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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장에서 36장까지의 의미분석 | ||
선민의 열조와의 언약 | ||
12~20장 아브라함과의 언약 | 21-26장 이삭의 언약 계승 | 27~36장 야곱의 언약 계승 |
12-14장 가나안 땅 언약 15-16장 자손 번창 언약 17-20장 열국 통치 언약 | 21-23장 언약 계승의 준비 24-26장 언약 계승의 실현 | 27-28장 야곱이 받은 복과 언약 29-36장 야곱의 복과 언약 성취 (33~34장 숙곳과 세겜 성 정복) |
33장을 보시면 야곱의 변화된 상태가 확인됩니다.
하나님께서 축복하시며 새롭게 주신 이름 ‘이스라엘’은, 환도뼈 위골로 말미암아 육신은 죽은 상태가 되었고 영적으로 소생한 상태가 됩니다. 앞선 32장에서는 형 에서의 마음을 얻고자 많은 제물과 종들과 아내와 아들들마저 앞에 보내며 온갖 인간적 수단으로 자기 목숨 챙기기에 바빴었는데, 33장에서 확인하는 바는 야곱이 완전히 변한 모습 즉, 자신이 죽은 모습으로 에서에게 다가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1절부터 17절까지의 말씀은 야곱이 형 에서를 상봉하고 숙곳에서 거주하게 된다는 내용입니다.
야곱이 눈을 들어보니 형 에서가 장정 사백 명을 거느리고 오는 것을 보고 레아와 라헬과 자식들을 뒤로 하고서 “자기(야곱)는 그들 앞에서 나아가되 몸을 일곱 번 땅에 굽히며 그의 형 에서에게 가까이”갑니다(1~3절). 야곱은 스스로 가장 앞에 서서 형 에서에게로 나아간 것입니다. 그리고 죽고자 몸을 굽힙니다. 아니 죽어서 몸을 굽히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하셨습니다.
위 본문에서 ‘몸을 일곱 번 땅에 굽히며’에서 ‘일곱 번’은 고대 근동 사람들에게 있어서 ‘완전함’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야곱이 에서에게 일곱 번 몸을 굽혔다는 것은 야곱이 형 에서에게 지은 죄에 대하여 죽고자 하는 마음을 표현하고 그리고 ‘땅에 굽히며’라는 것은 ‘엎드렸다’, ‘절하다’란 뜻으로서 이는 머리를 약간 숙이고 절하는 것이 아니라, 머리가 땅에 닿을 정도까지 몸을 완전히 굽히고 낮추어 절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먼 발치에서 가까이 나아가던 방식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삭의 축복을 야곱에게 계승하시고자 야곱의 환도뼈를 치셔서 죽게 하시고 그리고 이름을 ‘이스라엘’로 개명하십니다. 지금까지는 ‘야곱’(속이는 자)으로 살게 하시다가 이제는 지팡이를 의지하고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는 가운데에 앞장서서 ‘죽으면 죽으리이다’라는 심정으로 형 에서에게 나아가게 하십니다. 그리고 여러 문제로 캄캄한 가운데서 헤매도록 하시다가 빛으로 인도하여 주시고 고향으로 발걸음을 옮기게 하신 것입니다.
야곱은 이제 지팡이를 의지하며 살아갑니다. 이 지팡이는 영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만 의지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이스라엘을 이끄도록 지팡이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양들을 돌보는 목자는 지팡이를 지녔습니다. 인생은 죽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날마다 자신은 죽는다’라고 신앙 고백합니다.
교회는 이렇게 하나님과 싸워 이긴 자들이 모인 무리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낮고 낮은 땅에 보내셔서 자기 백성들, 곧 죄인된 자들로 하여금 아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게 하시고 그리고 천국에 데려가시는 것입니다. 나의 죄가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게 한 것입니다. 야곱과 같은, 믿음 없이 철저하게 인본적이며 자기중심적이요 욕심쟁이며 벌레보다 못한 우리를, ‘예수믿는 자 ’ 바꾸셔서 하늘나라로 이끌어가시는 분이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십자가의 능력이 우리 안에 있어서 이제 그를 믿는 믿음으로 인해 우리 성도는 죄를 이길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주의 말씀과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께서 우리로 이기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할 수 없으나 주께서 우리를 언약 안에서 부르셨고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새롭게 하셔서 주의 나라를 세우는데 사용해 가십니다.
4절부터 에서의 반응을 말씀합니다. 얍복강을 건너 다가오는 야곱을 향해 에서는 동생 야곱의 목을 끌어안고 입맞추며 웁니다(4절). 야곱이 생각하고 있었던 것과는 정반대의 태도를 에서가 보여준 것입니다. 야곱은 자기가 처음 고향을 떠날 때에 에서가 자기를 죽이려 하였기 때문에 아직도 자기를 만나면 죽이려 할 것이라고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에서는 도리어 야곱을 눈물과 입맞춤으로 환영하여 준 것입니다. 이것이 여호와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에서가 달려가서 그를 맞이하여 안고 목을 어긋맞추어 그와 입맞추고 서로 우니라”(4절)를 좀 자세히 분석해 보면, 에서의 다섯 가지 동작이 표현됩니다. ‘달려가서’ ‘안고’ ‘어긋맞추어’ ‘입맞추고’ ‘우니라’입니다. 이러한 동작에는 모두 ‘그리고’라는 계속적 히브리어 ‘와우(ו)’가 사용되었습니다.
이것은 에서의 동작 하나하나를 힘주어 강조하고 있고, 형 에서가 그의 사랑을 얼마나 강하게 표현하고 있는가를 성경 기자가 강조하기 위한 것입니다. 즉 에서는 야곱이 인사를 마치자마자 ‘달려갔다, 그리고 그를 감싸 안았다. 그리고 그와 서로 목을 교차하였다. 그리고 입맞추었다. 그리고 서로 울었다’입니다.
야곱을 향한 에서의 다섯 가지 표현에서 앞의 4가지, ‘달려갔다’ ‘감싸 안았다’ ‘목을 교차하였다’ ‘입맞추다’는 모두 단수형으로 쓰여 에서가 주도적으로 달려가서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머지 한 가지의 ‘서로 울었다’는 복수형으로 쓰여 야곱과 에서가 함께 울었음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자신의 장자권과 언약의 계승권을 속여 빼앗은 증오의 대상이었던 야곱을 이와 같이 반갑고 뜨겁게 맞이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에 온기를 불어 넣으셔서 야곱을 보호하고 맞이하도록 하셨기 때문입니다.
만일, 에서가 야곱을 해하거나 죽일 경우에는 여호와의 언약이 모두 거짓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 하나님께서 에서로 하여금 야곱을 선대하도록 섭리하신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세우신 언약을 이루어 주시려고 야곱의 생명도, 그의 아내와 자녀의 생명도, 그의 종과 모든 소유도 다 주관하시고 보호하십니다. 에서가 야곱을 다정하게 영접한 사실은, 형 에서가 동생 야곱을 용서하고 야곱은 형에 대한 고마움을 보답하는 단순한 형제간의 우애가 아닙니다.
이 사건은 언약 성취를 통한 여호와 하나님의 계시 섭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사건입니다. 여호와께서는 에서와 야곱이 어머니 리브가의 태중에 있을 때에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창25:23)고 언약하신 바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에서보다 야곱이 강하고 큰 자 에서가 어린 자 야곱을 섬기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에서가 야곱을 해하거나 죽이지 아니하고 다정하게 영접하는 것입니다. 언약자손 야곱은 죽지 아니하도록 여호와 하나님께서 작정하여 놓으신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모든 만사를 다 작정하여 놓으시고 섭리하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작정 섭리를 대부분의 사람들은 믿으려고 하지 아니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만사 만물에 대한 작정 섭리와 인간을 선택하시고 버리시는 예정 섭리는 성경이 확고히 증언하는 하나님의 중대한 사역입니다. 그러한데도 믿기를 꺼려하는 자들은 예정론이 철학에서 말하는 운명론과 같은 것으로 착각을 하며 목소리를 높입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예정론과 철학에서 말하는 운명론은 그 본질에서 근본적으로 달리합니다. 예정론은 주관자를 비롯하여 사건의 의미와 목적이 분명하게 있으나 운명론은 그 모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예정론은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사건의 의미와 목적을 두고 주관하시는 섭리입니다. 그러나 운명론은 어떤 사건이 주관자를 비롯하여 아무런 의미나 목적이 없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결과만을 보고서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 자들은 예정론을 말하고 부정하는 자들은 운명론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예정론과 운명론은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하나님께서 어머니 태중에서부터 야곱은 선택하여 그 후손으로 언약 자손을 삼으시고, 에서는 버리셔서 그 후손으로 하여금 이방 족속을 이루게 하십니다. 그래서 선택받은 야곱이 형 에서를 만났어도 죽지 아니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
야곱과 입맞추기를 마친 에서는 야곱의 뒤를 따라온 여인들과 자식들을 보고 누구냐고 묻는데 이에 “야곱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의 종에게 은혜로 주신 자식들이니이다”(5절)라고 대답합니다. 이 말의 뜻은,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이 자신을 불쌍히 여기시고 긍휼히 여기셔서, 야곱 자신이 행한 어떤 것에 대한 보상으로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아무런 조건없이 거저 주셨다는 의미입니다.
그 때에 아내와 자식들은 차례대로 에서에게 나아 와서 절을 합니다(6,7절). 가장 앞서 있었던 여종들과 그의 자식들이 먼저 절하고서 그 다음에 레아와 그 자식들이 절하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요셉이 어머니 라헬과 함께 에서에게 절을 합니다. 이들 모두는, 본문 3절에서 야곱이 행했던 모습과 동일한 방식으로 절을 했습니다.
에서는 또 야곱에게 묻기를 “내가 만난 바 이 모든 떼는 무슨 까닭이냐 야곱이 이르되 내 주께 은혜를 입으려 하나이다”라며 형에게 예물 받기를 권하지만(8절) 에서는 사양합니다(9절). 하지만 야곱은 강권하여 에서가 예물을 받도록 권하고, 에서는 야곱의 강권함에 예물들을 받아들입니다(10,11절).
한편 고대 근동 사회에서 예물은 주로 상호간의 우호 및 화해의 증표로 사용되었습니다. 따라서 예물을 상대방이 흔쾌히 받아들이면 화해 및 친선 관계가 형성되는 것이고 반대로 거절하면 화해할 생각이나 의사가 없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야곱이 형 에서에게 예물을 준 것은 단순히 환심을 사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이는 에서와의 모든 적대 관계를 청산하고 새롭게 화해된 관계로의 개선을 바라는 의미입니다.
야곱의 예물에 대하여 에서는 ‘내게 있는 것이 족하니 네 소유는 네게 두라’(9절)고 합니다. 즉 에서 역시도 많이 가졌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야곱의 예물이 필요치 않다고 하면서 야곱이 가져온 것에 대해 정중하고 간곡한 부탁의 의미로 ‘네게 두라’고 합니다.
만약 에서가 간곡한 부탁이 아닌, 명령으로(네게 두라) 야곱의 화해의 예물을 거절했다면 고대 근동의 관습에 비추어 볼 때 화해를 거절한 것이 됩니다. 하지만 에서는 부탁하는 형식으로 거절하였으나 야곱의 이에 더한 간곡한 부탁을 받고서야 받아들입니다(10,11절).
그리고 에서는 자청하여 야곱을 동행하며 보호하고자 합니다(12절). 그러나 야곱은 자식들의 연약함과 가축들 핑계의 이유로 에서를 먼저 보내고 뒤를 따라 가겠다고 합니다(13,14절). 그래서 자신의 걸음을, ‘앞에 가는 가축과 자식들의 걸음대로’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에서를 만났을 때 아이들의 나이는 약 12세에서 6세가량 된 상태입니다.
이러한 야곱의 말에 형 에서는 야곱과 그의 가족을 호위하는 몇 사람을 머물게 하려 하지만 사양하고(15절), 이에 에서는 그날에 세일로 돌아갑니다(16절). 얍복강에서 어떤 사람 곧 하나님께서 부리는 종에 의해 환도뼈가 위골이 되고 그리고 이름마저 개명이 된 이후의 야곱은 두려움에서 벗어났습니다. 그래서 형 에서와 함께 가는 것이나 도움 받는 것을 여러 가지 핑계와, 천천히 세일로 가서 형에게 나아가겠다는 대답으로 에서의 호의를 사양한 것입니다.
그 날에 에서는 자신이 거주하던 세일로 돌아갔고 형이 떠난 뒤 야곱은 숙곳에 이르러 자기를 위하여 집과 우릿간을 짓습니다. 야곱은 에서를 따라 세일로 가면 안되는 자입니다. 왜냐하면 일찍이 이삭이 에서에게 복을 빌 때에 기름지지 못한 메마른 땅에서 살게 될 것을 예고한 바가 있습니다(창27:39). 바로 그 곳이 에서가 살고 있는 거칠고 메마른 땅 세일이라는 곳입니다.
그러니까 세일은 밧단아람을 떠난 언약백성 야곱이 가서 살 곳이 아닙니다. 그는 어디까지나 여호와께서 주시기로 언약하신 젖과 꿀이 흐르는 기름진 가나안 땅으로 가서 머물러야 합니다. 그러므로 야곱이 에서를 따라가지 아니한 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따른 믿음의 행위입니다. 야곱의 마음을 하나님께서 주관하셔서 따라가지 않게 하신 것입니다.
언뜻 생각하기에는, 야곱이 형을 따라가면 안전하게 보호를 받으며 갈 수가 있고 또한 형과의 관계도 더욱 좋아질 것이라 생각이 됩니다만 그것은 아닙니다. 야곱이 형에게서 해를 입지 않고 살 수 있었던 것은 형의 마음이 변하여 너그러워져서 된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께서 형 에서의 마음을 돌이키게 하셔서 된 것이므로, 야곱은 야곱의 사명의 길로 가야하며 은사따라 가야 합니다. 여호와를 잊지 않는 것이 은혜를 대하는 자세입니다.
성경은, 야곱이 에서를 따라가지 아니한 것과 이후 정착하게 되는 세겜으로 가는 과정에서 또 한 장소를 가리키며 거기서 야곱 일행은 고정된 거처 한 곳을 지적하는데, 그곳 이름이 바로 숙곳이었다는 것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야곱은 속곳에 이르러 자기를 위하여 집을 짓고 그의 가축을 위하여 우릿간을 지었으므로 그 땅 이름을 숙곳이라 부르더라”(17절)
숙곳은 야곱이 고정된 거처로 삼아야 할 장소는 아닙니다. 그런데 그는 ‘자기를 위하여’, ‘가축을 위하여’라고 하면서 ‘집’을 지었다는 것입니다. 이 ‘집’은 이동식이 아닌 고정된 거처를 가리킵니다. 이는 장시간 머물렀음을 말합니다. 이러한 머뭄에 대한 보충적 해석과 설명하는 말씀은 전혀 없습니다. 단지 자신과 가족들과 가축을 위하여 지어 머무른 것을 보면, 잠시 20년의 고난의 길과 삼촌 라반과 형 에서의 두려움에서 모두 완전히 벗어났음을 찍는 쉼표같은 역할의 장소인 것으로 보입니다.
18절에서 20절은 야곱이 세겜 성에 이르러 밭을 사서 단을 쌓는다는 내용입니다.
야곱은 요단 동편 숙곳에 머물다가 요단강을 건너 요단 서편 땅의 세겜으로 이동합니다(p198 지도 참조). “야곱이 밧단아람에서부터 평안히 가나안 땅 세겜 성읍에 이르러 그 성읍 앞에 장막을 치고 그가 장막을 친 밭을 세겜의 아버지 하몰의 아들들의 손에서 백 크시마에 샀으며 거기에 제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엘엘로헤이스라엘이라 불렀더라”(18~20절)
위의 본문에서 유독 눈에 띄는 단어 하나가 있는데 그것은 ‘평안히’입니다. ‘평안히’는 히브리어로 ‘솰렘(ם)’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야곱과 그의 일행을 가나안까지 순조롭게 인도하셨음을 암시해 주는 말입니다. 그리고 야곱이 돌아온 가나안 땅의 정체성을 일깨워주는 단어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약속의 땅이기 때문입니다.
이 단어는 일찍이 야곱이 하란으로 도피할 때 ‘평안히 아비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창28:21)라고 서원 기도할 때도 사용되었습니다. 즉 그 기도의 응답으로 지금까지 함께 하시며 보호하심으로써 벧엘의 약속을 평안하고 완전하게 이행해 주신 것을, ‘야곱이 밧단아람에서부터 평안히 가나안 땅 세겜 성읍에 이르러’로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는 야곱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열조의 조상인 아브라함부터 이삭을 거쳐서 야곱으로 이어진 것입니다.
야곱이 세겜에 이르러서는 세겜의 아버지 하몰의 아들들의 ‘손’에서 성읍 앞 장막을 친 밭을 구입합니다. 그래서 야곱의 소유가 됩니다. 여기서 ‘손’이라는 단어는 신체의 일부분인 손 혹은 팔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상징적으로는 ‘힘’, ‘권능’, ‘능력’ 등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따라서 야곱이 가나안 땅에 거주하던 하몰의 아들들의 손에서 땅을 샀다는 것은, 가나안 땅을 약속하신 여호와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첫 삽이기도 합니다. ‘세겜’은 열조의 조상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언약따라 하란에서 가나안 땅에 들어와서 첫 제단을 쌓은 곳이기도 합니다(창12:6~7)
가나안 땅에 들어왔고 그리고 땅을 구입했다는 것은 야곱에게는 너무나 감격스러운 사건입니다. 야곱이 이십여 년 전에 형 에서를 피하여 떠났다가 큰 거부가 되어 가나안 땅 세겜성에 돌아와 온전한 장막을 치게 되었으니 참으로 감격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몰의 아들들의 손에서 산 땅에서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와 기쁨으로 제단을 쌓고 ‘하나님,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는 뜻으로 ‘엘엘로헤이스라엘’이라고 이름한 것입니다.
곧 하나님이 야곱 자기의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정말 여호와 하나님은 야곱에게 언약하시고 그 언약대로 이루어 주셔서 야곱, 곧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어주신 것입니다. 언약을 세우시고 그 언약을 이루시는 여호와는 언약 자손의 전능자 하나님이 되십니다. 그래서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언약을 세우시고 그 언약을 이루어 주시는 여호와가 언약 자손 야곱의 하나님이 되시는 것입니다.
야곱이 세겜에서 하몰의 아들들의 손에서 밭을 구입하고 거기에 ‘단을 쌓았다’는 것은, 야곱이 그곳에 동물의 희생 제사를 드리는 제단을 만들었다는 것을 의미하고 또한 지난 이십여 년의 모든 세월을 여호와 하나님께 바침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지난 이십여 년간 지켜 주셨고 또 이곳 가나안까지 무사히 언약대로 귀환하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감사의 제단을 쌓았던 것입니다.
‘단’은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야곱이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으로 돌아와 처음 정착한 세겜, 아브라함이 하나님께로부터 언약을 받고 가나안 땅에 들어서서 처음 정착한 곳으로 제단을 쌓은 곳도 세겜입니다. 그곳에서 야곱은 단을 쌓았는데 이것은 곧 자신을 언약대로 이끄신 여호와 하나님과 지속적인 만남을 가지겠다는 믿음의 행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