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천한담
호랑이 등에 매달리다
청계산(淸溪山)이라는 이름의 산이 수도권에 3곳이 있다. 자주 가는 과천의 청계산과 포천 일동의 청계산, 그리고 양평의 청계산이다. 전국적으로 찾으면 더욱 많을 것이다. 대체로 산 이름으로 보아 맑은 계곡이 있으면 붙일만한 이름이기 때문일까?
과천 청계산 외에는 당일 산행으로는 교통이 불편하여 가본 적이 없었는데 전철(電鐵)이 개통되어 양평 청계산은 쉽게 다녀올 수 있게 되었다.
전철역의 개통에 맞추어 등산로도 제법 정비를 잘해놓아 신선한 느낌이 드는데다 그 동안 등산객이 많지 않아서인가 아직까지는 심산(深山)의 자태(姿態)를 잘 간직하고 있다.
하늘로 죽죽 뻗어 오른 전나무들이 비록 가늘고 호리호리하지만 그래도 밀림(密林)과 같은 느낌을 주는데다 수림(樹林)을 벗어나면 금새 햇살이 환하게 비추이며 길가에 가득히 피어있는 들꽃들을 찬란하게 비추어 준다.
다만 한가지 아쉬운 것은 청계라는 이름에 어울리지 않게 크고 맑은 내가 없다는 것인데 양수리나 신원역 방면의 코스에서는 어떠한지 아직 가보지 않았으니 꼭 그렇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하여튼 나무숲으로 가득한 오솔길을 따라 걷다 보면 그다지 힘들지 않은 몇 군데의 깔딱 고개에서 잠시 숨을 허덕이고는 곧 정상(頂上)이 된다.
산 봉우리에 오르면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정상에서 사방을 조망(眺望)하다 보면 가슴 속 깊은 곳에서 벅찬 환희(歡喜)가 솟는다.
정상에 올라 사방을 내려다본다는 것에서 느끼는 무한한 기쁨은 더 이상 오를 수 없는 가장 높은 곳에 올라왔다는 사실에서 느끼는 일종의 자부심이요, 포만감(飽滿感)일 수도 있으나 다른 일에서 얻는 성취감이 때로는 어두운 그림자가 끼이거나 안개와 같은 과거의 흔적들이 가시지 않은 기쁨인 것과는 달리 아무런 보상도 대가도 필요로 하지 않는 그저 활짝 피어 오르는 순수한 기쁨이요 황홀함이다.
그것은 어찌하여 그런가?
누구나 땀을 흘리며 산에 올라 드디어 산마루나 산꼭대기에 서게 된다.
그 자리에서 때로는 광활(廣闊)한 대자연의 품속에서 하나의 작은 점으로 서있는 자신을 생각하며 감사와 겸손을 느끼기도 하고 어쩌면 “정상을 정복하였노라”고 하는 통쾌함도 있을 수 있겠으나 그러나 그 어느 누가 말하지 않아도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은 “오래 있을 수도 없을 뿐 아니라 반드시 다시 내려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하니 정상에서의 환희는 아무런 찌끼가 붙어있지 않는 순수한 기쁨이 될 수 밖에 없다.
이러한 순수한 기쁨이 산의 정상에 서는 것뿐이겠는가?
하지만 대부분의 성공이나 성취에서 느끼는 기쁨은 무언가 꼬리가 붙게 마련이다. 그것은 그 기쁨과 행복을 영원한 것으로 생각하고 붙잡아 두려고 애를 쓰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탐욕과 아집(我執)의 굴레에 묶여 자신의 대단했던 능력은 잃어버리고 시시하고 하찮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는 것처럼 허망하게 나락(奈落)으로 떨어지는 일도 생긴다.
우리나라가 왜정의 굴레에서 벗어나 광복의 기쁨을 누린 것은 잠시로 곧 남북, 좌우의 대립으로 혼란했던 정치판에서 미국에서 귀국한 이승만은 정권장악의 열망과 수일(秀逸)한 외교적 수완으로 좌익세력과 독립지사들의 공세를 하나씩 격파하며 정치적 승리를 거두고는 신생 대한민국을 이끌어 가는 정상의 자리를 장장 15년간이나 독차지하였다.
그만큼 오랜 세월 동안 장기독재를 할 만큼 어느 누구보다도 뛰어난 교지(狡智)와 강인(强靭)함을 갖춘 마키아벨리스트였음에도 정상에서 내려가야 할 때를 놓친 그는 이기붕과 같은 탐욕만이 가득한 소인배에게 휘둘리다 처량한 말년을 맞게 되었다.
그뿐이 아니다. 우리 민족에게 역사상 처음으로 경제적 활력을 가져오게 하였던 박정희도 정상에서의 달콤한 유혹을 이겨내지 못하고 끝까지 움켜쥐려고 하다가 끝내 차지철과 같은 범용(凡庸)한 자에게 휘둘리다 처참한 말로(末路)를 맞았다.
이런 일이 비단 정치적인 사건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보편적으로 성공의 순간, 드디어 정상에 섰다고 하는 바로 그 순간에 또 다른 정상을 찾게 되던가 아니면 피땀 흘려 일구어낸 정상에서 언제까지나 못박혀있고 싶은 것이 사람의 마음이다.
최근에 자살한 노무현 전대통령의 경우도 그러할까? 그의 자살에 대하여 많은 사람이 갖가지 이유를 들고 있는데 그 중의 하나로 그는 재임 중에 못다한 여러 가지 일에 대한 자괴(自愧)와 함께 이미 정상에서 내려왔다는 현실을 깨닫지 못하고 그 정상의 자리를 차지했을 때의 성공과 정복의 쾌감(快感)이나 자부심(自負心)을 그리며 그 자리로 되돌아가고 싶은 미련(未練)과 욕망이 너무 커서 우울증에 빠져 버렸을 수도 있다.
정상에서 내려왔다는 현실, 또 내려가야 한다는 사실을 주변에서 확실히 인지시켜주어야 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그런 마음 상태에 동조(同調)하거나 영합(迎合)한 자들은 이제 와서 눈물을 흘리며 무엇을 생각하고 있을까?
그런데 역설적(逆說的)으로 그는 최단시간에 떨어져 내려옴으로써 사람들의 감성(感性)을 자극하는 것에는 다시 한번 성공한 셈이다. 옛말에 “말은 통속적이어야 널리 퍼지고 세상 물정에 닿아야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다(話須通俗方傳遠 語必關風始動人)”라고 하였다니—
누구나 정상의 자리에서 언젠가는 내려가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기는 하지만 글쎄 그것이 주식에서 손절매(損切賣)하는 것보다 훨씬 어려운 노릇이다. 어쩌면 내려오고 싶어도 내려올 수 없는 그야말로 호랑이 등에 올라타고 있는 것이라고 해야 할까?
산봉우리에 올라 흐르는 땀을 닦으며 거친 숨을 고르는 동안 파란 하늘에 무심히 떠있는 흰구름과 멀리 말없이 드러누워 있는 산야(山野)들을 바라볼 때 그저 순수한 기쁨만을 느끼게 되는 것은 빈손으로 내려가야 함을 자연히 알고 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양천서창에서 2009.6.24. 문상두 씀)
첫댓글 산림욕하는 상쾌한 기분!!! 더우기 건강을 회복한 수호신과 함께한 산행이라 더욱 뜻 깊었습니다.
인생은 空手來 空手去~~~ 마음을 비워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