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느끼고, 스스로 납득하고, 스스로 발견해야 참으로 아는 것이다. 남이 가르쳐 준 것을 듣고, ‘그게 이렇더라’고 하는 것은 지식이 될지는 몰라도 참 지혜는 못 된다.
부처님과 역대 조사님들은 문자에 얽매이는 것을 가장 경계하셨다. 부처님께서는 평생 동안 내가 체험한 것만을 설한다 하셨고, ‘이 법은 와서 보라는 법이요 현실의 법이며 누구나 증험할 수 있는 법’이라고 설파하셨다.
조사님들도 문자나 말을 희롱하는 제자들을 앵무새 중이라 하시며 ‘방, 할’로 다스리셨다.
경전과 어록은 체험한 것을 일러주기 위한 방편이다. 부처님과 역대 조사님이 교문(敎門)을 세우신 것은 부득이한 조처였지 거기에 머물라고 한 게 아니었다.
말이나 문자는 체험을 나타내는 도구이지만 전하는 사람과 받는 사람 사이에 그 의미가 같을 수는 없다. 언제나 조금씩은, 때로는 아주 크게 그 의미가 어긋난다.
예컨대 잘 익은 과일을 먹은 사람이 제가 맛본 것을 표현하려고 ‘참 맛있다’고 했다 하자. 그는 맛을 체험했지만 그 말을 듣는 사람은 다만 ‘맛있다는구나’할 뿐이지 아직은 맛을 느끼지 못한다. 그 말을 듣고 자기도 직접 먹어볼 때에 그 나름대로의 맛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러나 문자로만 ‘맛있다’라는 표현에 접한 사람은 어떠할까. 그의 경우라면 ‘맛있다’는 말이 ‘잘 익은 과일을 먹다’라는 말과 동의어가 되질 않는다. 그의 관념세계엔 ‘맛있다’는 말이 주는 많은 연상들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어쩌다 전깃줄을 만진 사람이 ‘어이쿠’하고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어이쿠’라는 문자가 언제나 ‘전깃줄을 만지다’라는 의미로 전달되는 것은 아니다.
부처님 말씀이나 조사어록도 듣는 사람 읽는 사람에 따라 제각기 다른 의미로 이해될 수 있다. 그래서 말씀을 줄줄 외우고 가로 세로로 꿰고 있는 것과 실제로 맛을 보는 것과는 천지차이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