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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전통의 수호와 전달”
□ 딤후 1:1-14 □
박창환 (본원장)
I. 목회서신의 저작자 문제
오늘의 본문은 우선 그 저자가 누구냐 하는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피상적으로는 디모데후서가 사도 바울의 글로 되어 있고 따라서 전통적으로 바울의 글로 알고 읽혀지지만, 학계에서는 그것이 바울의 글이 아니라 바울을 지극히 존경하는 제자가 다음 세대에 스승의 이름을 빌어서 쓴 글이라고 주장한다. 우리 시대에는 남의 이름으로 글을 쓴다는 것이 하나의 거짓이요 부당한 것으로 여겨지지만, 옛날 특히 초대교회 시대에는 그것이 흔히 유행하던 일이요, 오히려 아름다운 일이라고 여겨졌었기에, 우리는 디모데후서에 대한 학자들의 주장을 쉽게 무시할 수가 없다.
우리가 전통을 존중해야 하지만 전통이 반드시 다 좋거나 옳은 것만은 아니기에 참을 찾는 노력을 게을리 해서는 안된다. 과거의 전통은 많은 경우 직관적이고 주관적이고 피상적인 판단에 의한 것으로, 그것들을 학문적으로 연구해 보면 참이 아닌 경우가 얼마든지 있다. 학문이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지성을 가지고 참을 찾는 노력이라고 볼 때, 막연한 전통보다는 학자들의 학구적 노력의 결과가 참에 보다 더 가깝다는 것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학자들이 목회서신(디모데전서, 디모데후서, 디도서)을 바울 사도 자신의 글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근거 중의 한 두 가지만을 소개해 보자. (1) 목회서신이 848 단어로 구성되었는데 그 중 306 단어 즉 36%가 다른 10 서신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그리고 그 306단어 중에 211 개가 제 2 세기 저술가들의 글에 흔히 사용되는 낱말들이다. (이 통계는 The Interpreter's Dictionary of the Bible,제 3권 670쪽에서 옴). 이만큼 그 어휘에 있어서 바울의 다른 서신들과 차이가 있다. (2) 사상에 있어서 목회서신과 바울의 다른 서신과 사이에 차이가 있다. 의(⌈디카이오쉬네⌋ δικαιοσύνη), 믿음(⌈피스티스⌋ πίστις)의 의미가 목회서신에서는 다른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율법에 대한 태도가 다른 서신에서의 바울의 태도와 다르다. 고린도서에서는 결혼을 가급적 반대했는데 목회서신에서는 교직자의 결혼을 필수적인 것으로 인정했다. (3)교회의 제도와 조직이 목회서신에는 상당히 발전된 상태로 나타난다. 이 밖에도 여러 가지 근거를 들고 나온다. 이런 것들이 절대적인 증거가 될 수는 없지만 상당한 가능성을 말해 준다.(David L. Barr, An Introduction to New Testament Story, 2nd ed. pp169- 170 참조).
목회서신이 바울 사도 자신의 글이라면 그의 말년에 사랑하는 제자요 후배요 믿음의 아들들인 디모데와 디도에게 다가올 시대를 예견하고 점치면서 지시하고 당부하고 가르치는 글을 쓴 것으로 볼 수 있겠다. 그러나 바울의 어떤 제자가 썼다면 그가 바울 이후 시대를 살면서 그 시대에 당면한 여라 가지 문제를 가지고 고민하면서 그 시대의 동료 교역자들을 디모데와 디도로 가상하고 당부하며 가르치려는 목적으로 글을 썼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II. 본문의 위치
디모데후서 저자는 노련한 선교사로서 젊은 후배 동료에게 시대적 사명을 부과하는 글을 쓴 것이다. 바울이 순교하고 서방(西方)의 교회는 지도자를 잃은 상태에 있었다. 그러나 교회는 계속 자라고 있었다. 교회가 자라면서 자연히 제도가 생기고 신앙과 행위의 틀이 잡히게 마련이었다. 그러는 중에 진리에 어긋나는 사상이나 행위가 숨어들어 교회를 교회답지 않게 만드는 사태가 벌어지는 것이었다. 그러기에 바울 이후의 교회는 사도의 전통 특히 바울의 교훈을 보존하는 일에 힘을 쓰고 그것을 표준으로 하여 신앙생활을 하려고 노력하였다. 저자는 교회 안과 밖으로부터 오는 여러 가지 악한 영향에서 교회를 보전하는 책임을 디모데에게 위탁한다. 그러한 지도자에게 요구되는 것은 우선 참을성이다. 교역자 디모데는 임직을 받을 때 하나님께로부터 받았던 그 열정과 불타는 사명, 즉 하나님의 은사를 소멸하지 말고 다시 불붙여 열을 내야 한다는 것이다(1:3-7).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증언하는 일을 부끄러워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1:8-18). 동시에 그리스도의 훌륭한 병사로서 고난에 참여해야 한다는 것이다(2:1-13).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일삼는 거짓 교사들을 대항하여 말씀을 올바로 해석하는 훌륭한 일군이 되려고 노력해야 하며(2:14-19),저열한 행동을 멀리하여 순결을 지키며 주님이 쓰시기에 합당한 그릇이 되어야 한다(2:20-26). 그러기 위해서는 달려 갈 길을 다 가고 의의 월계관을 기다리는 바울을 본받아야 한다는 것이다(3:10-17;4:6-8).
오늘의 본문은 이와 같은 맥락의 글 속에 맨 첫 부분으로서 재분기(再奮起)하여 그리스도의 증인의 역할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감당하라는 당부의 말씀을 골자로 하고 있다.
III. 원문비평
이 단락은 원문비평적 문제를 별로 가지고 있지 않다. 사소한 것들이 몇 개 있지만 UBS Greek New Testament 제 4 판이 한대로, 우리도 단 한 가지만 거론하기로 한다.
< 11절 >
א*, A 두 개의 대문자 사본과 1, 1175 두 개의 소문자 사본과 한 개의 시리아 역본에 καὶ διδάσκαλος로 되어 있고 א2 D F G ψ등 대문자 사본과 많은 소문자 사본, 고대 역본, 교부들의 인용문에는 καὶ διδάσκαλος ἐθνών으로 나타난다. 즉 전자는 그냥 “그리고 교사”로 되어 있고 후자는 “그리고 이방인의 교사”로 나타난 것이다. 또 하나는 33이라는 소문자 사본 하나가 καὶ διάκονος(그리고 일꾼)로 나타냈다. 이 마지막 경우는 증거가 너무 약해서 고려의 가치가 희박하다. 첫째와 둘째를 비교해 볼 때 시내산 사본(א)의 원본과 A 사본의 권위가 둘째 읽기를 지지하는 사본들의 권위를 능가하는 것이기에 자연히 첫째 읽기를 선호하게 된다. 그래서 UBS 학자들도 첫째 일기를 {B}급으로 간주하며 본문에 넣었다. 즉 100% 확신은 없지만 가장 개연성(蓋然性)이 많다는 말이다.
IV. 주 해
< 1절 >
저자는 헬라-로마의 전통적인 서신 형식을 따라 먼저 발신인을 주격 명사로 내세운다. 발신인은 사도인 바울이라는 것이다 (⌈파울로스 아포스톨로스⌋ Παύλος ἀπόστολος). 사도는 특별한 권위를 가진 존재이다. 파송을 받은 사람(ἀποστέλ- λειν ⌈아포스톨레인⌋의 파생어)즉 파송자가 어떤 사명을 주어 보낸 사람을 가리킨다.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가 파송한 대사 격인 존재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역사의 한 인물 사울을 불러 사도로 삼으신 것은 하나의 역사적인 평범한 사건으로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그 사건은 결코 세상의 인위적인 보통 사건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에 의한 신령한 사건이요 초역사적인 사건이라는 것이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약속대로. 그리스도 예수는 그 자신이 생명이고 그 분 안에 있는 사람은 자연히 생명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문제는 생명의 약속대로 (⌈카테팡겔리안 조에스⌋ κατ΄ ἐπαγγελίαν ζωής)가 어떤 뜻인가이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예수를 세상에 보내시고 그를 믿는 자들에게 생명을 주시기로 약속하셨다(요일 2:25).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그 복된 소식을 세상에 전하여 많은 사람이 생명을 얻는 것이 또한 그의 뜻이기에 그 일을 위하여 바울을 불러 파송하셨다는 뜻일 것이다.
< 2절 >
전통적인 서신 형식에 따라 수신인을 여격 명사로 나타냈다 (⌈티모테오⌋ Τιμο-Θέῳ). 바울과 디모데 관계는 아버지와 자식의 관계처럼 친밀한 것이었다. 그래서“아들 디모데에게”라고 한 것이다. 서신 서두의 인사는 보통 ⌈카이레인⌋ (χαίρειν‘기뻐하라’)인데 바울은 그것을 기독교화해서 은혜와 평강(⌈카리스 카이 에이레네⌋ χάρις καὶ εἰρήνη)으로 대치했다. 바울의 주요 서신들(the authentic epi-stles)에서는 예외 없이 그런 표현을 썼는데 여기서는 “자비”(⌈엘레오스⌋ ἔλεος)를 가운데 삽입했다. 이것이 비(非)바울적 요소의 하나가 아닐까? 아마도 은혜라는 말의 의미가 모호하고 혼동되기 때문에 보충하는 의미에서 후대에 “자비”를 첨가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세상에서 사람들이 얻는 은혜, 자비, 평강이 있지만 그것들은 임시적이고 불완전하다. 그러나 하나님과 그리스도께로부터 오는 은혜와 자비와 평강은 무한하고 영구적인 것이기에 그것들이 있기를 기원한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큰 축원이 바로 이것일 것이다.
< 3-5절 >
3절에서 5절이 하나의 긴 문장(sentence)으로 되어 있다. 주문장은 ⌈카린 엑호 토 테오⌋ Χάριν ἐχω τῷ θεῷ, 즉 나는 … 하나님께 감사한다는 말이다. 나머지 여러 문장은 분사구문으로 된 등위절(coordinate clause)들이다. 저자가 감사하는 마음을 가진 대상, 즉 하나님과 저자의 관계를 우선 진술한다. 그 하나님은 내가 청결한 양심으로 조상 적부터 섬겨 오는 분이라는 것이다. 저자의 양심적인 고백이다. 자기는 조상 때부터 대대로 하나님을 예배하고(⌈라트류오⌋λατρεύω: NRSV에는 worship, NIV에는 serve)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섬기고 그를 예배하는 일에 있어서 조금도 양심에 거리낌이 없을 정도로 자신이 있고 열성적이라는 말일 것이다. 다음에는 하나님께 감사하는 행동에 대한 시간적 부사절이 뒤따른다. 저자는 밤낮으로 하나님께 간구하는데 그 때마다 쉬지 않고 디모데를 기억한다는 것이며, 그럴 때마다 하나님께 고마움을 느낀다는 것이다. 디모데를 구원해 주신 일,그를 착실한 일군으로 만들어 주신 일,디모데를 자기의 믿음의 아들로 삼게 된 일 등등이 다 감사할 만한 조건이었을 것이다. 저자가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이 있는 동시에 가지는 또 하나의 상념은 디모데를 보고싶다는 생각이다. 그를 보고 싶은 이유는 디모데의 눈물이 자기 눈앞에 선히 떠오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저자가 그렇게도 못 잊을 디모데의 눈물은 어떤 종류의 것이었을까?
어버이를 떠나 보내는 자식처럼 바울과 이별할 때 디모데의 슬픔이 퍽 컸던 것 같다. 아니면 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야처럼 교회를 생각하고 염려하는 눈물을 흘리던 디모데를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저자가 디모데를 보고자 하는 목적은 자기 자신이 기쁨이 충만해지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만나서 기쁨이 되는 사람이 있고 만나기가 싫고 무서운 사람이 있다. 디모데는 전자에 속하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이는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을 생각함이라(1:5). 이 구절은 저자가 디모데를 보고 싶어하는 또 하나의 이유를 말해 준다. 디모데에게는 가식이 없는 믿음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테스 안휘포크리투 피스테오스⌋ τής ἀνυποκρίτου πίστεως 는 진지하고(sincere) 순수한(genuine) 신앙 즉 가식이 없는 신앙을 가리킨다. 여기서 믿음은 바울의 다른 서신에서처럼 예수에 대한 신앙을 가리키기보다는 좀 더 포괄적인 의미로 예수를 믿는 종교심을 가리킨다. 믿음이라고 해서 단지 믿는 행동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믿음으로써 가지는 마음가짐 전체를 가리키는 것이다. 디모데의 외조모 로이스와 어머니 유니게가 가졌던 신앙이 디모데에게도 있다는 사실을 저자가 확신하기에 그를 만나고 싶고 보고싶다는 말이다.
< 6절 >
그러므로(⌈디 헨 아이티안⌋ δι΄ ἣν αίτιαν). 저자가 생각할 때 디모데야 마로 귀한 존재요 그 시대와 앞으로의 시대를 위해서 중대한 책임을 질 수 있는 자격이 있다고 보기 때문이라는 말일 것이다. 대를 이어 가지는 신앙심, 그리고 순수하고 거짓이 없는 신앙을 가진 자는 별로 없었을 것이기 때문에 이제 디모데를 격려하여 훌륭한 그릇으로 쓰려는 것이다. 저자가 의도하는 주요 사항은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불일듯하게 하기 위하여 너로 생각나게 한다는 것이다. ⌈아나미므네스코 세⌋ ἀναμιμνῂσκω σε 는 디모데가 까마득히 잊어버렸거나, 가치를 깨닫지 못하고 매장해 둔 것을 그에게 다시 기억나게 하거나 깨우쳐 주겠다는 것이다. 디모데에게 하나님께서 귀한 은사를 주셨는데 디모데는 그 중요성을 깨닫지 못하고, 혹은 아주 잊어버리고, 마치 꺼져가는 불같아졌기에, 저자는 안타깝게 여기고 또는 위험스럽게 또는 유감스럽게 여기면서 그것을 다시 ανα 살려내고 ζω 불을 붙이라 πυρείν 고 권한다는 말이다. “네 속에 있는 은사 곧 장로의 회에서 안수 받을 때에 예언으로 말미암아 받은 것”(딤전 4:14)이란 말과 내가 나의 안수함으로 네 속에 있는(6)이란 말은 상통하는 것으로, 디모데는 바울을 비롯하여 몇몇 장로들의 모임에서 그들의 안수를 받으므로 성직을 받았을 것이다. 이러한 안수식에서 디모데가 하나님께로 받은 은사는 어떤 것일까? 사람의 머리에 손을 얹는 외형적 예식은 하나의 신령한 사건의 상징일 뿐이고 실제로 신비로운 사건이 벌어지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영이 안수를 받는 사람에게 임하고 그에게 직분과 책임과 거기에 필요한 여러 가지 능력을 부여한다. 디모데는 교회의 목자로서의 사명과 그리스도의 증인으로서(1:8)의 사명을 받았을 것이며 그 직책을 수행하기에 필요한 능력을 받았을 것이다. 그 능력의 일 부분이 제 7 절에 소개된다.
< 7절 >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니. 여기의 우리는 저자와 디모데를 가리킬 것이다. 저자도 은사를 받은 사람이고 디모데도 은사를 받은 사람이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자들에게 기름을 부어 임무를 맡길 때, 우선 소극적으로 말하자면, 비겁하고 겁을 먹는 영을 주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일꾼으로 기름 부어 세우신 이상 하나님이 책임을 지실 것이고 어떤 경우에도 내버려두시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사람이 겁을 낼 필요가 없다. 하나님은 전능자로서 능력의 영을 주시고 사랑의 하나님이시기에 사랑의 영을 주시고 지혜와 진리의 하나님이시기에 만사를 건전하게 바르게 판단하고 처리할 수 있는 영을 주시는 것이다. 보통 사람들이 가지지 못하는 이러한 직무와 능을 은사로 받았으니 그것을 사장해 버리거나 잊어버리거나 무시하지 말고 활용해야만, 소명을 주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일이 된다. 개역성경에 마음(πνεύμα)이라고 한 것은 오히려 “영”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자연스러울 것 같다.
< 8절 >
사명자로서 해야 할 일을 여기서 당부한다. 네 개의 명령형으로써 디모데에게 명을 내린다. (1)첫째는 부끄러워 말라는 것이다. 두 가지를 부끄러워 말라고 한다. 하나는 우리 주의 증거를 부끄러워 말라는 것이다. 즉 우리의 주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일을 부끄러워 말라는 것이다. 롬 1:16에서 바울이 스스로 자기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고백했다. 로마국의 시민으로서 변방의 작은 속국 즉 유대 나라의 한 사람 예수, 소요 선동죄로 십자가형을 받고 죽은 사람을 믿는 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우리의 구주라는 사실을 증언하는 일을 부끄러워하지 말라고 명령한다. 또 하나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바울)를 부끄러워하지 말라는 것이다. 여기의 ⌈데스미온 아우투⌋ δέσμιον αὐτού 는 그리스도에게 사로잡힌 자, 즉 그리스도의 포로라는 뜻도 된다. 바울은 그리스도에게 사로잡혔고 또한 그리스도 때문에 감옥 생활을 하고 있는데, 그러한 고통은 의로운 고통으로서, 그런 사람을 스승으로 모신다든지 교분을 가진다는 일은 부끄러워할 일이 아니라 오히려 자랑스럽게 생각해야 할 것이다. (2)둘 째 명령은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는 것이다. ‘복음과 함께’보다는 ‘복음을 위해서’라고 번역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토 유앙겔리오⌋ τῷ εὐαγγελίῳ는 ‘복음과 함께’라는 뜻도 있고 ‘복음을 위하여’라는 말도 된다). 복음을 전하고 복음의 증인이 된다는 것은 고통이 따르는 일이다. 복음을 위해서 고난을 당하는 사람이 많이 있다. 바울도 베드로도 그리고 제 2 세대 전도자도 다 고난을 겪으면서 복음을 전했다. 복음은 문자 그대로 인간에게 기쁜 소식이지만 악과 싸워서 선하신 하나님 편에 서야 하는 것이 기독교이기에 악을 대항하는 고통스러운 싸움이 없을 수 없다. 복음을 쉽게 전한다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디모데더러 그 고난의 행렬에 동참하라는 것이다. 그것이 전도자의 참 모습이기 때문이다. 그 고난의 길은 전도자 자신의 힘이나 지혜를 가지고는 성공적으로 걸을 수가 없다. 하나님의 능력을 좇아서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복음의 일꾼들에게 능력을 주신다. 우리 힘으로써는 그 고난을 당해 낼 수가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능히 그 고난을 극복할 수 있다.
<9-10절>
8절 마지막에 하나님의 능력을 언급하였고 이어서 저자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9-10 절에서 길게 설명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신 분이시고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신 분이시다. 여기서 거룩하신 부르심이란 무엇일까? NEB는 God called us to a dedicated life라고 번역했다. 즉 하나님께 봉헌된 삶을 살라고 우리를 부르셨다는 말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셔서 세상 사람들과는 구별된 존재로 삼으셨다는 말이기도 하다. 세상 사람은 아직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데 우리는 그들과는 다르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신 것이다. 이렇게 구원을 받고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것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다. 인간의 공로가 있어서 그 대가로 구원이 주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뜻 (⌈프로테신⌋ πρόθεσιν 계획, 목적)과 은혜를 따라서 된 것이다. 하나님이 창세 전에 이미 예정하시고 계획을 짜 놓으신 그대로 하신 일이며, 따라서 완전히 하나님의 은총적 사건이라는 것이다. 이어서 은혜에 대한 설명이 따른다. 은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다. 엄밀히 말해서 은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이지 우리가 벌거나 만든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은총을 베푸시되 그리스도 예수와의 관계에서만 하신다. 그리스도 예수를 보내신 것이 바로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은총이요 그를 믿을 수 있게 하신 것도 은총이요, 그를 믿는 사람을 구원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시고 영생을 얻게 하신 것도 은총이다. 그런데 그 은총을 우리에게 주시는 행동이 돌발적으로 또는 우연적으로 일어난 것이 아니고 영원한 때 전부터 하신 것이다. 세상을 만드시기 이전에 이미 그렇게 하시기로 계획되었던 것이다.
< 10절 >
그것이 마침내 이제 와서 밝히 드러났다. 구체적으로 말해서 은혜가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환히 나타났다는 말이다. ⌈에피파네이아⌋ (ἐπιφανεία ‘나타나심’)가 딤전 6:14에는 예수의 재림을 가리키는데 여기서는 예수의 성육신을 가리킨다. 인간이 다 구원을 갈망하면서도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건 속에서 비로소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이기에 그의 성육신에서 하나님의 은총이 환히 나타났다고 말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 예수가 어떻게 구원을 성취하셨다는 것인가? 여기서는 두 가지를 들고 나온다. 첫째로 예수가 사망을 폐하셨다 는 것이다. 지금까지 사망이 기승을 부리고 세력을 쓰고 있어서 어느 누구도 그 지배를 벗어나지를 못했었는데, 예수께서 사망을 무력화(無力化 καταργήσαντος)시켜 이제는 죽음의 지배를 면하게 됐다는 것이다. 둘째는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셨다. 죽음을 물리치시고 그 반대로 생명과 불멸불후(不滅不朽)를 환하게 나타내 보이셨다. 예수 자신이 부활하심으로써 생명과 불멸을 입증하셨고 그를 믿는 자에게도 같은 효과가 있을 것을 밝히 보여주셨다. ‘복음으로써’(⌈디아 투 유앙겔리우⌋ διὰ τού εὐαγγελίου)는 ‘복음을 통하여’라는 말이다. 결국 예수 자신이 우리 인간에게 복음이며 구원의 능력이다(롬 1:1-16). 그러니까 ‘복음을 통하여’라는 말은 예수 사건을 통하여라는 말이 될 것이다.
<11-12절>
10절 끝에 나오는 “복음”과 저자 자신과의 관계를 11절에서 설명한다. 즉 그 복음을 위해서 하나님은 자기를 반포자와 사도와 교사로 세우셨다 는 것이다. 여기서 저자(바울)는 자기 자신을 하나의 표본이나 예(例)로 내 세우고 디모데더러 자기처럼 하라고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바울을 부르셔서 복음의 반포자가 되게 하셨고 사도와 교사로서의 중책을 맡게 하셨다. 반포(頒布)하는 일은 일선에서 외쳐 선전하고 알리는 일이어 가장 선봉에서 하는 일이다. 그래서 여러 영어 번역은 그것을 herald라고 표현했다(NEB, NRSV등). 바울은 체면이나 격식이나를 따지지 않고 앞장서서 복음을 전파하는 역할을 했다. 둘째로 사도로서 권위 있는 증인의 역할을 했다. 아무나 사도가 되는 것이 아니다. 예수가 부르시고 사명을 주어 파송한 사람만을 사도라고 한다. 그만큼 그들은 사명과 책임이 크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에 대한 제 1차적 증언자들이며, 그들의 증언 위에 교회가 건설되고 기독교 신앙이 형성되는 것이다(엡 2:20). 바울은 스스로 사도임을 자부한다. 그는 부활주를 만났고 그에게서 사명을 받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바울을 교사로 삼으셨다. 바울의 교사적인 활동이 아니었다면 오늘의 기독교가 있을 수 있었겠는가! 이러한 중대한 사명을 수행하는데는 거기 따르는 많은 고난이 있었고 심지어 빈번히 감옥에 갇히는 일도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 수난 속에서도 바울은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이미 8 절에서 부끄러워하지 말고 함께 고난을 받으라는 명령을 내린 바 있다. 고난을 당하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은 까닭을 두 가지로 표현했다. 첫째는 내가 의뢰한 자를 내가 알기 때문이다는 것이다. �즉 바울은 예수를 믿은 후부터 자기의 전부를 그리스도께 위탁해 버렸다. ⌈페피스튜카⌋ (πεπίστευκα 내가 의뢰한)는 현재완료 직설법 동사로서 과거 동작의 현재적 결과를 나타내는 동사이다. 그러니까 바울은 오래 전에 개종하는 순간 자기를 몽땅 그리스도께 의탁했고 몸을 산채로 제물로 바치기로 결심했다(롬 12:1). 그때부터 지금까지도 그 결심이 남아 있다는 말이다. 주님께 자기를 위탁했는데 바울은 그 주님이 어떠한 분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는 말이다. 주님의 능력, 사랑, 자비를 알고 있으니, 고맙고 기쁠 뿐이지 부끄러울 이가 없다. 둘째 이유는 또한 나의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저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 여기서 나의 의탁한 것의 원문(⌈텐 파라테켄 무⌋ τὴν παραθήκην μου)을 풀이하는데 따라서 의미가 달라진다. 나의( ⌈무⌋ μου)가 주격적 속격(subjective genitive)이라고 간주될 때에는 “내가 주님께 의탁한 바”라는 뜻이 될 것이다. 그러나 목적격적 속격(objective genitive)인 경우에는 “주께서 나에게 의탁하신 바”라는 말이 될 것이다. 주님은 전능하셔서 최후 승리의 날까지 파수꾼이 되셔서 “내가 주께 의탁한” 그 의탁을 끝까지 응답해 주실 것이고, 혹은 “주께서 내게 의탁하신” 임무를 내가 수행할 수 있도록 지켜 주실 것이다. 이러한 확신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자기는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 13절 >
여기에 세번째 명령이 나온다. 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으로써 내게 들은바 바른 말을 본받아 지키라. 명령의 원 줄기는 “건전한 말씀의 표준을 늘 견지하라”는 것이다. ⌈휘포튀포신 에케 휘기아이논톤 로곤⌋ ὺποτύπωσιν ἐχε ὺγιαινόντων λόγων. 여기에 ἐχε라는 명령은 현재 명령법으로서 계속적인 동작을 명하는 것이다. 항상 건전한 말씀의 표준(standard,pattern)을 수호하라는 것이다. NEB는 an outline of the sound teaching이라 했고 그 각주에는 a model of sound teaching이라고 했다.� 디모데가 져야 할 공적 임무는 “건전한 도리의 표준을 수호하여” 자기 시대와 후대에게 가르치고 물려주어야 하는 일이었다.� 이것은 그 시대에 이미 여러 가지 불순하고 이단적인 교훈과 사상들이 교회를 혼란하게 있었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것이다. 교회 지도자들이 이런 처지에 마땅히 가져야 할 태도를 여기에 제시하고 있다. 그 건전한 교훈이란 어떤 것인가? 기독교 진리는 어떤 사람이 상상으로 만들어 낸 관념적인 갓이 아니다. 역사적인 사실에 입각한 것이며 면면(綿綿)히 산 증인들에 의해서 전달되어 오는 것이다. 그래서 그 “건전한 말씀”이란 사도를 통해서 전해진 것이어야 한다. 사도인 바울이 전해 주는 것을 디모데가 들었고 그것이 표준적이 건전한 가르침이라는 말이다. 그 건전한 교훈을 일일이 다 열거하지 않아도 디모데는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두 마디로 요약해서 정리해 주고 있다. 하나는 “믿음”이고 또 하나는 “사랑”이다. 복음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총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진리와, 그리스도 예수에게서 나타나고 또 그가 가르치신 사랑을 삶의 원칙으로 삼으라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원칙을 떠난 교훈이나 교리나 말씀은 건전하다고 할 수 없다.
넷째 명령이 14절에 나온다.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네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 디모데는 바울이 주께로부터 훌륭한 위탁을 받은 것처럼 아름답고 좋은 임무와 사명을 받았다. “부탁한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디모데가 받은 “아름다운 임무”이라고 보는 것이 원문에 가까운 해석이다. 그 임무를 수행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 속에 내재시키신 성령이 보혜사로서 역사하신다. 보혜사 πάρακλητος 는 우리 옆에서 παρα 말씀해 주시는 (κλητος < καλειν)분으로서 필요할 때마다 도와주시는 분이시다(위로하시고,격려하시고,권고하시고,책망하시고,변호하시고,간청하신다). 그러므로 그 성령의 도우심을 힘입어 그 직책을 수행하고 수호하라는 부탁이다.
V. 사 역
1. 하나님의 뜻에 의하여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얻는 생명의 약속을 위해서 사도가 된 바울이
2. 사랑하는 아들 디모데에게 쓴다.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께로부터 오는 은혜와 자비와 평강이 너에게 있기를 빈다.
3. 내가 조상 때부터 깨끗한 양심을 가지고 섬기고 있는 하나님께 나는 늘 고마운 마음을 가진다. 내가 밤낮 간구할 때마다 너에 대한 생각이 끊임없이 일어나며, 그때마다 고마움을 느낀다.
4. 나는 네 눈물이 생각나서 너 보기를 갈망한다. 너를 보면 내 기쁨이 충만해질 것이다.
5. 나는 네 속에 가식이 없는 믿음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기에 하나님께 감사한다. 그 믿음은 먼저 네 할머니 로이스와 어머니 유니게에게 깃들어 있던 것이다. 그리고 네 속에도 있는 것을 나는 확신하고 있다.
6. 이런 까닭에 나는 네가 기억을 새롭게 하기를 부탁한다. 나의 안수하는 예식을 거쳐서 네가 가지게 된 그 하나님의 은사를 불일듯 소생시키라는 말이다.
7. 하나님이 우리에게 비겁의 영을 주신 것이 아니라 능력과 사랑과 현명한 판단의 영을 주신 것이다.
8. 그러므로 우리 주님을 증거하는 일과 그 분 때문에 영어(囹圄)의 몸이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복음을 위하여 고난을 같이 받도록 하라.
9.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셨고
거룩한 부르심으로 우리를 불러 주셨다.
그것은 우리의 행함 때문이 아니라
영원한 시간 이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위해 세우신
당신 자신의 계획과 은총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10. 그 은총은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가 나타나심으로
이제 밝히 드러났다.
그리스도는 죽음을 무력화(無力化)했으며
복음을 통하여 생명과 불멸성을 밝히 보이셨다.
11. 그 복음을 위해서 하나님은 나를 반포자로, 사도로, 교사로 삼으셨다.
12. 그 때문에 나는 이런 고생까지 하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나는 내가 신뢰하는 분을 알고 있으며, 그는 나에게 의탁하신 일을 그 날까지 지켜 주실 능력이 있다고 내가 확신하기 때문이다.
13..너는 나에게서 들은 건전한 교훈을 표준으로 삼아라. 믿음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보여주신 사랑을 나는 가르쳤다.
14. 너에게 의탁된 좋은 은사를 우리 안에 깃들어 계시는 성령을 통하여 잘 지켜라.
VI. 메 시 지
(1) 기독교 복음 진리가 온 누리에 퍼져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얻고 생명을 누리고 있는 것은 저절로 되거나 우연히 된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충성된 증인들이 순교의 피를 흘리면서 정확하게 증언했고 또 그들의 대를 이어 증언할 사람들을 훈련하여 그 일을 부탁하였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증인이 된다는 것은 때로는 부끄러운 일이고 때로는 고통이 따르는 일이기에, 즉 순교까지도 각오해야 할 수 있는 일이기에 선뜻 그 일을 하려고 나서는 사람이 많지 않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최후 명령은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되라)”(행 1:8)는 것이어서, 그의 증인이 된다는 것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다같이 받은 사명이 아닐 수 없다. 열두 사도와 바울이 충성스럽게 복음의 증인 노릇을 했고 그들의 대를 이어 디모데, 마가, 누가, 디도, 실라 등이 역시 정성껏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었다. 그 후부터 오늘까지 많은 충성된 종들이 복음의 증인으로 활약했기 때문에 오늘의 이만한 교회를 이룬 것이다.
과거의 선배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수호하고 전하고 증거하는 일을 위해서 헌신한 것처럼 앞날의 교회를 위해서 오늘의 우리들이 그 책임을 물려받아야 하고 그 책임을 수행해야 한다. 우리가 그 책임을 수행하지 않으면 복음의 맥이 우리에게서 끊어지지 않겠는가?
(2) 여기서 우리는 바울이 디모데에게 당부한 말씀을 귀담아 듣고 디모데가 한 것처럼 우리도 그대로 해야 할 것이다.
(i) 우리는 먼저 그리스도의 증인이 될 만한 준비를 하고 그 자격을 갖추려고 노력을 해야 할 것 같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 스스로가 진실하고 믿을 만한 사람이어야 한다. 남들이 우리의 말을 듣고 우리의 행동을 보고 우리의 말을 믿게 되겠는데 우리가 진실하지 않으면 어떻게 설득력을 가지겠는가 말이다. 우선 우리는 바울처럼 그리고 디모데처럼 “거짓이 없는 믿음(1:5)을 가진 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ii)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는데는 “성령이 임하고 권능을 받아야”(행1:8)하는 것이다. 진정한 의미에서 중생한 사람이 됐다면 그는 성령을 받은 사람이다. 중생의 체험을 가진 사람은 눈물을 흘리며 감격스러운 체험을 했을 것이다. 목사나 신부처럼 어떤 성직을 받지 않았을지라도 성령 체험을 하고 거기서 기쁨과 감격을 맛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아니 그런 체험이 없다 하더라도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려는 열망을 가졌을 때, 그것은 이미 성령이 그 속에 역사하고 있는 증거이기도 하다. 성령은 “능력과 사랑과 자제의 영”(1:7)이시기에 그 성령을 힘입어서 증인의 역할을 능히 해낼 수 있다. 사람의 지식이나 경험이나 꾀로써 되는 일이 아니다.
(iii) 우선 예수 증거하는 일을 부끄럽게 여기지 말아야 한다(1:8). 그리스도를 바로 알고 믿을 때 그를 부끄러워하기보다는 자랑스럽게 생각하게 될 것이다. 동시에 복음 증거를 위해서 가난하고 헐벗고 매맞고 갇히고 하는 모든 고통을 창피하게 여기지 않아야 할 것이다(1:8).
(iv) 복음을 위해서 고난받는 일에 동참해야 한다. 증인의 역할은 때로는 순교를 각오해야 하는 어려운 일이다. 쉬운 일로 알고 섣불리 달려들어서는 안된다. 사실 복음을 증거하다가 죽고 고통을 당한 사람은 기독교 역사에 있어 일일이 셀 수가 없을 정도로 많다. 그 반열에 서는 것을 영광으로 알아야 할 것이다. 그 일이 고통의 길인 것이 사실이지만 그 배후에 우리를 지키고 후원하는 분은 전능자 하나님이시니 겁내지 말고 매진해야 할 것이다.
(v) 구체적으로 우리가 할 일은 사도적 올바른 진리 전통을 견지해야 하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사도적 신앙과 삶의 규율을 벗어나지 말고 그것을 잘 정리하고 해석하여 몸소 실천할 뿐 아니라, 그것을 남에게 전하고 가르치고 또 후대에 물려주어야 한다. 실은 복잡한 것이 아니다. 예수를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것과 그리스도에게서 실증된 사랑(1:13)을 실천하는 일을 유지하고 전하는 일이다.
(vi) 하나님께서 우리들 각자에게 위탁하신 일이 있다.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일은 반드시 사람을 붙들고 입으로 전도하는 일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우리 각자에게 주신 일상 직업과 사회적 활동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각각 하나님께로부터 위탁받은 일을 충실히 감당해야 한다. 그 일도 자기의 힘만으로는 완수하기 어렵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에게 보혜사로 와 계신다. 그러므로 우리와 함께 계시는 성령을 의식하면서 자기 임무에 충성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