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큰 대제사장과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감
성경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찌어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 4:14~16)」
승천하신 자
이 내용에서는 육체를 입고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 예수님에 대해 큰 대제사장으로 말하고 있다. 성경에서는 우리 주 예수님에 대해 ‘큰 대제사장’이라고 부르는 곳은 이곳 한 곳 밖에 없다. 이것은 땅에 있는 대제사장들과 구별하기 위해 주 예수님에 대해 ‘큰 대제사장’이라고 말하고 있다. 우리 주 예수님은 이 세상에 있는 뭇 제사장들과는 구별되는 큰 제사장이시다. 그는 땅에서 대제사장으로 활동하는 분이 아니고 하늘에서 대제사장으로 활동하시는 분이시다. 히브리서 8장 1∼4절에서는 “이제 하는 말의 중요한 것은 이러한 대제사장이 우리에게 있는 것이라 그가 하늘에서 위엄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으니 성소와 참장막에 부리는 자라 이 장막은 주께서 베푸신 것이요 사람이 한 것이 아니니라 대제사장마다 예물과 제사 드림을 위하여 세운 자니 이러므로 저도 무슨 드릴 것이 있어야 할찌니라 예수께서 만일 땅에 계셨더면 제사장이 되지 아니하셨을 것이니 이는 율법을 좇아 예물을 드리는 제사장이 있음이라”고 했다. 이 내용에서는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에 대해 하늘에서 위엄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다고 했다. 예수님은 자신을 제물로 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히 9:12, 26)는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 우편에 않으셨다. 이렇게 주 예수님께서 육체를 입고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사 높이 되심으로 말미암아 하늘에 있는 대제사장이 되셨다. 주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지 아니했다면 그는 결코 대제사장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땅에 이미 율법을 좇아 예물을 드리는 제사장이 있었기 때문이다. 곧, 땅에 이미 레위 지파인 아론의 반차를 좇은 제사장이 있었기 때문이다(히 7:11, 8:4). 육신으로 보면 예수님은 레위 지파의 자손으로 태어나지 않고 다윗과 같이 유다 지파의 후손으로 태어났다(마 1:1, 16). 그렇기 때문에 그가 땅에 있었다면 제사장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히 8:4). 그런데 주 예수님께서는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난 뒤에 승천하셨다. 그리하여 그는 땅에 속하지 않고 하늘에 속한 제사장이 되었는데, 그것은 아론의 반차를 좇지 않고(히 7:11),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제사장이 되었다(물론, 멜기세덱은 이스라엘 열두 지파 어디에도 속하지 아니 했다). 그는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에 승천하여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한 제사장이 되셨다(히 5:6). 히브리서 7장 26절에서는 “이러한 대제사장은 우리에게 합당하니 거룩하고 악이 없고 더러움이 없고 죄인에게서 떠나 계시고 하늘보다 높이 되신 자라”고 했다. 우리 주 예수님은 거룩하고 악이 없고 죄인에게서 떠나 계시고 하늘보다 높이 되신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대제사장이 되시기에 합당한 분이시다. 우리 주 예수님은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심으로 땅에 속하지 않고 하늘보다 높이 되심으로,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땅에 있는 어떤 대제사장들 보다 뛰어난 큰 대제사장이 되셨다. 이러한 큰 대제사장이기에 우리의 연약함을 얼마든지 도울 수 있는 것이다. 로마서 8장 34절에서는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고 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셨을 뿐만 라 하나님 우편에서 간구하시는 분이시다. 하늘보다 높이 되신 주 예수님께서 큰 대제사장으로서 우리를 위해 간구하시는 주님께 감사드림과 아울러 존귀와 영광을 돌립니다.
하나님 아들 예수
우리를 멸망 가운데서 건져 내기 위해 육체를 입고 오셔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주 예수님에 대해 하늘보다 높이 되신 큰 대제사장이라고 했으며, 또한 ‘하나님 아들 예수’라고 했다. ‘하나님 아들 예수’라고 하는 것은 주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며, 사람이라는 것이다. 로마서 1장 3, 4절에서는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고 했다. 이 내용에서는 육신 안에서는 다윗의 자손으로, 성결의 영 안에서는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다고 했다. 요한계시록 22장 16절에서는 “나 예수는 교회들을 위하여 내 사자를 보내어 이것들을 너희에게 증거하게 하였노라 나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니 곧 광명한 새벽별이라 하시더라”고 했다. 이 내용에서 예수님이 다윗의 뿌리라고 하는 것은 그가 다윗의 조상이고 근원이라고 하는 것으로서, 신성의 면에 있어서 그러하다는 것이다. 또, 다윗의 자손이라고 하는 것은 인성의 면에서 다윗의 자손이라고 하는 것이다. 마태복음 1장 1절에서는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고 했다. 이 내용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이라고 했다. 이러한 것을 종합해 보면 예수 그리스도는 신성과 인성을 다 가지신 분, 곧 하나님의 아들이며, 또한 인자 곧 사람의 아들이라는 것이다. 사도행전 20장 28절에서는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고 했다. 이 내용에서는 하나님이 자신의 피로 교회를 사셨다고 했다. 그런데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요 4:24), 피를 흘리고 죽을 수가 없다. 그러므로 사도행전 20장 28절에서는 ‘하나님이 자기 피로 교회를 사셨다’고 하는 분은 우리 주 예수님임에 틀림없다. 그렇다면 이 구절은 주 예수님에 대해, 하나님이시며, 사람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 고 단지 사람만이라면 어떻게 그의 피로 주님의 몸된 교회를 살 수 있으며, 인간의 죄들을 구속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일반 사람들은 십자가에서 죽는다 할지라도 다른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고 자신의 죄들도 구속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 주 예수님께서 인간의 죄들을 구속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사람임과 아울러 하나님이셨기 때문이다. 그는 인성과 신성을 함께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죽고 부활하고 승천할 수 있었고, 또 큰 대제사장이 될 수도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단지 사람만이었다고 해도 이룰 수 없고, 단지 하나님만이라고 해도 이룰 수 없다. 오직, 신성과 인성, 모두를 가진 자만, 하나님이며, 사람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만 이 놀라운 일을 행하기에 합당한 자이고, 또한 어떤 대제사장들 보다 뛰어난 큰 대제사장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음
우리가 믿는 큰 대제사장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는 이렇게도 우리에게 합당한 대제사장, 아론의 반차를 좇아 대제사장이 된 자들 누구보다도 크고, 위대하고, 뛰어난 분이시기에 어떠한 미혹이나, 핍박이나, 고난이나 환란이 닥쳐온다 할지라도 이 놀라우신 큰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요동되어서는 안 된다. 만약, 어떤 환경들로 인해 요동이 된다면 큰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저버리고 다른 자, 곧 허탄한 자를 택하게 된다. 이것은 불행한 것이고, 멸망의 길이다. 이것은 주 예수님께서 내신 것이 고, 주님과 우리의 대적이며, 미혹자이며, 거짓의 아비인 마귀로 말미암은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떠한 미혹이나, 환난과 핍박이 닥쳐온다 할지라도 흔들리지 말고 우리가 처음 믿을 때에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하게 붙잡고 나아가야 한다. 히브리서 4장 14절에서는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찌어다”라고 했다. 우리에게는 큰 대제사장이신 승천하신 하나님 아들 예수님이 계시므로 어떤 미혹이나, 환난이나, 핍박이 닥쳐온다 할지라도 흔들리지 말고 큰 대제사장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만 굳게 잡고 그만 추구하며 따라 가야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합당치 한 자를 믿고 붙잡고 있는 것이 고 참으로 큰 대제사장이신 주 예수님,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사 하나님 우편에 계시는 그 주님, 우리에게 합당하신 그 주님을 확실하게 믿고 견고히 붙잡고 나아가야 한다. 히브리서 3장 12∼14절에서는 “형제들아 너희가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하는 악심을 품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염려할 것이요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강퍅케 됨을 면하라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예한 자가 되리라”고 했다. 누구든지 믿지 하는 악심을 품고 살아계신 하나님께로 부터 떨어져 나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하고, 오늘이라고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죄의 속임수에 빠져 마음이 강퍅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고 했다. 또한, 우리가 처음 믿을 때에 가진 확신을 끝까지 굳게 잡는다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예하는 자가 될 것이라고 했다. 이것은 그 당시 대제사장 아나니아와 그와 함께 하는 자들이 주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은 유대인들은 너무도 심하고 가혹하게 핍박하고 고통을 가함으로 그들 중 일부는 이미 그들이 나왔던 유대교로 돌아가고 일부는 다시 유대교로 돌아갈까? 하고 망설이고 있는 자들에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처음 주 예수님을 믿었을 때에 확실한 것, 그것은 잘못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 확실한 믿음을 끝까지 견고하게 잡아 유대교로 돌아가지 말고 계속하여 주 예수님만 추구하며 전진할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요한계시록 3장 11절에서는 “내가 속히 임하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나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고 했다. 우리는 가져야 할 것을 갖지 못했을 때는 그것을 잡으려고 해야 하고, 가져야 될 것을 가졌을 때에는 그것을 굳게 잡아 놓치거나, 빼앗기지 않도록 해야 한다. 육신적으로 당하는 어려움이나, 교리나, 가르침에 의해서 이리저리 흔들리는 것은 합당한 것이다. 우리는 주님과 그의 말씀 안에서 굳건히 서서 오직 그만 관심하며 달려가야 한다. 에베소서 4장 13∼16절에서는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까지 이르리니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하여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찌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고 했다. 우리는 머리이신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람으로 어떠한 상황, 곧 교리적인 것이나, 어떤 가르침이나, 육신적인 고통이나, 핍박이나, 박해가 있다 할지라도 이러한 것들에 의해 흔들리거나, 다른 길로 가서는 안 된다. 우리가 관심하고 달려갈 길은 오직 우리 주님 밖에 없다.
긍휼하심과 은혜의 보좌로 나아감
우리 주님은 모든 것의 주인이시며, 모든 긍정적인 것들의 실재이시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환경에 걸맞게 역사하신다. 사랑이 필요할 때는 사랑의 주님으로 역사하사 문제를 해결하시고, 평강이나, 평안이 필요할 때는 평강의 주님으로 말씀하시고 역사하신다. 또한, 의가 필요할 때는 의의 주님으로, 거룩함이 필요할 때는 거룩함의 주님으로 역사하신다. 이렇게 우리 주님은 만유이신 주님으로 어떤 환경에서도 대처하고 이길 수 있도록 역사하신다. 히브리서 4장 14∼16절에서도 그 당시 히브리 믿는 이들이 대제사장 아나니아와 그와 함께 하는 자들에 의해 많은 박해와 핍박과 고난을 받는 가운데서 고통스러워하고 피곤하고 지쳐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자들을 위로하고 격려하기 위해, 새로운 힘을 얻도록 하기 위해 우리 주님을 긍휼과 은혜의 주님으로 말하고 있고, 그 주님을 통해 그러한 것들을 공급받음으로 현재의 어려움과 고난을 잘 극복하고 전진할 것을 격려하고 권하고 있는 것이다. 히브리서 4장 15, 16절에서는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하는 자가 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고 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와 같이 온갖 시험을 받은 자로서 우리의 연약함을 잘 알고 체휼하시는 분, 불쌍히 여겨 도우시는 분이시다. 그는 이론이나, 생각만 가지고 그렇게 하는 분이 시고, 우리가 당하는 온갖 시험을 자신도 당하셨기 때문에 어느 누구보다도 우리의 상황과 처지를 잘 알고서 불쌍히 여김으로 은혜를 베푸시며, 도우시는 분이시다. 주 예수님께서 그러한 분으로 역사 하시는 것은 그가 우리와 같은 육신을 입고 오셔서 이 땅에서 혈육을 입은 사람의 삶을 사셨기 때문이다(물론, 그는 죄가 없으신 분이시다). 주 예수님은 여러 가지 목적을 이루기 위해 육체를 입으심으로 말미암아 이 땅에서 일반 사람들이 겪는 온갖 고초를 다 겪으셨다. 그리하여 그는 고난을 당하는 자들의 처지와 형편을 아시고 그러한 일들을 당하는 자들을 불쌍히 여기는 가운데서 기꺼이 도우시는 것이다. 히브리서 2장 17, 18절에서는 “그러므로 저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구속하려 하심이라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고 했다. 우리 주님께서 형제들과 같이 육신을 입으심으로(히 2:14), 사람이 되심으로 우리가 겪는 온갖 고난과 시험을 받으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자신이 당한 어려움과 고초를 당하는 자들의 심정을 잘 아시는 가운데, 그러한 처지에 있는 자들을 불쌍히 여기사 은혜를 베푸시는 것이다. 우리 주 예수님께서 육체를 입고 오신 것은 단지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고 돌아가심으로 인간들의 죄악의 문제를 해결해 주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지금 말하고 있는 이러한 일을 위해서이기도 하다.
그런데 우리가 은혜를 말할 때 먼저 오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긍휼이나, 자비함이나, 불쌍히 여김, 측은하게 여김 등이다. 이러한 것들은 그러한 것들을 받을 특별한 일을 하지 아니했을지라도, 심지어 죄를 범했을지라도 요청할 수 있는 것들이다. 물론, 사랑 안에 긍휼이나, 자비함이나, 불쌍히 여김이나, 은혜가 다 포함되지만, 긍휼이나, 자비는 은혜보다도 더 깊고, 넓고, 높은 것이다. 그러므로 불쌍히 여기거나, 측은히 여길 때에 은혜를 베풀 수 있다. 누가복음 15장 17∼23절에서는 “이에 스스로 돌이켜 가로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군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군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상거가 먼 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아들이 가로되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하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라고 했다. 아버지의 재산을 미리 분배 받아 타국으로 가서 거기서 그 재산을 허랑방탕하게 탕진한 후에 굶어 죽게 되어 아버지의 아들의 명분으로는 돌아오지 못하고 ‘품군들 중 하나로 보아 주소서’라는 심정으로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었다고 했다. 그렇게 하고서는 종들에게 명하여 그 아들에게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게 하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게 했다. 그리고 그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아 먹게 했다. 이것은 자신의 재산을 허랑방탕하게 다 탕진한 아들을 측은히 여기는 가운데서 은혜를 베푸신 것이다. 이렇게 우리 주님은 우리가 범죄함으로 멸망을 시켜야 하는 데도 불구하고 측은히 여기사 은혜를 베푸신다. 에베소서 2장 3∼5절에서는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고 했다.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함으로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지만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으로 은혜를 베푸사 우리를 구원하셨다. 우리는 주님을 대적하고 범죄함으로 주님의 무서운 심판을 받아 멸망을 받아야 했지만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의 크신 사랑으로 은혜를 베푸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셨다. 이렇게 하나님의 긍휼과 그로 인한 은혜는 참으로 복되고 놀라운 것이다. 많은 핍박과 고난을 당하여 약하고 피곤하고 지쳐있는 유대인 믿는 자들에게(히 12:12) 대제사장이신 주님께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해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라고 했다. 우리 또한 악하고 거짓된 마귀가 세상 임금이 되어 활동하는 세상에서(요 12:31, 14:30, 16:11) 생활하므로 온갖 핍박과 고난 가운데서 피곤하고 지치고, 약해져 있으므로 낙심하거나, 좌절하거나, 포기하는 대신에 긍휼이 풍성하시고 은혜로우신 주님, 그의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 그의 은혜를 누리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우리 주님은 그 자신이 육체를 입고 오셔서 온갖 고초와 핍박과 박해와 시험을 당하셨기 때문에 그러한 고난 받은 자들의 처지를 잘 이해하시고 불쌍히 여기는 가운데 은혜 베푸시기를 좋아한다. 그러므로 긍휼이 많으시고 은혜로우신 주님께로 나아간다면 분명히 불쌍히 여기는 가운데서 은혜를 베푸실 것이다. 이사야 49장 13∼15절에서는 “하늘이여 노래하라 땅이여 기뻐하라 산들이여 즐거이 노래하라 여호와가 그 백성을 위로하였은즉 그 고난 당한 자를 긍휼히 여길 것임이니라 오직 시온이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나를 버리시며 주께서 나를 잊으셨다 하였거니와 여인이 어찌 그 젖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찌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고 했다. 여인은 자기의 태에서 난 자를 잊지 않고 긍휼히 여긴다고 했다. 엄마보다 더 사랑이 많으신 주님께서는 고난 당한 그 백성을 위로하고 긍휼히 여기신다고 했다. 우리 주님은 사랑이 많으신 분으로서 고난 당한 자들을 멸시하거나, 구박하거나, 내어 쫓지 않고 긍휼히 여긴다고 했다. 우리 주님은 이러한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어려움이나, 고난이나, 핍박을 받을 때에 자기 연민에 빠지거나, 낙심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긍휼히 여기시는 주님께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비록 잘못을 저질렀고, 아무런 선을 행하지 아니했을지라도 긍휼히 여기는 주님께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그것도 어쩔 수 없이, 힘없이, 겨우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담대하게 나아갈 수 있다.
히브리서 4장 15, 16절에서는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고 했다. 우리가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해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주님께 특별한 일을 해서가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와 같이 많은 미혹과 고난을 당하사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기 때문에, 그에게 나아오는 자를 내어 쫓지 아니할 것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요 6:37), 이를 믿고 주님 앞에,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는 것이다. 이것은 결코 뻔뻔한 것이 아니라, 긍휼과 은혜가 많으신 주님을 기쁘게 하는 것이다. 많은 어려움과 고난에 처해 있을 때에 자기 자신의 힘과 능력으로 스스로 해결하려고 하는 사람보다, 주님께서는 그러한 상황에서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해 그 앞으로 나아오는 자를 기뻐 받으신다. 우리에게는 이렇게 긍휼이 풍성하셔서 은혜를 베푸시는 주님이 계시기에,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기에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낙심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살 수 있는 것이다(히 4:15, 16; 롬 12: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