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폭력 대화’를 공부하셨다고 해서 뵙고 싶었습니다.”
학원 원장은 나를 면접보고 싶었던 이유로 비폭력 대화에 시선이 머물렀다는 얘기를 하셨다. 아이들을 위한 마음에 열정이 앞서다 보니 아이들과 갈등이 생기기도 하고 아이들도 자신도 서로 상처를 받았다면서 말이다. 그래서 나는 일주일에 세 번씩 공부가 싫다는 아이들을 만나게 되었다.
“싫어요.!”
뭘 공부하자고 하면 고개를 저으며 ‘싫어요!’ 라는 말만 반복하는 A. 예전 같았다면 나는 속으로 ‘내가 만만해 보이나?’ 혹은 ‘버릇없이 구는 아이네.’라고 단정지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아들 둘을 키워본 나는 문득 ‘A가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싫어요~”
라고 호응해주며 무엇이 힘들까 살펴보니, 아이의 손보다 작은 몽당 연필이 눈에 띄었다.
쓰는 게 귀찮은가 싶어, A는 단어를 써서 외우는 방식 대신 외운 것을 구술 테스트로 바꾸었더니 금방 다 외우고 간다. 여전히 “싫어요.”라고 말하지만 웃는다.
단 1분도 집중을 못한다는 B. 학원도 자주 빠지는 녀석이라고 들었다.
“B야, 휴식이 필요하니? “ 녀석은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조용히 물에 타 먹는 비타민 하나를 쥐어 주었다. B가 작은 목소리로 ‘”전 집중력이 없어서…” 라고 말하는 걸 들었을 때,
“B야, 너는 집중력이 없는 게 아니야. 재미있는 생각이 많이 나는 거지!” 라고 말을 한 날
B는 1시간도 넘게 공부를 하고 갔다. 물론 그 날이 아직까진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지만.
입이 매일 나와있던 C도, 말 한 마디 없이 있는듯 없는 듯 했던 D도 잘 웃고 한 마디 씩 하게 되는 모습이 기뻤다. 나는 단지 그 아이들에게 물어 보았을 뿐이다.
“너는 지금 이걸 하는 게 힘든 거니?”
“네가 많이 졸리는구나. 혹시 어제 밤에 잠을 못 잘 만한 일이 있었던거야?”
“너는 지금 즐거움을 느끼는 시간이 필요하니?”
우리는 누군가에게 무얼 물어보면 그걸 꼭 들어줘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래서 물어보는 걸 두려워 하는 게 아닐까? 내가 보는 모든 아이들은 다 공부를 잘하고 싶어한다. 단지 지금 이 순간 공부에 집중하기 어려운 이유가 있다. 우리는 우리가 어른이라는 지위를 이용해서 아이들의 의사를 물어 보지도 않는 갑질을 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나는 아이들에게 어떤 단원을 풀어보거나 단어를 외우라고 할 때, 아이들이 ‘예’라고 하지 않는 것을 인정해 주고 싶었다. 그럼 단어 외우기 전에 문법 문제를 먼저 풀고 싶은 지, 독해를 먼저 하고 싶은 지, 아이들에게 작은 자율성을 인정하는 것만으로도 아이들은 자신의 학습에 훨씬 동기 부여를 잘한다. 공부 자체가 다 싫은 아이들에게는 그 사정을 물어본다. 그리고 말해준다.
“네가 쉬고 싶은 건 당연해. 휴식은 중요한 거야”
“네가 지금 게임을 하고 싶은 건 당연해. 재미있는 걸 하고 노는 건 중요한 거야”
그리고 휴식과 공부 모두 중요한 일인데, 휴식도 공부도 다 하려면 지금은 어떤 선택을 하는 게 너의 욕구를 채울 수 있을지 물어본다. 모든 아이들은 스스로 선택한 것에는 책임을 지려고 한다.
다닥다닥 붙은 학원 강의실 사이에서 우리 반은 자주 웃고 말소리가 들려 원장샘이 늘 문을 닫아준다. 이 문장에 대한 너의 의견은 어떠니? 라는 질문 하나에 아이들은 의미 없는 수동태 공식이 아닌 능동과 수동의 차이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말하게 된다. 나도 안다. 원장샘은 우리 반을 포기 했기 때문에 못마땅하지만 봐주는 거라는 걸. 아이들의 의사를 물어보면 교실이 시끄러워지고 진도가 늦어지거나 학습량이 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공부하는 당사자들의 의견을 물어보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비폭력적인 소통을 배우고 아이들과 연결되는 기쁨을 누리게 된다. 우리가 공부에서 배워야 하는 것이 바로 평화적인 사고와 소통이라면, 나는 조금 덜 공부하고 아이들에게 조금 더 많이 물어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