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을 너희가 깨달아 알게 될 것이다.”(요한 10,38ㄴ)
오늘 독서는 예레미야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타고난 온화한 품성으로 그저 평범한 삶을 살기를 원했던 예레미야는 하느님의 주신 예언자로서의 소명 때문에 ‘말씀의 고독한 예언자’, ‘비탄의 예언자’라 불릴 만큼 고난과 고통, 고독으로 점철된 생애를 살아간 예언자입니다. 그런 이유로 때로는 자신의 힘든 삶을 원망하기도 하지만, 하느님께 대한 경외심과 책임감으로 자신의 운명을 감내하고 살아간 예레미야 예언자는 그의 예언서 안에 7개의 고백록을 기록해놓았습니다. 오늘 독서의 말씀은 바로 그 예레미야의 고백록 가운데 마지막 7번째 고백록의 말씀입니다. 오늘 독서의 말씀 바로 그 이전에 예레미야는 이렇게 자신의 신세를 한탄합니다.
“주님이 말씀이 저에게 날마다 치욕과 비웃음거리만 되었습니다. ‘그분을 기억하지 않고 더 이상 그분의 이름으로 말하지 않으리라.’ 작정하여도 뼛속에 가두어 둔 주님의 말씀이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오르니 제가 그것을 간직하기에 지쳐 더 이상 견뎌 내지 못하겠습니다.”(예레 20,8ㄴ-9)
하느님의 말씀이 자신에게 치욕과 비웃음거리만이 되어버린 현실을 개탄하면서 하느님의 말씀을 저버리려고 작정한 예레미야가 다시금 그 말씀을 선포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아주 인상적입니다. 예언자는 그 이유를 이렇게 말합니다. ‘뼛속에 가두어 둔 주님의 말씀이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올랐다’ 그래서 그 불을 마음속에 계속 숨겨둘 수가 없어 선포할 수밖에 없다고 고백하는 예언자의 이 말은 하느님의 말씀의 힘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지를 드러내는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를 박해하는 현실은 보다 감당하기 힘들어지기 때문입니다. ‘마고르 미싸빕’ 예언자가 외치던 그 말, 이스라엘 백성을 벌하실 하느님의 징벌을 예고하며 ‘사방에서 공포가!’라고 외치는 예언자의 말을 들어 비아냥대는 사람들은 예레미야를 적대시하며 괴롭힙니다. 이에 예언자는 주님이신 하느님만을 바라보며 그 분께 간절한 마음으로 도움을 청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예언자가 겪게 되는 현실적 고통과 시련을 전하는 이 같은 오늘 독서의 말씀은 화답송의 시편의 말씀으로 보다 구체화되기에 이르는데, 시편의 저자는 이렇게 외칩니다.
“죽음의 오랏줄이 나를 두르고, 멸망의 급류가 나를 삼키며, 저승의 오랏줄이 나를 휘감고, 죽음의 올가미가 나를 덮쳤네.”
“곤경 중에 나 주님을 부르고, 하느님께 도움을 청하였더니, 당신 성전에서 내 목소리 들으셨네. 부르짖는 내 소리 그 분 귀에 다다랐네.”
오늘 독서와 화답송의 이 말씀을 읽다보면 우리 마음 안에 한 가지 의문점이 생겨납니다. 도대체 예언자는, 아니 성경에 등장하는 그 많은 하느님의 사람들은 그들이 처한 현실의 극한적 고통 속에서 어떻게 하느님 한 분만을 바라고 믿을 수 있었을까요? 물론 오늘 독서의 예레미야 예언자의 고백처럼 하느님의 말씀의 힘이 어쩔 수 없이 그를 예언자의 직분으로 이끌었다할지라도 그 예언의 직분으로 인해 겪게 되는 그 큰 고통과 고난의 상황을 어떻게 극복해 낼 수 있었을까? 우리의 현실에 비추어볼 때, 우리는 너무도 자주 견디기 힘든 상황이 나에게 주어질 때, 하느님을 원망하고 나에게 그런 시련을 주신 그 분을 거부하기까지 하는 우리들로서는 예언자의 이 모습이 생경하게 느껴지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예언자들은 도대체 어떻게 그 상황 속에서도 하느님만을 믿고 바랄 수 있었을까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오늘 복음의 말씀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이번 주간 계속해서 들려지는 요한복음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들을 향한 예수님의 말씀을 전하는 복음의 말씀은 하느님과 특별한 관계를 지니신 예수님 자신에 대한 분명한 자기 인식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는데, 예수님은 이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을 너희가 깨달아 알게 될 것이다.”(요한 10,38ㄴ)
예수님의 이 말씀에 답이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아버지 안에 계시고 아버지 역시 예수님 안에 계신다는 사실, 곧 예수님은 하느님과 언제나 하나로 완전히 일치하여 언제 어디서나 아버지 하느님과 하나의 모습으로 계신 분이라는 사실. 둘이 아닌 하나. 하나와 하나가 만나 서로 다른 둘이 하나가 되는 이 진리를 삶으로 보여주신 예수님. 그 진리는 바로 하느님의 말씀에 온 정신을 기울이고 마음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는 예수님의 삶의 모습에서 비롯되며, 이로써 하느님과 온전한 하나가 되는 예수님 자신의 모습에 관한 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 사실이 우리가 하느님의 일을 하며 겪게 되는 모든 어려움들에 직면하여 잊지 말아야 할 한 가지 사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오늘 예레미야 예언자가 비탄에 빠져 고백한 것처럼 우리 역시 하느님의 일을 하며 많은 어려움과 고통을 겪게 됩니다. 아무도 도와주지 않고, 도와주기는커녕 오히려 이런저런 악의를 품은 말들로 상처만 주는 사람들, 좋은 뜻에 선의로 동조해 주기는커녕 이러쿵저러쿵 말만 해대며 도움은커녕 방해만을 일삼는 사람들, 마치 복음의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처럼 또, 독서의 예언자를 박해하는 사람들처럼 악의로 가득 찬 혀로 우리 마음에 돌을 던지려 하는 사람들로 둘러싸인 우리의 현실은 결코 녹록하지 않습니다. 아니 녹록함을 넘어 하느님의 일을 버리고 포기하고 싶은 유혹이 들 정도입니다.
그러나 그러할 때에 오늘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특별히 오늘 화답송의 시편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되뇌십시오. 아버지이신 하느님은 곤경 중에 있는 우리의 울부짖음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우리의 목소리를 들으시고 그에 응답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힘이신 그 분께서 위험에 처해있는 우리의 반석이 되어주시고 우리의 산성이 되어 우리를 지켜주시며 우리의 구원자가 되어주신다는 화답송의 말씀처럼 우리가 오늘 복음의 예수님이 보여주신 하느님과 하나가 되는 삶을 살아간다면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구원이 되어주십니다. 하느님과 하나 되는 삶, 그것은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신 하느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온 정신과 마음을 다하며 우리가 들은 말씀을 삶으로 살아가도록 노력하는 것입니다. 그 때에 비로소 하느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영이며 생명이 될 것입니다. 영이며 생명인 그 말씀에 우리의 마음을 두며, 여러분 모두가 그 말씀의 실천과 생활화를 통해 하느님과 하나 되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그리하여 결코 녹록치 않은 하느님의 일을 하는 데에 하느님 그분으로부터 힘을 얻는, 하느님이라는 든든한 산성 안에서 하느님과 함께 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당신 말씀은 영이며 생명이시옵니다. 당신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나이다.”(요한 6,63.68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