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그림자가 나를 배춧잎처럼 덮어도 외 1편
지 연
애벌레처럼 구멍을 뚫어가며
저 생을 기웃거리지 않을게
옹색한 내 숨소리에 기대어 옛날이 될게
다듬잇돌 위에 홑청
부뚜막에 놓인 물그릇
막막하면 마루에서 한숨 잘게
제비 새끼들이 주둥이를 벌리듯
꿈속에서 다리 찢어지게 도망가도
넘어지면 키가 큰다는 엄마 말을 믿을게
아직 햇볕 가득하고
시렁에는 찬밥이 떠 있고
나를 걱정하는 사람이 하나쯤 어둠 가까이
흩어지지 않는 말을 안고 있어
다시 이생이 반복된다 해도
의심 없이 고개를 끄덕일게
도망가도 배춧잎 속 같은 날이겠으나
간격
흰 개가 뒷다리에 힘을 주고 괄약근을 움직이듯
눈을 감았다 떴다 하면서 계수나무를 봅니다
토끼들은 어딜 가고 노랑에서 주황으로
달이 가볍게 떨어질까요
누런 구린내가 나니 너는 저리 가서 먹어라
팔순 넘은 어머니가 밥상을 들고 건넛방으로 가듯이
밥상을 던지던 아버지가 이제는 아장거리며 걸어 나와
당신 입에만 넣었던 고깃국물을 질질 흘리며
내 밥그릇에 담아주듯이
질퍽한 냄새를 하나도 못 맡는 사람처럼
아무렇지 않게 계수나무가 저녁을 먹습니다
아랫집 할머니는 밖에서 반지를 잃어버리고 들어온
할아버지를 위해 은 숟가락을 녹여 반지를 끼워줬다는데
계수나무 잎은 하트 모양이기도 하고 숟가락 같기도 해서
쏟아지나 봐요 평생 삼킨 숟가락들
단 하루도 숟가락을 업신여기지 않았으니 녹여 쓰시라
밥상을 사이에 두고 목숨이 서로의 반지인 거라
저뭅니다 밥 먹는 일이 저문다 하니
더딘 숟가락은 왜 공격적일까요
계수나무 사이로 달빛은 쏟아지고
저것은 먼 것이거니 하고 바라봅니다
지 연
1971년 전북 임실 출생.
2013년 시산맥 신인문학상. 2016년 《무등일보》 신춘문예 시부문 당선.
시집 건너와 빈칸으로 내일은 어떻게 생겼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