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아일보|오피니언 입력 2021-03-12 03:00
‘리더십의 상징’ 한번 선장은 영원한 선장[김인현의 바다와 배, 그리고 별]〈46〉
김인현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선장
선장이 되려면 갑종선장(1급 항해사)이라는 국가공인면허가 반드시 필요하다. 그리고 1등 항해사 경력이 4년 정도 요구된다. 선박과 선원과 화물을 책임지고 거친 바다를 헤쳐 나가며 항해를 완성할 리더십을 보여줄 때 선장으로 진급된다.
이렇게 얻은 선장직을 뒤로한 채 나는 해상법을 공부하기 위하여 대학원에 진학했다. 당시 상법 교수님 다섯 분 모두 나를 반기셨다. 상법에는 선장은 선주의 대리인이라는 점을 포함하여 선장 관련 여러 규정이 있다. 교수님들은 그런 선장이 학생으로 오니 신기해하며 실무를 물어보곤 했다. 그 뒤 대형 로펌에 취업을 하게 됐다. 선박 충돌, 오염 사고 시 조사를 하고 보고서를 작성할 수 있는 선장 출신이면서 해상법에 대한 소양이 있는 사람을 찾았다고 했다. 나에게 실장이라는 직함을 준다고 했다. 나는 말했다. “변호사님도 변호사 면허를 가지고 법률 서비스를 하는데, 저도 엄연히 유효한 선장 면허를 가진 선장입니다. 맡은 업무도 선장의 일이니 저를 선장으로 불러주십시오.” 그렇게 하여 선장으로 불리게 되었다. 사고 조사의 결과를 서면으로 보낼 때에도 ‘Captain IH Kim’으로 적었다. 선장이라는 직함이 외국의 고객들에게 큰 신뢰를 받았다.
세월이 지나 해상법 교수가 되었다. 교수들이 가르치는 지식 중에는 선장들이 발견한 것이 많다. 15세기까지만 해도 유럽 사람들은 지중해의 끝단인 지브롤터를 벗어나면 낭떠러지라서 죽음을 맞이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콜럼버스를 비롯한 용감한 선장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항해에 성공하여 ‘지구는 둥글다’라는 사실을 입증했다. 공동위험단체를 구성하는 화주나 선주의 어느 한쪽이 선장의 처분으로 희생된 경우 다른 쪽이 그 손해를 분담해 주는 공동해손과 같은 제도도 마찬가지이다. 이런 지식이나 제도를 설명할 때 선장 출신 해상법 교수인 나는 더 자신감에 차 있다.
선장과 교수의 타이틀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한 적도 있다. 나는 오스틴 텍사스대의 로스쿨을 다녔다. 졸업할 때였다. 선장, 교수, 박사 등 중에서 어느 것으로 호칭할지 표기를 하라고 했다. 선장이라는 항목이 있는 것이 신기했다. 영미에서는 선장을 그렇게 중하게 여긴다고 하더니 여기가 그렇구나 싶었다. 너무나도 기쁜 마음으로 나는 선장에 표기를 했다. 졸업식 날 단상에 올라가자 사회자가 “대한민국에서 온 김인현 선장입니다. 졸업을 축하합니다”라고 소개했고, 짜릿했다. 나는 명함에 교수와 함께 선장이라는 직함을 붙이고 다닌다. 명함을 받는 상대방은 “학교에 무슨 실습선이라도 있는지요” 하고 묻는다. 나는 “한국해양대를 졸업한 선장 출신입니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유효한 면허를 유지하면서 정년퇴직을 하면 선장으로 다시 배를 타겠다고 공언하고 다닌다. 한번 선장은 영원한 선장이다. 사람들은 선장 하면 살신성인하는 리더십을 떠올린다.
* 2. 동굴 (사막교부 뤄시앵 레뇨 p77-79)
선사시대 사람들처럼 초기 독수도승들은 나일 강 양안兩岸의 가파른 암벽에 형성된 자연 동굴 속에 은수처를 마련했다. 「이집트 수도승들의 역사」에 나오는 안티노에의 엘리우스, 아폴론, 엘리아스, 요한, 피티리온과 그의 제자 등, 거룩한 수도승들 대부분이 거기서 생활했다. 다른 수도승들은 안티노에 근처 동굴에서 생활했다. 그러나 주거지 인접 사막의 독수도승들은 수도승생활 초기의 안토니우스처럼, 무덤이나 폐건물에 정착했다.
야만족에 의해 스케티스에서 추방된 포이멘과 그의 수도승들은 오래 된 성전으로 피신했다. 안토니우스는 콜줌 산의 한 동굴에 정착했다. 아타나시우스가 쓴 「안토니우스의 생애」도 「라우수스의 역사」도 이 동굴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지만, 마카리우스와 암모나스와 「이집트 수도승들의 역사」는 그 실재를 명쾌하게 증언한다. 안토니우스가 죽은 다음 그 동굴을 차지한 시소에스는 “사자 동굴에 여우 한 마리가 산다” 고 말했다. 이 동굴은 현재 성 안토니우스 수도원에서 약 275미터 고지에 있으며 지금도 사람들이 존경스런 마음으로 방문하고 있다. 여기서 사막과 홍해의 절경이 펼쳐진다.
테베의 파울루스는 거기서 약 20킬로미터 떨어진 넓은 동굴에 은거했다. 수비아코에 있는 성 베네딕도의 거룩한 동굴처럼 그 동굴 위에도 교회가 세워졌다. 동굴 위치가 불분명함에도 불구하고 금언들은 동굴 거주 독수도승에 대해서 자주 이야기한다. 스케티스 사막의 독수도승 가운데는 케레몬과 엘피디우스도 있었다. 와디 나트룬의 석회질 돌출부에는 수많은 동굴이 있다. 그중 일부는 초기 독수도승들이 팠을 것이다. 이집트어로 쓰인 「마카리우스의 생애」에는 그가 판 두 개의 바위 동굴에 대한 기록이 있다. 팔라디우스는 마카리우스가 판 지하 통로에 대해서만 언급하는데, 그 통로는 마카리우스의 암자에서 작은 동굴까지 연결되어 있었다. 마카리우스는 그 동굴을 방문객들을 피하는 데 이용했다. 성 마카리우스 수도승들은 수도원 남쪽 1킬로미터 지점의 동굴 하나를 보여 준다. 그 동굴 내부에는 지하 통로가 있다. 이것이 팔라디우스가 말하는 동굴일 수 있다. 주변의 다른 동굴들에는 지금도 여전히 성마카리우스 수도승들이 은거하고 있다.
1970년 성 마카리우스 수도원을 복구하기 전, 마타 엘 메스킨 신부는 베니 수에프 서쪽 약 60킬로미터 지점의 사막 한가운데, 와디 라얀 동굴에서 제자들과 함께 12년 동안 생활했다. 다들 옛 삶에 대한 향수를 간직한 채 사막교부들의 삶을 충실히 재현했다. 와디 나트룬의 다른 세 수도원의 경우에도 남쪽으로 수 킬로미터 떨어진 동굴에서 생활하는 은수자들이 있었다. 사막이었던 니트리아와 켈리아에는 독수도승의 보호처가 될 만한 동굴이 없었던 것 같다. 팔라디우스는 암모니우스가 니트리아 사막에 도착하자마자 암자 하나를 지었다고 전한다.
팜부스는 사막에 도착해서 손수 지은 암자에서 죽었다. 최근 켈리아에서 몇몇 암자의 유적이 발굴되었다. 이것은 성 사우론이 이집트 남부 에스나 사막에서 발굴한 은수처들과 같은 형태다. 현재 와디 나트룬에 있는 성 마카리우스 수도승들의 몇몇 은수처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독수도승의 동굴 전면에 작은 대리석 건물이 연결 되어 있는 경우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