고 또 그것을 이해하기란 어렵습니다. 원래 사람은 자기중심적이어서 누구나 자기한테 불리한 사실은 잘 거론하지않거나 숨기려 거짓말을 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식의 역사 왜곡 논쟁은 비단 현재 뿐만 아니라 아득히 먼 과거에도 있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2200년 전인 기원전 3세기, 고대 그리스를 충격에 빠뜨리게 한 델포이 신전 약탈 사건이 그것입니다.
델포이 신전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예언의 신인 아폴로를 모신 곳이었는데, 모든 그리스인들로부터 신성시되는 장소였습니다.
그래서 그리스인들은 오래 전부터 델포이의 신전으로 가서 아폴로를 섬기는 사제들한테 미래에 벌어질 일을 미리 아는 대가로 황금과 은 같은 보물들을 제물로 바쳐왔습니다. 그러니 델포이의 신전은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보물 창고나 다름없었습니다.
이런 델포이의 신전에 보관된 엄청난 양의 보물을 노리고 쳐들어온 집단이 있었으니, 바로 켈트족이었습니다.
백인종에 속하는 켈트족은 현재 영국, 아일랜드, 프랑스, 벨기에, 스위스 같은 서유럽 지역에 넓게 살았는데 부족 연맹체 수준에 머물렀지만 기원전 390년에는 로마를 공격해 7개월 동안이나 점령할 만큼 사납고 용감한 전사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켈트족은 기원전 280년 약 8만 5천 명의 전사들을 모아 델포이의 신전에 보관된 황금을 노리고 그리스를 침공하였습니다.
이들의 앞을 그리스 북부 마케도니아 왕국이 막아섰지만 기원전 279년 1월에 벌어진 전투에서 마케도니아 군대가 패배하고 국왕인 케라우누스는 켈트족들한테 붙잡혀 처형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 여세를 몰아 켈트족들은 계속 남쪽으로 내려가 테르모필레 골짜기에서 그리스 연합군을 물리쳤고, 마침내 델포이의 신전으로까지 쳐들어갔습니다.
헌데 여기서 다소 이상한 기록이 등장합니다.
고대 그리스의 지리학자이자 역사가인 스트라보의 주장에 의하면, 켈트족들이 델포이 신전을 약탈하려는 순간 아폴로 신이 나타나서는 자신에게 바쳐진 황금을 빼앗으려는 켈트족들을 상대로 지진과 천둥 번개를 일으키며 경고를 했고, 이러한 천재지변에 겁을 먹고 놀란 켈트족들은 자기들끼리 서로 싸우느라 많은 수가 죽었고 침략군의 대장인 브렌누스도 그런 혼란 속에 죽는 바람에 켈트족들은 결국 황금을 전혀 빼앗지 못하고 간신히 살아남아 북쪽으로 도망쳤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기록은 다분히 의심스럽습니다. 현실에서 신이 직접 나타나 천재지변을 일으킨다는 일은 도저히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로마인 역사가들이 남긴 기록을 보면, 켈트족의 델포이 신전 침공으로부터 174년 후인 기원전 105년 무렵, 로마 장군인 퀸투스 세르빌리우스 카에피오는 갈리아 남부의 마을인 톨로사(프랑스 남부 도시인 툴루즈)에 살고 있던 켈트족들이 성스럽게 여기던 신전에 보관된 1만 5천 탈란트(99만 파운드) 어치나 되는 엄청난 양의 황금과 은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카에피오가 톨로사의 신전에 있는 황금과 은을 보고 놀라서 “저 황금들이 어디에서 났느냐?”라고 현지의 켈트족 주민들한테 묻자, 그들은 “옛날 우리 조상들이 그리스로 쳐들어가서 빼앗아온 것들인데, 신들한테 제물로 바치기 위해 신전에 보관해 두었다.”라고 대답했고, 그래서 카에피오는 병사들을 시켜 황금과 은을 모두 신전에서 꺼내어 로마로 가져가려다가 도적들한테 모두 빼앗겼다고 합니다.
이런 일화를 본다면 켈트족들이 델포이 신전으로 쳐들어가 그곳을 지키며 저항하던 성직자들을 죽인 후, 신전에 보관된 황금을 모두 빼앗아서 수레에 싣고 고향으로 돌아갔으며 그 중 일부가 갈리아의 톨로사 신전에 가서 약탈 원정의 성공을 기념하는 뜻에서 신들한테 황금과 은을 제물로 바쳤다고 보는 편이 가장 진실에 가까울 것입니다.
그렇다면 스트라보의 기록은 다분히 사실을 왜곡한 것이라고 봐야 옳습니다.
그리스인인 그로서는 미개한 야만족이라고 깔보던 켈트족들한테 그리스 군대가 연전연패하고 게다가 그리스인들이 성스럽게 여기던 델포이의 아폴로 신전까지 모조리 약탈을 당했다는 일이 무척이나 수치스러워서 그런 사실을 숨기기 위해 엉뚱하게 아폴로신이 나타나 켈트족들을 쫓아버렸다고 거짓 기록을 남긴 것이 아니었을까요?
출처: 흙의 전쟁/ 도현신 지음/ 이다북스
첫댓글 그게 그리이스 신전쟁탈의 정사라면 겔트족의 역사를 보면 알겠군요.
그리이스 전쟁으로 얼마나 많은 재물을 탈취했는지의 여부를 보아야 하고
점령후의 지도를 보고 얼마나 지속적으로 영토에 편입돼서 세력을 떨쳤는가가 중요하죠.
그냥 스쳐가는 도적무리의 군대라면 역사가치가 없죠.
켈트의 흔적이 가장 많이 남아있는 곳이 북잉글랜드가 아닐까 싶어요.
거기에는 고인돌도 존재하고 백제와 신라의 고분형태를 지닌 토광묘 형태의 분묘도 존재하지요.
뭔가 우리와 유사한 유적을 남기고 있는데 켈트라는 어원이 거의 말살되거나 사라진 상태라 민족의 기원을 알기가 매우 까다롭지요.
개인적으론 백인계가 아닌 황인계로 보여져요.
예를 들면 게르만=게르(유목민 주거지)+만(卍)이지요.
게르를 주거지로하고 卍이라는 탐가릭을 부족 또는 민족의 고유문양으로 사용을 했다는 뜻이지요.
그래서 게르만은 황인종계 유목민이 유럽으로 들어가 형성된 종족이지요.
켈트족 또한 황인계열과 관련이 있어보이는데 백둥이 중심의 역사로 재편이 되다보니 기원을 찾기가 어려워요.
우리민족을 케레이트라 했는데 케레이트 키르키츠 켈트가 어원이 같지 않을까 싶어요.
케레이트는 하늘을 나는 갈가마귀를 상징하고 케레이트가 겨레로 음운이 변천된 걸로 보여지구요.
우리민족은 케레이트(겨레)로 불렸고 하늘에서 날개를 편 갈가마귀 모양이 十字모양이라 민족 문양으로 十字를 사용했어요.
十은 세계의 중심을 뜻하기도 각 민족에게 민족문양을 지정하는 세계중심국이었지요.
역사는 승리자들의 기록이라는 말이 생각납니다.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조선총독부 2대 사이토 총독은
조선민족을 영원히 식민통치 하기 위하여
민족의 혼을 없애려는 문화정책을 하달합니다.
먼저, 조선사람들이 자신들의 역사, 전통을 알지 못하게 만듦으로써
그들 조상들의 무위, 무능, 악행등을 들춰내고, 과장하여
조선인들에게 가르침으로써 조상들을 멸시하는 감정을 일으키게 하여
그것을 하나의 기풍으로 만들면,
반드시 실망과 허무감에 빠지게 될 것이니, 그때에 일본 사적, 일본 인물, 일본 문화를 소개하면 그 동화의 효과가 지대할 것이다.
이것이 제국 일본이 조선인을 반(半)일본인으로 만드는 요결인 것이다.
일제가 만든 조선사 35권에서
조선사 1권을 축약한 게 지금의 대한민국 역사교과서입니다.
1920년 조선총독부의 국사교육지침을 보면,
‘옛날에 반도의 북부는 조선朝鮮이라고 불렀다.’고 해서, 옛조선, 고조선이라고 하고
‘남부는 진辰이라’고 바꿔 놨습니다.
@햇살아침
이것이 지금 100년 지났습니다. 100년이 지난 시점에서 우리의 모든 역사 교과서를 보면,
‘한반도 남쪽은 단군조선이 아니다.’는 100년 전 일제 시대의 지침에 충실하게 현재 고조선 지도를 만들어 놓았습니다.
@햇살아침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한반도 북부에 고조선이 있었는데 거기를 한 무제가 점령해서 한사군을 설치해서 420년 동안 유지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고서 한사군 420년이 끝나는 시점을 313년으로 설정해 놨습니다.
‘313년에 한사군이 멸망당하고 7년 후인 320년에 신공황후神功皇后가 삼한, 고구려⋅백제⋅신라를 정벌했다.’고 하면서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설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한사군 420년과 임나일본부 200년을 더해 약 620년간 중국과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햇살아침
일본은 한강을 포함한 곳을 한사군이라고 지금도 주장하고 있습니다. 현재 이러한 지도를 일본의 교과서에 그리고 있고, 전 세계에서 그것을 받아서 쓰는 곳이 많다는 것입니다.
일제의 역사 말살책은 우리 고대 사서의 ‘수서령收書令’입니다.
당시 조선에 머물렀던 미국인 저널리스트 나다니엘 페퍼Nathaniel Peffer의 증언을 보면
“한국의 역사는 절대 엄금이다. 일본인들은 조선의 역사는 전부 압수하여 불태워 버렸다.
철저히 수색하여 폐기시켜 버렸다.
한국의 국사는 가지고만 있어도 범죄가 됐다.”라고 이야기합니다.
나다니엘 페퍼가 영어로 쓴 것을 우리 임시정부의 번역가분들이 번역을 했는데, 영어 원본엔 이렇게 나옵니다.
one of the first of these reforms was to go through all the public archives and private libraries and systematically #collect and burn# korean works of literature and history. (『한국독립운동의 진상』, 나다니엘 페퍼)
@햇살아침
Collect and burn! 모아서 전부 불태웠다는 겁니다.
이렇게 ‘Korean Works of literature and history’, 한국에 관한 작품들,
문학, 역사들을 다 모아서 불태웠다는 분명한 증언들이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대마도 한 곳만 보더라도 고문서류가 6만 6천 매 이상,
고기록류 3,576책 등이 수거되어 불태워졌다는 증언이 나왔습니다.(일본 학자 하라타 사카에루 ‘역사와 현재’, 1981.04.25.)
@햇살아침
일본 레이타쿠麗澤대 교수를 역임했던 후지모토 유키오藤本幸夫는
“이등박문伊藤博文이 조선총독부를 은퇴하고 일본으로 올 때
조선 왕실의 기증이라면서 규장각 사서를 몇 수레나 일본으로 가져왔다.
일본 전역에 5만여 권의 한국 고대 사서가 있다.”는 얘기를 합니다.
중요한 것은 다섯 군데 조사한 것이 거의 3천 종 5만여 권이 된다는 겁니다.
다섯 군데 조사한 것이 그 정도이니 더 많은 곳을 조사하면 더 많은 책들이 나오겠죠.
박상국 한국문화유산연구원장은
“이 책들은 목록이 전부 다 공개된 것이 아니다. 궁내청 쇼료부書陵部에 한국 도서가 얼마나 있는지
진짜 규모는 아무도 모른다. 숨겨 놓은 도서 목록이 따로 있다는 것이 어떤 재판 결과에서 밝혀졌다.”(박상국 한국문화유산연구원장, 2024.07.30. 조선일보 기사)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일제가 51종에 20만 권 사서를 압수했다는 것은 절대 과장이 아니고, 사실은 51종이 아니라 거기에 숨겨진 목록이 더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