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설에 중국 고전을 인용하는 일이 많아지고 있다. 중국의 부상에 따른 세계적 현상이다. 어떤 문장이 인용에 좋을까. 중국인에게 국학대사(國學大師)로 추앙되는 지셴린(季羨林·1911~2009) 전 베이징대 부총장은 중국의 명문 148개 구절을 엄선했다. 그는 “이를 다 외우면 경계가 한 단계 올라간다. 문학 방면에 그치지 않는다”고 말했다.
교양있는 중국인은 모두 암송하는 문장들이다. 한·중 양국은 연간 1000만 명이 왕래한다. 중국인을 만났을 때 읊조릴 수 있도록 독음과 함께 현대 중국어 발음을 덧붙인다.
11 人非聖賢 孰能無過 過而能改 善莫大焉 『좌전(左傳)』
(인비성현 수능무과 과이능개 선막대언/런페이성셴 수넝우궈 궈어넝가이 산모다옌/rén fēi shèngxián, shú néng wúguò? Guò ér néng gǎi, shànmòdà yān)
사람은 성인이 아닌데 누가 잘못을 저지르지 않겠는가. 잘못을 저질렀어도 고칠 수 있다면 그보다 더 나을 수 없다.
-실수는 누구나 할 수 있다. 문제는 반복이다. 제갈량은 맹획을 일곱 번 잡았지만 일곱 번 풀어줬다.
12 知人者智 自知者明 『노자(老子)』
(지인자지 자지자명/즈런저즈 쯔즈저밍/zhīrénzhě zhì zì zhì zhě míng)
남을 아는 자는 지혜롭다하고 자신을 아는 사람은 명철하다 한다.
-용인술의 기본이다. 명철은 지혜를 넘어서는 통찰력이다. 자신을 이기는 사람을 강하다고 한다(自勝者强)는 말로 이어진다.
13 信言不美 美言不信 『노자(老子)』
(신언불미 미언불신/신옌부메이 메이옌부신/xìn yán bù měi měi yán bùxìn)
믿음직한 말은 아름답지 않고 아름다운 말은 믿음이 가지 않는다.
-신뢰의 적자는 가식적인 말에서 출발한다. 충성스런 말은 귀에 거슬린다는 충언역이(忠言逆耳)와 일맥 상통한다.
14 禍兮福之所倚 福兮禍之所伏 『노자(老子)』
(화혜복지소의 복혜화지소복/훠시푸즈쒀이 푸시훠즈쒀푸/huò xī fú zhī suǒ yǐ fú xī huò zhī suǒ fú)
화는 복이 의지하는 바이고 복은 화가 잠복하는 곳이다.
-일희일비하지 말라는 가르침이다. 화복의복(禍福倚伏)으로 줄여 쓴다. 고난 속에서 희망을 찾으라는 메시지다.
15 合抱之木 生於毫末, 九層之臺 起於累土, 千里之行 始於足下 『노자(老子)』
(합포지목 생우호말 구층지대 기어루토 천리지행 시어족하/허바오즈무 성위하오모 쥬청즈타이 치위레이투 쳰리즈싱 스위쭈샤/héb ào zhī mù shēng yú háomò, jiǔ céng zhī tái qǐ yú lèi tǔ, qiānlǐ zhī xíng shǐ yú zúxià)
아름드리 나무도 털끝 같은 씨앗에서 나오고, 높은 누대도 한무더기 흙쌓기에서 시작되고, 천리길도 한 걸음에서 시작된다.
-시작은 미약하나 그 끝은 창대하리라는 성경 구절과 일맥상통한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지난해 6월 평화공존 5원칙 선언 60주년 기념식에서 인도 격언 “물방울이 모여 내를 이루고 벼이삭이 모여 한다발이 된다”와 함께 이 구절을 인용했다.
16 敏而好學 不恥下問 『논어(論語)』
(민이호학 불치하문/민어하오쉐 부츠샤원/mǐn ér hàoxué bùchǐ xiàwèn)
영민하고 배우기를 좋아하며 아랫사람에 묻기를 부끄러워하지 않다.
-공자와 동시대 인물인 공문자(孔文子)의 생활태도다. 배움에는 위아래가 없다. 인문(人文)의 본질이 배움이요 소통이란 의미다.
17 己所不欲 勿施於人 『논어(論語)』
(기소불욕 물시어인/지숴부위 우스위런/jǐ suǒ bù yù wù shī yú rén)
내가 하고자 하지 않는 바를 남에게 시키지 말라
-역지사지(易地思之)는 갈등 해결의 지름길이다. 공자의 행동철학은 용서할 서(恕)로 요약된다. 서는 여심(如心)이다. 분쟁이 발생하면 공자의 지혜를 떠올리자.
* 소아정신과지나영마음이흐르는대로 p290-292
나의 길을 넘어 초월의 길로
최근에 고등학생인 조카가 “요즘은 대개 한 반의 친구들 하나하나를 경쟁상대로 보지, 서로 도와주고 위해주어야 할 상대로 보는 경우는 드물다” 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 깜짝 놀란 적이 있다. 나는 아무리 사회가 변했어도 부모님들이나 그렇게 생각하지 아이들은 그러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사회적인 영향으로 아이들까지도 친구라는 사람 그 자체보다는 점수나 차를 더 중요하게 본다는 점이 안타까웠다. 나는 ‘사람’이 아닌 다른 가치를 앞세우는 이의 삶은 궁극적으로 ‘잘 산 삶’이라 볼 수 없다고 생각한다. 억만장자가 되든, 노벨상을 타든 그 과정에서 사람을 존중하고 위하지 않고 그저 자신의 목표를 이루는 데 쓰이는 ‘도구’로만 여겼다면 그 삶의 마지막에 섰을 때 과연 무엇을 얻었고, 또 무엇을 이루었다고 할 수 있을까.
지금껏 내 삶을 살아오면서, 그리고 수많은 나의 환자와 가족들의 삶을 보면서 깨달은 점이 하나 있다. 우리 삶의 궁극적인 목적은 결국 ‘사람을 위하는 것’이라는 진리다. 그리고 이것은 첫째로는 나를 위하는 것이고, 둘째로는 나 이외의 다른 사람을 위하는 것이다. 나를 마구 희생하면서 남을 위할 순 없고(그럴 필요도 없으며), 남을 마구 희생하면서 나를 위할 수도 없다(그래서도 안 된다). 참된 나를 실현하는 과정 속에서 그저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과 서로 도와가며 살아가는 것이 진실한 삶이 아닐까 한다. 혼자 가는 사람은 빨리 가고 함께 가는 사람은 멀리 간다는 말처럼, 우리의 인생은 마라톤이므로 함께 가야 함이 맞다. 그러다 보니 무슨 일을 놓고 고민할 때에는 일단 ‘사람을 존중하는 것’을 우선으로 두고 고민하면 더 좋은 답이 나오는 경우가 많다.
남편의 경우 여러 파트너와 함께 꽤 큰 개인 병원을 운영하다 보니 병원 재정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데, 그럼에도 남편이나 나나 절대로 재정 혹은 돈을 환자보다 앞세우면 안 된다고 믿는다. 이것은 의사로서 우리의 철칙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두 가지 유사한 시술이 있는데 결과는 별 차이가 없는데도 보험 수가가 두세 배로 나오는 것들이 있다. 대체로 새로운 기술을 쓴 시술들이 비싼 편인데, 비싸더라도 또 그 나름대로 아직 잘 알려지지 않은 위험성이 있을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수익만을 고려해 수가가 더 높은 시술을 하라고 환자를 재촉해선 안 된다는 것이다. 특히 환자의 건강과 생명을 다루는 의사는 더더욱 환자에 대한 측은지심과 그 사람을 존중하는 마음을 가지고 환자 그 ‘사람’을 위한 결정을 내려야 한다. 이는 의사뿐만 아니라 다른 직업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새로운 아이디어로 사업을 크게 일으킨 창업자들을 보면 어떤 상품으로 돈을 많이 벌겠다고 생각한 사람들보다, 그 상품으로 사람들의 불편을 개선해주고 싶었다는, 즉 ‘돈’보다는 ‘사람’을 먼저 생각한 창업자들이 더 성공한 경우가 많다. 그렇게 만들어진 상품은 보란 듯이 더 많이 애용되어 재정적인 성공을 가져다주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