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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은평 삼각산 진관사(津寬寺)를 찾아서 ①
-대웅전, 명부전과 나한전-
3월 4일, 금선사 반야전에서 법회를 본 다음, 공양을 한 후 전각을 찾아 참배하고 두루 살 핀 후 국수공양까지 끝낸 우리는 일주문에서 기념사진을 찍은 다음 황심행님은 하산하시 고 넷이서 비봉으로 향했습니다. 중간에 잠시 휴식을 취하면서 음료와 과일을 들었습니 다. 너무 많이 먹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날씨는 흐려 한두 방울의 빗 방울이 떨어졌으나 지극히 소량이라 문제가 될 것은 없었습니다. 단숨에 비봉이 있는 고 개를 올랐으나 비봉은에 오를 만한 시간이 되지 않아 그대로 진관사로 난 탐방로를 따라 진관사계곡으로 내려갔습니다. 약 2km로 넉넉히 1시간 반이면 쉬엄쉬엄 갈 수 있는 거리 입니다.
북한산은 어디를 봐도 수려합니다. 봄이지만 아직 새싹이 움트기에는 이른 관계로 겨울산 그대로지만 속에서는 움틀 준비로 분주하겠지요.
예전에 이 웨딩바위 내려온 적 있네요. 아찔합니다.
진관사로 가는 길에
잠시 포즈를 취하며
여기서 사방을 조망한 다음 1시간여 만에 진관사에 도착했습니다. 산에서 내려온 관계로 바로 경내에 들었습니다. 참으로 오랜만에 진관사를 찾은 것 같은데 또 어찌 보면 엇그제 같이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진관사는 역사적으로도 의미 깊은 사찰입니다. 역사드라마를 보노라면 진관사 이야기가 가끔 나오는 것을 봅니다. 멀리는 '천추태후'로부터 '대왕세 종', '뿌리 깊은 나무'에서도 진관사가 언급되기도 한 것을 보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최근 에는 칠성각에서 문화재급 태극기가 발견되어 화제가 되기도 했었습니다. 이제 진관사는 어떤 절인가 살펴볼까 합니다.
이 사진은 3월 11일 응봉능선에서 바라본 진관사 광경입니다.
진관사(津寬寺)는 서울시 은평구 진관동 354번지에 자리한 대한불교조계종 직할사찰로 동 쪽의 불암사, 서쪽의 진관사, 남쪽의 삼막사, 북쪽의 승가사와 함께 예로부터 서울 근교 4 대 명찰로 손꼽힌 이름난 사찰입니다.
『도량의 건물은 주법당인 대웅전을 중심으로 좌측으로 전각(殿閣)이 있으며, 우측에 요사 (寮舍)가 배치된 중정형(中庭形) 가람이다. 대웅전 좌측으로는 명부전을 시작으로 나한전, 칠성각, 독성전이 자리하고 있으며 현재 서울시 문화재로 지정된 12종 36점의 성보유물들 이 산재해 있다. 이들 유물들은 모두 16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제작된 귀중한 작품들이 다. 그 외에도 진관사에는 근대불교의 대강백이신 탄허스님의 친필을 포함한 많은 성보들 이 있다.』 -진관사 홈페이지에서-
홍제루에서 바라본 대웅전
진관사(津寬寺) 창건기
『진관사(津寬寺)는 거란의 침입을 막아내고 국력을 수호한 고려 제8대 현종(顯宗)이 1011 년(顯宗 2년)에 진관대사(津寬大師)를 위해 창건했으며, 6.25 당시 폭격으로 폐허가 되었 다가 복구된 고찰로 전해진다.
또한 '신라시대 고찰'이란 설과 조선 후기 승려 성능(聖能)이 찬술한 「북한지(北漢志)」에 서는 원효대사가 진관대사와 더불어 삼천사와 함께 세웠다는 설도 전해진다.
전해 내려오는 연기설화(緣起說話)에 의하면 고려 제5대 경종(景宗;975~981) 때로 거슬러 올라가 981년(景宗 6)에 경종이 죽고, 성종(成宗)을 거쳐 경종의 왕비인 헌애왕후(獻哀王 后 : 964~1029)는 그의 아들 송(誦)이 왕위에 올라 목종(穆宗)이 되었을 때 천추태후(千秋 太后 : 獻哀王后)가 되어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게 된다. 또한 태후는 성종년간에 김치양 (金致陽)과 정을 통해 몰래 사생아를 낳게 되었고 마침내는 김치양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을 왕위에 앉히려고 하였다.
이런 정쟁(政爭) 가운데 목종에게 아들이 없어 헌애왕후의 동생 헌정왕후(獻貞王后)와 태 조(太祖)의 아들인 욱(郁, 安宗)의 사이에서 난 대량원군(大良院君) 순(詢)이 왕위 계승자로 봉해진다.
이를 기회로 태후는 자신의 사생아를 옹립하기 위해 목종에게 참소하여 대량원군을 숭경 사(崇慶寺)에 가두고 죽임을 꾀한다. 그러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대량원군을 다시 진관대 사(津寬大師)가 혼자서 수도하는 삼각산(三角山)의 한 암자로 축출하게 된다. 대량원군의 신변이 위험함을 느낀 진관대사는 산문 밖에 망보는 사람을 배치하는가 하면 본존불을 안 치한 수미단 밑에 땅굴을 파고는 그 안에 12세인 대량원군을 피신시켜 자객으로부터 화를 면하게 하였다. 대량원군은 이곳에서 3년을 보내게 되는데, 1009년 강조가 군사를 일으켜 목종을 폐위하고 왕순을 왕위에 옹립하니 대량원군 순이 제8대 현종(顯宗)으로 왕위를 계 승하게 된다.
대량원군은 재생의 은덕에 대해 고개 숙여 감사하고, 진관대사와 눈물로 작별하면서 자신 이 거처하던 땅굴을 신혈(神穴)이라 하고 절 이름을 신혈사(神穴寺)로 바꾸기를 청했다. 그 후 왕위에 오른 현종은 그 은혜에 보답하고자 신혈사(神穴寺) 인근의 평탄한 터에 진관 대사의 만년을 위해 크게 절을 세우게 하고, 진관대사의 이름을 따서 진관사(津寬寺)라 명 하였으며, 그 후 마을 이름도 진관동이라 부르게 됐다.
진관사의 창건 불사는 1011년 가을에 시작해 만 1년 동안 공사하여 1012년 가을에 준공을 보았다. 당시 대웅전이 사방 10칸, 동ㆍ서 승당이 각 30칸, 청풍당(淸風堂)과 명월요(明月 寮)가 각 10칸, 제운루, 정재소, 일주문, 해탈문, 종각, 창고 등 상당한 규모로 건립되었다. 또한 불상과 장엄구, 일상도구 등 사찰에 필요한 일체의 모든 것을 현종이 지원하였다. 현 종은 이 진관사에 최고의 정성을 모아 불사를 이룩한 것이다. 그리고 완공 그해 10월에 낙 경법회(落慶法會)를 연 후 진관대사를 국사로까지 책봉하였다.』 -진관사 홈페이지에서-
대하사극 '천추태후'을 재미있게 시청했었는데 그때 대량원군이 숨어지낸 사실을 그렸던 것이 생각납니다.
진관사 경내 모습
고려시대의 진관사
『이후 진관사는 임금을 보살핀 은혜로운 곳이라 하여 고려시대 여러 임금이 왕래하면서 왕실의 각별한 보호와 지원을 지속적으로 받게 된다.
1090년(宣宗 7년) 10월에 선종(宣宗)은 진관사에 행차하여 오백나한재(五百羅漢齋)를 성대 하게 봉행하였으며, 1099년(肅宗 4년) 10월에는 숙종(肅宗)이 진관사에 친행하였고, 그 후 1110년(睿宗 5년) 10월에는 예종(睿宗)이 진관사에 순행하는 등 역대 왕들이 참배하고 각 종 물품을 보시하는 국찰(國刹)로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조선시대의 진관사
『고려시대 이래로 역대 왕들의 왕래가 빈번했던 진관사는 조선시대에 수도를 서울로 옮 기면서 제2의 전성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수륙재(水陸齋)의 근본도량으로서 명성을 떨치게 되는데, 권근(權近)이 지은 《수륙사조성기(水陸社造成記)》에 그 전모가 전해진다.
1397년(太祖 6) 정월에 태조는 내신 이득분(李得芬)과 조선(祖禪)스님에게 조상의 명복을 빌고 나라일로 죽어 제사조차 받지 못하는 굶주린 영혼을 위해 수륙사(水陸社)를 설치할 것을 명하게 된다. 이에 이득분과 상충달(尙忠達), 지상(志祥)스님은 북한산과 도봉산을 답 사한 결과 수륙재를 열기에 가장 적합 곳으로 진관사를 선정하게 된다.
수륙사 건립은 조선을 건국하면서 전쟁에서 죽어간 고려왕실의 영혼을 기리는 목적에서였 으며, 내면적으로는 불안정한 국민정서의 동요를 막고 조선왕실의 안정을 꾀할 목적도 겸 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후 태조는 진관사에 수륙재(水陸齋)를 개설하도록 공사를 지시하고 절에도 행차하였으 며, 1397년 9월 낙성식에도 참여하였다. 이에 고려시대 역대 왕들의 지원을 받던 진관사 는 조선왕조의 국가적 수륙재(水陸齋)가 개설되는 사찰로서 다시 전성기를 누리게 된다. 당시 진관사에 조영된 시설물은 모두 59칸으로, 상,중,하단의 삼단을 기본구조로, 중,하단 에 행랑이 연이어 들어서 있는 왕실사찰로서의 위엄과 규모를 갖추게 된다.
이후 불교를 배척하던 태종 역시 1413년(太宗 13)에 진관사에서 성녕대군(誠寧大君)을 위 한 수륙재를 열고 향과 제교서(祭敎書)를 내렸으며, 수륙재위전(水陸齋位田) 100결을 하사 하여 재를 계속하게 하였다.
따라서 절에서는 매년 1월 또는 2월 15일에 수륙재가 열려 조선왕실의 명실상부한 수륙도 량으로서 인정받게 되었으며, 국찰(國刹)로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세종 때에는 1421년(世宗 3)에 태종 내외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재를 올린 이후부터 왕실 의 각종 재를 봉행하는 사찰로 국가에서 정례화시켰다. 그리고 세종은 1442년(世宗 24)에 진관사에 집현전 학사들을 위한 독서당을 세우고 성삼문, 신숙주, 박팽년 등과 같은 선비 들을 학업에 몰두하도록 하였다. 독서당 건립 후 진관사에서는 학사들과의 교류가 빈번해 지면서 왕실과 사대부, 그리고 서민들까지 애용하는 전국민의 사찰로 확대되었다.
또 1452년(文宗 2)에 대대적인 중창불사가 이루어지는데, 1463년(世祖 9)의 화재로 일부가 람이 소실되어 피해를 입게 되었다. 그 후 1470년(成宗 1)에 벽운(碧雲)스님이 다시 중건하 고, 1854년(哲宗 5)과 1858년에 중수되었으며, 1879년(高宗 16)에는 당두화상(堂頭和尙) 경운(慶雲)대선사가 큰방 34칸을 지어 국찰로서의 대가람을 형성하게 되었다.』
-진관사 홈페이지에서-
대웅전(大雄殿)
진관사의 주법당으로 정면 5칸, 측면 3칸 팔작지붕의 다포계 단층건물로 정면 13.6m, 측면 8m의 크기이다. 기단의 초석만 원래의 것이고 건물은 1965년에 중창주인 진관스님 이 신축한 것으로, 장방형의 화강암 기단 위로 원형초석을 두고 그 위로 두리기둥을 세워 다포를 받친 모습입니다.
근ㆍ현대의 진관사
『근대에는 1908년에 송암(松庵)선사가 경내에 오층석탑을 조성하였으며, 1910년에는 경 운( 慶雲 )선사에 의해 대대적인 중창불사가 이루어졌다. 그는 대웅전 삼존상을 개금하고, 아울러 명부전의 지장보살상과 시왕상, 시왕탱화 등을 개금ㆍ보수하였다. 또한 독성전과 칠성각을 신축하고, 자신이 소유했던 토지를 사찰에 무상으로 돌려 '백련결사염불회' 의 자원으로 쓰게 함으로써 근대 진관사 중창주로서 족적을 남겼다.
그러나 근대기의 열성적인 노력으로 일신한 진관사는 1950년 6.25전쟁 때 나한전 등 3동 만을 남기고 모두 소실되었다.
이에 폐허만 있던 진관사는 1963년 현 회주이신 비구니 최진관(崔眞觀)스님이 발원하여 건물을 차례로 재건하여 오늘에 이르게 된다.
진관 (眞觀) 스님은 1965년에 현재의 대웅전(大雄殿)을 신축하고, 1966년에 삼존불( 三尊 佛) 을 조성하였으며, 1967년에 후불탱( 後佛幀) 및 신중탱( 神衆幀) 을 조성하여 진관사 주법당(主法堂)을 여법(如法)하게 일신하였다. 또 1968년에는 명부전(冥府殿)을 비롯하여 1969년에 지장보살과 시왕상을 조성하였으며, 1970년에는 일주문과 동별당을 신축하고, 1972년에 나가원( 那迦院) 을 신축, 1974년에 범종(梵鐘) 조성, 1975년 동정각(動靜閣) 신 축 등 진관스님의 불사로 옛 가람(伽藍)의 자취를 찾는 여법한 가람(伽藍)이 복원되었다.
또한 진관스님은 부처님의 자비사상과 중생구제의 원력을 사회복지와 포교 활동을 통하여 실현하고자 1996년에 진관사 부설 포교당인 보현정사와 코끼리유치원을 신축하였으며, 2007년 9월에 사회복지법인 진관 무위원을 설립하여 지역사회 복지증진을 위한 또 다른 장을 열었다.』 -진관사 홈페이지에서-
석등(石燈)
수기삼존불(授記三尊佛)
수기삼존불(授記三尊佛)이란 현재불인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 미래불인 미륵불(彌勒佛) 의 보살형인 미륵보살(彌勒菩薩), 과거불인 정광불(錠光불)의 보살형인 제화갈라보살(提和 渴羅菩薩)을 말합니다.
특히 제화갈라보살은 본래 《법화경(法華經)》에 나오는 정광불(錠光佛)입니다. 연등불(燃 燈佛)이라고도 하지요. 석가모니불의 전생(前生)인 아득한 과거에 석존께서 선혜(善慧)라 는 수행자로 있을 때 정광불(錠光佛. 燃燈佛 혹은 普光如來)로부터 미래에 석가모니불이 되리라는 수기(授記)를 받았습니다.
미륵보살은 인도 바라내국의 바라문집에 태어나 석존의 교화를 받고, 미래에 성불(成佛)하 리라는 수기(授記)를 받아 석존보다 먼저 입멸하여 도솔천에 올라가 천인들을 교화하고, 석존 입멸 후 56억7천만 년을 지나면 다시 사바세계에 출현한다고 합니다. 그 때 화림원 (華林園) 안의 용화수(龍華樹) 아래에서 성도(成道)하여 3회의 설법으로 석가모니불의 교화 에서 빠진 모든 중생을 교화한다고 합니다.
이와 같이 과거불인 정광불을 제화갈라보살로, 미래불인 미륵불을 미륵보살로 모신 것을 수기삼존불(授記三尊佛)이라 합니다. 후불탱화로 삼신불탱화(三身佛幀畵)를 모셨습니다.
본존 석가모니불(本尊 釋迦牟尼佛)
석가모니불 후불탱화는 삼신불탱화 중 비로자나불탱화로 불기 2511년(1967) 금어(金魚) 일섭(日燮)스님에 의해 조성되었습니다.
좌보처 미륵보살(左補處 彌勒菩薩)
미륵보살 후불탱화는 삼신불탱화 중 노사나불탱화로 불기 2511년(1967) 금어(金魚) 일섭(日燮)스님에 의해 조성되었습니다.
우보처 제화갈라보살(右補處 提和渴羅菩薩)
제화갈라보살 후불탱화는 삼신불탱화 중 비로자나불탱화로 불기 2511년(1967) 금어(金魚) 일섭(日燮)스님에 의해 조성되었습니다.
신중탱화(神衆幀畵) 불기 2994년(2511, 1967)제작.
현왕탱화(現王幀畵) 불기 2478년(1934)제작. 금어 화경(和璟) 스님.
화기에 불기 2961년 갑술년 4월 5일이라 되어 있는데 이 때는 불기 2478년으로 1934년입 니다. 1556년을 불기 2500년으로 삼았으니 전래의 불기와는 483년 차이가 있습니다.
현왕(現王)이란 사람이 죽은 지 3일 만에 가는 명계(冥界)를 주재하며 심판을 주관하는 명 간교주(冥間敎主)인 보현왕여래(普現王如來)를 말하는데 줄여서 현왕여래라고 합니다. 현 왕여래는 염라대왕을 말하는데 염라대왕이 나중에 보현왕여래로 수기를 받았기 때문에 그렇게 부른다고 합니다. 현재는 염라대왕을 말합니다. 판관(判官), 녹사(錄使), 사자(使 者) 등이 등장합니다.
현왕탱화(現王幀畵)는 현왕탱화는 주로 19세기 이후에 유행했던 그림으로서, 사람이 죽은 지 3일 만에 재판을 하는 현왕과 그 권속들이 묘사되는데, 현왕은 염라왕(閻羅王)의 화신 격(化身格)이므로 시왕도(十王圖)에서 처럼 염라왕의 권속들이 똑같이 배치되나, 지옥장면 만 생략되는게 보통입니다.
영단의 오여래탱화(五如來幀畵).
불기 2534년(1990)에 금어(金魚) 수산 임석환(樹山 林石煥)에 의해 조성되었다고 합니다.
보통 영단에는 감로탱화를 모시는데 거기에는 7여래가 등장하는데 여기는 5여래가 등장 하네요. 이는 모두 진언밀교(眞言密敎)의 영향입니다. 오여래(五如來)란 진언밀교의 만다 라(曼茶羅)에서 중앙의 대일여래(大日如來)와 그 사방의 4불(四佛)을 말합니다. 금강계만 다라(金剛界曼茶羅)에서는 중앙의 대일여래(大日如來)를 중심으로 동쪽에 아촉여래(阿閦 如來), 남쪽에 보생여래(寶生如來), 서쪽에 무량수여래(無量壽如來. 阿彌陀佛), 북쪽에 불 공성취여래(不空成就如來)를 말합니다.
명부전(冥府殿)
명부전은 대웅전 좌측에 있는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건물에 다포계 단층목조건 물로 1968년에 진관(眞觀)스님이 세운 것이며, 현재의 건물은 1996년에 다시 신축한 것으 로, 낮은 기단 위에 원형초석을 두고, 그 위로 두리기둥을 세워 다포를 얹은 모습입니다.
명부전(冥府殿) 편액 탄허(呑虛)스님 글씨.
명부전의 편액과 주련은 모두 탄허스님 글씨입니다.
우보처 무독귀왕 본존 지장보살 좌보처 도명존자
건물 내부는 후벽에 맞붙여 삼면의 벽에 ㄷ자형의 불단을 가설하였는데, 그 위로 1969년 에 조성한 지장보살상과 도명존자상, 무독귀왕상, 그리고 저승계의 심판관인 시왕상(十王 像)과 시왕을 시봉드는 동자상(童子像), 사자(死者)를 심판하는 판관(判官)과 기록을 담당 하는 녹사(錄事) 그리고 문 입구를 지키는 장군상 1쌍을 봉안하였습니다.
이외 후불벽에는 1997년에 금어(金魚) 임석환이 그린 지장시왕탱화(地藏十王幀畵)과 시왕 탱화(十王幀畵), 사자탱화(使者幀畵)를 두었습니다.
시왕상(十王像)과 시왕탱화(十王幀畵)
후불벽에는 1997년에 금어(金魚) 임석환이 그린 시왕탱화(十王幀畵)입니다. 좌우에 모두 있으나 그 일부만 담았습니다.
시왕과 그 권속인 판관, 녹사, 장군상
사1997년에 금어(金魚) 임석환이 그린 사자탱화(使者幀畵)가 모셔져 있습니다.
나한전(羅漢殿)
나한전은 6.25 전쟁 때 칠성각ㆍ독성전과 함께 불타지 않고 남아 있는 세 건물 가운데 하 나입니다. 나한전은 대웅전 좌측 축대 위에 있는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의 익공계 목조 단층건물로 근래에 새로 중창하였습니다.
나한전은 석가모니불을 주불(主佛)로 모시고 그 좌우에 부처님의 제자인 16아라한을 봉안 한 전각입니다. 나한(羅漢)은 아라한(阿羅漢)을 줄인 말인데 엄밀히 말하면 잘못된 말입니 다. 아(阿)는 무(無)의 뜻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라한은 무학(無學)의 뜻이 있는데 나한(羅 漢)이라 하면 학(學)의 뜻이 있어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는 무학위(無學位)가 아니라 배움이 아직도 남은 학위(學位)이니 하늘과 땅의 차입니다. 즉 번뇌의 적을 무찌른 살적(殺賊)이 아니라 번뇌가 남아 있는 것이니 아라한과는 십만팔천 리입니다. 무학(無學)이라야 존경 과 공양을 받아 마땅한 사람으로 진리에 도달했다는 뜻에서 응진(應眞)이라 할 수 있는 것 입니다. 그래서 아라한을 무학(無學), 응공(應供), 진인(眞人)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줄인다고 줄인 것이 부정사를 잘랐으니... 그러나 이는 전래의 관례이니 아라한을 나한이 라 통상 부릅니다. ^^ 그리고 나한전을 영산전(靈山殿)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나한전(羅漢殿)
예서체로 쓰인 나한전 편액은 오랜된 글씨임에도 선명합니다.
광서십년갑신삼월초오일(光緖十年甲申三月初五日) 노천(老泉)이란 낙관이 있네요.
광서(光緖) 10년은 고종 21년인 1884년입니다. 갑신정변이 일어난 해입니다. 갑신 정변이 음력 10월에 일어났으니 그 전인 3월 15일에 현판을 썼음을 알 수 있는데 노천(老泉)이 누 구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
석가삼존불. 소석가삼존불(塑釋迦三尊佛)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143호
여기도 대웅전과 마찬가지로 수기삼존불(授記三尊佛)을 모시고 있습니다. 중앙의 석가모 니불을 중심으로 좌보처로 미래불인 미륵보살, 우보처로 과거불인 제화갈라보살을 모셨습 니다. 소석가삼존불(塑釋迦三尊佛)은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143호이고 영산회상도는 서울 시 유형문화재 제145호입니다.
『건물 내부에는 후불벽과 맞닿은 ㄷ자형의 불단 위로 조선후기에 조성된 소조석가삼존상 을 비롯하여 소조16나한상, 사자상, 제석상, 인왕상 등 완전한 16나한상 일체가 봉안되어 있으며, 후불벽에는 1884년에 진철(震徹)스님이 그린 영산전의 후불탱화로 조성되었던 영 산회상도와 16나한도가 걸려 있다. 화기(畵記)에 의하면, 16나한상과 나한도(羅漢圖) 4축, 관음도(觀音圖) 2축 등이 함께 조성되었다고 하며 진철(震徹)스님이 그리고, 시주자는 왕 실 상궁들이라고 한다.』 -진관사 홈페이지에서-
좌측 소조 16아라한상과 아라한도
소조 16나한상은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143호이고, 16나한도는 서울시 유형문화재 146호 입니다.
소조 16아라한상 중 일부
좌측의 16아라한상 그리고 제석상
우측의 16아라한상 중 일부
우측의 아라한상과 사자상, 그리고 인왕상
이상 대웅전과 명부전 나한전을 살피다 보니 지면이 꽉찼습니다. 다음은 중요한 칠성각과 독성전 그리고 여러 가지 당우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다음은 칠성각과 그 밖의 당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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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드라마 '천추태후' 기억이 납니다. 잘 봤습니다. _()-
천추태후에서 대량원군이 숨어 살던 장면이 생각납니다. 대웅전 안 사진은 순례 당시는 못 찍었는데 못내 아쉬워서 그 다음 주인 지난 주에 가서 찍어왔습니다. _()_
산수산님과 산행도 하고 순례도 하고 싶습니다. 진관사 역사가 깊은 곳이라 숱한 보물이 있으련만 6.25 전쟁으로 폐허가 되었으니... 통탄할 노릇입니다. 6.25때 소실된 사찰은 아군에 의한 것이 무척 많습니다. 작전상 이유로... 여기는 어떤 연유로 폐허가 되었는지 알 수 없네요. 다음 주 일요일은 어떠하십니까 _()_
진관사 다녀 온지 2주가 지났네요. 시간이 참 빨리 지나 가는것 같아요. _()_
예, 저는 한 번 더 갔습니다. 대웅전 내부 사진 때문에... 다음은 천사를 가 볼까요 _()_
언제든지 시간 나실 때 말씀하세요. 이번 일요일도 좋고요. _()_
이번 일요일날 선약이 있어 지방 내려가요. _()_
수기삼존불에 대한 좋은 공부를 하고 갑니다. 제화갈라 보살은 서산 마애삼존불상에서 볼수 있었던 분 이었는데 진관사에서 뵐수 있어 넘 좋으내요. 예전에 몰랐던 것,넘 넘 좋은 공부 하고 갑니다.웨딩 바위 옛날 추억도 생각 나구요~~....나무묘법연화경()()()
오, 그렇지요. 서산 마애존불에서 제화갈라보살을 봤었지요. 사실상 그때 제화갈라보살에 대해서 처음 알았습니다. 웨딩바위 그 아찔한 추억, 다시 갈 수는 없을 것 같네요. _()_
감사합니다. 다녀가셨군요. _()_
사진이 왜 자꾸 날아가 버릴까요 방법을 찾아야 할텐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