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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게시판 스크랩 매창이 사랑한 남자, 천민 유희경
이장희 추천 0 조회 37 14.05.24 15:03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1. 한시와 거문고에 능한 부안 출신의 명기 매창!~

 

 

400년 전 기생과 천민으로 만나 운명적인 사랑을 나눈 이들이 있었다.

 

 

 

두 연인은 가고 없지만 애달픈 시 구절만 남아 그 옛날의 사랑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이것은 이별한 여인의 슬픔이 잘 드러난 시조입니다.

지은이가 누군지 아십니까?

 

고등학교 교과서에도 나왔던 이 시인은

조선시대 대표적인 여류시인으로 꼽히는 매창입니다.

 

매창은 부안 출신의 기생으로

한문시에 능했을 뿐만 아니라

거문고 연주에도 뛰어났던 걸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당시 내노라 하는 사대부들이 매창을 보기 위해

전북 부안으로 적지 않게 찾아왔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매창과 친분을 맺은 사람들 중에는

전라도 일대에서 현감을 지낸 이귀(李貴),

홍길동전을 지은 허균과 같은 인물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매창이 사랑한 인물은

지위가 높은 관료도, 또 이름이 알려진 학자도 아니었습니다.

 

그녀가 사랑한 단 한 사람의 연인,

유희경(劉希慶, 1545~1636)이란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신분은

조선시대에 가장 미천한 신분으로 업신여김을 당했던 천민이었습니다.

 

당대 사대부들의 관심을 얻고 명성이 자자했던 기생이 사랑했던 남자가 천민이었다, 놀랍지 않습니까? 

그러나 우리를 놀라게 하는 것은 또 있습니다.

 

이 두 사람의 사랑이  

당시 양반들의 전유물처럼 여겨졌던 한시를 통해 이어졌다는 것입니다.

 

역사스페셜, 오늘 이 시간에는 매창과 유희경의 사랑을 통해서

조선시대에 어떻게 이 같은 사랑이 가능했는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여류시인 매창이 어떤 여인인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부안 시내 한가운데 위치한 서림공원.

그 입구에서 매창의 시비를 만나볼 수 있다.

 

지난 74년에 세워진 매창시비는 매창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사비를 털어 세운 것으로

그녀에 대한 이곳 사람들의 애정을 느끼게 해준다.

 

"여러 시인 묵객들과 더불어 여러 시를 논하던 장소가 되어서

그 뜻을 살려서 바로 이 자리에 매창시비를 세우게 된 것입니다."

                                                                                            - 김민성 워낭, 부안 문화원

 

 

 

변변한 비석 하나 갖추지 못한  여느 기생과는 달리 그녀의 무덤은 단정히 손질되어 있었다.

부안 사람들에게 매창은 시와 거문고에 능했던 이 고장의 대표적인 예술인으로 기억되고 있다.

매창의 시는 그녀가 죽은 후 아전들의 입을 통해 전해 내려왔다고 한다.

 

이것을 개암사에서 목판본으로 만들었는데

원하는 사람이 너무 많아 절의 재정이 바닥날 지경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목판을 불살랐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올 만큼

이곳 부안 사람들은 그녀를 아끼고 사랑했던 것이다.

 

매창은 1573년 부안현의 아전이었던 이탕종의 첩에게서 태어났다.

본래 이름은 향금이었는데 어릴 적부터 거문고와 한문 공부를 즐겼다고 한다.

기생이 된 후엔 이름을 계랑으로 바꾸고 직접 호를 지어 매창이라고 했다.

 

오래지 않아 그녀의 이름은 인근 양반들 사이에 알려지게 되었는데

부안엔 매창이 즐겨 찾았다는 장소가 지금도 남아 있다. 

 

 

 

"이곳은 금대입니다.

매창이 바로 이 바위 위에서 거문고를 타면서 여러 시인 묵객들과 시를 주고 받았다고 합니다." 

                                                                                              - 김민성 워낭, 부안 문화원

 

매창의 명성은 전국으로 퍼져 나갔고

수많은 시인과 문장가들이 그녀를 보기 위해 부안을 찾았다고 한다.

그들 중엔 이귀와 허균 등도 있었다.

 

허균은 매창과의 첫 만남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얼굴은 비록 뛰어나지 못했지만

재주와 정취가 있어 함께 얘기를 나눌만 했다.

하루종일 술은 나누어 마시고

서로 시를 주고 받았다.

저녁이 되자 조카딸을 침실로 보내주었다."

                                                                  - <조관기행>

 

여행하는 곳곳마다 기생들과 염문을 뿌리고 다니는 허균이었건만

매창과는 남녀의 사랑으로 발전하지 않았다. 

이후 두 사람은 평생 우정을 나누는 사이로 이어지게 된다. 

이것은 십 년 뒤 허균이 매창에게 보낸 편지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매창은 기생이면서도 사실은 기생이 아닌 것으로 살았거든요.

많은 사람들이 매창을 좋아한 것은 그녀가 끝까지 절개를 지켰기 때문입니다.

기생이면서도 절개를 지킨 그녀의 면모들이 매창시에 드러나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여성적인 다정다감함을 지녔구요,

그러기에 후대 시인들이 매창시를 높이 평가했다고 생각합니다." 

                                                                 - 허경진 교수, 연세대 국문학과 

 

기생이었다고는 하나 매창은 행동거지가 바르고 절개가 굳은 여인이었다.

손님들 중에 그녀를 유혹해 보려는 이도 많았지만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고 한다. 

 

이 같은 그녀에게 사랑이 찾아온 것은 그녀의 나이 스무 살 때 일이었다. 

그것은 스물여덟 살 위였던 촌은 유희경과의 만남이었다. 

 

 

2. 기생 매창과 천민 유희경의 첫만남과 사랑!~ 

 

 

"시인 신석정은 '개경에는 송도3절이 있듯이, 부안에는 부안3절이 있다'고 말한 바가 있습니다.

 

송도3절은 여러분이 잘 알고 있듯이

박연폭포, 황진이, 그리고 황진이를 사랑했던 서경덕을 가리키는 말이지요.

 

이 송도3절에 대비해서 신석정은

부안의 명소인 직소폭포, 매창과 유희경을 일컬어 부안3절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두 사람을 황진이와 서경덕에 비유를 한 것이지요.

그러나 서경덕이 당대 내노라 하는 학자였던 것에 비해, 유희경은 그럴 처지가 아니었습니다.

 

매창의 나이 스무 살에 찾아온 사랑.

당시 사대부들의 관심을 한몸에 받고 있던 매창이

내세울 거 하나 없는 천민 남자와의 사랑때문에 더욱 드라마틱하게 느껴지는 것일까요?

 

이 두 사람의 만남이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었는지 400년 전의 러브스토리를 만나보겠습니다."

  

남해 용문사유희경과 관련된 유물이 있다는 얘길 듣고 그곳을 찾았다.

주지스님의 안내를 받고 들어간 곳은 대웅전의 불상 좌대의 뒷편이었다.

 

그곳엔 300년이 넘도록 이곳에서 보관해온 것은 나무로 만든  목판이었다.

모두 52장인 이 목판은 유희경의 문집을 새긴 것이었다.

 

어떻게 이 목판들이 이곳에 보관되고 있을까?

 

 

"이 책판은 유희경 선생의 손자 되시는 분이 보성 만호로 재직하고 계실 때,

만호는 지방 무사계급 종4품에 해당하는 치안을 담당했던 자리인 모양입니다.

지역적으로 보성지방이 이 용문사와 인접해 있고

또 용문사가 그때까지만 해도 재정적으로 좀 풍족해서

용문사의 도움을 받아서 책판을  제작을 하고

그때부터 지금까지 용문사에서 보관하고 있지 않나 봅니다."

                                                                                              - 중 현 스님, 용문사 주지

 

이 목판에서 매창과 유희경 두 사람의 만남을 확인할 수 있는 시 한 수가 발견되었다.

 

 

 

시 속에서 등장하는 계랑매창의 이름이다.

결국 이 시는 매창을 위해 지은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시는 유희경이 처음 매창을 만나서 읊은 시입니다.

매창이 글 재주와 노래 솜씨가 뛰어나서 서울 장안에까지 소문난 기생이었는데

유희경이 서울에서 부안으로 실제로 와 만나보니

정말 시 솜씨, 거문고 솜씨 등이 선녀에 비유될 정도였음을 극찬했던 겁니다."

                                                               - 허미자 교수, 성신여대 국문과

 

두 사람이 처음 만난것은 1591년 봄날의 일이었다.

남도를 여행하던 유희경이 그녀를 찾아온 것이었다.

 

이때 매창은 유희경에게 "유.백 중 누구인가?"라고 묻고 있는데

'유.백'이란 당시 천민 시인으로 유명했던 유희경과 백대붕을 뜻하는 것이었다.

 

"매창쪽에서는 유희경의 이름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처음 만났을 때 '유.백 중 누구인가'라고 물었습니다.

 

두 사람은 만나기 전부터 시를 통해 서로를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때 매창은 스무 살이 되기 전이었습니다.

나이차가 상당히 많았는데 그때부터 서로를 이해하는 친구가 되었고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습니다."

                                                                                                                                   - 허경진 교수

 

촌은집에는 유희경이 그때까지 뭇여성들을 가까이 하지 않았는데

이때 비로소 '파계(破戒)'했다고 적고 있다.

 

그 어느 남자도 가까이 하지 않았던 매창과

뭇여성을 가까이 하지 않았던 유희경.

 

그런 두 사람이

첫 만남에서 맺어진 것이었다.

 

매창과 유희경이 서로에게 강하게 이끌린 것은 

천민과 기생이라는 신분적 한계에 대한 공감대가 컸을 것이다.

 

여기에 더불어 문학이라는 공통의 언어가 있었기에

두 사람의 운명적 만남이 가능했을 것이다.

 

이듬해 일어난 임진왜란(1592년)은 두 사람을 갈라놓았다.

 

전 국토를 휩쓴 전란 속에서 유희경은 의병활동을 결심하게 되고

두 연인은 이별을 맞게 된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매창은 유희경을 잊지 못하고 그리움 속에 세월을 보내게 된다.

손님들 중에는 짖궂은 이가 있기 마련, 그럴 때면 그녀는 재치로 위기를 넘겼다고 한다.

 

 

독수공방의 나날을 이어갔지만 님으로부터의 소식은 오지 않았고

그리움만이 깊어질 뿐이었다.

 

 

3. 천민 유희경 임진왜란을 통해 신분 상승!~

          남언경에게서 예법을, 박순에게서 시를 배우다!~ 

 

 

 "KBS에서 방영한 허균의 생애를 다루었던 <천둥소리>라는 드라마가 있었습니다.

오정혜씨, 드라마에서 매창역을 맡으셨는데 그 여인의 매력이 뭐던가요?

 

오정혜: 황진이와 비교하면 어떨까요?

            두 사람 다 시인이었구요, 또 이름을 떨친 시인이었습니다.

            

            황진이가 파격적인 행동이나 남성편력으로 유명해졌다면,

            매창은 언행에 품위가 있고 절개를 지키던 그런 기생이었습니다.

           

            꽃에 비유하면 황진이는 오유월에 피는 장미같구요,

            매창은 초봄의 은은한 향기를 품고 있는 매화향 같은 기생이었습니다.

 

유인촌: 매창도 매화꽃과 같은 여인이 되고 싶어서

            '매화꽃이 피는 창', 매창이라고 자신의 호를 지은 거 아닐까요?

 

오정혜 :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는 그런  아름다움을 지닌 여인이 바로 매창이 아닌가 싶습니다.

 

유인촌 : 드라마를 보면 매창이 유희경을 사랑하는데,

             왜 매창이 유희경을 사랑했는지 오정혜씨의 생각은 어떠신지요?

 

오정계 : 글쎄요. 저도 그 부분이 궁금합니다.

            사실 드라마는 허균의 일생을 담고 있기 때문에

            두 사람의 사랑이야기를 적극적으로 다루지는 않았는데요,

            하지만 분명한 건 두 사람이 정말 사랑을 했구요,

            유희경은 천민임에도 불구하고 양반과 교류가 있었던 독특한 부분이 있는데요,

            어찌 되었건간에 유희경이 어떤 남자이길래 그토록 사랑했을까 궁금합니다. 

 

유인촌:  유희경의 문집<촌은집>은 그에 대한 많은 정보를 제공해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도 뭔가 의문이 나는 점이 있습니다.

            한 번 보시죠.

 

            통정대부(정3품), 가의대부(종2품), 한성부윤(정2품)

           

            이것이 모두 유희경에게 내려진 벼슬 이름입니다.

            유희경은 분명 천민이었는데 신분제사회인 조선에서

            어떻게 천민 유희경에게 이런 한성부윤이라는 벼슬이 추존될 수 있었는지 의아합니다.

 

             이 부분을 오정혜씨와 함께 궁금증을 좀 풀어보겠습니다."

 

서울대 규장각.

 

촌은집의 원본이 보관되어 있는 규장각을 찾았다.

족보가 전해지지 않은 탓에 <촌은집>은 유희경에 대해 알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단서다.

 

"이것이 유희경이 쓴 촌은집 원본입니다.

들어가 보면 촌은집서라고 해서 서문이 나오고

그 다음부터 시들이 계속 나옵니다.

 

1545년 을사사화가 일어났던 해에 출생을 해서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까지,

계산을 해보면 92세까지 당시로써는 아주 장수하셨습니다."

                                                                               - 신병주 박사, 서울대 규장각

 

촌은집은 두 권의 시집으로 되어 있었는데

앞쪽에는 유희경이 지은 시들이,

그 뒤로는 사람들이 유희경에 대해 적어 놓은 것이 다양하게 나온다.

 

일대기를 요약한 <행록>에 따르면

유희경은 살아 생전엔 종2품 가의대부를 지냈고

사후엔 정2품 한성부 판윤으로까지 추증되었다고 한다.

 

이 같은 기록을 어떻게 봐야 하는가?

 

오정혜 - "제가 알고 있기로는 유희경은 천민으로 알고 있거든요. 그런데 어떻게 벼슬까지 할 수 있었는지요?"

 

신병주 박사 - "여기서 벼슬은 실제 그 직을 맡았다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로 치면 명예직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품계라고 하는데, 그러나 어?든 이렇게 높은 품계를 받았다는 자체로

                     후대에서 유희경을 높이 평가했다는 것입니다."

 

 

유희경은 임진왜란 이후에 천민 신분을 벗어났고

벼슬은 그 후에 받게 된 것이라 한다.

 

그가 천민 출신이라는 것은

족보상의 이름을 통해서도 짐작할 수 있었다.

 

할아버지 도치. 

아버지 업동.

 

이 같은 이름은 당시 양반들에겐 사용되지 않던 이름이었다.

 

이처럼 낮은 신분이었음에도 사람들이 유희경을 높이 평가했음을 여러 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우리나라 역대 위인 천여 명을 기록한 <동국시화휘성>.

바로 이곳에 단군, 이성계와 어깨를 나란히 하며 유희경, 그의 이름이 올라 있었다.

 

이번 취재 과정에서 발굴 해낸 또 한 권의 기록은

유희경의 행적을 기록한 <구적첩>이다.

 

 

 

그가 죽고 100년이 지나 만들어진 이 책은

후대의 이름난 학자들이 유희경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지은 것이다. 

 

규장각 깊숙한 곳에서 잠자던 유희경에 대한 평가가 세상에 공개되는 순간이었다.

 

"이것은 유희경이 살아 생전에도 많은 사대부 학자들과 교류가 있었고 이름을 넓혀간 그런 점 이외에도

죽어서도 이름있는 양반가 학자들에게까지 그 명성이 알려졌다는 것을  

이 자료를 통해 확인, 평가할 수 있습니다."

                                                                                                                              - 신병주 박사

 

그런데 어떻게 천민 출신이었던 유희경이 한시를 짓고, 이처럼 세간에 명성을 얻을 수 있었을까?

 

촌은집에 따르면

유희경이 열세 살 되던 해 아버지를 여의었다.

 

어린 유희경은 혼자 3년상을 치뤘는데

이것이 당대 유명한 학자였던 남언경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된다.

 

"우리가 조선시대 때 모두가 3년상을 치루었다고 당연히 믿고 있습니다.

사실 3년상은 상당히 어려운 것입니다.

3년상은 집에서 치루는 게 아니고 무덤가에서 지내는 것으로

어떤 사람은 3년상을 치루다가 병에 걸리기도 하고 영양실조에 걸리기도 해서 죽은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서 3년상을 잘 치루었다는 것만으로도 효자로 이름을 얻기도 했습니다.

이것은 3년상을 철저하게 지키기 어려웠음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효는 삼강오륜 중에 사람의 가장 기본 도덕인데,

남언경이 어린 유희경을 효자라고 보며 

그때부터 자신의 학문을 전수할 제자라고 생각하고 

그에게 예법을 가르켰던 것입니다."

                                                                                                                      - 허경진 교수

 

남언경으로부터 정통 예법을 배운 유희경은

천민의 신분으론 드물게 당대 손꼽히는 상장례 전문가로 성장하게 된다.

 

 

 

경사가 된 것이다.

 

경사란

상례 절차를 모르는 일반인들을 대신해

상장례 전반의 예법을 조언하고

상장례  전반을 도맡아 하는 이들을 뜻하는 것이다.

 

오래지 않아 그의 명성이 널리 알려졌고

사대부들의 장례는 물론이고 국상 때에도 그의 자문을 구했다고 한다.

 

당시 항간엔 유희경의 명성을 짐작하게 하는 소문이 떠돌았다.

'허준의 스승이었던 양예수는 뒷문으로 나가고 유희경은 앞문으로 들어온다'는 것이었다.

 

"그 말은 무슨 말이냐면 사람이 죽었으니까 의사였던 양예수는 대접을 못받고 결국 뒷문으로 나가고

상장례에 정통한 유희경이 상장례를 치루기 위해 대접을 받으며 앞문으로 들어간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만큼 유희경이 당시 상장례를 행하는데 유명했던 인물이었다는 걸 알 수가 있습니다." 

                                                                                                                 - 고영진 교수, 광주대 사학과

 

유희경에겐 남언경(南彦經) 외에 또 한 분의 스승이 계셨는데,

그가 바로 영의정을 지낸 박순(朴淳)이었다.

 

 

 

남언경에게서 예법을 배웠다면, 

박순은 시를 가르친 스승이었다.

 

그는 당대 화려하기만한 시 경향을 비판하고 담백한 시를 추구한 당대 최고 시인이었다.

바로 그가 유희경에게 시를 가르친 것이다.

 

 

  

유희경이 박순을 만난 것은 독서당을 드나들면서부터였다. 

 

상가집에 불러다니는 틈틈이 시 짓기를 즐겼던 유희경은

이곳의 젊은 학자들과 곧잘 시를 주고 받았다고 한다. 

 

유희경의 시를 본 박순은 그의 시를 높이 평가했고

이후 그를 가르치게 된 것이다.

 

이것을 계기로 유희경은 더 많은 양반 사대부들과 교류를 갖게 된다.

이로써 그는 천민 신분임에도 시를 배울 수 있었고 이름을 날릴 수 있었다.

 

 

 4. 유희경의 침류대에는 17세기 문화사랑방이었다?~

 

 

 

 

"유희경이 매창과 헤어진 후 쓴 시입니다.

촌은집에는 이와 같은 연시가 여러 편 있는데요

이것을 통해 볼 때 매창이 유희경을 그리워했듯이

유희경 역시 매창을 그리워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다시 만나게 되는 건 첫 만남이 있은 지 15년이 지나서였습니다.

두 사람의 이별이 계속 되는 동안 유희경은 한문학 공부와 시작에만 열중하게 됩니다.

 

그는 자신의 집을 침류대라고 이름을 짓고 시작에 열중하게 되는데

임진왜란 이후에는 명성이 자자한 학자들이 이곳을 제 집 드나들듯 드나들었다고 합니다.

 

이들 중에는 왕실의 일원이었던 완평부원군 이원익을 비롯해서 장유, 김상헌, 이수광, 신흠 등

당대 내노라 하는 시인과 학자들이 이곳 침류대를 찾아와 그와 함께 시를 짓고 풍류를 즐겼다는 것인데

신분을 비추어 볼 때 천민에 불과했던 그에게 이런 일이 가능했는지 의아합니다.

 

이수광은 이 침류대를 일컬어 '무릉도원이 따로 없다'고 비유한 바가 있는데

그 내용을 한 번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이렇게 아름다움과 화려함을 노래한 침류대가 과연 어디에 있었는지 궁금하지 않습니까?

유희경의 행록에 보면 '家在淨業院下下流(가재정업원하하류)' ,

'집은 정업원 아래쪽 하류, 속칭 원동이라고 하는 곳에 있었다'라고 되어있습니다.

 

이와 같은 기록을 바탕으로 침류대가 어디에 어떤 모습으로 있었는지,

또 왜 그렇게 많은 양반 사대부들이 드나들었는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기록의 정업원터는 현재의 창덕궁 서편, 원동 부근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것 이외에 침류대의 위치를 추정할 수 있는 기록들을 토대로 그 위치를 찾아보기로 했다. 

 

또 하나의 단서는 이수광의 기록이다. 

 

"여기 이수광이 쓴 침류대기를 보면

'유희경이 내가 거처하는 곳은 금천의 상류다'라고 했거든요.

 

아마 이 금천교를 따라 올라가면

그 어느 곳에 침류대가 있었다는 것을 확인 시켜주죠."

                                                                                 - 신병주 박사

 

금천교는 궁궐 입구쪽에 위치하고 있는 다리의 이름이다.

기록대로라면 이 금천교를 따라 오르면 침류대와 만날 터였다.

  

두 가지 기록을 토대로 침류대의 위치를 추정해보면

먼저 침류대는 정업원의 아래쪽, 계곡 하류쪽에 위치해 있었다. 

 

계곡을 따라 내려오다 보면 그 물은 금천교와 만나게 된다. 

이곳에서 다시 상류쪽으로 백여 보 올라간 곳이 침류대의 위치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대로라면 침류대는 궁궐 안에 위치해 있음을 알 수 있다. 

 

오정혜(<천둥소리> 매창역) - "어떻게 침류대가 궁궐 안에 위치할 수 있나요?" 

 

정현숙(창덕궁  관리소) - "창덕궁은 한꺼번에 지어진 게 아닙니다.

                                       처음 지어진 것이 태종 인데, 그후 여러 차례 임금님들에 의해 더 지어집니다.

                                       그 중에서도 서쪽 담장쪽은 효종 임금님 때 지어진 것로 제가 알고 있습니다."

 

신병주 박사 - "그 기록이 정확할 거 같습니다.

                      효종 때 만수전이라는 인조의 제위를 위한 궁전을 지으면서

                  바로 이 일대, 유희경이 사는 침류대 일대도 궁궐 안에 편입된 거 같습니다.

                     

                      개인의 집터가 궁궐 안에 들어갔다는 건 상당히 넌센스인데

                      아무튼 궁궐 확장 공사가 이루어지면서 궁굴 안으로 들어왔다 이렇게 볼 수 있습니다."

 

이 같은 사실은 후대의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효종 때 만수전을 지으면서 완평부원군의 집과 함께 침류대가 궐 안으로 편입되었다는 것이다.

 

창덕궁 돌담에서 그 위치를 추정할 수 있는 자리를 찾아볼 수 있었다.

서편 담장에서 'ㄱ'자로 꺽인 확장한 흔적을 발견한 것이다.

 

결국 우리가 찾던 침류대는 지금의 창덕궁 서편 담장 안쪽임을 최종적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유희경이 살았을 당시 침류대의 위치를 추정해보면 궁궐의 경계는 지금과 달리 금천 동쪽에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침류대에서 대궐의 초입문 경추문까지는 아주 가까운 거리임을 알 수 있다.

당시 침류대는 조선 상류사회에도 널리 알려져 있었는데

심지어 왕비가 궁궐 너머로 유희경이 침류대를 노니는 모습을 봤다는 기록도 있다.

 

 

  

"당시에는 계곡이 발달해있고, 아주 차고 맑은 물이 흘려내렸고,

복숭아꽃, 버드나무가 우거진 아주 풍취가 좋았던 그런 곳이었고,

궁궐과 가까운 당시로 보면 중심지였습니다.

 

중심지이면서 풍취가 좋은 이곳에

당대의 명사, 학자들이 모여서 학문을 토론하기도 하고 서로 교류를 하면서

17세기 이곳은 상류층의 문화 공간의 역할을 했고,

오늘날로 치면 문화사랑방 장소였다 이렇게 평가할 수 있습니다."

                                                                                                 - 신병주 박사

 

침류대를 드나들던 많은 명사들은 이곳의 아름다움을 시로 남기기도 했다.

 

 

 

수많은 양반들이 침류대를 드나든 것에는 유희경의 신분 상승이 가장 큰 역할을 했다.

 

유희경의 신분 상승은 임진왜란 때 이루어졌는데

전쟁 중 의병 활동을 한 공로가 인정받아 신분 상승이 된 것이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 두 시기는 조선시대 전체를 통틀어 가장 신분 상승이 활발했던 시기였다.

 

납속, 공명첩 발행

 

전쟁 비용이나 군사를 충당하기 어려웠던 조정은

전쟁에서 공을 세우거나 군량미를 헌납하는 노비들에게 면천증서를 줬다.

 

선조실록에 따르면

노비가 적군의 목을 벨 경우 그 수의 많음에 따라 면천과 벼슬길을 열어줬다고 한다.

 

 

 

"유희경이 살았던 시대도 그런 일들이 활달하게 이뤄졌던 시대였고

유희경도 결국은 임진왜란 때 공을 세워 노비에서 면천되고 신분 상승하는 계기가 되죠."

                                                                                                          - 고영진 교수 

 

1609년 유희경은 또 한 차례 공을 세운다.

 

궁궐의 고민거리였던 중국 사신들의 비용 마련에 해결책을 제시했던 것이다. 

이에 조정에서는 정3품 당상관의 벼슬을 내리게 된다.

 

결국 유희경은 천민에서 양인으로,

그리고 명목상이긴 했지만 당상관으로 신분 상승을 이루게 된다.

 

그후에도 유희경은 겸손함을 잃지 않았다.

그리하여 양반 사대부들은 그를 찾아와 침류대에서 교류함을 마다 하지 않은 것이다.

 

침류대를 드나들던 사대부들을 살펴보면 차천로, 이수광, 신흠, 조우인 등

당대 내노라 하는 문인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면천되었다고는 하지만 유희경은 엄연히 천민 출신이었다.

침류대를 드나들었던 사대부들은 대체 어떤 생각으로 천민 출신의 유희경과 격의 없이 함께 할 수 있었을까?

 

 

서울대 한영우 교수는 이들이 당시 서울을 중심으로 개방적 학풍의 학자들이었음에 주목했다.

 

"침류대를 드나들던 학자들은 수십 명인데

그 중에 상당수가 화담 서경덕 선생의 학풍을 물러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화담 선생은 아시다시피 개성 사람이거든요. 

개성은 일찌기 고려 시대부터 상업이 발달하고 중국 문물이 들어오는 통로였기 때문에  

이쪽 지방 사람들의 성향이 대단히 개방적이고 실용적인 사상을 가졌습니다."

                                                                                     - 한영우 교수, 서울대 사학과 

 

화담학파의 사상적 경향은

율곡 이이학파나 퇴계학파 등 조선의 정통 성리학파와는 달리

당시 이단으로 여기던 양명학과 도교를 받아들이는 개방적인 학풍이었다.

이와 같은 사상적 바탕 위에서 천민인 유희경과도 어울릴 수 있었다.    

 

"이 화담학파의 개방적 사상 때문에

유희경 같은 사람도 천민이지만 침류대를 소지하고

그 침류대 아래 서울의 각계 각층의 사대부들이 모여들었다 이렇게 볼 수 있습니다." 

                                                                                                            - 한영우 교수, 서울대 사학과 

 

이 같은 배경 속에서 침류대는 당대 학자들의 토론의 장이자 문학 활동의 공간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무엇보다 뛰어난 풍광과 궁궐이 한 눈에 내려다보이고 북악산 자락.

이 같은 지리적인 위치 때문에 침류대는 많은 사대부들의 발길을 붙잡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5.  위항문학, 중인들의 신분상승운동!~

 

 

"결과적으로 유희경은 천민의 신분에서 출발해서

당대 최고의 문학살롱으로 부각된 침류대의 주인이 된 셈이니 그의 신분이 격상이 된 셈입니다.

 

물론 여기에는 그의 학식과 겸손한 사람 됨됨이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의문점이 생깁니다.

 

유희경이 양반 사대부들과 본격적으로 교류를 시작하게 된 것은 면천되고 난 이후지만

그가 글을 배우고 시를 읊었던 것은 분명 천민 시절부터였습니다.

 

조선 시대, 엄격한 신분 사회에서 천민 유희경은 어떻게 글을 배울 수 있었을까요?

천민들도 글을 배우는 것이 가능했을까요?

 

서울대 정옥자 교수님께서 그 해답을 주실 것입니다."

 

"조선 왕조는 문치주의 국가입니다.

문치주의라는 것은 글을 숭상하는 나라라는 것이구요,

오늘날로 말하면 무력을 숭상한 것이 아니라

문화를 숭상한 것이다 이렇게 풀어볼 수도 있을 겁니다.

 

그래서 글자를 아는 것이 중요한 능력입니다.

조선 시대 지배층들은 혈연적인 요인보다는

학문을 잘 아는 사람들이 지배층이 되고 사회를 이끌어 간 그런 시대입니다.

 

신분에 고하를 막론하고 문자를 익히고,

그 문자의 능력에 따라 사회적인 대우를 받던 그런 시대이기 때문에

누구나 글을 배우고 싶어하고 실제로 그렇게 할 수 있었던 시대입니다.

 

그래서 중인층의 경우도

글을 통해서 자신들의 존재 의의를 부각시키고, 세습직을 수행하고,

그것을 사회적으로 인정을 받으면서 후기 신분상승운동으로 나아가는 하나의 통로를 연 것입니다." 

                                                                                                     - 정옥자 교수, 서울대 규장각 관장

 

"그렇습니다.

조선 시대에는 신분이 낮다고 해서

글을 배우는 것이 원천적으로 금지되어 있지는 않았습니다.

 

실제로 전국에 서당이 존재했고,

글을 배우고 싶다면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글을 배우는 게 가능했던 것입니다.

 

선조 때 서기라는 사람은 노비의 신분에도 불구하고

양반의 자제들을 문하생으로 가르치기도 했고

 

이달, 어무적 같은 사람들은

양반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면서 문학 활동을 펼쳤다고 합니다.

 

이처럼 유희경이 살았던 시대는

아직 신분제가 확고하기 이전이었기 때문에

 

양반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자신의 능력이 뛰어나다면

사대부들과 교류를 할 수 있었고 능력을 인정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조선 시대 중인 계층 이하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문학 세계를 만들어 가기도 했는데

바로 그 한가운데 유희경이 있었던 것입니다."

 

젊은 시절 유희경이 친하게 지낸 사람들 중에 백대붕(白大鵬)이란 사람이 있었다.

배를 만들고 수리하는 전암사의 노비였는데 그 역시 한문에 조예가 깊었다고 한다.

 

유희경은 백대붕과 더불어 시짓기를 즐겼는데, 

두 사람의 명성은 양반들 사이에도 널리 알려졌다.

 

사대부들은 이 두 사람을 가르켜 '풍월향도' 라 불렀다.

 

"풍월향도

임진왜란 이전에 평민들과 천민들이 모여서 만든 문학 모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풍월이라고 하는 것은 문학을 뜻하는 것이고

우리가 흔히 상득꾼이라고 하는 것이 향도(香徒)를 뜻하는 말인데,

  

결국 풍월향도라는 것은

풍월이라는 문학

상득꾼이라는 향도, 상장례를 결합해서 만들어진 용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유희경이 상장례에 정통을 했고

또 문학에도 능했으니까 그런 이름이 만들어졌다고 할 수 있죠."

                                                                                                   - 고영진 교수 

 

유희경과 백대붕을 중심으로 하는 풍월향도는 임진왜란 이전까지가 그 전성기였다.

전쟁 과정에서 백대붕이 사망하고 유희경마저 신분 상승한 후

서민 출신의 시모임인 풍월향도는 삼청시사에게 그 전통이 이어진다.

 

삼청시사는 주로 삼청동에 모여 시활동을 벌였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유희경의 제자격인 최기남(崔奇男, 1586~?) )을 중심으로

아전, 서리, 역관 등 중인 이하의 신분의 사람들이 모여

시와 문학 등 자신들만의 문학 세계를 만들어갔던 것이다.

 

"유희경의 제자 중 최기남이란 사람이 여기서 서당을 했습니다.

많은 제자들을 가르치고 또 친구들이 모여 시를 썼던 곳입니다.

최계남의 신분은 신익성이라고 선조의 부마인데 그 집안의 노비였습니다.

자연히 친구들은 아전이나 역관들 중인들이 많이 모였습니다."

                                                                                     - 허경진 교수 

 

이들은 자신들이 주고 받은 시를 모아 1658년 육가잡영이란 시집을 발간한다.

이것은 위항문학(委巷文學) 최초의 시집이다.

 

"위항이라고, 당시에는 위항이라는 말을 썼습니다.

대저택들이 있는 넓은 길이 아니고 꼬불꼬불 길이 나 있는 달동네를 뜻하는 말인데

거기에는 중인 이하의 계층은 다 포함된다는 뜻입니다. 천인까지도 말입니다."

                                                                                         - 정옥자 교수

 

풍월향도에서 비롯된 중인 이하 문학인의 모임은

인왕산을 중심으로 점차 확대되어 나간다.

 

인왕산이 그 중심 지역이 된 이유는

양반들이 많이 사는 안국동이나 종로 등과 가까우면서도 비교적 땅값이 싸고 경치가 좋았기 때문이다.

 

가장 왕성하게 활동한 것은 옥계시사였다.

이들은 주로 우두머리격인 천수경의 집 근처, 송석원에서 모였다고 한다.

 

현재 옥인동 47번지가 바로 그 송석원이 있었던 자리다.

이곳엔 옛 모습을 기억할 어떤 흔적도 남아 있지 않았다.

 

도시의 개발로 인왕산 자락에서 옛 풍류의 현장을 찾아보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옥계 상류에 이르러서야 위항시인들이 모였을 것 같은 자리를 발견할 수 있었다.

 

"주로 시냇가 왼쪽과 오른쪽에, 그땐 솔숲이었거든요.

그 소나무숲과 바위 아래 모여 시를 읊고 그림을 그린 자료가 상당히 많이 나와 있습니다.

 

처음에 모인 사람들이 열두 명인데요, 이 사람들이 약속을 했습니다.

한 달에 한 번, 일 년에 열두 번, 시를 쓰니까 156편이 되었겠지요.

그것을 묶은 것이 옥계사라는 시집이구요,

 

거기에 그림이 그려졌어요.

인왕산 철 따라서 그림이 네 폭이 남아 있어요."

                                                                                                           - 허경진 교수

 

위항문학은 이 옥계시사로부터 본격적인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조선 전기까지 한문학은 양반들만의 전유물이었다.

그 외의 사람들은 업무상의 이유나 출세를 위해 글을 배울 뿐이었다.

 

그러나 중기로 접어들면 이 같은 실용적 목적 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생각과 느낌을 글로 표현한다.

 

이들의 모임에 대해 조선 왕조에서도 후원해주는 입장이었다고 한다.

 

"시대가 문치주의 시대니까

글자를 해독하고 시를 짓는 활동들은 국가적 조류와 맞물리는 것이었으므로 좋게 보았구요, 

 

그리고 또 하나는 이들의 이런 활동을 전부 제한하고 누를 경우에 

그게 폭발하면 체제 위협적인 사고가 터질까봐

그들 중인의 돌파구를 허용해주는 두 가지 의미가 있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 정옥자 교수

 

 

 

인왕산을 중심으로 하는 위항문학 모임은 후대로 가면서 조금씩 그 성격이 변하게 된다.

 

처음엔 순수한 문학적 동기에서 시작했지만

점차 시간이 흐르면서 신분 상승 운동의 한 흐름으로 발전했고

조선말에 이르면 근대화 운동에 한 축을 이루게 된다.

 

바로 이 거대한 흐름의 꼭대기에 유희경과 풍월향도가 있었다.

 

유희경 자신은 면천이라는 과정을 통해 사대부의 삶을 살았지만

그로부터 시작된 풍월향도의 정신은

후배 문인들에게 계승되어 위항문학인들의 역사와 전통으로 이어진 것이다

 

 

 6. 15년만에 이루어진 재회, 그리고 이별!~ 

 

 

유인촌 - "유희경에 대한 모든 것을 살펴본 셈인데요,

               우리 오정혜씨와 유희경, 오정혜씨는 유희경을 어떻게 평가하시겠습니까?"

 

오정혜 - "글쎄요. 자수성가라는 말이 있지요.

               유희경이란 사람은 이런 표현도 미흡하다고 생각이 듭니다.

               신분 계급도 이룰 수 있었고

               당대 내노라 하는 매창과 풋풋한 사랑도 이룰 수 있었던 이 사람은

               그 시대로 보나 지금 시각으로 보나 입지적인 인물의 전형이 아닌가 싶습니다."

 

유인촌 - "젊은 시절에는 시인으로 이름을 드높혔고

            말년에는 명예직이긴 했지만 종2품의 벼슬을 누렸고

            또 92세라는 천수를 누렸다는 것입니다.

               당시에 90세를 넘겼다는 것은 정말 장수한 것으로 그의 인생이 대단히 성공적이고 순탄했다 말할 수 있죠. 

               그런데 그의 90 평생 가운데서 어떤 일이 그의 남자의 가슴을 그토록 흔들었겠어요?

               그것이 매창과의 사랑 아니었겠어요?

               매창과 유희경의 사랑, 그 애달픈 마지막 장을 열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매창과 유희경이 다시 만난 것은 이별 후 15년만이었다.

그러나 기나긴 세월의 공백도 두 사람의 사랑을 퇴색시키진 못하였다.

 

 

              

뭇 남성을 상대해야 하는 기생과

처자식이 있는 유부남의 이룰 수 없는 사랑.

 

그러나 이 두 사람에겐 시라는 공통의 언어가 있었다.

매창과 유희남은 부안의 명소를 돌아다니며 함께 시를 읊고 사랑을 노래했다.

 

 

 

 

 

 

이별을 노래했던 매창의 시귀처럼 짧은 재회의 시간은 지나고

유희경은 다시 서울로 돌아갔다.

 

두 번째 이별은 매창에게 더욱 깊은 그리움을 남겼다.

 

유희경과 함께 거닐었던 장소를 홀로 헤매거나

늦은 밤 거문고를 타는 것으로 매창은 자신의 외로움을 대신 했다고 한다.

 

"매창은 생애 전체를 통해서

유희경과 떠나서는 존재 의의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형이상학적 관계를 맺고 있었던 겁니다.

                                                                               - 허미자 교수

 

매창의 죽음.

그것은 이별 뒤 3년만이었다.

 

그러나 매창은 유희경에게 자신이 죽음이 알려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것이 유희경에 대한 그녀의 마지막 사랑이었던 것이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평생을 이어간 두 사람의 만남은 이렇게 끝이 났습니다.

 

유희경은 말년에 지은 시를 통해 여전히 매창을 그리워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아련한 연시를 통해 죽음도 이들을 갈라놓지 못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유희경의 삶에서 다른 여인들이 전혀 언급되지 않은 것을 비춰봤을 때

그에게 있어 매창은 단 한 사람의 연인이었던 것입니다.

 

매창이 사랑했던 남자, 천민 유희경.

400년 전 신분제가 엄격했던 그때 천민으로 태어나서 침류대의 주인으로 생을 마칠 때까지

유희경의 일생은 오늘날 우리에게 그 시대를 엿보게 하는 스펙트럼인지도 모릅니다.

 

양반이 아니면서도 시를 짓고 풍류를 즐길 수 있었던 사회.

아니 한 걸음 더 나아가 양반과 천민이 더불어 풍류를 나누었던 시대.

 

우리는 그의 삶을 통해서 조선 중기의 참모습을 알 수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아직 신분제가 완고해지기 이전의 열린 사회의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또 이를 통해서 양반의 전유물이었던 한문학을 매개로

천민 유희경과 기생 매창의 사랑이 가능했던 것이겠지요.  

 

오늘 우리에게 이러한 사랑이야기가 남아서

400년 전의 애틋한 사랑이야기 한 토막이 전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 유인촌의 역사스페셜을 보고(건강하세요 모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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