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16일 주간에 계획대로 1제대가 출발하였다. 철수작전은 어느 작전보다도 주도면밀한 계획과 철저한 사전준비가 필요한 것이다. 비밀을 유지하기 위해서 뒤늦게 통보받은 부대는 준비를 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철수명령을 받은 장병들은 우선 가족을 피난시킬 대책부터 세우기 위하여 개인행동을 하였다. 부대 철수준비는 다음 일이었다.
1제대가 떠나가자 더 이상 비밀은 유지될 수 없었다. 이제 콘툼(Kontum), 플레이쿠(Pleiku) 지역 주민들의 탈출 작전도 시작되었다. 먼저 비행장부터 아비규환이 되었다. 수천 명이 몰려들어 먼저 타려고 아우성이었다. 조종사에 뇌물이 필요하였다. 경찰도 제복을 벗어 던지고 탈출을 해야 했다. 누가 통제할 사람이 없었다. 헬기는 해안지역까지 1인당 100달러에서 200달러로 올랐다. 모든 차량은 7번 도로로 몰려들었다. 차편을 구하지 못한 사람들은 도보로 출발하였다. 시내는 아수라장이 되어 약탈과 파괴가 자행되었다.
탄약고와 연료탱크는 일부만이 폭파되었다. 그러나 각 부대는 파기할 시간도 없었다. 군수 지원단장은 군단으로부터 정식명령도 받지 못한 채 인근부대의 철수를 보고 급히 서둘렀다. 고가의 장비, 많은 보급품이 그대로 유기되었다.
3월 17일과 3월 18일 주간까지는 별 일없이 지나갔다. 노폭이 좁고 험난한 7번 도로로 수많은 민간차량과 피난민들이 계속 밀려들었다. 군 차량과 민간차량, 군인과 피난민이 뒤엉켜 투이 호아(Tuy Hoa)로 밀려가고 있었다. 왜 철수하는지, 어디로 철수하며 철수 후에 어떤 임무를 수행할 것인지 장병들은 알 수가 없었다. 얼마나 많은 차량이, 얼마나 많은 병력과 피난민이 이동하고 있는지 아는 사람은 없었다. 한 외신기자는 대략 4천여 대의 차량과 약 10만 명의 군인과 피난민이라고 추정하였다.
중부 고원지대를 탈출하기 위해 7번 도로로 밀려든 차량들
반메투오(Ban Me Thout)를 점령하고 남베트남군의 역습을 격퇴한 반 티엔 둥(Van Tien Dung)은 신속히 공격을 한다면 우기가 시작되기 전 5월까지는 중부 고원지대를 점령할 수 있겠다고 판단하고 우선 플레이쿠의 공격계획 수립에 전념하고 있었다.
반 티엔 둥
그러나 3월 16일 기상천외의 일이 벌어졌다. 12:00 남베트남 공군 조종사들의 무전내용을 감청한 결과 플레이쿠를 이륙한 항공기들이 나트랑(Na Trang)에 착륙하기 위하여 교신하고 있었다. 15:00에 플레이쿠에 있는 남베트남군 제2군단 전방사령부가 나트랑으로 이동하였다는 정보를 하노이로부터 들었다. 16:00에는 정찰대로부터 남베트남군의 긴 차량행렬이 플레이쿠로부터 7번 도로를 따라 이동하고 있다고 보고되었다.
둥은 남베트남군의 의도를 판단할 수가 없었다. 플레이쿠 비행장에 포격을 많이 하지도 않았는데 왜 항공기와 2군단 사령부가 나트랑으로 이동하는가? 7번 도로는 사용할 수 없는 도로라고 보고받은 바 있는데 무엇 때문에 7번 도로로 부대가 이동하는가? 반메투오에 대한 역습인가? 철수인가? 철수란 상상할 수도 없었다.
하노이에서는 플레이쿠로부터 남베트남군의 이동은 반메투오에 대한 역습 증원, 이를 위한 플레이쿠로부터의 철수, 중부 고원지대로부터의 전략적 철수의 3가지 중의 하나일 것이라고 분석하고 둥에게 이에 대한 대비를 지시하였다. 둥과 그의 참모들은 적의 의도를 판단하는 골몰하였다.
21:00 마침내 하노이로부터 적은 중부 고원지대에서 철수하는 것이라는 정보가 내려왔다. 국제 관리 감시위원회의 헝가리 대표가 하노이에 긴급히 이 정보를 제공하였다고 한다.
국제 관리 감시위원회의 헝가리 대표단
둥은 전부터 7번 도로는 차량통행이 불가능한 도로라고 판단하여 차단대책을 강구하지 않은 북베트남군 320사단장을 경질하고 즉각 7번 도로를 차단하여 적을 공격하도록 지시하였다. 또한 제968사단은 적을 추격토록 하고, 공병부대에게는 콘툼, 플레이쿠에 진입하여 화재를 진압하고 보급소 등 남베트남군의 시설을 관장토록 하였다.
7번 도로와 북베트남군의 추격 상황
둥은 지방 베트콩들에게 7번 도로를 차단하여 적의 이동을 최대한 지연시키도록 하고 제320사단과 작전을 협조하도록 하였다. 3월 16일 야간부터 행동을 개시한 제320사단은 3월 18일 야간부터 남베트남군을 공격하기 시작하였고 지방 베트콩들은 도로를 차단하기 시작하였다.
남베트남군의 사전준비 부족으로 첫 번째의 그리고 최대의 비극이 3월 18일 야간부터 3월 19일 하루 종일 계속되어야 했었다. 푸봉(Phu Bon) 지역에 있는 에아 파(Ea Pa) 강의 부교가설이 지연되어 전 철수제대는 여기에서 발이 묶여버렸다. 측 후방 경계대책도 강구하지 않고 무질서하게 몰려있는 남베트남군과 피난민들에 대한 북베트남군의 무자비한 공격이 시작된 것이다.
한 마리의 성난 이리에게 양의 숫자가 문제가 되지 않듯이 북베트남군의 계속적인 공격으로 사기가 극도로 저하되고 지휘체제조차 제대로 확립되지 않은 남베트남군은 피난민과 뒤엉켜 지리멸렬되어 버렸다. 여기에다 자중지란까지 겹쳤다. 철수부대에 합류하였던 일부 몽타냐 출신 지방군과 민병대 요원들이 적의 공격이 시작되자 피난민에 대하여 약탈을 자행하고 거부하는 자들을 무차별 사살하여 혼란을 더욱 가중시켰다.
철수제대를 총지휘하도록 임명되었던 타트(Tat) 준장도 적에게 포로가 되고 지휘권은 기갑 여단장 동(Dong) 대령에게 넘어 갔으나 그도 얼마 되지 않아 밀림 속으로 행방불명이 되어 버렸다.
수 마일에 걸쳐 남베트남군과 피난민들의 시체가 즐비하게 널려있고 불타는 차량에서 내뿜는 연기 속으로 북베트남군의 공격은 계속되었다. 전쟁이 연출하는 인간지옥 중에서도 가장 비참한 모습이었다.
3월 20일에야 남베트남군의 철수대열은 푸봉의 지옥을 탈출할 수 있었으나 이미 북베트남군은 곳곳에서 도로를 차단하고 있었다. 항공지원도 별로 효과가 없었다. 때로는 오폭으로 우군의 피해를 가중시키도 하였다.
1975년 3월 21일 투이 호아 서쪽 9마일 지점에서 아들을 잃은 어머니가 울고 있다.
바(Ba) 강의 부교가 3월 22일에야 설치되었다. 육로는 이미 북베트남군과 지방 베트콩들에 의해 차단되었기 때문에 부교자재는 헬기로 공수되었다. 투이 호아까지 5일 동안 적의 차단을 뚫고 3월 27일 21:00 경에 선두차량이 투이 호아에 도착하였다.
남베트남군의 병력과 장비의 손실이 얼마인지 정확하게 판단할 사람도 없었다. 남베트남군 참모총장 카오 반 비엔(Cao Van Vien)은 투이 호아까지 철수한 것은 차량(군인, 민간차량 포함) 300여 대, 피난민 5,000여 명, 병력 1만여 명 정도로 추측하고 있다. 모든 철수부대는 와해되었고 최초의 철수병력 규모는 최소한 5만 명 이상이 될 것으로 추산되었다.
1975년 3월 23일 중부 고원지대에서 헬기로 철수한 피난민들이 안전지역에 도착하고 있다.
첫댓글 아수라장이네요. ㅎㄷㄷ...
이 중부 고원지대에서의 패주가 남베트남 몰락의 기폭제가 되죠.
힘.전투력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