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학 용어 중 흔히 혼용해서 쓰는 말 가운데 ‘개별 수요곡선’과 ‘시장 수요곡선’이 있다. 일반적으로 수요곡선이란 상품 가격이 하락함에 따라 해당 상품의 수요량이 늘어나는 현상을 표현한 곡선을 의미한다. 이러한 수요곡선은 개별 소비자가 해당 상품의 가격 변화에 따라 자신이 수요하고자 하는 양을 변화시킨 결과를 표현한 것이다.
시장 수요곡선은 이러한 개별 소비자의 수요곡선과는 다르다. 그렇다고 해서 둘 사이에 아무 관계가 없는 것은 아니다. 개별 소비자의 수요곡선을 합하면 시장 수요곡선이 되기 때문이다.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특정 시장의 소비자로 갑, 을, 병 세 사람이 있다고 가정해보자. 한 달 동안 커피 한 잔 가격이 4천 원일 때, 이 세 사람이 각각 3잔, 4잔, 5잔의 수요량을 보일 경우, 커피 가격 4천원에서 시장 전체의 수요량은 12잔(3잔+4잔+5잔)이 된다. 이처럼 시장 전체 수요곡선이란 개개인이 특정 가격 수준에서 구매하고자 하는 수요량을 모두 더하여 도출할 수 있으며, 이렇게 도출된 시장 전체 수요곡선은 개별 소비자의 수요곡선을 각 가격 수준에서 수평으로 합하여 그려진다.
하지만 시장 수요곡선이 항상 개별 소비자의 수요곡선을 수평으로 합하여 도출되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현상은 우리가 특정 물건을 구매할지 여부를 결정할 때 단순히 가격 말고도 다른 사람들의 구매 행태에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개별 소비자가 마신 커피의 개별 수요곡선을 합하면 시장의 수요곡선이 된다. <출처: gettyimage>
남들과 다르고 싶다는 욕구, 속물효과
우리는 물건을 구매할 때 수많은 요인들을 고려한다. 제품의 가격은 물론이거니와 디자인, 성능, A/S 등 제품 자체의 요인들을 고려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구매 행태도 함께 고려한다. 즉, 주변 사람들이 구매하는 것을 보고 나도 덩달아 구매를 결정하기도 한다. 반대로 유행이 불어 너무 많은 사람들이 구매한 물건에 대해서는 오히려 사고 싶었던 마음을 접는 경우도 많다. 경제학은 일찍부터 이러한 일련의 행태들을 주목하고, 이를 규명하는 다양한 이론을 제시해왔다.
이 중 사회 전체의 소비량이 증가함에 따라 개별 소비자가 해당 상품에 대한 수요량을 줄이는 현상을 속물효과라고 한다. 즉, 유행이 불어 많은 사람들이 구매한 물품에 대해 사람들이 흥미를 잃어버리는 경우가 여기에 해당한다. 사람들이 많이 구매하는 제품을 구매하지 않음으로써 자신을 다른 사람과 구별 지으려는 태도가 마치 속물과 같다고 해서 속물효과 또는 속물이라는 뜻의 스놉효과(snob effect)라고 부르게 되었다.
고가의 옷을 구매하는 사람들은 남들과 구분되고 싶어 명품 브랜드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사람은 누구나 남들이 갖고 있지 않은 자신만의 물건을 소유하고픈 욕구가 있기 때문에 이러한 현상이 일어난다. 결국 속물효과가 유발되면, 다른 사람들의 수요량이 증가하는 것을 목격한 누군가가 자신의 수요량을 줄이게 된다. 따라서 각 개인의 수요량이 커지면서 증가하는 시장 전체의 수요량 증가폭이 각 개인의 수요량 증가폭보다 작게 된다. 이 때문에 시장 수요곡선 또한 개별 소비자의 수요곡선을 단순히 합해서 도출된 수요곡선보다 가파른 형태의 수요곡선을 갖게 되는 것이 통상적이다.
속물효과를 가장 흔히 목격하는 품목 중 하나가 바로 옷이다. 우리는 주변에서 흔히 명품이라고 불리는 고가의 브랜드 옷을 주로 구매하는 사람들을 목격하곤 한다. 물론 이들이 고가의 옷을 구매하는 이유를 단순히 한두 가지만으로 설명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현상을 속물효과로도 얼마든지 설명할 수 있다. 고가의 옷은 일반인들이 쉽게 구매하기가 어렵다. 따라서 보통 사람들이 사 입기 어려운 명품 의류를 입고 다니면 남들이 잘 안 입는 옷을 입고 다닐 가능성이 높아진다. 따라서 남들과 구분되고 싶은 심리를 가진 사람들일수록 명품 브랜드를 선호하는 경향이 강하다. 누구나 쉽게 사는 물건을 구매할 경우에는 자신의 속물적 욕구를 충족시키기 어렵기 때문이다.
옷으로 자신을 구별 지어온 역사
그렇다면 브랜드를 통해 자신을 남들과 구분하기 어려웠던 예전에는 어떻게 속물근성을 풀었을까? 우리 인간은 스스로 브랜드를 만들어 내거나 복식의 격차를 두는 방식으로 타인과 자신을 구분 지으려는 일련의 시도를 지속해왔다.
곤룡포를 입은 조선 태조의 어진
타인과 자신을 명확히 구분할 필요가 있었던 사람은 단연 임금이었을 것이다. 임금은 자신만 입을 수 있는 옷인 용포(龍袍)라는 브랜드를 고안해내었다. 원시시대부터 상서로운 동물로 여겨졌던 용을 자신의 상징물로 삼음으로써 옷만으로도 자신이 남들과 더 높은 지위로 구분된다는 사실을 쉽게 전달하려는 것이었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용포의 앞부분을 곤의(袞衣)라 하는데, 이는 왕만 입는 것이 아니라 삼공(三公)도 함께 입을 수 있었다. 하지만 용포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왕이 입는 용포의 용의 모양과 삼공이 입는 용포의 용의 모양은 다른 형태를 취하고 있다. 왕이 입는 용포는 하늘로 승천하는 용의 모양이다. 하지만 신하로써의 지위는 가장 높지만 결코 왕의 지위를 범할 수 없는 삼공은 꼬리만 하늘로 향하고 머리는 땅으로 조아리는 모양으로 그려져 있다. 물론 역대 왕조에 따라 용의 모양과 형태에는 다소 변화가 있었지만, 임금의 옷에 그려진 용의 모양과 신하의 옷에 그려진 용의 모양을 구분하는 예법은 지속되었다.
절대적인 권한을 가진 제왕과 달리 비교적 권한이 약한 제왕들은 봉황이 그려진 옷을 입었다. 봉황과 용을 이처럼 상하 관계로 구분하게 된 배경에는 여러 설이 있다. 이 중 하나가 고증학자 왕웨이띠의 견해다. 원래 상고시대 용을 숭상하던 부족과 봉황을 숭상하던 부족이 화하족(華夏族)이라는 하나의 부족을 형성했는데, 그 뒤로 용을 숭상하던 부족이 봉황을 숭상하던 부족과 싸워 이겼고, 이에 중원에 800년 동안 군림하게 되면서 이 같은 상하관계가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또 다른 의견으로는 봉황을 숭상하며 출범한 중국의 진나라는 진시황 다음 대에 멸망하는 아주 짧은 왕조를 남겼지만, 이후 다시 중국을 통일한 유방(劉邦)의 한나라는 용을 숭상하였는데, 몇 대에 걸쳐 강성한 왕조를 유지하였던 것이다. 이에 이후의 많은 왕조들이 봉황에 비해 용을 더욱 숭상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임금이 자신만의 의복을 만들어 입고, 이를 통해 자신을 다른 사람과 구분하는 모습을 지켜본 신하들도 자신들의 품계를 구분 지을 수 있도록 관복을 차별화하기 시작했다. 한서의 손숙통(孫叔通)전에 따르면, 한 고조 유방(劉邦)때 유생 손숙통(孫叔通)은 유방에게 천하를 유지하기 위한 방편으로 복색(服色)에 대한 예법을 제정할 것을 권고했다. 즉, 신하가 황제를 알현할 때는 어떠한 의복과 예를 갖춰야 하는지를 법률로 정하여 엄히 따르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다른 복식을 사용해 상하 존귀를 구별할 수 있도록 규정하였다. 이에 유방은 “이제야 황제의 존귀함이 바로 섰다.”라고 칭송하였다고 한다.
사실 옷을 통해 상하를 구분 지으려는 시도는 한나라가 이를 엄격히 법률을 통해서 제정했을 뿐이지 한나라 이전부터 시도되었던 방식이다. 계급사회에서는 늘 옷을 통해서 신분의 높고 낮음이 표현되었다. 하지만 한나라 이후부터는 신분에 따라서 도안뿐만 아니라 색깔과 옷감의 질까지도 신분에 따라 엄격히 규정되었던 것이다. 명나라 때는 관리의 공복은 꽃을 사용해 등급을 표시했는데, 1품은 지름 5촌의 큰 꽃 한 그루가 그려졌으며, 2품은 이보다 작은 꽃 한 그루, 3품은 잎이 없는 꽃 그림, 다시 4품과 5품은 잡화(雜花)의 그림을 수놓은 옷을 입어야 했다. 청나라 때는 관복에 붙은 옥의 숫자와 크기 등을 통해 지위의 고위를 나타내었으며, 8품 이하의 관직에는 아예 옥을 붙일 수 없게 하였다. 물론 옷에 대한 제약은 평민에게도 적용되어 사(士) 이상의 신분에만 옷에 문양을 사용할 수 있었으며, 평민의 옷에는 문양을 넣을 수 없게 규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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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복식을 알 수 있는 고구려 무용총의 벽화 <출처: 고고학사전, 국립문화재연구소>
무용총
우리 고유의 의복 문화의 변천 과정에 있어서도 이러한 옷을 통해 서로를 구분 지으려는 움직임은 동일했다. 우리 고유의 복식 문화는 우리의 언어가 알타이어 계통인 것과 마찬가지로 중국적인 면보다는 기마 수렵 생활을 하던 서호(西胡)적인 형태에 속했다. 삼국시대 우리 선조가 입었던 하의가 기본적으로 바지 형태이기 때문이다. 이는 당시 중국의 하의가 치마 형태였던 것과는 명확히 구분되는 것이다.
이러한 중국과 구분되는 우리 고유의 복식 문화는 신라의 삼국 통일을 기점으로 해서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그것은 신라의 왕실과 일부 귀족층이 중국 양식으로 의복의 형태를 변화시켰기 때문이다. 당시 서민들은 이전에 자신들이 즐겨 입었던 복식 문화를 그대로 유지했기 때문에 이때부터 우리는 서민층의 전통적인 복식문화와 지배층의 외래 복식문화로 명확히 구분되기 시작한다. 지배층은 이후 중국 왕조의 변화에 따라 복식문화의 변화가 지속되는 반면, 서민들은 저고리와 바지, 두루마기 형태의 전통적인 복식문화를 지속적으로 유지해왔다. 일례로 삼국시대에 입었던 저고리는 엉덩이까지 내려오는 형태였지만, 조선 중기에 간소화되고, 다시 조선 후기에는 더욱 작아졌을 뿐이지, 저고리라는 기본적인 우리의 전통 복식 구조는 조선 말기까지 계승되었다.
중국과 마찬가지로 우리나라 역시 공복제도가 활용되었다. 의복의 형태를 법령화하여 우리 역시 의복을 통해 서로를 분명히 구분 짓기 시작하였다. 최초의 공복제도는 백제 고이왕 때 제정되었는데, 삼국사기에 따르면 당시 백제는 허리띠의 색깔을 계급에 따라 자주, 검정, 빨강, 파랑 등으로 구분하였으며, 옷 색은 1~16품까지는 모두 붉은 색으로 규정하고, 평민은 비색을 금지하였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경우, 의복을 통해서 신분의 높고 낮음을 구분하려는 이러한 시도들은 1884년 갑신 의제 개혁과, 1894년 갑오 의제 개혁, 1895년 을미 의제 개혁 등을 통해 완전히 제거되었다. 당시 의복 개혁의 주된 내용은 이전까지 용도와 신분에 따라 다양했던 포의 형태를 두루마기 하나로 통일시켜 이를 통해 반상과 상하 존비의 구분이 불가능하도록 유도하였다.
남들과 다르게 입음으로써 다른 사람과 구별 짓고자 하는 욕구는 어쩌면 자연스러운 본능이 아닐까.<출처 : gettyimage>
저명한 경제학자 라이벤슈타인(Leibenstein)은 다른 사람의 소비 행태에 영향을 받아 이루어지는 일련의 소비 행태들은 합리적인 선택이 아니라고 지적하였다. 그는 이러한 소비수요 행태를 ‘비기능적 수요’라고 불렀다. 라이벤슈타인의 견해에 따르면, 앞서 소개한 남들과 달라 보이기 위해 명품 브랜드에 집착하는 속물근성 역시 다른 사람의 소비 행태에 기인하여 형성된 소비 행태이기 때문에 비기능적 수요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앞서 역사적인 상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우리는 아주 오랫동안 의복을 통해서 나와 다른 사람을 구분 짓기 위한 노력을 끊임없이 전개해왔다. 의제 개혁을 통해서 전통 복장으로는 더 이상 신분을 확인할 수 없게 만들자, 이번엔 다시 오늘날의 신식 복장인 양복을 발 빠르게 도입해 자신은 남들과 달리 신식 문명에 익숙한 개화된 사람임을 보이려는 시도가 이어지기도 했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우리 인간이 남들과 다른 의복 내지 브랜드를 구매함으로써 자신을 남들과 구분 짓고자 하는 욕구는 어찌 보면 속물근성으로 치부할 것이 아니라 우리 본연의 본능이 아닐까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