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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상수훈
세상의 소금
본문/마태복음5:13-16절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15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16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우리는 이 말씀이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 합니다. 그러나 어떤 분은(아더 핑크)
[본문의 시작에 문맥을 보시면 1-10절까지의 “그들”이라는 말로 표한하고 본문 11절에서 부터는 “너희”라는 말로 표현하는 것으로 보아 즉 그래서 10절에서는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라는 보편적인 원칙을 말씀하셨고, 11절에서는 자신의 목자들에게 특별히 적용되는 말씀을 하셨다. 즉 박해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누구나 겪는 체험이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종들의 특별한 몫이기도 하다. 그래서 여기에 나오는 박해를 받는자는 “너희 전에 있는 선지자들도...”라는 말로 일반 성도를 말하는게 아니고 하나님의 종들을 말한다.
이와같이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라는 말씀은 분명히 구약의 선지자들이 행했던 것과 같은 위치에 있는 자들에게 관련된 말씀이라]라고 주장을 합니다.
그러나 이 주장이 전혀 맞지 않는 이유는 “너희”라는 단어는 뒤에서도 계속해서 일반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표현 입니다.(22-48절) 그리고 더 나아가서 6-7장에서도 “너희”라는 단어를 계속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에수님의 제자들에게 해당 되는 단어가 아니라. 모든 신자들에게 하신 말씀인 것을 증명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19절의 말씀도 특별한 제자들에게 주시는 특히 가르치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말씀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의 주의해서 읽어보면 다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누구든지“라는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20절에 있는 말씀도 너희 라는 대상은 모든 신자들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병행 구절이라고 할 수 있는 마가복음이나 누가복음을 보시면 문맥상으로 보면 목회자들이나 특별한 자들을 대상으로 하신 말씀이 아니라는 것을 금방 드러나게 됩니다.
마가복음9:50절,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하시니라.
누가복음14:34절, 소금이 좋은 것이나 소금도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즉 이 말씀은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들에게 그리고 성도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바울 서신서에도 이런 비슷한 말씀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거기에서도 신자들이 세상에서 빛 가운데서 살아 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엡5:8)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빌2:15절)
모든 성경은 믿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특정한 자들에게 주신 말씀이 아닙니다. 특별히 오늘 우리가 다루어야 할 소금과 빛에 대한 말씀도 목회자들에게만 해당 되는 말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인들을 세상의 소금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를 통해 세상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영향력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존 스토트는
[만약 팔복이 예수님의 제자들의 본질적인 성격을 묘사한다면 소금과 빛의 은유는 세상에서의 그들의 선한 영향력을 나타낸다.]
양용의 교수님도 같은 주장을 펼칩니다.
[조금과 빛은 세상에 대한 제자도의 영향력을 보여준다....]
이 해석이 바른 해석이라는 이유는 본문을 보시면 이 말씀은 명령법이 아니라. 직설법입니다. 즉 어떤 것이 되어 라는 명령이 아니라.(성령 충만을 받으라) 사실에 대한 진술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세상의 소금이 되라고 명령하지 않았습니다. 세상의 소금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들응ㄹ 세상의 소금으로 만드셨으므로 당연히 세상의 소금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영향력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순서에 유의 해야 합니다. 즉 팔복 다음에 소금과 빛에 대한 말씀이 나온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즉즉 팔복에서 예수님께서 따라야 할 주제들, 겸손한 가난 의와 정의를 추구, 평화와 화해를 이루어 냄,과 연결해야 정말 지혜롭다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즉 팔복의 다음으로 나오는 이유는 사람들의 사람들이기에 세상의 소금이요 빛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은 세상에서 팔복의 사람들인 그리스도인들이 어떤 존재이며, 또 어떤 영향을 기쳐야 하는지를 보여주고 있는 말씀이 분명합니다. 이것을 염두에 두고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는 말씀의 뜻을 더 나누어 보고자 합니다.
1)세상의 소금이라는 말의 의미
소금의 역할과 기능은 매우 다양합니다. 그래서 혼란이 발생합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이런 해석을 합니다. 여러분 소금을 말할 때 어떤 느낌이 듭니까? 소금의 다양한 사용이 결국 예수님께서 하고자 하신 본래의 뜻대로 하지 않는 다른 해석으로 인도하게 됩니다.
어떤 분은 소금의 역할을 ”갈증을 일으키는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어떤 책에 보면 이런 글이 나옵니다.(론 쎄니의 개인 전도 방법)
[주일 학교에 다니는 한 소녀가 ‘소금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그 애는 소금은 목이 마르게 해요 하고 대답했습니다. 소금처럼 당신과 나는 사람들을 마시게 해줄 수는 없어도 그들로 갈증을 나게 할 수는 있습니다. 우리가 주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기쁨과 승리로 가득찬 삶을 살아갈 때 그들은 영적인 것들에 갈증을 느끼게 되고 그리스도께 나아가 생수를 마심으로 만족을 얻게될 것이다.(요4:10). ]
라고 해석을 합니다. 이런 해석을 한 주장들이 꽤 있습니다.
어떤 분은(루이스 바비에리)
[예수님의 추종자들은 그들이 보다 위대한 지식에 대한 갈증을 유방해낸다는 점에서 소금과 같다.]
위즈덤 종합강해서에도
[소금은 갈증을 느끼게 한다.]
참 희안하게 해석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런 의도로 하신 말씀 일까요? 이 해석은 말장난에 불과한 해석이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설교 중에 그런식으로 설교를 하는 분들이 참 많을 것입니다. 그리고 어떤 분들은 소금의 특성을 줄줄이 역어서 설명하면서 그것이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의 의도였다, 라고 주장하는 설교도 꽤 있습니다. 설교자들이 자기 개인의 생각이나 추측으로 교훈을 유추해내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가? 이것들은 엣부터 많이 들은 바 있는 부분입니다.
우리가 소금을 생각할 때 가장 대표적으로 떠올리는 것은 ”조미료와 방부제“일 것입니다. 신학자들도 예외가 아닙니다. 그래서 맛을 배는 것과 부패를 방지하는 것이 소금의 역할이라고 해석하는 주장들이 많습니다. 성경에도 그런 말씀들이 있습니다.
욥6:6절에, 싱거운 것이 소금 없이 먹히겠느냐 닭의 알 흰자위가 맛이 있겠느냐.
골로세서4:6,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맛을 냄과 같이 하라 그리하면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것을 알리라.
그러나 본문의 “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음식을 짜게 하는 것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 저도 이것을 읽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짜게 한다”는 것을 소금이 음식을 짜게 하는 것 즉 음식5의 맛을 낸다는 뜻으로 이해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그것이 이 말의 의미가 아니라는데 동의 하고 있습니다. 이 말의 진짜 의미는 “짠 맛을 회복한다.”는 것으로 소금이 자신이 잃어버린 “짠 맛을 회복하겠느냐.”는 질문입니다. 즉 그것이 불가능함을 듯합니다. 다행히 몇몇 주석가들이나 번역본도 그 의미를 잘 살려서 표현하고 있습니다.
공동번역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만일 소금이 짠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다시 짜게 만들겠느냐?”
새번역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나. 소금이 짠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그 짠 맛을 되찾게 하겟느냐?”
현대인의 성경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그런데 소금이 그 맛을 읽으면 어떻게 다시 짜게 할수 있겠느냐?”
그래서 본문의 소금은 맛을 낸다는 해석이 틀린 것이 아닙니다. “맛”이라는 단어를 통해서 가장 본문에 적합한 해석 가능 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너희는 소금이다. 너희는 소금으로 창조되었다. 이미 세상은 맛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너희는 그들과 다르다. 그러므로 너희는 짠 맛을 지켜내고 절대 맛을 잃어버리지 말라”고 말씀한 것으로 해석해도 바른 해석입니다.
그러나 이 구절을 통해서 방부제로 설명해야 해석해야 할 중요함을 크게 느낍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빛”이라는 말이 세상의 어두움을 전제하듯이, “세상의 소금”은 세상의 부패를 전제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빛이 어둠에 대조한 것이듯이 세상의 소금은 세상의 부패와 대조하는 단어가 아니겠습니가? 그러므로 세상의 소금을 설명해야 할 때 그래서 소금을 말할 때 맛이라는 해석보다는 방부제로서의 역할을 더 중요하다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이 부분에 맞추어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2)왜 세상의 소금이 되어야 합니까?
우리가 세상의 소금이 되어야 할 이유는 “세상의 소금”이라는 말 자체에 나타나 있습니다. 그것이 이 세상의 실체를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로이드 존스는 다음과 같이 주장합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이 말씀은 기독교인을 가리키는 말씀일 뿐 아니라. 그가 사는 세상을 한마디로 암시하는 말씀이라 하겠습ㄴ다. ... 이 말씀은 세상의 부패성을 암시함이 분명합니다. 이 말씀은 오염될 경향과 더럽고 도발적으로 될 성향을 암시합니다. 성경이 세상에 대해 말씀해야 할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세상은 썩고 오염되기 쉬운 고기와 같습니다. 죄와 타락의 결과로 인해 이 세상에서의 삶은 대채로 썩어지는 상태에 들어가는 경향이 있습니다.
성경에는 이와 같은 실례가 무수히 많습니다. 여러분은 이 사실이 첫 번째 책인 창세기에 나타나 있음을 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완전히 창조 하셨지만 죄가 세상에 들어왔기 때문에 이 악하고 오염적인 요소는 즉시 자태를 나타내기 시작했습니다. 창6장을 보시면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란 말씀을 보시게 됩니다. 불결과 오염이 너무 심하므로 하나님께서 홍수를 보내셔야 했습니다. 그 후에 새 출발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악한 원리는 여전히 그 정체를 나타내었으며, 거의 상상하기도 힘든 죄악으로 더럽혀진 소돔, 고모라에 이르게 됩니다.]
옳은 지적입니다. 그리스도를 떠난 세상은 더 심하게 여염되고 악해지고 타락해서 하나님께서 멸망시킬 수 박에 없었던 노아의 때나 롯의 때와 같이 될 것입니다. 그것을 말세에 만난 우리들에게 경고를 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17:26-30, 노아의 때에 된 것과 같이 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
27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더니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망시켰으며
28 또 롯의 때와 같으리니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
29 롯이 소돔에서 나가던 날에 하늘로부터 불과 유황이 비오듯 하여 그들을 멸망시켰느니라
30 인자가 나타나는 날에도 이러하리라.
그리고 적그리스도가 나타나기 전에 교회 안에서 바울이 말한 배도의 일이 일어나고 성경이 예언한 적그리스도가 나타나서 대환란이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그 후에 주님이 다시 오시고 타락한 온 세상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절대 세상의 사조나 문화를 따라가면 안됩니다. 우리는 오로지 참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그것을 전적으로 신뢰해야 합니다.(롬12:2절)
그런데 세상이 점점 더 악하고 음란해지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부패와 타락을 최대한 막고 지연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이를 억제하는 영향력을 세상에 두셨습니다. 그것들 중의 으뜸이 국가와 가정을 정하셨습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역부족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리스도인들이 더 강력하게 그 역할을 해주기를 원하십니다. 즉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이 썩고 부패하는 것을 억제하는 영적인 방부제가 되어 주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어떤 학자는 이렇게 설명합니다.(타스커)
[제자들은 도덕적 기준이 끊임없이 변하며 낮아지거나 존재하지 않게 되는 세상에서 도덕적 살균제가 되어야만 한다.]
옳습니다. 이것이 세상의 소금으로 부름받은 그리스도인의 사명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절대 맛을 잃어버리면 안됩니다. 즉 절대로 팔복의 특성을 잃어버려서는 안됩니다. 그리하여 세상의 소금의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3)세상의 소금 역할을 잘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세상의 소금으로서 우리는 그 역할을 잘 감당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두 가지가 필요한데, 바로 구별과 침투입니다.
요한복음17:14-19,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그들에게 주었사오매 세상이 그들을 미워하였사오니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으로 인함이니이다
15 내가 비옵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다만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16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
17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18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그들을 세상에 보내었고
19 또 그들을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그들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
이 말씀에는 세상에서의 구별과 침투에 대한 주님의 뜻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두 가지가 곧 우리가 세상에서 소금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는 비결입니다. 그러므로
첫째로, 우리는 세상과 철저하게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럼 세상과 구별된 삶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일까요?
먼저, 그것은 본문 앞에 나오는 팔복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존 스토트는
[소금과 빛에 관한 두 가지의 은유는 만약 그리스도인들이 팔복에 묘사 되어 잇는 것과 같은 그들의 독특한 성격을 유지한다면 그들이 사회에서 끼치게 될 선한 영향력을 나타낸다.]
앙용의 교수님도 다음과 같이 구별된 삶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본 단락에서 예수님은 제자의 특징 역시, 소금이나 빛과 마찬가지로 세상으로부터 구별되는 데 있다는 점을 지적하신다. 그런데 세상으로부터 구별되는 제자의 특징은 본 단락 바로 앞에 위치한 팔복에 잘 드러나 있다.]
또한 위즈덤 종합강해에도 같은 원리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산상 수훈 가운데서 참된 제자가 행해야 할 빛과 소금의 역할을 팔복보다 우선순위에 두지 않으셨다. 그는 먼저 팔복을 가르치심으로 천국을 소유한 제자들이 갖는 내면적 특성을 강조하신 후에, 팔복을 소유한 제자들이 갖는 내면적 특성을 강조하신 후에, 팔복을 소유한 자들의 행위와 파급 효과에 대해서 강설하신 것이다. 이 사실은 내면적 특성을 소유하지 않고서는 빛과 소금의 삶이 절대로 불가능함을 나타낸다. 즉 빛과 소금의 삶은 천국의 규범인 내면적 특성을 소유하였을 때에만 비로소 성취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세상의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려면 반드시 팔복의 사람이어야 하고 게속 그 특성들을 유지해야 합니다.
다음으로 세상과 구별된 삶은 본문 뒤에 나오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나은 의를 보여주는 삶입니다. 스캇 맥나이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는..이다. 라는 표현에 감추어진 내용이 있다. 그것은 예수께서 자신의 제자들이...5:3-12절이 말하는 그 복이 있는 자들이며 또한 5:17-48과 이후의 내용에 나오는 순종하는 자들이기 때문에 그들이 소금과 빛이 될 것을 당연하게 여기셨다는 사실이다. ]
그러므로 우리가 세상의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려면 팔복의 사람이 됨은 물론이고 예수님이 율법의 계명들을 설명해주신 대로 행함으로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나은 의를 가져야 합니다. 그것이 세상의 소금의 역할을 다하는 삶입니다. 나아가서 그것이 마태복음 7:21절이 말한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삶이입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그렇게 살아가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우리는 세상과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의 소금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세상으로 보내셨습니다. 우리가 있어야 할 곳은 사막이나 산 속이 아닙니다. 세상입니다. 그러므로 중세 수도사들의 영성은 본받되 삶의 형태는 본받지 말아야 합니다. 즉 그들처럼 염세주의적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이에 대해 양용의 교사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세상의 소금이고 세상의 빛이라고 하였다. 이는 제자들의 삶이 세상과 구별될 뿐 아니라. 세상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제자는 세상과 무관하게 살아가는 자들이 아니라. 세상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살아간다. 그런데 그들은 세상과 관계를 맺는 데 있어서, 세상의 영향을 받는 자들이 아니라. 세상에 영향을 끼치는 자들이다.]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려면 세상 안에 있어야 합니다. 즉 세상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야 합니다. 그들과 살되 팔복의 사람으로, 그리고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나은 의를 가진 사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야 세상의 소금이 될 수가 있습니다.
해긴 목사님의 간증 속에 어던 분이 해긴 목사님에게 다음과 같은 도움을 요청했다고 합니다.
“목사님 제가 일하는 직장에서 유일하게 저 혼자만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러니 이 직장에서 나올수 잇도록 기도해 주세요”
그러나 해긴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권면했다고 합니다.
“아니요 그러지 마십시오. 당신이 선한 영향력을 발휘하지 않으면 그 직장은 참으로 부패한 곳이 될 것입니다. 계속 거기에 있으세요. 당신은 이 땅의 소금입니다. 그러니 계속 거기에 있으면 그곳을 짜게 만드는 소금이 되시기 바랍니다.”
옳습니다. 많은 이들이 국회가 썪었으므로 나는 정치인이 되지 않겟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곳에 소금이 필요한 것입니다. 소금 역할을 하려면 참된 신자들이 국회로 들어가야 합니다. 방송, 사업, 교육, 연예게계, 등 어느 곳이나 마찬가지 입니다. 소금이 되려면 그곳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실력을 갖고 닦아서 불의하고 부패한 세상의 각 분야로 들어가십시오. 그곳에서 소금의 역할을 하십시오. 그래서 그 단체가 썩어가고 부패해가는 것에 제동을 걸어야 합니다.
넷째로, 맛을 잃어 버리면 안됩니다.
본문은 사실상 경고에 가깝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절대로 맛을 잃어버리지 말라고 경고하고 계십니다.
마5: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이것은 우리처럼 바닷물을 말려서 소금을 얻는 곳에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입니다. 엄격하게 말하자면 소금은 맛을 잃을 수 없습니다. 소금은 염화나트륨(NaCl)은 완전한 화합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팔레스타인안에는 암염이 많습니다. 즉 소금기둥들이 있는데 비가오면 소금이 흘러내려 나중에는 소금은 다 빠지고 바위만 남습니다. 또한, 예수님 당시 팔레스타인에서 사용하던 소금은 염화나트륨과 더불어 상당량의 불순물을 포함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보관을 소홀히 하면 물에 잘 용해되는 염화나트륨 성분은 녹아 없어져 버리고, 불순물만 남는 경우들이 종종 있었습니다. 이런 흰 가루는 여전히 소금처럼 보이고 소금이라고 불리기도 하지만, 더는 짠맛을 낼 수 없는 무용지물이었습니다. 이런 소금을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이렇게 맛을 잃은 소금은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거름으로도 쓸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박에 버려져서 사람들의 발에 밟혔습니다. 슬프게도 이것이 오늘날 한국교회의 현실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대로 소금의 맛을 잃은 것은 팔복의 특성을 잃어버리고 그 뒤 산상수훈대로 살지 못하는 것을 듯합니다. 우리는 돈이나 명예나 건강보다 이 맛을 지켜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왜 소금의 맛을 지키는 것이 가장 중요한지 세 가지로 정리해서 설명해드리고자 합니다.
①맛을 잃으면 쓸모가 없습니다.
소금이 맛을 잃으면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본문에도 나타나 있지만 눅14:34-35절에도 이것이 더 잘 나타나 있습니다.
소금이 좋은 것이나 소금도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하나님은 믿는 자들이 팔복의 사람으로서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나은 의를 가지고 살아감으로 세상의 소금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맛을 잃어버리면 세상의 소금이 될 수가 없습니다.
물론 제사장이나 장로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처럼 그런 사람이 여전히 사회나 교계에서 자리를 차지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세상의 소금으로 쓰실수는 없습니다. 오늘날 그런 신자와 목사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그들 가운데는 하나님께 쓰임 받지 못할 뿐 아니라. 도리어 마귀에게 쓰임 받는 자들까지 있습니다. 많은 이들이 자신이 하나님을 위해 살고 있다고 착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맛을 잃은 자는 쓰지 않으십니다.
캠멜몰간 목사님의 글을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 의하면 영향력의 성격은 바로 그리스도적인 품성에서 즉 인간 됨됨이에서 발휘되는 영향력 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살아 있는 영향력과 그 영향력의 발휘는 생명 없는 사무적인 시도와는 크나큰 차이가 있는 것이다. 왕께서는 인간의 근본적인 존재 자체에서 시작하면서 너희는 ...이다. 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당신의 한 가정의 가장이라고 가정해 보자. 그러면 당신은 자녀들에게 무엇으로 영향을 끼치겠는가? 잘 되라는 말을 통해서인가? 그렇지 않다. 당신 자신의 됨됨이를 통해서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당신의 자녀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은-그들을 성장시키든 그들을 버려놓든 상관없이-바로 가장 깊은 곳에 형성되어 잇는 당신의 인격인 것이다. 이를 피할수 잇는 길은 없다. 만일 우리가 우리 자녀들에게 착해야 한다고 늘 말하면서도 우리 자신이 악한 상태에 있다고 가정해 보자. 그러면 아이들은 어떻게 되겠는가? 어쩌면 하나님의 은혜로-어떤 사람이 그들을 성장시켜둔다든가 그들을 이끌어준다든가 하여- 그 아이들이 착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 자녀들이 선하게 되기를 원한다면 우리가 먼저 선해지는 것이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우리의 영향력은 우리의 됨됨이에서 나오는 것이다.... 우리가 원하든 원치 않든, 우리의. 됨됨이는 우리가 세상에 끼칠수 있는 영향력의 성격을 결정짓는다.]
하나님은 우리의 외모나 조건을 보지 않습니다. 불꽃 같은 눈으로 팔복의 사람인가? 그리고 산상수훈대로 살려고 하는가를 보십니다. 이 두 가지가 없으면 하나님께서 전혀 쓸모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절대 맛을 잃지 않으므로 하나님게 쓸모 있는 사람, 그리고 하나님이 쓰실수 있는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②맛을 잃으면 구원을 받지 못합니다.
소금이 맛을 잃으면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습니다. 그래서 버림 받게 됩니다.
마5:13절에 “...아무 쓸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다.”
눅14:34-35절, 소금이 좋은 것이나 소금도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35 땅에도, 거름에도 쓸 데 없어 내버리느니라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하시니라.
당연하고 명백한 말씀입니다. 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라는 교리는 성경적인게 아닙니다. 그런데도 잘못된 교리에 왜곡되어 맛을 잃으면 버림받는다는 말씀을 들으면 왜곡되이 해석하여 맛을 잃은 소금이 버림받는다는 것은 즉 쓰임받지 못한다는 것이 구원하고는 상관이 없는 것이다. 라고 해석을 합니다.
본문의 구절은 그렇게 해석되지 않습니다. 여러분 소금의 맛이 팔복의 특성과 연관되는 것이고,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나은 의를 뜻하기 때문에 맛을 잃으면 쓰임 받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버림 받습니다. 천국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마5:20절) 그러므로 맛 잃은 소금은 버림받는다는 것이 쓰임 받지 못한다는 해석은 사람들을 지옥으로 끌고 가는 가르침입니다.
이 구절과 유사한 구절들을 보면 전후 문맥을 통해서 보면 구원을 받지 못하거나 버림받아 지옥에 떨어지는 것과 관련이 있게 나타나 있습니다.(막9:50,눅14:34) 그러므로 맛 잃은 소금이 버림받는다는 것은 단지 주님이 쓰시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그 영혼이 버림받는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은 한번 구원이 영원한 구원이 아니라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는 중요한 말씀입니다. 이 사실을 어떤 학자를 다음과 같이 해석하고 있습니다. (헤르만 리델보스)
[맛을 잃은 소금은 다만 박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제자들에게서 짠 영향이 방출되지 않는다면 그들에게는 천국에서의 장례가 없다. 밖에 버리워, 라는 문구는 이 문맥에서 대단히 의미심장한 것이다.(참조8:12, 눅13:25, 요12:31, 15:6) 이러한 의미에서 선한 행위는 참으로 천국에 들어가기 위한 조건이라고 할수 있다.]
라고 합니다. 소금이 맛을 잃는다는 것은 앞에 나오는 팔복의 특성을 잃어버리고 뒤에 나오는 산상수훈의 교훈대로 살지 못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 마7:13-14절에서 에수님은 그것을 생명으로 인도하는 좁은 문과 좁은 길에 비유하셨습니다. 오직 이 길만이 우리를 생명으로 인도합니다. 나머지 길은 넓은 길이고 멸망으로 인도합니다.
또 예수님은 마7:21절에서도 경고하고 있습니다.
“다만 내 아버지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런데 여기서 “아버지의 뜻은”산상수훈대로 사는 것을 말합니다. 그 뒤에 에수님은 또 이렇게 말씀합니다.
마7:22-23절에서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여기서 불법이란 율법의 계명들에 대해 해석해주신 주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는 것을 뜻합니다. 즉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나은 의가 없는 자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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