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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은 인류에게 있어서는 필요 불가결한 요소였으므로 소금 생산자는 동 서양을 막론하고 경제적, 사회적으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 우리나라의 속담에 "평양감사보다 소금장수"라는 말이 있고, 또 이유없이 싱글벙글 웃고 있는 사람을 가리켜 "소금장수 사위보았나"라는 말에서 단적으로 표현된다. 또한 소금은 가장 중요하고 오랜 무역의 품목이었고 황금과 맞먹는 결재의 수단이었으며 부와 권력의 상징이었다. 실제로, 12세기에는 모로코 남부의 시딜마사에서 가져온 소금이 가나에서 금값으로 거래 되곤 하여 노예 한 명이 그의 발 크기만한 소금판 하나와 맞교환되기도 했다. |
▶ 고대 소금의 주요 생산지는 이탈이아. 이집트. 에스파니아. 그리스 등 지중해 주변의 해안지역이었다. 이는 사막의 많은 도로를 이용하기 때문이다. 이로인해 제노바, 베네치아를 포함한 많은 도시들이 소금 무역 중심지로 발전시키기도 했다.
▶ 페르시아 이집트에서는 왕실에서 소금을 독점 하였는데,그 당시는 소금을 장악하는 것이 곧 권력을 장악 하는 것을 의미했다.
▶ 고대 여러나라에서는 소금으로 세금을 내기도 했으며 지중해 주변의 여러지역에서는 소금 덩어리를 화폐로 사용했고, 중국에서는 소금을 끈적끈적하게 한 후 틀에 넣어 굳혀 동전같이 만든 후 황제의 문양을 새겨 화폐(염화)로 이용하였다. 아프리카의 소말리아 반도. 티베트에도 비슷한 화폐가 있었다.
▶ 고대 로마에서는 병사의 봉급을 소금으로 주었던 적이 있다. 영어로 일을 하고 받는 대가를 "샐러리(Salary)라고 하는데 이 말은 "병사에게 주는 소금은 살라리움(salarium)"이라는 말에서 유래하였다.
▶ 고대로마 시인 호라티우스(Horatus:bc65~8)는 "소금과 빵은 기아(饑餓 )를 극복하고 얼굴색깔을 붉게 한다."고 강조한 것으로 보아 당시부터 소금은 식생활에 사용되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 고대 근동에서는 산모가 아기를 낳으면 신생아의 몸을 소금으로 문질러 피부를 단단히 하도록 하고 병균으로 부터 보호 하였다.
▶ 고대 그리스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Herakleitos, B.C. 500년전후)는 죽은 시체를 부정하다고 멀리 하지 말라고 했는데 이것을 부연하여 플루타르코는 소금이 시체를 살리는 정신력 이라고 했다.
▶ 고대 이집트에서는 시체를 장시간 소금물에 담그어 부패를 방지하고 향로를 발라서 미이라로 만들었다.
▶ 중세 비쟌틴 제국의 대주교인 에우스타티우스(Eustathius)는 소금을 우정의 상징으로 청하였다. 한 가마니의 소금을 함께 먹어야만 참된 우정이 성립된다고 하는 말은 고대부터 전해온 격언이 되고 있다.
▶ 로마 제정시대 그리스 철학가인 플루타르크(Plutark46 ∼ 120?)는 물과 햇빛과 봄과 대지는 인류가 공유하여 신성시하는 바이지만 그 필수 욕구상에서 보면 이것들도 소금에는 미치지 못한다고 했다.
▶ 19세기 중반에는 땅속에는 소금(암염)을 캐기 시작하였으며 소금 캐내기 위하여 땅속에 구멍을 뚫는 기술이 발전하여 석유시추에도 크게 기여 하였다.
▶ 漢代(한대)에는 지방이나 변방에 파견 나갔던 관리가 중앙으로 복귀 할때에는 임지의 소금 표본을 북경으로 가져 왔는데 이때 가져온 소금 표본을 모아 북경에 개설한 북경 박물관이 지금까지 운영되고 있다. 당시 사염(私鹽 )을 엄격하게 금지 했으며 소금을 밀매하는 자는 왼쪽 발가락을 자르는 형에 취했다.
▶ 동서양을 막론하고 많은 사람들이 소금을 노래하고 연구 했고 화폐의 단위로 사용하고. 의약품으로 사용해 왔다.
서양 보다는 동양의 문헌에서 소금에 대한 구절들을 많이 찾아 볼 수 있으며 특히, 현재 중국 소금 박물관에는 수백 종의 소금을 보관하고 있다고 한다. 그런만큼 중국 문헌들에는 소금에 관한 자료들이 압도적으로 많은 부분을 차지하며 서양의학 보다는 한의학에서 소금을 약제로 많이 사용하고 있음을 살펴 볼 수 있다.
▶ 중국에는 바위소금岩鹽 소금못鹽地 소금우물鹽井 등이 많이 있었는데「영현전英賢傳 」에보면 염제 당시 섭사씨가 처음으로 바닷물을 이용해서 소금을 만들었다고 한다.
▶ 설문해자(說文解字)에 소금은 천연으로 만들어진 것을 노(鹵)라고 했고, 가공한 것을 염(鹽) 이라고 한다고 했다.소금은 (鹵)에다 (鹽)을 합성한 글자로서 (形聲字 )이다.
▶ 鹽人(염인)은 소금을 다루는 직명이요, 鹽釜(염부)는 바닷물을 조려서 소금을 만들 때쓰는 가마요. 鹽商(염상)은 소금장수를 일컫고. '鹽幕'(염막)은 소금 만드는 곳을 말한다.
▶ 鹽水選'(염수선)은 소금물에 곡식의 씨를 떨어뜨려 뜨는 것을 버리고 가라앉는 것을 쓰는 종자 선택방법을 말하고`鹽水秒' (염수초)는 한방에서 소금물에 담갔다가 볶는 일을 말한다.
▶ <書痙>에보면 ,`鹽梅'염매는 소금에 잘 절인 매실인데, 이것은 신하가 군주를 잘 도와서 선정을 베풀게 하는 것을 비유했다. 원래 염매는 선비들이 좋아한 술안주로서 소금이 골고루 잘 섞여 부패를 방지하듯이 사견에 얽매이지 않는 훌륭한 신하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그러했을 것이다.
▶ 당((唐)나라 말기에는 송(宋), 명(明), 청(淸)나라때까지 염(鹽 )법을 제정하여 국가재정에 많이 충당함으로서 소금값이 한해 수십배에서 백배까지로 폭등하자 소금 밀매자가 생겨나고 정부에 대항하여 그 중 왕선지(王仙芷), 황소(黃巢 )등은 당왕조를 위협하는 반란세력으로 까지 성장하여 당왕조를 쇠퇴하게 했다.
▶ 우리나라의 염세는 매년 말까지 호조에 납부토록 명시되어 있고 세율은 염분 1좌(坐 )에 소금 사석.화폐로는 1냥. 면세포로 납부 할때는 1필반으로 계산했다. 균역법 실시 이후 부터 세금을 거두었으나 18세기 후반부터 잘 지켜지지 않아 1냥 부터 16냥 까지 일정하지 않았다. 고종 21년 (1884)부터 염분세(鹽盆稅 )를 실시하여 소금 1석에 1냥 광무10년 (1906)부터는 염 100근당 6전을 내도록 개정하였다.
▶ 고려 충열왕1년 (1309년)에는 당나라 제도를 모방하여 문란한 염정(鹽政)을 바로잡기 위해 권세자들이 소유하던 염분을 국유화 시키고 소금가격은 은(銀 )1근에 소금 64석 은 1냥에 소금사석, 포(布 )1필에 소금 2섬의 비율로 의염창(義鹽倉 )에서 팔게 하였다. 1년간의 염가세입(鹽價歲入 )은 포(布 )로 4만 필에 달하였다.
▶ 고려초기부터 국가에서 주도하여 전매제도를 시행케 되었고 문종 때 부터는 소금 가마솥을 국가가 직접 소유하여 제조, 민간에게 배급 판매 하였다. 고려 후기에는 귀족, 권신, 부호들이 소금 가마솥을 소유, 염업을 사염(私鹽)하여 염정(鹽政)을 문란케 하였다.
충선왕때 각염법을 개정 ,강력히 통제하면서 배급기일을 정하여 백성에게 소금을 팔았는데 소금 2석(石)에 포(布 )1필,사석에는 은 1냥.64석에 은 1근(斤)으로 하였다.
▶ 조선시대에는 세력가들이 염전을 장악하여 염세를 거두지 못하다가 균역법 시행과 함께 징수규정이 마련되었다. 염세는 염전의 규모 염전의 생산성. 품질. 소비지와의 거리등을 고려하여 차등징수 하였다. 또 먼곳에 위치한 곳에서는 염창을 세워 세염을 받아 비축하였다. 직물,곡물로 바꾸어 군자로 쓰게 하였다.
▶ 1907년 인천 주안에 근대적 의미의 천일염전이 조성되었고 일본 강점기 및 해방 후 정부 주도로 전매제도가 실시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