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동여지도 (조선) 서울 부분도
서울북부에 위치한 도봉산에 고찰 영국사가 있었음이 최근 발굴된 영국사비에서 확인되었다. 아울러 견주(見州)가 서울의 북부지방 양주(揚州) 였음이 다시 확인된 것이다.
그런데 여태까지 견주가 경상도와 경기도에 두군데 있어 영국사가 어디에 있었던 절이었는지 모르다가 이번에 비석발굴을 통해 경기도 양주 도봉산에 있었던 절로 확인된 것이다. 이러한 내용을 보면서 <고려사>와 <삼국사기>를 살펴보면 우리역사의 지명 비정이 얼마나 엉터리로 유지되어 오고 있는지 연구를 얼마나 안하는지 알 수 있다.(대동여지도에 옛지명으로 기록되어 있는데도...)
삼국사기 卷第五十 列傳 第十 弓裔 (898)
以我太祖爲精騎大監, 伐楊州·見州.
우리 태조를 정기대감(精騎大監)으로 삼아 양주(楊州)와 견주(見州)를 치도록 하였다.
卷三十六 世家 卷第三十六 忠惠王 卽位年
癸酉 自見州巡南京, 乃還.
왕이 견주에서 남경을 돌고 귀경하다.
본인의 저서에서 고려태조 왕건이 도읍을 정한 송악이 지금의 개성이 아닌 한주 즉 요녕성 요양 인근이라는 것을 밝힌바 있다. 물론 각자의 지식의 범위에 따라 본인의 연구결과를 믿고 안믿으면 그만이다,
고려사 지리지를 자세히 분석하면 이상한 내용이 한두가지가 아님을 알 수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다음 귀절에서 또 증명된다.
高麗史 卷56 志 卷第10 地理1 양광도 남경유수관 양주 견주
見州本高句麗買省郡【一云昌化郡】, 新羅景德王, 改爲來蘇郡. 高麗初, 更今名. 顯宗九年, 來屬. 後置監務.
견주는 원래 고구려땅이었는데 신라경덕왕때 지명을 래소군으로 바꾸고 고려초 견주로 다시 바꾸었다. 현종때 내속되었다.
일반이 알기로는 고려태조가 고려를 세우고 송악 즉 개성을 수도로하였다고 하였는데 개성에서 하루 거리(고려사 기록)인 견주를 내속시키지 못하고 11세기초 현종때 내속시켰다고 한다. 그렇다면 왕건이 경순왕을 남쪽 경주에서 개성으로 오라해서 항복받은 것은 뭔가? 결국 경순왕이 신라땅을 고려에 바치지 않았던지, 고려가 신라영역이던 견주를 처음부터 관리하지 않았던지 둘 중 하나일 것이다.
고려사 내용의 키는 고려가 신라를 936년에 귀속시켰으나 11세기초까지 직접 관리하지 못하다가 현종때 거란과의 전쟁에서 패한후 지리적으로 안전한 한반도로 진입한 것으로 귀결되는 것이다.
고려사 卷二十九 世家 卷第二十九 忠烈王 6年 4월(1280)
지선을 동녕부에 보내 선대 군왕의 능묘를 발굴한 일을 따져묻다.
즉 고려의 초기수도 송악 즉 한주는 고려사 공민왕 기록에서 확인 되듯이 고려태조의 무덤이 있는 동녕부였던 것이다.11세기초 현종때 이르러 개성으로 도읍을 옮기고 나성을 강감찬의 건의에 따라 쌓게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현종 이후 기록에 비로소 견주가 등장하는 것이 된다.
심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