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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소한 삶과 죽음을 이해하기 위하여
----조옥엽의 {거실에 사는 고래}의 시세계
조동범 시인, 문학평론가
삶은 사소함으로부터 비롯되는 법이다. 그리하여 시인은 아무 것도 아닌 듯 무심하게 펼쳐진 삶의 순간을 바라보고자 한다. 시인의 어조는 비장하거나 열에 들뜨지 않고 담담하고 담백하다. 조옥엽 시인이 응시하는 세계는 우리의 삶과 가장 가까이 있는 것들이다. 시인은 언뜻 사소해 보이는 작은 단위의 사건을 어루만지는데, 시인의 음성을 따라 삶은 이렇게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이때 삶은 담장 밑에 핀 작은 꽃처럼 가련한 모습이기도 하고 애틋한 마음을 갖게 하는 존재가 되기도 한다. 삶은 사소함이고, 사소한 삶이 진실에 가장 가까운 것임을 시인은 알고 있다.
그리하여 시인의 음성은 간결하고 꾸밈이 없다. 그것은 마치 저물녘의 거리를 산책하는 이의 시간처럼 우리 앞에 펼쳐진다. 거기에는 슬픔과 회한, 북받침과 기쁨, 상처와 고통 등 여러 감정이 어제인 듯 오늘인 듯 아무 말 없이 서성일 따름이다. 하지만 조옥엽 시인의 시가 갖고 있는 사소함은 가치 없음으로 전락하지 않는다. 시인은 사소함 속에 숨어 있는 삶의 진실을 발견하고자 애쓴다. 그러나 조옥엽의 시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그의 시는 죽음을 향해 나아가고 수렵됨으로써 우리 삶이 지니고 있는 사소함이 결코 가볍지 않다는 점을 명백히 하고자 한다. 그리하여 사소함으로부터 이어진 죽음은 삶의 본질이 무엇인가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을 던지며 시적 긴장감을 형성한다.
늘 바닥이 훤히 보이는 내 쌀통
간당간당 간당간당
어제는 어찌어찌 넘겼으나
오늘도 그럭저럭 넘어가고 있지만
이미 꽉 차버린 치부책
내일은 누구에게 양식을 꾸러 가야 할지
누가 가난한 내게 쌀 한 되박을 꿰 줄지
도통 앞이 보이지 않는다
-「가난한 시」 전문
시인은 삶의 무연함을 파악하고 그것의 정처 없음을 깨닫는다. 아무 것도 아닌 것이 삶이라는 사실은 너무나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삶은 특별한 사건의 연속이 아니다. 우리 삶은 사실 사소한 것들로 가득하며, 의미를 부여받지 못한 날들의 연속일 뿐이다. 그리하여 삶은 꾸역꾸역 밥을 먹는 것처럼 전개되기 마련이다. 당연히 이러한 삶은 비루함으로 가득한 세계일 수밖에 없다. 밥을 먹듯 견디는 삶이야말로 우리를 둘러싼 삶의 진짜 모습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바닥이 훤히 보이는” 쌀통을 앞에 둔 화자의 삶은 비루함의 극단을 보여준다.
“간당간당”한 쌀통을 앞에 두고 끼니를 걱정하는 것은 견디기 힘든 삶의 비애이다. 누군가에게 “양식을 꾸러” 가야하는, “누가 가난한 내게 쌀 한 되박”을 줄지 걱정하는 삶은 우리가 늘 마주치는 고통의 순간이다. 이처럼 일상화된 비애가 진짜 삶이라는 사실을 시인은 잘 알고 있다. 그리하여 삶을 이어가기 위한 한 그릇 밥조차 구할 수 없는 것이 우리가 속한 세계의 실체라고 말하려고 한다. 더구나 한 그릇 밥의 부재를 경험하며 느끼는 고통은 우리 삶의 일상과 맞닿아 있기 마련이다. 그런 가운데 삶이 전달하는 슬픔과 비애는 더욱 강하게 작동한다. 그러나 시인의 음성은 담담하게 그것이 바로 삶이라고 이야기할 뿐이다.
남편이 거실에서 자고 있다
오늘은 어느 바다를 헤엄치다가
귀향했는지 탈탈거리는 엔진소리가
한밤의 멱살을 잡고 흔든다
몸 누일 둥지를 틀고
식구를 먹여 살린다는 건
거친 바다에 몸을 던지는 일
어둠을 뚫고 용케
어리바리한 물고기 몇 마리
건져 올려 하루를 접고 짠물에
절은 삭신 막걸리 몇 잔으로
달래 바닥에 눕히고 잠든 남편
잠결에도 압박감에 짓눌려
바다와 교신 중인지 간간이
미간을 찌푸린다
-「고래」 부분
오늘날 예술의 당위는 무의미해 보이는 것의 의미를 포착하는 것으로부터 비롯된다. 작가는 평범한 삶에 가치를 부여하고 그것에 미적 의미를 덧붙여 작품화한다. ‘사건’을 통해 작품을 전개하는 방식보다 ‘사건’이 없는 세계를 통해 작품 속 의미를 파악하고자 한다. 책상 위에 놓인 펜이나 해변의 작은 돌멩이와 같은 것들로부터 이야기가 전개된다. 이와 같이 등장하는 작품 속 이야기는 때로 쓸모없어 보이기까지 한다. 시 역시 마찬가지다. 거대 담론조차 일상의 사소함을 통해 말하는 것이 시를 포함한 오늘날 예술의 발화 방법이다. 조옥엽의 시 역시 그렇다.
조옥엽 시의 매혹은 아무 것도 아닌 삶의 순간을 포착하는 데 있다. 그것은 어쩌면 매혹의 반대 지점에 놓인 것들이라 할 수 있지만, 시인은 그것으로부터 미적 감각을 길어 올린다. 그리하여 무심한 듯 던지는 시인의 시선은 가장 치열한 삶의 한가운데를 관통하며 나아간다. 거실에서 자고 있는 남편으로부터 시작한 세계는 바다로 이어지며 원형과 맞닿은 세계로 확대되기에 이른다. 잠이라는 사소한 일상과 바다라는 원형적 삶이 이어지며 시적 세계관은 보다 넓은 지평을 갖게 된다. 언뜻 보기에 “절은 삭신 막걸리 몇 잔으로” 달랜 남편이 바닥에 잠든, 아무 것도 아닌 모습을 제시하고 있지만 「고래」에 등장한 잠의 깊이와 너비는 남다르다. 잠을 통해 우리 앞에 당도하는 것은 바다와 같은 확장된 사유의 지점이다. 시인은 사소함을 말하지만 그 안에 담긴 것들은 결코 사소하지 않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초저녁 잠을 형상화한 다음 작품에서도 여지없이 드러난다.
초저녁에 책을 읽다가
나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
눈을 뜨니 불빛이 환한 방에
음악만이 구름처럼 떠다니고 있다
앞으로 내게 얼마의 시간이
남아 있는지 나는 모른다
그러나 앞으로도 쭉 이렇게
책을 보다 잠깐 잠이 들었다
다시 깨 책을 읽거나
혹은 생각의 꼬리를 따라
근심을 키워나가거나 그걸
덜어갈 묘수를 생각하면서
살아갈 것이다
잠들고 깨는 일을 거듭하다
언젠가는 발끝을 드러낼 생
음지에 드문드문 남은
잔설 같은 슬픔이
하얀 비말을 일으키며 차오르는데
건조한 방에 미니 가습기는
여전히 제 역할에 충실
수증기를 뿜어내고 있다
-「습」 전문
시인은 삶이 사소하다고 말하고 싶은 것일지도 모른다. “초저녁에 책을 읽다가” 잠이 든 모습은 지극히 평범한 삶의 순간이다. 잠이 들었다 깨다를 반복하며 책을 읽거나 생각을 하는 것에 ‘사건’은 존재하지 않는다. 텅 빈 방에는 그저 “수증기를 뿜어”내는 가습기만 있을 뿐이다. 아무런 사건이 없지만 「습」을 읽는 이들이라면 이것이야말로 우리 삶의 진짜 모습임을 깨닫게 된다. 더구나 조옥엽의 시는 ‘사건’ 없는 일상을 제시하고 그것으로부터 의미를 말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시인은 평범한 삶의 끝에 죽음이 있음을 인식하고 그것을 말함으로써 삶을 완성하려고 한다.
삶의 끝에는 죽음이 놓이기 마련이다. 그래서인지 조옥엽 시인 역시 죽음으로서의 삶의 모습을 시집 곳곳에 배치하고 있다. 시집 전체 분량 중에 죽음을 다룬 작품은 많지 않지만 죽음이 시집 전반을 장악하는 주요한 정서임은 부인하기 힘들다. 이 시집에서 죽음은 다양한 양상으로 재현된다. 개인적 죽음은 물론이고 사회적 죽음을 다루고 있을 뿐만 아니라 삶의 마지막에 맞닥뜨리는 죽음과 함께 오래전의 죽음을 담담하게 말하기도 한다. 이처럼 죽음은 다양한 양상으로 다가오며 삶 이후의 문제를 탐문한다. 그러나 시인은 죽음 역시 거대한 ‘사건’으로 파악하지 않으려는 태도를 견지한다.
동사무소에 사망신고를 하러 갔다
직원이 내민 용지에
그녀의 출생 연월일과 사망 연월일, 사망 사유
딱 세 칸을 적고 나니 일이 마무리되었다며
직원이 흘끗, 나를 한번 쳐다보더니
다음 대기 번호를 부른다
돌아오는 길 내내 종이 한 장에 담긴
사람의 무게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지구의 등에 업혀 태양을 아흔두 바퀴나 돌았던 그녀
그 시간을 모조리 쓸어 담은 종이 한 장
꼭 쥐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어떤 일은 너무 가벼워서 사람을 짓누른다
밥 한 숟갈에도 이르지 못할 무게로 남은 생
일 그램도 채 안 될 생의 흔적이 무겁기만 하다
-「일 그램의 무게」 전문
죽음은 거창한 무엇이 아니다. 그것은 그저 삶의 한 순간일 뿐이다. 죽음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우리는 알지 못하지만 남겨진 자들의 시간 속에서 죽음은 삶이 되어 이어진다. “동사무소에 사망 신고를 하러” 간 것은 산 자의 시간이다. 산 자가 죽음을 호명할 때, 보이지 않는 죽음은 실재화 한다. 죽음은 삶의 순간을 통해 비로소 명확한 사건으로 남게 된다. 우리가 생각하는 죽음은 크고 무거운 것이다. 하지만 죽음은 “출생 연월일과 사망 연월일, 사망 사유” 세 가지로 간단하게 완성된다. “딱 세 칸을 적고 나니” 삶은 종료되고 죽음만이 오롯이 남는다. 시인은 사소하게 완성되는 죽음을 통해 삶의 덧없음을 우리에게 말하려 한다. 그리고 이와 같은 죽음은 이곳저곳에서 연이어 나타난다. 모든 죽음은 이렇게 아무 것도 아닌 삶의 마지막이 되며 스스로의 모습을 완성한다. 그런 죽음 앞에 남은 삶은 “밥 한 숟갈에도 이르지 못할 무게”에 불과할 정도로 비루할 뿐이다.
철문을 열자 여행을 마무리한
고인이 만반의 채비를
갖추고 반듯이 누워있다
…(중략)…
장례지도사는 가난해진 몸피 채우듯
혼자 견딘 수십 년의 공허를 메우듯
몸을 꽁꽁 묶은 뒤 포장을 한다
-「침묵으로 가는 계단」 부분
아버지가 무덤 앞에 무릎
꿇고 앉아 축문을 읽으신다
반백 년을 이산가족으로 지내시던
부모님 주검을 거두어 합장을 마치고
떨리는 목소리로 축문을 읽고 계신다
아들 음성을 들어보기 그 얼마만인가
꿈인 듯 반가웠을 사자들은 기척이 없고
바람의 저항에 무명실 같은 목소리만
봉분에 손가락을 얹다 말고 흩어진다
-「합장」 전문
공원묘지에 그녀가 누워있다
군데군데 붉은 흙이 드러나는 봉분
우리는 산적과 밀감을 앞에 놓고
술을 따르고 절을 한다
…(중략)…
그녀를 험지에 떨궈두고 달음질치는
내게 까마귀가 뒤따라오며
네가 그녀와 수십 년 한솥밥 먹고
살았던 사람인가 되묻고 있다
-「자문」 전문
우리가 맞닥뜨리는 죽음은 대체적으로 가까운 이들에게 닥친 일이다. 따라서 우리가 경험하는 죽음의 양상 역시 대부분 사적인 체험을 동반하며 다가오기 마련이다. 그런 점에서 조옥엽 시인의 시 속 죽음 역시 가족이나 지인과의 관계에서 비롯된 것이 많다. ‘나’와 관계를 맺었던 이들의 죽음은 ‘나’의 삶과 연결되며 지상의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어떤 점에서 죽음은 ‘그들’에게 닥친, 타자의 일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이야기이다. 시인은 타인의 죽음을 자신의 삶 속에서 이해하고 수용하려고 한다. 이것을 통해 죽음에 대한 시인의 애정 어린 시선을 느낄 수 있다. 시인이 인식하는 죽음이 ‘나’와 상관없는 타자의 사건이 아니라 자신과 관계를 맺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죽음에 대한 시인의 인식이 축소 지향적인 것은 아니다. 타인의 죽음에 깊은 애정을 갖고 있는 시인은 자신과 인연이 전혀 없는 이들의 죽음까지 안타까운 마음으로 바라본다. 그것은 공적인 양상을 띤 죽음을 대할 때도 마찬가지다. 시인은 공적인 양상의 죽음에 담긴 사적 양상의 가슴 아픈 사연에 주목한다.
백마고지에서 유골이 발굴되었다
해와 달의 화살받이가 돼
형체만 남은 허름한 농막 한 채
손대는 순간, 바로
해체되어버릴 듯 위태롭다
엎드려 총을 겨눈 사격 자세로
아직도 전투 중인 병사의 유골
집요한 정신력의 산물인가
잔인한 역사에 대한 항의 표시인가
70여 년을 공포와 두려움과 벌인
사투 끝이 적나라하다
누구도 찾지 않았던 잊힌 목숨
흙구덩이에 몸을 감추고
눈보라와 굶주림에 몸을 내준 채
이 전쟁이 끝나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으리란
일념 하나로 버티다 날아가 버린 생
그 설움 풀길 없어 백골로나마
신분이 밝혀지기를 기원했을 무명의 병사
처절했던 지난 기억을 까맣게 잃어버린
구멍 뚫린 철모와 녹슨 탄피만이
해와 달을 삼키다 공기놀이에 착안
낮과 밤을 가지고 놀았는지
사방에 널려 태평스럽다
-「발굴」 전문
여기 또 다른 죽음이 있다. 사연은 알 수 없지만 전쟁이라는 ‘대의’ 속에 삶을 바친 죽음이 있다. 무감각한 일상 속 죽음과 전쟁 속 죽음은 사뭇 다르다. 무엇인가를 위해 싸웠다는 점에서, 전쟁 속 죽음은 보다 큰 의미로 다가오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그들의 삶 역시 이름 없이 살다가 이름 없이 죽음에 이르렀다는 점에서 다른 이들의 죽음과 다르지 않다. 전쟁이라는 공적 사건과 결부된 죽음이라고 해서 사적인 슬픔이 제거된 것은 아니다. 그런 점에서 모든 죽음은 지극히 사적인 것일 수밖에 없다. 사상도 정치도 우리의 삶 속에서 아무 것도 아닐 수 있음을 시인은 알고 있다. 그 때문에 시인은 줄곧 아무 것도 아닌 삶의 순간을 포착하여 말하고자 한다.
지구 저쪽에서 지진으로
수천 명이 죽어 나간다는
비보가 뜬 날
나는 이런저런 걱정으로 하루 치
근심의 물동이를 채우다
그나마 죽지 않고 살아있으니
다행 아니냐고 자신을 다독인다
날아가 버린 집터에서
핏줄을 잃고 추위에 떨며
울부짖는 사람들, 마음 한구석에선
죄스러운 마음이 일지만
그들을 보며 가라앉히는 근심
세상 사람들도 나처럼
남들의 불행을 보고
안으로 자신을 다스리며
그럭저럭 살아가는 것일까
위를 올려다보지 않고
아래를 내려다보며 개떡 같은
날들을 쓰다듬고 다독여 가며
그럭저럭 하루하루를
-「그럭저럭」 전문
공적인 죽음을 끌어안은 시인의 시선은 이제 “지구 저쪽” 지진으로 “수천 명이 죽어 나간다는” 곳으로까지 이어진다. 시인의 주된 관심사는 일상의 영역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개인적인 관점에만 머무는 것은 아니다. 바로 여기에서 세계에 대한 조옥엽 시의 지향 의지와 태도를 엿볼 수 있다. 그것은 나로부터 시작하여 “남들의 불행”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의지이며, 내부에서 외부로 나아감으로써 보다 큰 세계에 닿고자 하는 시인의 확고한 신념이기도 하다. 여기에 이르러 놀라운 것은 시 전반에 걸쳐 나타난 사소한 삶의 국면을 바탕으로 개인적 차원을 넘어서는, ‘사건’으로서의 죽음을 이끌어낸다는 점이다. 조옥엽 시의 죽음은 점층적인 양상으로 전개된다. 삶의 사소한 지점으로부터 전개된 죽음은 일상 속 장면에서 시작되지만 이내 확장되어 사회적 죽음으로까지 나아간다.
공사를 하느라 자갈밭에
옮겨 심은 수국이 말라 죽어버렸다
화단을 지나갈 때마다
떨어지지 않는 눈길
마치 지극히 사랑하던 이를
잃은 것처럼 밀려드는 서글픔
지난겨울 눈밭 속에서
마음을 다잡은 것일까
경칩 날 아침 그리움에
쪼그리고 앉아 비쩍 마른 밑동을
한참 동안 들여다보는데
죽은 가지들 사이에서 손톱만 한
움들이 조심조심 올라오고 있었다
가슴 깊은 곳에서
조용히 터져 나오는 탄성
온몸을 휘감는 이 전율
내 안의 내가 콩 타작마당의 콩처럼
콩콩 콩콩 뛰고 있다
-「재생」 전문
모든 삶과 죽음은 사소한 것일지도 모른다. 사소함의 가운데 삶과 죽음은 이어지고, 죽음은 또 다른 삶으로 전이된다. 여기 말라 죽어버린 수국이 있다. “공사를 하느라 자갈밭에” 옮겨 심었으니 당연한 죽음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조금만 삶에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면, 죽음에 무신경한 마음을 조심했더라면 수국은 말라 죽지 않았을 것이다. 이렇듯 삶과 죽음은 작은 것들로부터 시작되고 나뉘기 마련이다. 시인은 이 모든 것들에 애정을 가지고 바라보기를 희망한다. 그리하여 말라 죽은 수국을 바라보며 “지극히 사랑하던 이를” 잃은 듯한 서글픔을 느낀다. 하지만 이때 시인의 감정은 격렬하게 요동치지 않는다. 시인이 느끼는 슬픔은 “쪼그리고 앉아 비쩍 마른 밑동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고요한 그리움과 닮아 있다. 그리고 그곳에서 시인은 또 다른 삶의 시작을 발견하며 삶과 죽음이 다르지 않음을 깨닫는다. 그리하여 시인은 “가슴 깊은 곳에서 조용히 터져 나오는 탄성”이자 “온몸을 휘감는 전율”인 삶의 애초를 보며 두근거리는 감정에 사로잡히게 된다. 마지막 순간으로부터 새로운 시작을 바라보는 것! 그것이 바로 조옥엽 시의 핵심이자 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