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 가까이 자료를 올리지 못한 점 사과드리며
중단했던 강좌를 재개합니다.
제3회
화자와 어조
1. 시인은 마음의 조련사
시가 무얼까?
내 마음을 이토록 휘어잡아놓고 무정히도 외면하는 시, 써도 써도 내 만족하나도 못 채우는 이러한 시를 꼭 써야하는 것인지 시를 쓰는 사람이면 몇 번쯤은 겪게 되는 마음입니다.
우리는 흔히 시를 아름다운말의 모음에서 시를 찾고자 하지는 않았을까?
아름다운 꽃을 보며 그것을 기록해놓고 시라고 하지 않았을까?
내 마음이 슬퍼져서 슬픔을 써놓고 시라하지 않았을까?
누군가를 사랑하다보니 희열을 써놓고 시라하지 않았을까?
손에 잡히는 사랑을 잃고 아픔이라며 그것을 쓰고서 시라하지 않았을까?
남들이 가꾸어 놓은 길을 걸어가며 편하고자 하면서 모든 걸 갖고자 하면서 시를 쓴다 하지는 않았을까?
시인은 자문해 봐야 합니다.
시인은 언어의 마술사가 아니라 마음의 조련사이어야 합니다. 내 마음 보이지도 않은 내 마음을 그릇에도 담아내지 못하는 내 마음을 오늘은 이렇게 내일은 저렇게 그리 바뀌는 것으로 시를 쓰려하며 이것과 저것의 차이를 보려하는 마음을 내지 못하고 시의성에 들려합니다. 시의 성문은 두껍습니다. 철벽보다 더 합니다.
시는 도구가 아닙니다
시는 길이요
시는 삶이요
시는 전부입니다
하나가 나뉘어 헤아릴 수 없는 것이 되고 넓고 넓게 퍼져있지만, 결국 세상은 하나입니다. 모습을 달리할 뿐 만상으로부터 하나로의 귀일 그렇게 흐르는 것입니다.
시에 입문하고자 하시면 가장먼저 내 마음을 달구십시오.
앞모습이 있으면 뒷모습이 있듯 보이는 것에 집착함을 버리십시오.
느끼는 것에 집착함을 버리십시오.
감정에 치우치는 것을 억제하십시오.
그래야 시의 문을 열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영롱한 시와 만날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귀하고 소중한 시와 사랑해 보십시오.
이 처럼 고귀한 시는 삶을 바꾸어 줍니다.
한편의 아름다운 시는 사람의 마음을 따뜻하게 데워줍니다.
한편의 시에서 받은 감동은 일생을 두고 그 사람의 감성을 조율하기도 합니다.
이만한 큰 힘을 가진 시 이러한 시를 쓰려면 우리가 주의해야 할 점은 무엇일까?
시는 이래야한다. 이 말에는 많은 의견이 있을 수 있으나 시는 전적으로 "이래야한다"는 적용되어서는 안 됩니다.
즉 획일화된 문법의 틀이나 일상화된 언어의 틀, 사회 통상관념의 틀 정해진 규범의 틀, 바로 이러한 틀에 작품을 억지로 넣어 맞추어 보면 감상의 오류가 생길 수 있다는 점입니다.
시는 창작물입니다 즉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르고 생소한 내용이거나 창조된 모습을 보일 수도 있다는 점을 독자는 인식해주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외면보다 내면을 중시하라
시는 예컨데 현상을 옮기는 이동 표현이 아니다.
본 것을 적거나 느낀 것을 적거나한다면 이는 기록문이나 감상문에 가깝다고 보는 것이다. 현상의 동적인 것을 적었다 해도 이는 현실문학이지, 이미지문학은 아닌것입니다.
즉 작품의 현란함이나 아름다운 단어보다는 읽고 난 뒤의 전해지는 느낌이 중요하며 이미지로 전달되는 감성적 행위 기여도가 더욱 중시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는 시가 보여주는 밑그림이 중요하다는 이야기이며 단편적이거나 포괄적이거나 상상적 기능이 비중이 커야한다는 말인 것입니다.
지식이나 학문으로 논하지 마라
지식이나 학문은 작가의 기본 몫일뿐 작품일 수는 없는 것으로 예를들어 초등학교를 졸업한 시인이 대학을 졸업한 시인보다 더 좋은 작품을 창작할 수 있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는 것일 것입니다. 반대의 경우도 물론 있음에도 불구하고 경력란에 모모대학 국문과졸 모모신문사 신춘문에 당선 모모 상 수상이라는 말이 가치이상으로 인정되어야하는지는 재고할 일이라 보는 것입니다. 그만큼의 가치는 가치요, 아닌 것은 부가적으로 부가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시 창작에 대하여
시를 쓰려 하는 마음을 시심으로 그는 시심은 어디에서 오는가?
바로 생활에서 온다고 보아야 합니다. 사는 모습이 어떠하든 한 개체의 인간이 살아가는 동안에 많은 것을 보고 듣고 느끼게 됩니다. 이러한 것을 생각이라는 장치를 통하여 걸러내게 되고 행동 또는 언행의 절제를 통해서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면 삶의 어디에서 시심을 일으킬 것인가?
어떠한 형태로 가슴에 시심을 담아서 어떻게 표현을 해야 하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시심을 얻는 삶
우선 삶의 행태에 있어 생각하는 삶이 있지 않고는 진정한 시심은 일으키지 못함을 말하고 싶습니다.
한 번의 생각으로 혹은 떠오르는 대로 삶을 살아버린다면 혹간 그삶이 가시적 관점에서 성공을 하였을지라도 모든 사람이 다 부러워하고 풍요로운 삶이 되었다 하여도 정작 그 자신은 어딘지 빈 느낌을 가질 수밖에 없을 것이고 얻은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잃었음을 분명 알게 될 것이기 때문에 이러한 삶에서는 시심의 아름다움은 멀다고 보아야 하겠으며 얻는다 하여도 참회의 글 정도일 것입니다.
물론 반대급부적인 논란의 여지도 있으나 실패와 성공을 어떤 기준으로 보느냐는 개인의 시각차가 크기에 이점을 다루려는 게 아니고, 시를 쓰는 마음은 최소한 남을 배려하는 마음과 타인의 아픔을 어루만져주는 마음 옳다는 것은 지킬 줄 아는 마음이 필요하기에 인간본연의 마음을 말할 수밖에 없음을 밝힙니다.
시심을 담는 그릇
시심을 담는 그릇이 따로 있느냐 하면 결코 그렇지 않다고 말하겠습니다.
시심을 담는 그릇이란 그 첫째가 눈으로 보이는 것에서 느끼는 모든 것 즉 보이는 것이나 보이지 않는 것이나 눈으로 보는 것에 각별함을 주문하고 싶습니다.
이 말은 보이는 것을 근거로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부분과 마음의 눈까지를 말하나 이 부분은 상당부분 깊은 이야기로 표현될 점이 많아 따로 말하기로 하겠으며 여기에서의 눈이란 보이는 것을 시작으로 펼치는 생각과 느낌의 범주라 보면 무리가 없을 듯 싶습니다.
보이는 것을 보이는 만큼만 보면 누구나 하는 것임을 알 것으로 시심을 얻기 위해서는 보이는 것을 통하여 가슴이 움직여야 합니다. 일상적이라 하여 버려서도 안되며 흔한 것이라 하여 스쳐서도 안된다는 한번쯤 꼭 이러한 것의 의미를 생각해보기 바랍니다.
다음에는 감각을 말할 수 있습니다. 이는 느낌을 시작으로 하여 인체가 가지는 오감을 말하는데 보고 느끼고 생각하는 순서 속에 왜? 라는 의문부호를 달고 오감을 열기를 당부하는 바입니다. 있는 것은 결코 그냥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꼭 염두에 두기 바라며 있다는 의미는 포괄적으로 라도 생각의 접근이 꼭 이루어져야 합니다.
이때에는 필히 주의할점은 그것은 본인의 잣대로 자질을 해서는 않된다는 것을 주의하고 싶습니다. 진정 자유로이 오감을 열고 형태를 보라는 것입니다.
표현
그러면 얻어진 것을 어찌 표현 할 것인가?
표현은 우리의 일상에 아주 가까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즉 배고파. 덥다. 춥다 등 이러한 일상적 표현들을 자연스럽게 하면서 산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시만 쓰라하면 이상해집니다. 그토록 자연스럽던 표현들은 몇 겹의 옷을 껴입듯 형체를 분간키 어렵게 숨겨 버리면 이런 속에서 글이 나오겠는가?
표현은 자유스러워야 하고 배고프면 배 고파 하듯 하여야 하는 것으로 즉 있는 그대로를 표현하되 적절성을 찾아야 하는데 여기에서도 철학적이거나 사상적인 것을 먼저 생각하는 습관을 철저히 버려야 합니다.
시는 철학도 사상도 아니다. 다만 삶을 통하여 철학과 사상을 보는 창이 바로 시라고 보고있으며 이것이 발전하여 정신적 세계로 진입하는 과정 즉 시의 세계는 한계의 세계가 아니고 무한의 세계로 가는 승차권과도 같다보면 옳을 줄압니다.
표현을 구애하지 마라.
표현은 절제하는 것이다.
이 말을 가슴에 담고 주변을 보시기 바랍니다.
수없이 많은 시 자료가 널려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