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그러대요.
“끝내 사랑할 수 없는 대상들 때문에 사랑을 알게 된다.”
‘모두 다 사랑하리’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가능합니까?
모두 다?
어떤 모두 다?
외국의 어떤 신흥종교는 악마도 사랑의 대상이라고 해서 그를 숭상하기까지 한답니다.
대단히 아량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사람을 넘어서 악마까지 사랑한다니요.
그러나 이는 신의 반대에 서 있는 것을 숭배하라는 말과 같습니다.
신은 사랑이고
사랑에 적대적인 존재는 사랑의 대상이 아닙니다.
하나를 사랑하면 다른 것에 관심을 더 쓸 수 없는 상황이 옵니다.
그것을 마음이 편협해서 등으로 쉽게 단정할 수 없습니다.
‘충실함’, 이는 사랑의 바른 자세이기 때문입니다.
보편적인 사랑, 말은 좋습니다만 그것은 쉽게 갈아타는 인심을 말할 뿐입니다.
이는 바람둥이의 자기변명입니다.
진정 충실하다면 끝내 마음을 줄 수 없는 대상이 생깁니다.
이는 세상의 애정관계를 넘어서
신앙을 함에 있어서나
학문을 함에 있어서나
스승을 대함에 있어서나
동일하게 적용될 주제입니다.
그러나 그렇습니까?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이 생각납니다.
“...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눅 18:8)?”
이 말은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때 세상에서 사랑을 볼 수 있겠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