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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청주성이 탈환되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1536~1598)가 1592년 임진왜란을 일으켰다. 전쟁 원인으로는 도요토미가 조선 도자기를 탐을 내서 등 여러 설이 있으나 가장 유력한 것은 영토 획득설이다.
도요토미는 전쟁을 해서 획득한 영토를 다이묘(大名·지방영주)와 무사들에게 나눠주고 이들은 그 같은 은전 때문에 주군인 도요토미에게 충성을 해왔다.
그러나 일본 전역을 통일하게 되자 이같은 메카니즘이 작동되지 않게 됐다. 그래서 영토를 외국, 즉 조선에서 획득하려고 했다는 설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을 침략하기 직전 이런 말을 한 것으로 번역된 일본 논문에 쓰여 있다.
"일(조선침략 지칭)이 순조롭게 달성되면 새로운 정복에 의해 회득된 諸國, 봉록, 유리한 영지를 줄 것이며 너희는 많은 즐거움 속에서 여생을 보낼 것이다."
실제 도요토미는 명나라와 화친회담을 갖게 되자 7가지 요구를 하게 되고 그 안에 조선 4도 할양론도 들어 있다. 이때의 4도는 대체로 한강 이남을 의미한다. 실록에도 "급기야는 땅을 할양(割讓)하고 쌀을 바치는 일로 제도(諸道)의 백성들에게 공갈하고 있으니"라는 표현이 있어, 이를 확인하고 있다.
이밖에 일본천황 후궁으로 명나라 황녀를 보낼 것, 조선 왕자와 신하를 볼모로 보낼 것 등을 요구했다. 결국 이같은 요구 사항이 수용되지 않으면서 정유재란이 일어난다. 도요토미의 과대 망상증이 임진왜란을 일으켰다는 설도 있다. 도요토미는 1586년 6월 쓰시마 도주 '오요 시시게'에게 보낸 편지를 이렇게 적었다.
"일본 지역은 동으로 간토(동경일대 지역)까지 모두 장악하여 천하를 평정하였다. 앞으로 규슈(일본 최남단)에도 군대를 보내려 한다. 그때 조선도 (협조)병력을 파견하도록 (조선에)명령을 해두어라."
이 문장에서는 두 가지가 읽혀진다. 하나는 일본을 통일하기 직전에 있다는 우쭐함이고, 또 하나는 조선을 쓰시마의 속국으로 착각하고 있다는 점이다. 도요토미는 자신을 '천황의 아들'이 아닌 '일륜자'(日輪子), 즉 태양의 아들이라고 칭하기도 했다.
임진왜란 발발 2년 전인 1590년 조선통신사 일행이 토요토미를 만났다. 이때 토요토미는 조선국왕에게 전해 달라며 이런 내용의 편지를 쓴다.
"내가 태아였을 때 나의 어미가 일륜이 태내에 들어오는 꿈을 꿨습니다. 점쟁이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햇빛이 미치는 바가 비추어 임하지 않는 바가 없다. 장년에 반드시 팔방에 인덕을 듣게 하고 사해에 위명을 입을 것이다.'
1592년 4월 13일 왜군이 부산 앞바다에 새까맣게 출현됐다. 그로부터 보름후 충주 탄금대에서 관군 8천여명이 몰살했고, 5월 2일에는 청주성 함락됐다.
'영의정 심순택이 아뢰기를, (…) 오래도록 잊지 않는 뜻과 충성에 보답하고 절개를 장려하는 훌륭한 덕에 대해 참으로 흠모하여 마지 않는데 내년은 바로 옛날의 그 해입니다. 전례대로 내년 봄에 제사를 지내주는 것이 어떻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고종실록>
이때가 임진왜란 발발 5갑(300년·1892)이 되는 해다. 금년은 420년이 지난 7갑이 된다. 청주성도 그해 음력 8월 1일에 탈환됐다. 역시 7갑 전이다.
악명높은 구로다와 청주성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임진왜란 발발 1년 전부터 조선을 협박했다. 일본 승려사신 겐소(玄蘇·?~1612) 임란전 조선을 자주 찾았고, 강화회담에도 참여했던 인물이다. 일종의 직업 외교관으로 볼 수 있다. 겐쇼는 임란 1년 전 일본통신사 경험이 있는 김성일에게 이런 말을 했다.
"중국에서 오랫동안 일본을 거절하여 조공을 바치러 가지 못하였습니다. 평수길(平秀吉·도요토미)이 이 때문에 분하고 부끄러운 마음이 쌓여 전쟁을 일으키고자 합니다. 만약 조선에서 먼저 주문하여 조공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다면 조선은 반드시 무사할 것이고 일본 백성들도 전쟁의 노고를 덜게 될 것입니다."-<선조수정실록>
겐쇼는 이어 "옛날 고려가 원(元)나라 병사를 인도하여 일본을 쳤었습니다. 이 때문에 조선에 원한을 갚고자 하니, 이는 사세상 당연한 일입니다"라고 노골적인 협박을 했다.
외교적인 언사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왜인들이 자주 드나들고 많이 거주했던 부산에서는 임란 발발 1년전 이런 현상이 나타난 것으로 실록이 적었다.
'이후로는 해마다 조공오던 왜선이 다시 오지 않았고, 관(館)에 머물던 왜인이 항상 수십 명이었는데 점차 일본으로 되돌아가 임진년 봄에 와서는 온 왜관이 텅 비게 되었다.'-<선조실록>
대규모 전쟁을 도발하기 직전, 자국민을 모두 철수시킨 것으로 볼 수 있다. 지금부터 420년 전(7갑)인 1592년 4월 13일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왜군이 부산 앞바다에 출현했다.
그러나 당시 부산진은 이것이 외침, 즉 임진왜란의 서막인지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조경남(趙慶男·1570∼1641)은 '난중잡록'의 한 부분을 이렇게 썼다.
'13일 새벽 안개가 자욱한 기회를 타서 곧장 부산(釜山)으로 쳐들어 왔다. 그때 첨사 정발(鄭撥)은 절영도로 사냥을 나가 있었다. 처음에는 조공 오는 왜인이라고만 생각하고 걱정거리로 여기지도 않았는데, 잠시 후 병선이 무수히 몰려오는 것을 보고야 급히 돌아와 성으로 들어갔다.'-<난중잡록>
난중잡록은 계속해서 '성문이 겨우 닫히자 왜적들은 이미 상륙하여 성을 백 겹으로 포위하였으며, 얼마 안 가서 성은 함락되었고 정발은 죽었다'라고 기록했다.
왜군은 우리고장 청주에 묘소가 있는 송산현을 동래성에서 살해하고 3갈래로 나눠져 북상했다.
이중 구로다가 이끄는 제 3진이 창원-성주-금산-영동-옥천-보은-청주 방향으로 움직였다. 전회에 신립이 이끄는 정부군이 충주 탄금대에서 8천명 대부분이 몰살당한 날이 4월 28일이었다고 밝힌 바 있다.
공교롭게도 이날 충북의 최남단인 황간과 청산도 구로다가 이끄는 왜군들에게 분탕질을 당하고 화염에 휩싸였다. 구로다가 이끄는 왜군은 그로부터 나흘 뒤인 5월 2일 보은, 회인을 거쳐 청주에 들어닥쳤다.
본명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는 당시 25살 나이로 1만2천명을 이끌고 청주를 거쳐 황해도까지 올라갔다. 그는 1597년 정유재란 때도 다시 침입, 조선인 코를 가장 많이 베어가 도요토미에게 진상했다.
그는 임란 종전 후 전공 대가로 50만석의 대영지를 받았다. 그런 구로다의 군대가 5월부터 7월말까지 3개월 가량 청주성을 점령했었다.
되레 의병 모집을 방해하다, 청주성 관군
왜군이 1592년 5월 2일 보은, 회인을 거쳐 청주에 들이닥쳤다. 5월 2일이면 임진왜란이 발생한지 19일 밖에 안 되고, 또 우리고장 황간, 청산이 화염에 휩싸인지 나흘이 지난 시점이다.
게다가 관련 사료를 보면 왜군은 보은, 회인, 청주를 단 하루만에 주파했다. 이는 당시 청주성에서는 관군과 왜군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없었음을 의미한다. 왜군 북상로 주변의 관군은 모두가 달아났다. 왜군은 사실상 청주성에도 무혈입성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충청도 병마절도사는 신익이라는 인물로, 청주읍성에 머무르고 있었다. 실록에 이를 엿볼 수 있는 내용이 등장한다.
"전쟁이 일어난 이후 패전한 장수들 중에는 신익(申翌)보다 더한 자가 없습니다. 당초 한 도의 많은 군사를 거느리고 청주에 머무르면서 왜적이 나타나기도 전에 허겁지겁 먼저 달아나서 허다한 군량과 병기를 모두 왜적의 손에 넘어가게 하였고 용인(龍仁)에 이르러서도 또다시 앞서 달아나 수만 명의 군사가 일시에 무너져 흩어지게 만들었으니..."-<선조실록>
청주성은 이후 3개월 가량 왜군의 수중에 놓이게 된다. 이때 관군은 미호천 서쪽으로 퇴각해 왜군과 대치 상태에 들어갔다. 당시 충청도관찰사였던 윤국형이 쓴 '문소만록'에는 이런 내용이 나온다.
"충청도 방어사 이옥은 당시 연기 동쪽에 있는 나루에 진을 치고 있었는데, 얼마 안 되어 영규가 서문(西門) 밖 빙고현(氷庫峴)으로 나가 진을 치니..."
인용문의 연기 동쪽은 청주에서 보면 미호천 서쪽이 된다. 방어사는 병마절도사 바로 밑의 계급으로, 지금으로 치면 부사령관 쯤이 된다. 그리고 빙고현은 지금의 모충동 고개를 말한다.
관군과 왜군의 대치하는 동안 조헌과 영규대사는 의병을 모집했다. 그 과정에서 관군 지휘부와 조헌 등 의병 사이에 갈등이 자주 일어났다. 관군이 사후 문책과 전공을 노골적으로 의식했기 때문이었다. 다음은 '은봉전서'의 내용이다.
"윤선각은 조헌이 공을 세우면 관찰사인 자기에게 돌아올 문책을 우려하여 고의로 의병에 가담한 자의 부모처자와 의병장을 도와준 수령를 감옥에 감금하여 조헌의 의병모집을 방해하였다."
은봉전서는 조선 중기의 유학자인 안방준(安邦俊·1573~1654)의 저서이다. 선조수정실록에도 "그러자 순찰사와 수령이 관군에게 불리하다고 여겨 갖가지 방법으로 (모병을) 저지하고 방해하였다"라는 표현이 보인다.
그러나 그 과정에도 의병들은 청주읍성을 탈환을 위해 속속 청주 인근에 모여들었다. 청주읍성 주변에 가장 먼저 진출한 의병은 영규대사로, 안심사를 거쳐 지금의 모충동 고개에 진을 쳤다. 이때가 1592년 7월 15일이다.
다음은 조헌으로 7월 4일 거병을 한 끝에 같은 달 29일 영규대사가 진을 치고 있는 모충동 고개에 합류했다. 연려실기술은 조헌 의병이 기병하던 모습을 "7월 4일에 깃발을 들고 북을 울리며 청주로 진군하니 그 군사가 1천7백명이었다"라고 적었다.
이밖에 박춘무도 조헌과 같은 7월 4일 청주 사주면 복태리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복태리는 지금의 청주 복대동을 말한다.
남편이 아내를 팔고, 청주성 1년후 참상
임진왜란 청주성 전투의 시작에 대해서는 음력 8월 1일과 2일로 약간은 엇갈린다. 그러나 1일 시작됐다는 내용이 보다 많다. 이날의 의병 공격은 3개 방향에서 동시에 시작됐다. 조헌과 영규대사의 연합 의병은 서문을 공격했다.
반면 청주 부모산에 진을 치고 있었던 박춘무 의병군은 남문을 공격했다. 그리고 연기 쪽으로 퇴각해 있었던 방어사 이옥의 관군은 미호천을 건너와 청주읍성 북문을 공격했다.
이날 전투가 치열했는지 여부는 사료마다 표현이 다소 엇갈린다. 선조실록은 "이날 밤 적이 화톳불을 피우고 기(旗)를 세워 군사가 있는 것처럼 위장하고 진영을 비우고 달아났다"고 적었다.
반면 이긍익(李肯翊·1736∼1806)은 연려실기술에서 "이날 밤에 적이 저희들의 시체를 불태웠는데, 3일 동안이나 꺼지지 않았다. 적은 북문(北門)으로 빠져 도망쳐 달아났다"라고 서술했다.
임란 발발 직후 충청도관찰사를 역임한 윤국형(尹國馨·1543~1611)은 문소만록에서 "이리하여 8월 1일에 크게 싸워서 비록 적의 머리를 베는 공은 세우지 못했지만 적도들이 화살과 총탄에 많이 맞아 그 형세가 매우 고립되었다. 이튿날 새벽에 적은 무리들을 다 이끌고 도망했다"라고 표현했다.
전과가 다소 엇갈리나 한 가지 공통적인 표현이 있다. 약간의 차이는 있으나 세 사료 모두에서 '왜군이 청주성 전투가 있던 그날 밤에 야음을 틈타 도주했다'는 내용이 공통적으로 관찰되고 있다.
의병과 관군은 청주성 전투가 끝난 후에도 또 다시 티격태격 해야만 했다. 청주성 안에 남겨져 있던 군량미 때문이었다. 조헌은 굶주리고 있는 청주 백성들에게 나눠주자고 했으나 방어사 이옥은 이를 반대했다. 선조실록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조헌이 성에 들어가니 창고의 곡식이 그대로 있었다. 방어사 이옥(李沃)이 와서 보고 말하기를 '이것을 남겨두어 적이 다시 점거하게 할 수 없다.' 하고 모두 태워버렸다."
비록 청주성을 탈환했으나 충청도를 포함한 전국민의 생활상은 처참함 그 자체였다. 당시 충청도관찰사로 있었던 윤국형은 문소만록을 또 이렇게 적었다.
"임진년 난리 후로 백성들이 뿔뿔이 흩어져서 비록 대가 세족이라도 모두 생업을 잃고 거지가 되어 돌아다녔으며, 여자들은 신분의 높고 낮음에 관계없이 적들에게 몸이 더럽혀진 자가 몹시 많았다. 시체는 들에 가득하고 매장된 것은 거의 없었다. 아비가 자식을 팔고 남편이 아내를 팔았으며…'
문소만록은 계속 해서 "계사년 봄에는 사람들끼리 서로 잡아먹고 시체를 쪼개어 앞을 다투어 먹었으며, 골육지간끼리도 서로 죽이는 자도 있었으니, 우리 동방 변란의 참혹함이 오늘과 같은 때는 없었다"라고 기술했다.
계사년은 임진왜란 발발 1년 후인 1593년을 말한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임란 후의 농토는 거의 황폐화됐다. 역시 문소만록은 이렇게 적었다.
"중외의 들판에는 쑥대만 우북하고, 모 심은 곳이 3분의 1도 안 되어 흉년이나 다름이 없었다. 굶주리고 병들어 죽은 자가 반이 넘었기 때문에 김을 맬 사람이 없어서 가을에 수확할 것이 없었지, 하늘이 풍년이 들지 않게 한 것은 아니었다."
임란 육전의 최초 승리일까, 청주성전투
청주성 전투에는 '임진왜란 최초의 육전(陸戰) 승리'라는 수식어가 자주 따라 붙고 있다. 임진왜란 청주성 전투는 1592년 음력 8월 1일에 있었다.
그러나 청주성 전투를 임진왜란 최초의 육전 승리로 보는데는 다소 무리가 있다. 충남 금산 진산면에는 이치대첩비가 존재한다. 권율은 그해 음력 7월 8일 금산 이치(梨峙·배재)에서 왜군과 싸워 승리했다.
규모의 차이는 있겠지만 이보다 먼저 승리한 전투가 있다. 이른바 경기도 양주 해유령(蟹踰嶺) 전투로, 1592년 5월 16일에 있었다. 실록에 관련 내용이 등장한다. 당시 전투를 지휘한 인물은 신각(申恪·?∼1592)이다.
'마침 응원하러 온 함경병사 이혼을 만나 군사를 합쳐 진을 결성했는데, 여염에 흩어져 약탈하는 왜병을 양주의 게재(蟹嶺)에서 요격하여 패배시키고 70급을 참수하였다. 왜적이 우리 나라를 침범한 뒤로 처음 이런 승전이 있었으므로 원근에서 듣고 의기가 용동하였다.'-<선조수정실록>
인용문에 등장한 '게재'는'해유령'과 같은 지명이다. 어류 '게'를 한자로 쓰면 '蟹'(해)가 된다. 실록 다른 곳에도 숫자가 다소 다르나 비슷한 내용이 등장한다.
'신각(申恪)은 사력을 다하여 외로운 군사를 이끌고 격전하여 사졸(士卒)에 앞장서 일당백으로 곧장 적의 소굴을 짓밟아서 80명의 목을 베어 바쳤으나….'-<선조실록>
그러나 신각은 공을 인정받지 못하고 전란의 와중에 되레 칼에 엎드려 자살하는 '복검'(伏劍)을 당한다. 앞 인용문의 '바쳤으나…' 뒤에는 이런 문장이 이어진다.
'주첩의 공은 받지 못하고 도리어 복검의 죽음을 당했으니, 사람들은 모두 원통해 하기를 "군사 전체를 패몰시킨 경우도 은사를 입지 않은 자가 없는데, 신각만은 무고하게 죽었다" 합니다.'-<선조실록>
신각의 억울한 죽음은 '허위 보고'에서 비롯됐다. 신각은 해유령 전투 이후 '이양원'이라는 인물을 따라 산골로 숨어들었고, 이후 외부와의 연락이 끊어졌다.
그러자 김명원이라는 인물이 '신각이 이양원을 핑계대고 도망쳤다'는 보고를 올리면서 군법 위반으로 현장에서 복검형을 당했다. 선조가 그날 오후 잘못된 보고임을 알고 사형 중지를 하명하나 이미 늦은 뒤였다.
'선전관이 떠나고 난 뒤에 첩서가 이르렀으므로 상이 뒤따라 선전관을 보내어 중지하도록 하였으나 미치지 못하였다. 신각이 비록 무인이기는 하나 나라에 몸바쳐 일을 처리하면서 청렴하고 부지런하였는데, 죄없이 죽었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원통하게 여겼다.'-<선조수정실록>
우리고장 인물인 조헌은 임진왜란 발발 가능성에 대한 상소를 올리고, 주변 관리들에게는 성벽 보완 등 전쟁 대비를 집중적으로 독려한다. 이때 조헌의 독려를 실천한 인물은 신각이 유일하다.
'신각은 그(조헌 지칭) 말을 옳게 여겨 기계(器械)를 대대적으로 수리하고 성내에 봇물을 끌어들여 큰 못을 만들었다. 뒤에 왜란이 일어나자 이정암이 성을 지켜 온전할 수가 있었으므로 고을 사람들이 신각이 사전에 준비한 공로를 추모하여 아울러 비석을 세워 그 공을 기렸다.'-선조수정실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