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logue 1.......
태초부터 복음 안에 있었던 강도!
십자가에 달린 강도,
강도짓을 하며 살았기에
참혹한 십자가에 매달려 죽어야만 했다.
오죽 짐승같은 강도짓을 했으면
그 당시, 가장 참혹한 방법으로서,
십자가 꼭대기에 매달아 죽였을까?
그런데 그 강도는 하나님께서
이미 창세 전에 택정하신
복음 안에 있는 강도였다.
십자가에 함께 매달려 있는 강도를 향하여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으니 말이다.
그러나 그가 저지르는 육의 죄악성 때문에
복음 안에 있는 강도인 것을 아무도 몰랐다.
과연 '복음 안에 있는 강도' 라고
누가 알아 차릴 수 있었겠는가?
예수님의 제자였었든
가룟 유다는 어떠했는가?
가룟 유다 이 사람은
주님의 제자로 선택받은 사람이다.
하지만, 성경에 보니 그는 창세 전에
이미 유기된 자였다.
가룟 유다가 주님과 함께
제자로서의 사명을 감당하고 있었을 때에는
그가 복음 안에 있는 자처럼 비춰졌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이미 유기된 자였기에 결국
“태어나지 않았음이 더 좋았을 것이라”는
주님의 말씀을 들어야만 했다.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는 어떠했는가?
베드로는 예수님과 함께 생활을 하면서
'주는 그리스도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라는 고백을 했다.
당시의 베드로의 그 고백은
하나님의 허락하심으로 인한 고백이었다.
하지만, 극한 상황이 닥치자 베드로는 그만
주님을 세 번씩이나 모른다고 극구 부인했다.
배신자의 극치를 보여 주는 것 같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 보자
베드로가 그랬던 것처럼 너나 나나 할 것없이,
모든 인간들의 요물스런 행동들은 하루에도 골백번
복음 안에 바로 서있는 것처럼 보이게도 하고
때론 복음 밖에 서있는 모습으로도 보이게 한다.
그렇다면 순간 순간 표출되는 열심있는
신앙심(?)만을, 기준으로 평가하여서,
또한 복음적인 말만을 입으로 고백한다고
그것을 기준으로 삼아 평가하여서,
‘복음에 바로 서 있다’,
혹은‘바로 서 있지 못하다’ 라고,
단정지어 주는 것이 타당한 일이겠는가?
‘복음 안에 선자와, 서지 못한 자’의
구분을 다같은 죄인인 인간들이 적당하게
판단하여서 결정지어 줄 수 있는 사항은 아니잖는가?
창세 전에 '택함과 유기' 로 상황이 종료되어
이미 확정이 된 것을 성령께서 개개인에게
택자임을 깨닫게 하시고 마음으로 믿게 하시고
입으로 시인하게 하시는 것 아닌가!
물론 상대방의 신앙의 고백을 통하여
그가 십자가 복음에 서있는 자인지,
아닌지, 어느 정도의 유추는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설령 본인들의 입으로 시인을 했다 해서
그것이 결코 진실인지, 아닌지는 인간들로서는
가름할 수 없는 애매한 부분으로, 같은 죄인들이
속단해 주기에는 무척이나 조심스러운 부분이다.
천길 물 속은 알아도 한뼘 되는
사람의 마음은 모른다 하지 않았던가?
상대방의 현 상황에서 보여지는
모습만을 잣대로 '복음 안에 바로 서있다.
바로 서있지 못하다' 라는 식의 판단은
실로 인간적인 사고방식에서 나온 것이다.
나름대로의 잣대에 의해 판단되어진
인간의 편견에서 결정지어 진 것으로,
어디까지나 짐작 내지는 상상일 뿐이다.
죄인은 부끄럽고 수치스럽게도,
어제는, 복음에 갇힌 자의 모습으로,
오늘은, 마귀에 끌려 사는 자의 모습으로,
내일은, 주께 감사하며, 모레는, 불평으로,
수없이 변덕의 삶으로 살아가고 있다.
앞으로도 어쩔 수 없는 인간 멍멍이라,
그렇게 살아질 수 밖에 없음을 안다.
감사와 불평과 분노와 낙담을 혼합하여
살아가고 있으니 아무 할 말없는 멍멍이다.
그러기에 이런 변덕스런 못난 모습으로 인하여
나의 정체성에 대해, 뭇 사람들에게 수십 번
아니 수백번의 혼란을 가져오게 하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렇게 수치스러운 변덕으로
살아가는 나지만, 한가지는 안다.
물론 내가 알아 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이끄심에 의한 수동적인
방법에 의해서 아는 것이다.
죄로 죽을 수 밖에 없는 죄인의 머리이기에
죄없으신 주님께서 다른 사람 아닌 이 못난,
아니 어쩜 세상에서 0순위로 평가될
이 죄인 때문에 내 주님이 십자가에서
온 몸의 피를 쏟으셨음을, 난 안다.
조용히 생각해 본다.
그 유명하신 radical sign pastor 님은
오직 주님의 십자가만을 외치시는데,
과연 복음 안에 계신 분일까?
훌륭하신 providence pastor 님은?
존경하는 azure pastor 님은?
난 모른다. 정말 모른다.
다만, 그 분들이 가르치시는 복음의 말씀이
성령의 이끄심에 의해 내 마음 깊은 곳에서
요동치고 있으니, 난 그 분들의 전하는 말씀에,
그 복음의 품 속에 자동으로 안겨질 뿐이다.
나같은 죄인을 창세 전에 택하사
자녀 삼아 주신 하나님께서
내 안에 계신 성령을 통하여
들을 수 있는 귀를 열어 주셨음에,
복음의 말씀에 거하게 된 것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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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nologue 2.......
끝없이 높이 세워진 원통(圓筒) 속에서
빠져 나오기 위해 인간들이 저마다
원통(圓筒) 속에서 기어 오르려 애쓴다.
그런데 사탄이 계속 참기름을 발라 놓는,
그 끝이 보이지 않는 원통(圓筒)을
감히 빠져 나올 자 있을까?
물론 ‘어느 선까지 얼마나 올라가 버티다
떨어졌느냐’ 의 시간과 길이의 차이는 나겠지.
하지만, 남들보다 더 애쓰고 힘들게
많이 기어 올라가서 버티다 추락했다 한들
결국 떨어진 곳은 다 같은 원통 바닥 아닌가?
그렇다면 기어 오르다가 바닥에 추락한
모든 인간들의 수준은 무엇이 다르겠는가?
더 많이 올랐다가 추락했다고 그것이 성과급의
해당사항으로 인정되어 차등화 될 수 있는가?
원통 속에서 빠져 나오기 위해선 누군가가,
두레박이라도 내려 보내 나를 싣고 올려야 한다.
두레박에 탈 수 있는 조건은
많이 올랐다가 추락된 자의 몫이 아니다.
그렇다고 꼼짝달싹하기 싫어서 그냥 엎어져
바닥에 편안히 누워 있었든 자의 몫도 아니다.
누구의 몫도 아니다. 다만,
두레박 줄을 쥐고 있는 이의 선택에 의해
퍼 올려짐을 당하는 자의 몫일 뿐이다.
그런데 두레박에 올려지기 위해서
내가 무엇을 어떻게 애쓰라는 말인가?
강도짓을 해도 살인을 해도 남을 미워해도,
어차피 죽음 후에 갈 곳이 정해져 있는 인간들.
불우한 이웃을 위해, 평생의 헌신을 해도,
남의 목숨을 구하고자 철길을 뛰어 들어도
전 재산을 다 바쳐 예배당을 건축했어도
죽음 후에 갈 곳이 이미 정해져 있는 인간들.
택자나, 유기된 자나, 세상살이에서의 행태를
굳이 따지자면 요물스럽기는 매 한가지 아닌가?
그런데 말이다.
진정으로 하나님의 사랑,
참으로 그 큰 사랑에 겨워 진정 감사가
솟구치고 있다면, 그런 마음으로 굳이
살인을 저질러 세상 교도소에 갈 것 뭐있나.
강도짓해서 십자가 꼭대기에
매달려 죽을 거 뭐있나?
성깔대로 살아서
좋을 것 뭐 있느냐는 말이다.
이래 살든, 저래 살든 십자가에
떠밀려 간다는 사실 하나 내세워,
성깔대로, 본성대로 살 것 뭐있나?
아무런 조건도 내세우지 말고
사람이니 그냥 사람답게 살면
어디가 덧나나?
‘구원을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해야 된다’가
아니라, 이미 창세 전에 택함 받아 구원 받고,
성화되어진 하나님의 자녀로서 육신의 법인
세상 법도 잘 지켜 가며, 그냥 살아가 지는 대로
살아가는 것이 제일 쉬운 방법, 아니겠는가?
같은 멍멍이들 중에서 특별히 택정하사
십자가의 피로 구원해 내신 내 하나님께
진정 감사 외에 달리 무엇을 할 수 있으리!
그런데 궁금한 것이 있다.
십자가에 달려 죽은 강도는, 붙잡힐 때까지
강도짓을 하며 살았기에 인민 재판에 의해
십자가에서 처절한 죽임을 당하고 말았는데,
그렇다면 과연 그가 십자가 꼭대기에서
주님께 이끌림 받은 후에 얼마만큼의
성화의 삶을 통해 신앙의 성숙(?)으로,
어떤 수준의 모습까지 변하게 되어서
주님께 끌려 올라 가게 되었을까?
굳이 애써 성화의 삶, 자라감의 삶,
신앙인의 성숙된 삶이라는 주제들을
issue 로 내세워 복잡하게 사느니....,,
“그냥 사람으로 태어나게 하셨으니”
“그냥 사람으로 살아 가면 되지 않을까”
주님께서 창세 전에 택하시사
십자가의 복음으로 이끌어 주신
내 주님께,,,
오직 감사와 찬양과 영광을
돌려 드릴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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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글퍼온글
monologue
sinn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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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7.06 2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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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몇 번 읽었는데요..걍 가슴이 아파옵니다. - 주님께서 대답하시었네/나의 귀하고 소중한 아이여/나는 너를 사랑했고/너를 결코 떠나지 않았단다./네 시련의 때/ 고통의 그 때에도/네가 본 오직 그 한 발자욱은/내 발자욱이니라/그때에 내가 너를 품에 안고 걸었노라/- 위의 글의 내용과 맞을지 모르지만 이 시가 생각이 납니다. - 그 때에 내가 너를 품에 안고 걸었노라- 제가 좋아하는 구절입니다.
가끔은 아주 가끔은 내가 나를 위로할 필요가 있네/큰일 아닌데도 세상이 끝난 것 같은 죽음을 맛볼 때/남에겐 채 드러나지 않은/나의 허물과 약점들이 나를 잠 못 들게 하고/누구에게도 얼굴을 보이고 싶지 않은 수치스러움에/문 닫고 숨고 싶을 때/괜찮아 괜찮아 힘을 내라 구/이제부터 잘하면 되잖아/조금은 계면쩍지만/내가 나를 위로하며 조용히 거울 앞에 설 때가 있네/내가 나에게 조금 더 따뜻하고 너그러워지는 동그란 마음/활짝 웃어 주는 마음/남에게 주기 전에/내가 나에게 먼저 주는 위로의 선물이라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