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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부 난징 1944-1945
1 장 저택
1950년 홍콩에서의 아버지와 나의 관계가 단순한 오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심각 했다. 부자가 모두 노여움과 적대감으로 꽉차 있었다. 우리는 서로를 원망 했다. 무엇 보다도 둘다 영국 식민지에서 살고 싶지 않았다.
홍콩에는 사라져가는 대영 제국의 영화가 아직도 남아 있었다. 교육 정도나 직업에 관계없이 영국인들은 귀족이었다. 영국인들이 아프리카나 아시아 식민지로 가는 것은 마치 영국 상원의원에 당선 되는 것이나 마찬가지 였다. 설령 그들이 영국에서 살 수가 없어서 망명 했다 하더라도 식민지의 영국인은 영국 상원의원 보다 더 높은 대우를 받고 살았다. 잘보이려고 귀찮을 정도로 아첨하는 사람들과 주인의 마음에 들려고 애쓰는 하인들로 둘러 싸인 그들은 교만 했고, 권력을 휘두르며 사치를 만끽 했다. 그들이 가장 두려워 하는 것은 본국으로 소환 되는 것이었다.
아버지도 같은 망명객이었다. 그러나 영국인들과 달리 중국에서는 높은 지위에 있었다. 고위 관리였던 그는 만인의 존경을 받았고 많은 사람들이 그의 도움을 받으려고 찾아 왔다. 그의 망명은
영국인의 망명 처럼 사치스럽고 유쾌 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존경받지 못하는 식민지인이라는 그의 처지를 몹씨 혐오 했다.
나는 홍콩에 오기전에 난징 빈민가에서 어른의 보호 없이 일년을 살았고, 상하이 프랑스 조계지에서 즐거운 4년을 보냈다. 모두 아버지의 무거운 손과 나를 인정하지 않는 시선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다. 이 동안은, 특히 난징 빈민가에서 살던 일년은, 나에게 행복했던 시절이었다. 홍콩으로 온 것은 또 한번의 어른들에 의한 강제이주였다. 나는 10살이었고 나를 익숙하고 편한 환경에서 떼어 놓은 장 본인은 아버지라고 생각 했다.
그렇지만 나보다 아버지는 화나고 절망에 빠질 헤아릴 수 없는 이유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북방계 사람이어서 남쪽 캔톤에 적응 하기 어려웠다. 그는 홍콩에서의 주위 환경을 모두 싫어 했다. 만나고 싶은 사람도 없었다. 말도 통하지 않았다. 문화도 이해 할 수가 없었다. 그는 식민지 통치자들을 미워 했다.
아버지와 나의 관계는 내가 어렸을 때부터 걸끄러 웠다. 이곳 열대 식민지에서 아버지와 나는 상대방을 화나게 하고 절망 시켜 가며 언제 파탄이 날지 모르는 춤추기를 계속할 운명이었다. 아버지는 말과 행동으로 표현 했지만 나는 은밀하고 비밀스럽게 대응 했다. 그것은 삶의 불문율 이었다. 아들은 아버지에게 불만을 품어도 안되고 불만을 표시하는 것은 더구나 허락되지 않았다. 얼마전 만 해도 중국에서는 아버지가 죽으라면 죽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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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1940년에 태어 났다. 내가 다섯살 먹을 때까지 나는 난징에 있는 거대한 저택에서 살 았다.
아버지의 저택은 위압적인 짙은 회색의 높은 벽돌 담으로 둘러 싸여 있었다. 거리에서 쳐다 보면 이 높은 벽이 우리집을 형무소 처럼 보이게 했다. 정문은 우리집을 더욱 형무소와 같은 인상을 주게 했다. 강철로 만들어진 두개의 커다란 육중한 문은 한쪽에 작은 문을 만들어 사람이 걸어 들어 올 수 있게 했다. 두개의 문이 열리면 버스가 통과하고도 여유가 있을 정도 였다.
정문을 통과 하면 차도(드라이브 웨이)가에 로마 싸이프러스 나무가 일렬로 서 있었다. 사이프러스 나무는 섬세하게 유지된 정원을 가려주 고 있었다. 잘 가꾸어 진 잔디밭, 가장자리에는 각종 색깔의 꽃이 심어져 있었고 중앙에는 4개의 실물 크기의 아폴로가 원 모양으로 서서 입에서 물을 뿜고 있는 분수대가 있었다. 거실의 문을 열고 나가면 커다란 베란다가 있었고 대리석으로 된 계단을 따라 내려가면 정원이었다. 저택 뒷 쪽에는 두개의 건물이 있었다. 하나는 거대한 부엌이었고 다른 하나는 12명 이상의 하인들이 살 수 있는 숙소 였다.
나는 절대로 집에서 나가면 안되었다. 이 규칙은 아버지가 만들었고 강철 정문 옆에 설치한 작은 검문소 안에 앉아 있는 무장 보초에 의해서 이 규칙이 시행 되었다. 내가 아팠을 때도 나는 나갈 수가 없었다. 의사가 집에 와서 나를 치료 했다.
나는 집에 꼼짝 없이 갇혀 있는 것을 무척 싫어 했다. 나보다 나이가 많은 5명의 내 형제들은 매일 밖에 나갈 수 있었다. 그저 학교에 가는 것이었지만 그들은 보디가드와 함께 리무진에 타고 집을 나갔다. 그는 우리 형제들을 보호하면서 그들이 학교에서 다른 곳으로 가지 못하게 하는 임무를 수행 했다. 그렇지만 나를 제외한 형제들은 보디가드와 떠들고 장난치고 웃으며 매일 집을 나갔다. 그들과 나는 달랐다. 이 차별이 나에게 감금을 잊어 버릴 수 없는 어릴 적 첫 기억으로 만들었다. 왜 나는 그들 처럼 밖으로 나갈 수 없었는 지 아무도 나에게 설명 해 주지 않았다.
나에게 가해진 규제 때문에 나는 자연히 금단의 벽 밖앗 세상을 무척 궁금해 했다. 어느날 유모와 함께 집안에서 산보 하다가 저쪽 큰 나무 밑에 오줌누러 간다고 하고 유모를 떼어 냈다. 그녀가 안보이자 나는 집 담 위로 올라 가려 했다. 커다란 보리수 나무가 회색 벽 옆에 서 있었다. 높은 나무가지에서 땅으로 수많은 줄기가 자라 뿌리를 내리는 나무이다. 뿌리는 서로 엉켜 격자를 만든다.
나는 담장 꼭대기와 가장 가까운 굵직한 나무줄기를 골랐다. 그리고 그 줄기가 땅으로 두개의 뿌리를 아래로 내리고 있는 것을 확인 했다. 나의 작은 손가락은 두개의 뿌리를 할퀴듯 부여 잡고 나의 발은 다른 쪽 뿌리를 밀며 겨우 나뭇가지에 올라 갔다. 그런 다음 나뭇가지를 타고 담장 위에 도달하는 데 성공 했다.
그러나 내가 밖으로 뛰어 내리기에는 담이 너무 높았다. 나이마, 내 불쌍한 유모는 내가 담장에 두다리를 벌리고 앉아서 몹씨 가보고 싶은 바깥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 동안 나를 찾아 왔다. 내가 그녀를 내려다 보니 그녀의 입술이 무엇인가 말 하려는 것처럼 움직이는 것을 보았으나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두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떼었다. 그녀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고 눈은 동그랗게 커져서 검은 눈동자가 잘 보였다.
“당장 내려와” 그녀의 목소리는 단호 했다. 거절 할 수 없는 명령이었다. 나는 온갖 동작을 동원하여 재 빨리 올라 갔던 방식의 반대로 네 손과 무릎을 긁혀 가며 내려 왔다. 내가 바닥에 내려 오자 마자 유모는 내손을 잡고 저택 안으로 들어 갔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침묵이 그녀가 나에게 할 수 있는 최상의 꾸짖음 이었다. 나는 이때 거의 4살이었다.
내가 바깥 세상에 대한 애착을 달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내 방에 붙어 있는 발코니에서 바깥을 쳐다보는 것이었다. 다행히 내 방은 우리 집 앞 쪽에 있었다. 나는 대낮에 꿈을 꾸듯이 발코니에 앉아서 가끔 바깥을 쳐다 보며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멀리 보이는 마을 앞 밀밭에 동물이 살았는 데 이놈들이 움직이면 밀대가 여느때와 달리 심 하게 흔들렸다. 똑바로 쳐다 보면 벌거숭이 언덕이 아주 작은 경사를 이루며 부드럽게 내려와 우리 아버지 저택 정문 앞 쪽 길과 만났다. 오른 쪽에는 우리집과 같은 비슷 하지만 더큰 저택이 자주 사람들로 번잡을 이루고 있었다. 차들이 줄을 지어 들랑 달랑 하고 군인들이 경례로 맞이하고 하인들이 바쁘게 왔다 갔다 했다. 나이마는 그 사람은 아버지 보다 더 높은 사람이라고 일러 주었다. 나중에 나는 그집 주인이 난징 정부의 부통령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부통령 관저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 외에는 이웃에서는 별일이 없었다. 이웃이라고 하기에는 좀 그렇지만. 중국 도시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상업은 우리집 주위에서는 전혀 이루어 지지 않았다.
아버지는 당시 중국 도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가난과 불결함을 피하기 위해서 일부러 교외에 집을 지었다.
밀이 자라는 것을 쳐다보는 것 외에는 할일이 없는 나는 발코니에 앉아서 새로운 세상을 상상 하는 전문가가 되었다. 지나가는 까마귀는 폭격기, 붕붕 거리는 자동차는 탱크, 밭에서 일하는 두 농부는 전진하는 부대의 정찰병이었다.
그 때는 2차 세계대전 중이었다. 난징은 일본이 만든 허수아비 중국정부의 수도였다. 이 정부는 중국해안 지방과 해안에서 수백 마일 안쪽의 영토를 통치 했다. 2차 대전이 일어나기 몇년 전에 일본은 약 2억이 살고 있는 이 지역을 점령 했다. 주민들은 전쟁과 함께 살고 있었다.
내가 발코니에 앉아있는 동안 내 눈앞에서 전개된 전쟁의 스펙터클은 우리집 앞을 지나가는 일본군대와 장비의 행열이었다. 더 멀리 보이긴 했지만 더욱 나를 신나게 하는 장면은 미국 폭격기가 멋진 편대를 이루고 하늘을 나는 정면이었다. 이러한 볼거리는 나를 때때로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꿈속으로 빠 지게 했다. 내가 집중 할 수 있었던 것들 중 또 하나는 어른들 이야기 하는 것을 어깨너머로 듣는 것이었다. 태평양에서 미군이 서쪽으로 진격하고 있다. 독일이 후 퇴하고 있다. 일본은 군수 물자가 부족 하다. 일본은 잔악한 행위를 하고 있다. 새로운 폭격기와 새로운 무기가 도입되었다 등등. 어른들의 전쟁에 대한 이야기를 다 알아들 수는 없었다. 그러나 나는 그들의 격앙된 어조로 아주 심각한 이야기 임을 알 수 있었다. 나는 열심히 귀를 기울였다.
실제로 사건이 내 앞에서 전개 되어 진짜로 내가 흥분하는 때는 아주 드물 었다. 그런 기념할 만한 장면은 미군 폭격기가 편대를 이루어 높은 하늘에서 폭겨하는 장면이었다. 폭탄은 폭격기의 바닥에서 떨어져 나왔는 데 마치 작은 막대기 처럼 보였다. 나는 고개를 젖히고 폭격기를 쳐다 보았다. 작은 막대기는 수평으로 내려오다가 똑바로 서 면서 빠른 속도로 내려가더니 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내가 서있는 발코니를 포함한 모든 것이 흔들리 더니 일련의 폭발음이 울려 퍼졌다. 감간 후 지평선 넘어로 까만 연기가 치 솟았다. 폭격기가 은색의 티끌 처럼 보이더니 방금 떨어진 포탄 같이 저편 하늘로 사라졌다.
우리는 전쟁에 중요한 시설과 멀리 떨어져 있는 교외에 살았기 때문에 우리 동네는 한번도 폭격을 당 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폭탄이 터지면 사람들이 얼마나 공포에 떠는지를 잘 몰랐다. 철없는 나는
공중폭격을 가슴조이며 즐기면서 상상의 날개를 폈다. 나는 알고 싶은 것들이 많았다.
“비행기안은 어떻게 생겼지? 어떻게 날아가? 비행기 안엔 누가 있어?” 하고 나이마에게 물었다. 나는 불에서 연기가 나는 것은 알고 있었다. “불 나면 사람이 죽어?”
“몰라” “조그만 놈이 물어보는 게 너무 많아!” 나이마는 내가 질문 할 때 마다 똑 같이 대답 했다.사실 폭발 소리가 들리고 연기가 보이면 무엇인가 부서졌을 것이라는 것외에는 나이마도 아무것도 몰랐다.
그녀도 아버지 저택에 오기전에는 비행기를 본적이 없었다. 그녀가 살던 곳은 난징에서 내륙으로 한참 들어가 있는 시골 마을 이어서 공중폭격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었다.
유모는 폭격 구경을 별로 재미 있어 하지 않았다. 그러나 내가 졸라서 나와 함께 발코니로 나와서 나를 팔로 뒤에서 안고 폭발 소리가 울릴 때마다 나를 좌우로 약간씩 밀치며 하늘을 쳐다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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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날 발코니에 앉아서 저택 앞 도로를 쳐다보고 있는데 남자 몇명이 죽을 힘을 다해서 도망가고 있었다. 그들 뒤를 일본군 부대가 쫓아가고 있었다. 도망가는 사람들은 군복도 입고 있지 않았고
무기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남자들은 되도록 빨리 뛰려고 애쓰고 있었고 추격하는 일본군과 간격이 점점 벌어지고 있었다. 남자들이 밀밭으로 들어가자 일본군 병사들은 추격을 멈추고 그들을 겨냥하여 사격을 했다. 총소리가 연달아 들리더니 남자들이 밀밭에 하나 둘 씩 앞으로 꼬끄라지듯 쓰러지는 것을 보았다. 군인들은 서로 떠들고 크게 웃으며 쓰러진 사람들 발을 잡고 질질 끌고 나갔다.
나는 나이마에게 도망가던 사람들이 죽었냐고 물었다. 유모는 파랗게 질려 있었다.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가득 했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끄덕 하더니 내손을 잡고 발코니에서 우리방으로 갔다. 이 장면은 여러날 내마음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내가 처음으로 죽음을 본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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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저택에 같이 사는 식구들과 별로 교류가 없었다. 네 형제들은 나보다 훨씬 나이가 많아서 나를 상대 하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벌써 사춘기였다. 큰 누나는 의과 대학에 다니고 있었다. 다른 형제들은 중학교 아니면 고등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그들은 자기네들끼리 만 놀았다. 나는 그들이 너무나 부러웠다.
부모도 사느라고 바빴다. 나는 어머니가 무엇을 하는지 몰랐다. 그 때 중국에서는 부잣집 아이들은 유모에게 맏겨져서 컸다. 무표정하고 가깝게 느껴지지 않는 우리 어머니는 저택의 다른 건물에서 살았다. 나는 어머니를 거의 보지 못했고 별로 생각하지도 않았다.
나에게 아버지는 공포 스러운 존재 였다. 아버지는 웃지도 않았고 얼굴에 미소를 띄우는 법이 없었다.
그는 언제나 심각한 표정을 지었고 상대방을 위압하는 체격의 소유자 였다.
저택의 널직한 아버지의 서재에는 버릇 잡기 용의 큰 회초리가 준비 되어 있었다. 어느날 나는 혼 나고 있는 두 희생자들의 분통이 터지는 듯한 우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 아파서 고막을 찢는 듯한 날카로운 우는 소리는 나를 벌벌 떨게 했다. 몇십년 후에 어머니가 나에게 집안의 법도를 지키기 위해서 그의 권위를 행사 했던 것이라고 일러 주었다. 매를 맞은 사람은 남자 하인과 여자 하인이 었는데 서로 좋아 하다가 임신이 되었기 때문에 체벌을 받게 된 것이었다. 매 맞은 다음에 그들은 산동 아버지 고향 집으로 돌아 갔다. 저택의 하인들은 원래 모두 그곳에서 왔다.
아버지는 항상근무 중 이었다. 일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서도 모두 나에게 그는 일 하고 있다고
일러 주었다. 그는 거의 집에 오지 않았다. 어쩌다 집에 와도 나와 같이 시간을 보내지 않았다. 나와 나이마가 같이 지내는 숙소는 저택 본관에 붙어 있었다. 방이 둘 있었고 각각 목욕실과 내가 많은 시간을 보냈던 발코니가 있었다. 나이마는 유모의 진짜 이름이 아니고 그녀와 같은 일을 하는 사람을 그렇게 불렀다. 나이는 젖 즉 유 라는 뜻이고 마는 어머니 즉 모라는 뜻이어서 나이마는 유모를 말 한다.
나는 그녀의 진짜 이름을 몰랐다. 나이마는 항상 내옆에 있었다. 그녀는 나를 먹여 주었고 씻어 주었고 나와 같이 놀고 이야기도 해주었고 내가 아풀 때에는 간호도 해주었고 발코니에 앉아 바깥 세상의 볼거리를 찾고 있을 때에도 내옆에 있었다. 잠자리에 들 때면, 내가 무척 싫어 했지만, 그녀는 내 얼굴을 쓰다듬어 주었다. 그녀의 손가락이 내 눈썹과 이마 양쪽을 쓰다듬으면 마음이 가라 앉으면서 억지로 뜨고 있으려는 내눈이 마술 처럼 스르르 감겼다.
내가 아침에 눈을 뜨면 그녀는 내옆에 앉아서 활짝 웃고 있었다. 그녀의 미소는 아름 다웠다. 그녀는 매일 아침마다 나를 귀엽다는 듯이 꼭 안아 주었다.
나이마는 아주 긴 진한 검은 색 머리를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머리를 꼬아서 허벅지에 닿을 정도로 긴 포니테일(말꼬리)을 만들었다. 가끔 나는 포니테일 끝을 두손으로 잡고 그녀는 중간을 꼭 잡은 다음 나를 높이 쳐들고 원을 그리며 빙빙 돌았다. 나는 너무나 좋아서 낄낄 거리고 웃었다.
내가 몹시 불안해 하던가 무서워 할 때 나이마는 오랫동안 사용 했던 전통적인 중국식 치료법으로 나를 가라 앉혔다.
그녀는 자신의 포니 테일에서 강하고 뚜꺼운 머리카락을 잘라 냈다. 앉아 있는 나의 아래 쪽 눈 꺼풀을 까고 눈물 관을 찾은 다음 머리카락을 관 속에 가만히 넣고 부드럽게 비볐다. 다른 쪽 눈에도
똑 같은 시술을 했다. 서양 사람들에게는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눈물관을 들랑날랑하는 머리카락은 내 마음을 어루만져 주는 희열감이 일어 나게 했다. 마치 등의 가려운 곳을 너무 쎄지도 않고 너무 부드럽지도 않은 딱 알맞은 힘으로 긁어 주는 것 같았다. 나이마의 요법은 내 마음을 가라 않지는 데 한번도 실패 하지 않았다.
나이마는 노래 부르기를 좋아 했고 나와 놀이를 하기를 좋아 했다. 내가 그녀와 눈을 마주칠 때마다 그녀에게서 애정이 넘쳐 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의 눈은 아몬드 모양의 진한 갈색이 었는데
암사슴의 눈처럼 촉촉하고 반짝 거렸다. 그녀의 강하고 굳은 턱, 검은 눈썹, 감각적인 입술은 강하고 믿을 만한 여자라는 인상을 주었다. 코는 크지도 않고 납작하지도 않은 그저 보통 중국 사람 코 였다. 잘 다듬어진 우아함이 없었기 때문에 나이마가 미인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녀의 에너지, 활달함, 쾌활한 성격은 그녀만이 가지고 있는 방식으로 그녀를 건전하고 매력있게 만들었다.
그리고 내가 생각하기에 그녀는 아름다웠다.
어느 일요일 아침 눈을 떠 보니 나이마가 나를 안고 있어서 놀라기는 했지만 기분은 좋았다. 때로는 그녀가 내옆에서 자기도 했다. 그러나 그날 아침에는 나를 무릎에 않지고 두 팔로 꼭 안고 앞 뒤로 흔들어 주었다. 우리는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내가 좋아 하는 민요를 조용히 불러 주었다. 그녀는 내가 아프거나 불안해 할 때 이 노래를 불러 주었다.
“멀고먼 나라에 어여쁜 하녀가 있었는데
그녀는 어린 소년과 함께 살았다.
하녀는 그와 인연을 맺었고
그들의 사랑은 기쁨 이었다.
그것은 이별(?)에서 오는 슬픔의 원인이…. “
그녀의 노랫소리에 만족해 하면서, 아직도 잠에서 덜 깬 눈으로 나이마를 쳐다 보았다. 그녀는 웃고 있었지만 여느 때와 같은 아무 거리낌 없는 환한 미소가 아니었다. 그의 입은 피곤해 보였고 눈은 슬프고 긴장되어 보였다. 갑자기 정신이 확 들었다. 눈을 크게 뜨고 그녀를 쳐다 보며 원인을 찾아 보려 했지만 더 혼돈 스러워 지기만 했다. 나는 한번도 그녀가 이렇게 강하게 감정을 들어내는 것을 본적이 없었다.
“나이마, 아무일도 없어? 괜찮아?” 내가 이렇게 물어 보자 눈물이 그녀의 볼에 흘러 내렸다. 나는
작은 손으로 눈물을 훔치려고 했지만 그치지 않았다. 나는 너무나 놀라서 그만 울음을 터트렸다.
그러자 그녀의 눈물이 금방 말라 버렸다. 그녀는 몸을 추스려 자세를 바로잡은 다음 나이마는 나를 보살펴 주는 유모의 표정으로 돌아 갔다.
“아무일 없다. 애기야!, 다 괜찮아. “그녀는 손수건으로 내 눈물을 닦아 주었지만 눈물은 그치지 않았다.
너는 놀라서 울기 시작 했다. 그러자 그녀는 당장 눈물을 그쳤다. 나이마는 자세를 바로잡고 나를 보살피는 본래의 임무로 돌아 갔다. “아무일 없어, 애기야! 괜찮아” 그녀는 손수건으로 내 볼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그녀가 나를 안심 시키자 질문을 계속 했다. “왜 울었어?” 잠깐 침묵이 흘렀다. 그녀는
어떻게 말해야 될 까 생각하고 있는 것 처럼 보였다.
“애기야” 그녀는 결국 털어 놓기 시작 했다. “내가 너를 키우기 위해서 이곳에 온지도 벌써 4년이 지났다. 그 때 너는 이렇게 작았서” 그녀는 양손을 조금 벌려 내가 갓난 아이였을 때의 크기를 보여 주며 말했다. 그리고 그녀는 4년전을 떠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이벤 너는 말도 하고, 뛰어 다니고,
뭐든지 잘 먹어! 넌 이제 애기가 아니야. 너는 엄마 아빠와 같이 지내야 해”
나는 어쩔줄을 몰랐다. “그렇지만 유모는 우리 엄마 아빠야!” 이 말을 듣고 나이마는 감격어린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나는 아무리 노력해도 네 아버지가 될 수 없다. 나는 네 유모 다.” 울음 섞인 목소리였다. “나는 너에게 젖을 주려고 왔서. 그러나 넌 이제 젖이 필요 없어. 난 여기서나가야 해.”
그녀는 고개를 아래로 숙이며 나를 꼭 안아 주었다. “난 유모를 떠나게 놔두지 않을 거야.” 나는 네코를 그녀의 알굴에 가만히 비비면서 조용히 말 했다. “잘들어, 이 꼬마야! 네 아버지는 이미 그렇게 하기로 결정했어. 때가 되었어. 나는 고향으로 돌아가야 해. 오늘 나는 떠나야 해.”
나는 그녀의 말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아버지 어머니는 왜 그럴까? 그들은 네 세상을 산산조각이 나게 하려는 심산이었다. 아무도 나에게 나이마가 저 멀리 떨어져 있는 마을에서 살아야 하기 때문에 언젠가는 나를 떠날 것이라고 설명 해 준 적이 없었다. 여러해 후에 나는 유모가 이곳에 오기 직전에
자신의 아이를 분만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유모는 내가 난지 한달 되었을 때 우리 집에 왔다.
그녀는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 자신의 아기를 집에 놓아 두고 우리집에 와서 대신에 나를 키웠던 것이다. 그녀에게는 가슴을 후벼 파는 일이었을 것이다. 유아 였던 내가 그녀의 슬픔을 알아 차릴 수는 없었다. 내가 기억 할 수 있는 능력이 발달 할 무렵에는 그녀는 나에게 익숙해 졌을 뿐만 아니라 마치 내가 그녀의 친자식 처럼 서로 가까워 졌다.
분만 한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친자식을 버리고 나에게 오다니! 그녀는 견딜 수 없게 슬펐을 것이다.
나에게 나이마는 단순한 유모가 이니었다. 그녀는 따뜻함, 애정, 편안 함, 안전, 행복, 동무 였다.
나는 아버지가 그녀를 보내기로 결정 했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내 작은 뇌가 작동하기 시작 하더니 해결 방법을 찾아 냈다. “유모가 날 데리고 가!” 내말을 들은 이모는 부드러움과 사랑이 가득찬 미소를 지었다. 이 미소는 내 기억속에 새겨 져서 이날 까지도 눈에 선하다.
“안돼, 애기야, 너는 나랑 가길 원하지 않아. 넌 아주 특별한 집안 아이야. 나는 가난한 집에서 왔서. 넌 내 아들이 아니야. 그럴 수도 없어. 허락하지도 않을 거야.”
그녀의 말은 수수께끼였다. 왜 그럴 수 없어? 누가 못하게 해? 나는 나이마의 아들이라고 생각 했다. 왜 그녀는 내가 그녀의 자식 이라고 하지 않을 까? 어쨌든 그녀의 대답은 나의 해결책이 작동하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했다.
둘다 입을 다물었다. 얼마지나지 않아서 문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남자 하인이 고개를 내밀고 “차가 대기 중입니다.” 하고 알려 주었다. 나이마는 허리에 닿는 청삼(cheongsam)을 바로 잡으며 일어 났다. 그녀는 당시 여자 하인들 처럼 청삼에 검은 바지를 입고 있었다. 그녀는 남자 하인에게 여행가방을 넘겨 주었다. 그 여행가방은 둘이서 이야기하는 동안 침대가에 있었는 데 나는 이제야 그것이 거기 있었는 지 알았다. 그녀는 나를 추겨 들어 두팔에 안고 드라브워이에서 기다리고 있는 어머니 차를 향해서 층계를 내려가기 시작 했다. 그녀가 집에서 나가는 데 대해서 저항할 의지를 잃 은 나는 정신나간 것처럼 멍했다.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감정이 복받쳐 나는 혼란 스러웠고 무 감각이 되었다. 보고 듣기는 했지만 아무것도 뇌에 박히지 않았다.
나이마는 차 옆에 나를 내려 놓았다. 그녀는 내 어깨에 손을 얻고 무엇이라고 말 하려고 했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눈물이 앞서서 숨이 막힌 그녀는 나를 쳐다 보며 자세를 바로 잡으려고 애를 섰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래 나이마가 떠난다. 나는 울부짖기 시작 했다. “가지마! 가지마! 나이마 가지마!” 흐느끼는 소리가 나의 외침사이에 경련처럼 세어 나왔다. 나는 그녀의 왼쪽 소매를
부여 잡고 그녀가 차에 타는 것을 막으려 했다. 나이마는 그자리에 선 채로 흐느껴 울기 시작 했다.
나이마를 떠나게 하기위해서 남자 하인이 네뒤에서 붙잡아 나이마에게서 떼어 내려고 하자 나이마 소매를 잡은 오른손을 놓지 않고 옆으로 가서 맘자하인의 정강이를 힘껏 발로 차버렸다. 그는 아파서 소리 질렀다. 나는 나이마를 붙잡고 게속해서 울부짖으며 가지마라고 외쳤다.
내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다 얼어 붙었다. 갑자기 나는 공중에 떠 있었다. 누군가가 나를 등뒤 셔츠를 잡고 들어올리고 있었다. 본능적으로 두발을 허우적 거리며 디딜 땅을 찾았지만 소용 없었다.
나는 거의 수평이 되어 떠있었지만 오른쪽 팔은 아래 쪽으로 뻗은 채로 나이마의 소매를 잡고 있었다.
다음 순간에 어떤 손이 아주 쎄게 내팔을 내려 쳤다. 팔에 감각이 없어지면서 나이마의 소매가 내손가락에서 빠져 나갔다. 나는 나를 때린 사람을 보려고 몸을 비틀었다. 아버지 였다.
그는 발버둥치는 나를 나이마로 부터 떼어내서 강아지 처럼 끌고 나갔다. “후아이 단(나쁜 놈), 후아이 단(나쁜 놈)!” 나는 숨이 넘어가라고 소리쳤다. 내눈물은 땅에 줄줄 흘러 내렸다. 나는 그의 얼굴을 볼 수 없었지만 그의 팔은 내 갈비뼈를 불렀고 나는 숨쉬기 힘들어 졌다.
그는 나를 집안으로 데리고 들어가 목욕실에 던져놓고 문을 잠그었다. 목욕실에 갖혀 있는 동안 나는 내가 알고 있는 모든 욕을 동원하여 그를 저주 했다. 그리고 어느날 나는 똑같이 복수 하겠다고 결심 했다.
다음날 아침 어머니는 아버지가 출근 한 후 나를 목욕실에서 꺼내 주었다. 그녀는 높은 목의 셔츠를 입고 있었고 머리는 윤기나는 검정 색 매듭을 만들어 뒤쪽으로 젖히고 있었다. 귓불에는 진주가 번쩍 거렸다.
“이 세상 아무도 제 아버지를 나쁜 놈이라고 부르 지 않아” 그녀는 무정하게 말 했다. “더군다나 식구들이 다 있는 데서. 아버지는 지금 화가 대단히 낫서.” 후에이 단”은 문자 그대로 “썩은 달걀”이라는 뜻이지만 “개새끼”라고 하는 것과 비슷 했다.
나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조금 있다가 어머니는 약간 어깨를 으쓱하더니 방을 나갔다. 어머니의 훈계는 나를 뉘우치게 하지도 않았고 나에게 깊은 인상을 주지도 않았다. 나는 우울증에 빠졌다. 조금 밖에 먹지 않았고 아무한테도 말을 하지 않았다. 전에 내가 그렇게 원했던 형과 누나들의 자기네 방에서 같이 놀자는 초대에도 응하지 않았다. 이틀 후에 어머니는 나에게 아들은 아버지에게 화낼 권리가 없다고 훈계 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속으로 나는 전혀 동의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나를 올바르게 대접해 주지 않았다. 확실히 그랬다. 그는 나이마를 나에게서 떼어 놓았고 내가 너무나 좋아 하던 것들을 수술 칼로 베어 내듯이 빼앗아 갔다. 그는 나의 작은 체구와 어린나이
임을 이용하여 힘으로 나를 제압 했다. 나는 조용히 분노를 가라않지며 그에게서 도망가려는 꿈을 꾸고 있었다.
나이마가 나간지 일주일 만에 어머니는 12살 먹은 여자 아이를 나의 놀이친구 하라고 집으로 데려왔다. 놀이친구의 이름은 주안-주안이었고 고아원에 살고 있었는데 양녀로 입양한 것이었다.
그 당시 부잣집 사람들은 고아원에 걸어 들어가서 몇분만에 아이를 데리고 나올 수 있었다. 고아원은 집없는 아이들로 넘쳐 났다. 아이들이 매일 학대 받고, 인질로 잡히고, 팔리고, 살인당하거나 굶어 죽는 일이 비일비재 했다. 고아원에서는 누군가가 그냥 와서 아이들을 데려 가기를 바랐다. 특히 부자를 환영 했다. 원서나 서류도 필요 없었다. 인터뷰도 하지 않았고 아무것도 물어 보지 않았다. 중계역활과 집안을 알아 보는 소셜 워커도 없었다. 고아원은 부유하고 안정된 집안은 아이를 사고 파는 일에 관여하지 않을 것이라고 가정 했다. 아이들 인신매매는 19세기에서 20세기 중반 까지 중국에서 잘나가는 사업이었다. 어쨌든 고아원은 아이 하나가 입양 되면 또 다른 고아를 받아들일 수 있는 자리가 생겼다.
새로 입양한 놀이 친구 주안-주안은 알고 보니 무기력하고 무뚝뚝 했다. 그녀는 나이마와는 전혀 달랐다. 나를 보살필 줄도 몰랐고 하고 싶어하지도 않았다. 옛날 이야기도 할 줄 몰랐다. 놀이 하기도 노래부르기도 좋아하지 않았다. 그녀는 도대체 관심있는 것이 없었다. 그녀가 좋아하는 소일거리는 그저 경직되어 앉아 있는 것이었다. 그녀는 정말 앉아 있기만 했다. 여러분도 이미 알아 차렸을 것이지만 내가 가장 싫어 하는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누워 있거나 앉아 있는 것이었다. 나는 발코니에서 바깥 세상을 여러시간 동안 처다보고 있을 때도 내 두발로 서 있었다. 나는 5살 가까이 되었고 지나치게 활동적이었고 모든것에 호기심을 가지고 있었다. 나에게는 삶은 지쳐서 쓰러져 잘때까지 쉬지 않고 움직이는 활동 그 자체 였다.
어느날 나는 주안-주안에게 앉아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느냐고 물었다. “아니, 난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아,” 그냥 쉬고 있어.” 라고 대답했다. 대낮에 멀쩡하게 깨어 있는 데 가만히 앉아서 쉬어야 할 까? 나는 주안-주안의 대답을 믿을 수가 없었다. 사람은 몸이 아프거나 깜깜한 밤에나 쉰다. 대낮의 반대인 별로 탐탁치 않은 저녁이 되어야 사람들은 할 수 없이 잔다고 생각 했다. 때로는 자지 않고 놀게 왜 해가 24시간 동안 떠 있지 않을 까 하는 의문이 떠오르기도 했다.
하지만 주안-주안은 마치 영원한 암흑을 원하는 것 처럼, 그녀를 둘러 싸고 있는 것들을 느끼고 듣기를 원하지 않는 것 처럼 그녀는 항상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서 쉬려고만 했다. 그녀가 너무나 움직이지 않고 게을 러서 살아있는 생물이라기 보다는 앉아 있는 동상이라고 생각 했다.
그녀가 내 숙소에서 같이 살려고 온 다음 부터, 나에게는 전쟁에 대한 환상에 사로잡혀 발코니에 혼자 앉아서 보내는 시간이 점점 더 많아 졌다. 정기적으로 미국 폭격기가 와서 싫고온 폭탄을 떨어 트렸지만 너무 자주 보아서 별로 재미가 없었다. 나는 여러 달 전에 보았던 일본병사들이 도망가는 사람들을 총으로 쏘는 것같이 신나는 장면을 보고 싶었다. 그 사건은 나를 겁먹게 했지만 죽음에 대한 호기심을 불러 일으켰다. 죽음은 잠드는 것과 같은 것일 까? 나이마와 이별하는 것 처럼 나를 괴롭힐 까? 죽음은 잠드는 것 같이 그냥 일어나는 것일 까? 도망가는 사람들이 일본 병사들 총에 맞았을 때 비명을 지르거나 울부짖었는 지 기억 할 수가 없었다. 내 기억에는 그들은 그냥 쓰러졌다. 이제 자는 그장면을 다시 한번 보고 싶다. 그러면 아마 내가 가지고 있는 의문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사건은 반복되지 않았다. 대신에 하루가 아무 변화 없이 규칙적으로 맥없이 지나갔다.
내 생활은 나이마가 떠난 다음에는 예전 갖지 않았다. 나는 자주 절망에 빠지거나 화가 나 있었다. 나이마가 다시 돌아오지 않아서 절망 했고 아버지가 나이마를 집으로 보냈기에 나는 화가 났다. 나는 주안-주안을 무시하고 아버지를 원망하며 우울해서 땅바닥에서 딩굴딩굴 했다. 그러나 이런 상태는 오래가지 않았다. 내 인생을 바꾸어 놓은 다른 사건이 발생 했다.
나이마가 떠난지 한두달 후 지프차 한대가 저택 마당에 들어 왔다. 몇명의 사복 차림의 에이전트가 경기관총을 흔들며 뛰어 내렸다. 그들은 우리집 가드의 권총을 정문을 통과 하면서 이미 압수 한 후
였다. 나는 발코니에 앉아서 이 드라마가 펼쳐지고 있는 것을 보고 있었다. 사복의 에이전트는 권위적이었고 위협적이었다. 그들은 집안으로 말한마디 하지 않고 들어 왔다.
몇분 후에 에이전트들은 평상북을 입은 아버지를 웨어싸고 다시 마당으로 나왔다. 내가 넥타이와 양복 차림이 아닌 아버지를 것을 보기는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 그러나 에이전트들이 그를 지프차로 데리고 가는 동안 그는 고개를 꼿꼿이 세우고 앞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한마디라도 말하는 사람은 없었다. 무성영화에서의 한장면처럼, 에이전트는 아버지를 데리고 차에 탔다. 아버지는 두명의 에이전트 사이에 끼어 뒷좌석에 앉아 있었다. 그들은 아버지를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납치해 갔다.
5년전에 내가 마지막으로 본 아버지는 그의 뒷 모습이었다.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앉아 있었다. 큰머리위로 잘 빗어 넘긴 진한 검은 머리는 햇볓에 번쩍 거렸다.
한시간 후에 더많은 에이전트가 탄 큰 지프차가 우리집 드라브 웨이에 들어오고 그 뒤에는 여러대의 빈 트럭이 따라 왔다. 먼저 그들은 우리 아버지의 리노와 울 어머니의 세단을 몰고 갔다. 다음에는 가구, 옷, 가방, 카페트(러그), 족자, 집안에 있는 모든 것들을 트럭에 실었다. 나와 주안-주안은 발코니에서 숨죽이고 아래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머니가 양복입고 멋진 헤어 스타일을 한 리더에게 울면서 호소 하다가 안되면 큰소리로 항의 하는 것이 보였다. 그러나 그는 어머니를 완전히 무시하고
부하들을 독려하여 우리집 습격을 계속 했다. 그는 때때로 어머니의 간절한 호소에 눈을 마주치기는 커녕 고개도 돌리지 않고 매정하게 손을 졋거나 잘들리지 않는 짧은 몇마디로 거절 했다. 단 두시간 만에 아무도 다치지 않고 우리집을 완전히 비웠다.
그날 저녁 때 어머니는 텅빈 거실에 저택에서 일하는 전직원을 모여 놓았다. 그녀는 하인, 문지기, 요리사들 앞에 서서 부드럽지만 단호 하게 말했다.
“여러분들은 오늘 치앙 카이색 총통의 에이전트들을 보았 습니다.” 그녀는 서두 없이 말을 꺼냈다. “안됐지만 리씨 가족은 24시간 안에 이곳을 떠나야 하기 때문에 여러분들은 이곳에서 할일이 없게 되었 습니다.”
모여있는 직원들이 서로 중얼거리기 시작 했고 당황스러워 하는 소리가 드렸으나, 모두 크게 놀라지는 않은 것 같았다. 결과적으로 정부 관리들이 멘션을 빈집으로 만든 사건은 리씨 가족의 패망 이외에는 다른 의미가 없었다.
어머니의 얼굴은 평온해 보였다. 그녀는 침착하게 두손을 허리에 걸치고 할말이 머리에 떠오르자, “리씨 가족은 여러분의 충성스러운 서비스에 감사 합니다.” 라고 말을 끝내는 듯 했다. 그러더니 방금 생각 났다는 듯이 “여러분들 중에 산동에 있는 고향에 돌아가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기차표 값을 주겠 습니다.”라고 덧 부쳤다.
이 때 나는 여기서 일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아버지와 그의 조상이 자랐던 중국 북쪽에 위치한 산동지방 어느 마을에서 왔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아버지는 중국의 전통적인 고용 원칙에 따라
고향 사람을 선호 했는 데, 이는 단순히 같은 고향이라는 이유로 그사람들에게 믿고 일을 맡길 수 있기 때문이었다.
어머니가 말을 마치자 마치 죽음을 알리는 종이 친 것처럼 동굴 같은 거실에 으스스한 침묵이 드리워 졌다. 침묵을 깨는 것은 한 두명의 여자하인들의 흐느껴 우는 소리 뿐이었다. 희미한 불빛아래 나는 직원들의 슬픔과 절망을 보고 느낄 수 있었다. 어머니의 간략한 발표는 그들의 경력과 생활 터전의 종말을 의미 하는 것이었다.
미칠 듯이 괴로운 순간들이 지난 다음 그들은 하나 둘 씩 헤어 지기 시작 했다. 모였던 직원들이 흩어지기 시작 하자, 흰머리의 늙은 남자 하인이 어머니 한테 다가가서 고향에 가는 기차표 값을 박아 갔다. 젊은 사람들은 고향의 견디기 힘든 가난으로 돌아 갈 배짱이 없었다.
나는 어머니가 공식적인 업무를 수행하는 것을 본적이 없다. 나는 옆에서 어머니가 평정을 잊지 않고 위엄 있게 아무 준비없이 즉석에서 연설 하는 것을 보았다. 그녀는 창백하고 피곤해 보였지만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건의 심각성을 생각하면 어머니는 너무나 의연 했다.
나는 이번에 처음으로 어머니가 미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이마는 항상 어머니에 대해서 이야기 할 때 “아름다운 마담 리..”로 말을 시작 했다. 그러나 나에게 그 말이 이제까지 전혀 들리지 않았었다. 어머니의 아름다움은 자극적인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즉각적인 관심을 불러오는 그런 종류의 것이었다. 우아함과 교양을 나타내는 그런 미였다. 그녀에게 한참 주의를 기울이고 있으면 자신도 모르게 아 미인이구나 하는 생각이 저절로 드는 그런 종류의 것이었다.
나는 이 불행한 사건이 일어나기전에는 어머니에 대해서 관심을 가져 본적이 없었다. 그녀는 항상 무심하고 쌀쌀 했다. 그리고 나는 그녀를 더 이상 생각해 보려고 하지도 않았다. 아버지는 전혀 달랐다. 그 또한 어머니 처럼 냉담 했지만 그는 항상 권위 있는 모습을 보였다. 그가 나를 쳐다보는 모습, 그가 걸어 다니는 모습, 그가 리모에 타고 내리는 모습, 모든 것들이 나의 관심을 끌었고 호기심을 불러 왔다.
하인들에게 발표가 끝난 다음, 어머니는 우리 형제들에게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이 난징의 빈빈가로 이사간다고 말 했다. 오늘 우리들에게 우리집에서 나가라고 명령 한 사람들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돈도 전부 빼앗아 같기 때문이었다. 나는 “빈민가”가 무슨 뜻인지 몰랐다. 그래서 물어 보았더니,
어머니는 빈방에 딱붙어 모여 있는 우리들에게 “그것은 불쾌하고 불결한 동네야.” 라고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분명하고 침착 했다. “우리는 가난할 거야. 우리는 아주 다르게 살아야 해.”
내 누나들 중 하나는 최신 유행에 맞춰서 입은 비단 스커트에 손을 꼬면서 울었다.
그때가 1945년 9월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일본이 항복 했다. 나는 나이 먹을 때 까지 자세한 내용을 몰 랐다. 아버지는 중국 친일 허수아비 정부의 원로 장관이었다. 일본은 점령 지역을 직접 통치하지 않고 중국 사람으로 구성된 친일 정부를 만들어 중국 사람이 중국 사람을 다스리게 했다. 그러다가 일본이 중국에게 항복 하여 국민당이 일본점령지역을 다시 찾자 허수아비 정부는 와해 되었다. 그 때 장가이색 국민당 정부 관리들이 아버지를 체포 했던 것이다. 아버지는 반역죄로 재판을 받았다. 아주 간단한 재판 후 그는 13년 징역이 선고 되었다. 친일 정부 원로 장관들 중 사형을 면한 사람은 아버지 뿐이었다. 이날 까지 아무도 나에게 그 이유를 말해 주지 않고 있다. 중국에서 여론에 영향을 미칠 만큼 정치적으로 중요한 수감자에게 내려지는 형량은 고위층 집권당 간부에 의한 정치적인 결정으로 정해 진다. 공정한 재판이라고 하는 것은 내가 알기로는 하나의 조크에 불과 하다. 그가 그저 적당한 형량으로 처벌 받은 것을 보면 아마 고위층에 친구가 있었을 것이다.
감옥에 있을 때, 아버지와 친일정부에서 같이 일 했던 그의 동료들은 다른 범죄자들이 수감되어 있는 “호랑이 다리”라고 하는 감옥 로부터 멀리 떨어 져 있는 넓고 편하게 가구가 마련된 방에서 살 았다.
관리들은 그들이 읽고 싶어하는 모든 책, 글쓰는 데 필요한 모든 도구 들을 마련해 주었다. 매일
교도관은 감옥 바깥에서 요리 한 양질의 음식을 제공 했다. 자유를 빼앗긴 것 외에 아버지가 겪어야 할 유일 한 고통은 그의 동료가 그가 수감된 방 밖의 마당에서 총살 되는 것을 아는 것이었다. 하나 씩 하나 씩 그들은 수감된 후 한두 달 만에 총살 되었다. 20세기 중국에서의 사형은 사형수의 뒷통수에 총 한방을 쏘는 방식이 였다. 아버지는 아침 일찍 사형집행자의 총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의 고막을 때리는 한방의 새벽 폭발음은 험악한 중국 정치판에서 같이 일했던 동료들의 생명이 하나가 사라지는 것을 의미 했다.
내 나이가 30세를 넘어 내가 미국 대학의 교수 일때 나는 아버지와 그의 삶을 이해하기 위해서 중국의 정치사에 관해서 광범위하게 읽어 보았다. 그 때야 비로소 아버지가 얼마나 큰 정치적인 오판을 했었고 그로인해서 중형을 피할 수 없었음을 알 수 있었다.
1930년 대 초반에 중국에서는 장카이색, 마오 제동, 왕징웨이가 서로 정치적으로 우위에 서려고 3파전을 하고 있었다. 1911년 청나라를 멸망 시킬 때에는 장과 왕은 둘 다 같은 국민당이었다. 왕징웨이는 국민당의 지식인들의 지지를 받았다. 반면에 장카이색은 후앙주 중국에서 가장 중요한 사관학교 교장이었고 군대을 장악하고 있었다. 공산주의 들은 3파전에서 가장 약한 세력이었고 내륙으로 후퇴 해 있었다.
중국은 당시에 군벌시대에서 겨우 벗어나고 있었다. 그 전에 중국은 이미 100년동안 외국의 침략과 식민지화에 시달 렸다. 이런 상황에서 정치인들은 외국 정부의 힘을 빌려 권력을 잡으려 했다. 금융기관과 군대조직을 조정할 수 있는 외국인들은 정치판을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움직일 수 있는 모든 카드를 가지고 있었다. 국민당의 장카이색은 부인의 영향력과 인맥에 힘입어 미국의 지지를 받았다. 마오제동은 공산주의자였기 때문에 소련이 도왔다. 왕징웨이와 아버지는 그들이 젊었을 때 일본에서 대학에 다녔다. 그때 현재 일본 집권세력이 된 사람들과 알게 되었기 때문에 일본과 손을 잡았다. 1937년과 1938년 중일전쟁 중 일본이 중국 해안 지방 대부분을 점령 하자 왕징웨이는 일본의 후원을 받아 난징 정부를 조직하고 정부수반이 되었다. 항상 왕을 찬양하며 같은 편에 섰던 아버지는 일본점령지 허수아비 정부의 장관이 되었다.
친일 정부는 아무리 수백만 점령지 주민들에게 잘 해도 시작부터 실패할 운명이었다. 일본군대가 침략 전쟁 중 주민들에게 참혹한 전쟁 범죄를 저질렀기 때문이었다. 가장 악명높은 일본의 전쟁 범죄는 “난징강간” 으로 알려진 대학살이었다. 그 사건은 1937년 12월에 일어 났다. 난징으로 처들어 온 일본군대는 몇주 동안 아무도 말리지 않는 폭력과 공포의 잔치를 벌렸다. 난징에 살고 있는
시민, 남자 여자 어린아이 까지 약 300,000이 가장 잔인하고 비인간적인 방법으로 죽었다. 기관총에 맞아 무더기로 죽는 것은 약과 였다. 일본 군인들은 여자와 소녀들을 강간하거나 심지어 항문에 성교를 하기도 했다. 임산부들의 복부를 총검으로 찔렀다. 남자들을 총검의 훈련 목표물로 간주하고 마구 찔러 죽였다. 갓난아이를 축구공 처럼 사용 했다.
일본의 만행을 생각 하면 일본 침략자들과 협조 하기로 한 아버지의 판단을 이해 하기 힘들다. 20여년 후에 현대 중국의 정치 상황에 대해서 토론 하는 중, 아버지는 나의 동정과 이해를 얻기 위해서 자신의 입장을 설명하려고 애썼다.
그는 나에게 “너는 1930년대에 일본은 아시아의 지배적인 세력이 이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라고 말 했다. “ 30여년전에 일본은 짜의 러시아 제국을 전쟁에서 어렵지 않게 패배 시켰다. 타이완과 한국을 무력으로 점령하여 영토를 확장 함으로서 일본은 초강대국으로 성장하는 시발점에 와 있었다. 그 때는 특히 아시아에서는 히틀러의 독일이 세계 강국이 되어 또 한번의 세계 대전을 일으키고 궁극적으로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예견하는 사람은 없었다.”
1941년 펄하버 공격 후 1937년에 시작한 중일전쟁은 2차 세계 대전의 일부가 되었다. 일본의 세계무대에서의 패배는 난징 정부의 종말을 의미 했다. 나는 다 알고 있었다. 그는 분명히 내가 모르는 중요한 사실을 밝히려고 나를 준비 시키고 있었다. 그것을 알고 싶어 하는 기대감은 나의 호기심을 자극 했다.
나는 참다 못해 “아버지, 아버님 께서 지금까지 말씀 하신것 다 이해 하겠는 대요. 그러면 도대체 요점이 뭐예요?” 하고 물었다.
나와 눈을 맞출 수가 없었다는 듯이 아버지는 창밖을 내다 보았다. 그는 더듬는 목소리로 내 질문에 놀랍게도 자신의 실수를 인정한다고 대답하고 다음과 같이 자신의 정치 경력에 대한 역사적인 정당화를 나에게 설명 했다.
“세월이 지난 다음에 판단 해 보면 나와 왕징웨이가 일본과 손을 잡은 것이 결정적인 실수였음은 분명 하다. 그러나 나와 왕이 외국세력과 협조 했다고 역적이 되었다면 장카이색과 머우제동도 마찬가지이다. 다만 다른점은 그들의 후원자는 2차세계대전의 승자이고 우리의 후원자는 패자라는 것이다. 네가 보다싶이 중국 정치판에서의 승패는 국제적인 사건에 의해서 결정 되었다. 우리 중국 정치가들은 우리의 운명을 우리가 결정 할 수 없었다.”
이것은 아버지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자신의 실수를 고백 한 것이다. 그나마 실수가 복잡한 역사적인 상황 때문에 할 수 없이 저질러 진것이라고 했다.
원칙적으로 아버지는 아들에게 고백하지 않는 다. 그러나 그때 나는 30세가 넘었고 미국에서 대학교수로 자리를 잡아서 중국의 전통적인 문화에서 벗어나 있었다. 우리가 1970년대와 80년대에 만났을 때는 아버지는 나를 거의 평등하게 대해 주었다.
나는 그의 감정과 설득력 있는 그의 정치경력에 대한 변호에 감탄 했지만 어떤 역사적 상황에 대한 연출도 일본이 중국시민에게 말할 수없는 범죄를 저지른 후 그의 의도적인 왕징웨이 허수아비 정부 참여를 용서 해주지 않을 것임을 나는 안다. 나는 그와 더이상 말다툼하거나 그의 함찬 자기 변호에 도전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이미 8순이었고 오도된 정치 권력 추구에 대한 대가를 톡톡히 치른 후였다.
결국 아버지는 13년 형량 중 단 3년을 살고 나왔다. 1948년 장카이색은 처들어오는 중국공산당 군대를 피해서 자신이 난징을 빠져나가기전에 아버지를 석방 했다. 그때 우리 부모가 홍콩에 왔다.
전생애 동안 반공주의자였던 아버지로서는 영국식민지인 홍콩으로 망명 하는 수 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