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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궁극이
48편 11절-13절: 주의 판단을 인하여 시온산은 기뻐하고 유다의 딸들은 즐거워할찌어다 너희는 시온을 편답하고 그것을 순행하며 그 망대들을 계수하라 그 성벽을 자세히 보고 그 궁전을 살펴서 후대에 전하라.
11절: ‘주의 판단을 인하여 시온산은 기뻐하고 유다의 딸들은 즐거워할찌어다.’ 주의 판단은 외모 모양이나 세상의 인정정신이나 학벌이나 재물이나 세상의 명예나 영광이나 세상의 이력이나 세상의 업적을 보고 판단하는 것이 아니다. 주의 판단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인격적 성품적으로 하나님을 얼마나 온전하게 닮았느냐?’ 하는 게 주님의 판단이다.
이방세상의 판단은 눈에 보이는 육적 가견적 판단이요, 불에 타질 것을 기준 삼아서 판단을 하지만 주님의 판단은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 무형적 판단이다. 즉 ‘속사람이 얼마나 하나님을 닮았느냐? 영적 기능과 지능적으로 얼마나 영능화 되었느냐?’ 하는 것으로 판단을 한다. 그러니까 세상의 판단과 주님의 판단은 질적 본질적 근원적으로 다르다.
그러면 현재 예수를 믿는 자기는 누가 내리는 판단과 같으냐? 주님의 판단이냐, 세상 사람들의 판단이냐? 이걸 보면 자기의 판단이 잘못되었는지, 바른 판단을 하고 있는지 금방 나타난다. 설령 자기가 주님의 판단을 모른다고 해도 자기가 예수님을 안 믿는 사람들과 같은 판단으로 되어있다면 자기는 세상 사람들의 판단을 하고 있는 거다. 주님이 판단하는 그 판단을 가지고 있지 않은 거다. 예수를 믿으면서 자기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하면서 자기 아버지가 내리는 판단을 가지고 판단을 하지 않고 세상판단을 가지고 판단을 한다면 하나님 아버지와는 대립이 된 상태다. 이러면 어떻게 아버지로부터 사랑을 받을 수 있겠느냐?
‘어느 판단으로 사는 게 좋다. 안 좋다’ 이게 문제가 아니라 ‘어느 쪽 기준으로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지식을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을 현재 자기가 알아야 한다. 만일 눈에 보이는 면에 신앙목적을 두고 있다면 이 사람은 아무리 주님 앞에 사명적으로 열심 충성봉사를 했다고 해도 모두가 헛것이 된다. 이렇게 예수 믿는 것을 목사나 교인들이 칭찬을 했다면 이는 이렇게 신앙목적을 둔 사람이나 이것을 칭찬한 목사나 교인들 모두가 판단이 잘못된 거다. 하나님의 판단과 정 반대로 된 거다.
사람이 주님의 옳은 판단을 하려면 우선적으로 진리생명 길, 좁은 길의 신앙노선으로 들어서야 한다. 세상 넓은 길로 가며 세상의 이해타산 평가성을 가지고 판단을 내리면서 ‘내가 내리는 판단은 주님의 판단이다’ 라고 할지라도 이건 스스로 위안제를 마시는 거고, 스스로 속는 거다. 아무리 성경구절을 붙여봐야 소용이 없다.
무슨 판단을 인해서 시온산이 기뻐한다고 하느냐? 주의 판단을 인해서 시온산이 기뻐한다. 우리가 주님의 판단을 가지고 주님의 판단처럼 판단을 내리면 시온산은 기뻐한다는 건데, 시온산은 진리의 말씀, 생명의 말씀, 신적인 도덕성의 말씀의 차원을 말한다. 그러니까 진리통치가 나오는 곳이다. 즉 진리통치가 나오는 곳이 시온산이다. 이 시온산은 난공불락의 요새다. 어떤 원수도 정복을 할 수 없는 요새다.
‘주의 판단을 인하여 시온산은 기뻐하고 유다의 딸들은 즐거워한다’는 것은 말씀 앞에 정직하게 사는 성도들을 괴롭히는 모든 악한 자들과 거짓된 자들을 판단하고 심판해 버리는 것을 본 인도자들과 성도들이 매우 기뻐한다는 거다. 왜냐? 공의로운 판단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우리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의 기준 척도를 가지고 진리신앙 노선을 따른다면 이 신앙의 성질은 시온산처럼 차원 높은 도의 봉우리에 거하는 것인데, 이런 도의 봉우리에 거하는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성도를 핍박하는 악한 자들을, 거짓된 자들을 심판하는 것을 본다는 거다.
그리고 하나님의 공의로운 판단을 옳은 판단으로 알고 그 정신 사상 그 차원의 분별력을 가지고 있는 성도라면 자기의 판단 또한 진리일진대 내가 판단하는 것을 보고 주님이 대단히 기뻐하시는 거다. 질이 같다 그 말이다. 성경에 보면 주님이 쇠몽둥이를 가지고 항아리를 부수듯이 이 권세를 성도에게 주겠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공의롭고 절대적인 옳음을 가지고 강한 진리로 무장을 한 성도는 하나님 앞에 거짓되고 악한 것을 낱낱이 두들겨 부수는 쇠몽둥이와 같은 강한 성도가 된다는 것을 말하는 거다.
우리가 이런 구별력과 판단력을 가지려면 절대적인 하나님의 공의로운 말씀을 받아야 한다. 또 그 길을 걸어야 한다. 강한 능력을 받을 수 있는 그 길을 걸어야 한다. 애굽의 사상을 가지고 애굽에서 살고 있다면 광야에서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만나를 먹을 수 없다. 약속의 땅을 가는 신앙노선으로 가야 하늘로부터 내리는 만나를 먹게 된다. 신앙의 노선이 이렇게 들어가야 한다. 인도자들은 이것을 염두에 둬야 한다.
거짓 종들은 성도들을 세상과 짝하게 만들지만 참 종들은 세상과 떼는 일을 한다. 세상 안에 살면서도 세상을 소원 목적한 것을 떼게 한다. 하늘나라에 소원 목적을 두고 세상에 살게 한다. 이것은 약속의 땅을 올라가는 이스라엘과 같은 거다.
‘유다의 딸들은 즐거워할찌어다.’ 어떤 딸들이 즐거워한다고 하느냐? 진리통치를 받는 유다고을의 딸들이 즐거워한다. 아들보다는 딸이 더 귀엽다. 잔정이 더 있다. 그런 것처럼 하나님의 진리통치를 받는 유대고을의 지방 도시들이 이방세상을 따라가지 않았다. 그러니 얼마나 아름다우냐?
시골 조그마한 교회들은 경제적으로 어렵다. 이렇게 되니 그 교회의 인도자는 자동적으로 물질에 의탁하게 된다. 그래서 큰 단체나 종교계에서 알아주는 밑으로 들어가기도 한다. 그러나 진리통치를 받는 교회는 어느 곳에 흩어져 있다고 해도 마치 품행이 아름다운 딸처럼 아름답게 곱게 자란다.
교회가 세상성의 사상을 가지고 있으면 음녀라. 오늘날 음녀가 된 교회를 많이 볼 수 있다. 음녀가 된 교회, 음녀가 된 인도자가 많다. ‘예수 잘 믿으면 세상에서 어쩌고 저쩌고’ 하는 것은 전부가 음녀다. 그리고 그 소리를 듣고 있는 교인들 역시 세상에 신앙정조를 파는 음녀들이다. 신앙 사상적인 음녀는 세상을 끌어들여서 세상과 짝하고 자기의 몸을 세상에 재물로 바치고, 거기에서 나오는 것으로 먹고 산다. 목적을 이렇게 둔다면 음녀다. ‘신앙이냐, 아니냐?’ 하는 것의 경계는 종이 한 장보다 더 얇다.
주님을 위해 산다면 실지로 인격화 되는 거고, 이해타산 평가성이 죽음 저 너머에 결산을 두게 된다. 이게 신앙의 성도고 진리의 성도라. 이건 음녀가 아니다. 그러나 말로는 아무리 주님을 위해 산다고 할지라도 목적을 세상에 둔 복을 바라고 있다면 이 사람의 정신은 세상에 팔린 거다. 음녀다. 음녀 같은 목사, 음녀 같은 교인들이 많다. 진리성도 진리교회는 이방세상의 헛되고 교만하고 악한 유혹과 미혹에 빠지지 않고 주님의 판단을 대단히 즐거워한다. 세상판단을 즐거워하지 않고 싫어한다.
주님의 판단과 세상판단은 완전히 다른 건데 일반사람들은 이걸 전혀 모르는 거고, 거짓된 교회도 이걸 모른다. 우리가 볼 때는 세상의 판단은 주님의 판단과는 전혀 다르지만 세상은 세상대로 자기들 기준에 정확해야 한다. 이들은 영이 죽어있고 영적인 상태는 모르기 때문에 예수 믿는 우리가 영적인 상태를 생각하면서 안 믿는 사람들의 판단이 잘못됐다고 하면 이들은 못 알아듣는다. 그런데 교회 안에서 신앙의 세계에서 일반사람들만도 못한 판단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신앙의 세계에서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판단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그렇지 않고 오히려 세상 사람들의 판단보다 더 난잡하고 추잡하고 더러운 교회가 많다.
우리는 영적인 것과 육적인 것, 생명적인 것과 사망적인 것, 영원 궁극적인 것과 임시적인 것이 판단되는 것을 즐거워해야 한다. 주님을 믿고 따르는 것은 영원히 헛되지 않는 것을 대단히 즐거워하는 거다. 내가 염려가 되는 것은 주님이 우리교회의 교훈이 엉터리라고 하신다면 내가 지금까지 예수 믿어온 게 헛것이 되는 거다. 그리고 진짜인 줄 알고 여기로 나온 교인들도 다 헛것이 되는 거다. 이렇게 되지 않아야 되겠고, 그리고 우리교회에 오기 전에 과거적으로 예수를 믿어온 것이 오늘날 여기에서 받은 교훈의 지식으로 현재에서 되돌아보니 ‘과거적으로 믿은 것이 잘못 믿었구나’ 하는 게 있느냐? 있다면 두 번 다시 그런 일이 반복되지 않게 신경을 써야 한다.
공의로운 진리의 판단은 영원 궁극적인 신령세계에까지 효력이 있는 거다. 천국에까지 효력이 없는 것이라면 그 신앙은 거짓이다. 그러니까 이 효력성이 있는 판단을 하는 것이 정확한 거다. 주님의 판단은 이런 효력이 있기 때문에 정확한 거다. 따라서 내가 판단을 내린 것이 죽음 저 너머에서도 효력이 나타난다면 내가 한 판단이 옳다는 것으로 판명이 되는 거다.
12절: ‘너희는 시온을 편답하고 그것을 순행하며 그 망대들을 계수하라.’ 말이 참 어렵다. ‘편답’이란 ‘순행하며 둘러보며 자세히 관찰하다’ 라는 말이다. ‘너희는 시온을 편답하고.’ 둘러보면서 자세히 관찰하라는 거다. 이 말을 예루살렘에 가서 성지순례를 하라는 것으로 오해하면 안 된다. 다윗의 진리신앙이 어떻기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신앙이 되었는지, 시온주의 신앙사상이 왜 요새가 되었는지, 어느 신앙노선에서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이뤄 나갔는지, 고차원적인 진리신앙이 뭔지 관심이 있고 알고 싶거든 시온주의 진리통치 신정통치를 유심히 관찰을 해 보라는 거다.
성경에 ‘누구는 미워하고 누구는 사랑하였도다’ 라는 말씀이 있는데, 왜 그럴까? 하나님의 기분대로 ‘나는 야곱을 사랑하고 에서는 싫다’ 이거냐? 이유가 있는 거다. 누구는 미워하고 누구는 사랑한다는 것을 ‘내 마음대로다’ 이러면 안 된다. 만사를 다 아시는 분께서 야곱이 사랑받을 짓을 할 것을 아시고 미리 그렇게 말씀하신 거다.
우리는 성경에서 하나님의 본질적 본성적인 신앙차원이 뭔지, 계시적인 신앙사상이 뭔지 알아야 한다. 예수를 믿고 받은 증거가 있느냐? 예언 방언이 터진 게 증거냐? 이런 건 아니다. 마지막 시대의 교회가 하나님의 본질적인 신앙사상을 갖지 못하고 영의 눈이 먼 상태에서 중동에 있는 예루살렘의 성지를 순례하면 신앙이 더욱 깊이 들어가겠느냐? 가서 눈으로 보니 실감이 나고 얘깃거리가 더 생기느냐? 성경을 볼 때는 얘깃거리가 없었는데 실지로 가서 보니 얘깃거리가 많아지느냐?
그렇다면 예루살렘의 골고다에 가서 자기가 십자가에 못박히는 장면을 재현해 봐라. 그 전에 감람나무 밑의 바위 위에서 기도를 하면 응답이 오겠느냐, 안 오겠느냐? 예수님이 거기에서 밤이 맞도록 기도를 했는데 응답이 왔느냐, 안 왔느냐? 안 왔다. 히스기아가 수명을 15년 더 연장 받은 곳에 가서 기도를 하면 응답이 있을 게 아니냐? 요즘 어느 기도원들이 응답되는 성전이라고 하기도 한다. 이런 식으로 가르치는 것은 다 신앙 사기꾼들이다. 우리는 기독교 안의 사기꾼을 알아야 한다. 기독교 안에서 사기꾼을 만나면 자기의 영원이 다 날아간다. 이 세상에서 사기꾼을 만나면 임시적인 재산도 털리고 자기 몸도 빼앗기지만 신앙사기를 당하면 영원한 것이 다 달아나 버린다.
성경을 볼 때는 하나님의 뜻을 몰랐는데 성지순례를 가서 그곳에서 육신의 눈으로 보니 성경이 깨달아졌다면 그것이 은밀계시가 되는 거냐? 그리고 꼭 그곳에 가서 손으로 만져봐야 믿음이 생기는 거냐? 설령 이렇게 해서 믿음이 생겼다고 해도 그것이 참 믿음이냐? 그리고 그 말대로라면 안 보고 믿는 사람들은 다 잘못된 거냐? 이런 사고방식은 믿음도 아니고 진리신앙도 아님을 알아야 하고, 구약시대로 말하면 번제단에서 양을 잡은 것이 아니라 전 밖에서 인간의 수단 방법으로 짐승을 죽여서 하나님 앞에 피를 뿌리는 것과 같은 거다.
하나님께 제물을 바치려면 제물이 하나님의 설계로 된 번제단에 놓여져서 죽어져야 하고, 물두멍에서 씻겨지고, 밀가루처럼 곱게 빻아져야 한다. 그래야 지성소로 들어갈 수 있다. 우리의 신앙의 수준도 그렇다. 제물이 번제단에서 죽는 것처럼 자기가 진리이치의 말씀에 죽지 않고 어떻게 신앙이 되느냐? 어떻게 하나님께 ‘날 받아주옵소서’ 이게 되겠느냐? 왕 중 왕이나 쿼바디스나 모세나 십계 같은 기독교 영화를 보고 예수 믿은 사람이 있느냐? 그거 다 회개하고 진리에서 다시 죽고 살아나야 한다. ‘만져봐야 믿겠다.’ 누가 그랬느냐? 도마다. 지금 교회 안을 보면 도마신앙의 후손들이 많다.
‘그 망대들을 계수하라.’ 망대들을 어쩌라고? 망대들을 세어봐라. 망대는 높이 쌓은 탑이다. 옛날 소방대가 그랬다. 높이 쌓은 탑으로 올라가서 성 안과 성 밖을 멀리까지 바라보고 관찰하여 존재와 활동들을 분별하고 그 상황을 성 안에 알려서 싸울 준비를 하게 한다. 망대의 역할은 살피고, 알리고, 준비케 하고, 성 안을 보호하는 거다.
사람들은 다 왕이 되고 싶어 하는데 지옥에 가서 왕이 되겠느냐, 하나님의 성 안의 망대에 올라가서 파수꾼이 되겠느냐? 파수꾼은 참 괴로운 거다. 눈을 붙일 새가 없다. 그러니 얼마나 귀찮으냐? 반대로 왕은 얼마나 좋으냐? 명령만 하면 척척이다. 모든 게 다 자기 거다. 자기 아내도 마음대로 갈이치울 수 있다. 그러니 왕이 좋으냐, 파수꾼이 좋으냐?
하나님 앞에서 의와 불의를 볼 줄 안다면 이건 하나님의 눈이요, 자기 속에 망대가 있는 거다. 망대는 높은 거다. 수준이 높다. 수준이 높으니까 다 쳐다보인다. 다 쳐다보이니 판단 분별을 하게 된다. 이건 망대를 가진 거다. 하나님 앞에서의 선과 악을 하나님이 보시듯이 볼 줄 안다면 이 사람에게는 망대가 있는 거다. 거짓과 진실을 볼 줄 안다면 이 사람 속에 망대가 있는 거다. 생명과 사망을 볼 줄 안다면 망대가 있는 거다. 성공과 실패를 볼 줄 안다면 망대가 있는 거다.
패배와 승리를 볼 줄 안다면 망대가 있는 거다. 참과 거짓을 볼 줄 안다면 망대가 있는 거다. 양과 염소를 볼 줄 안다면 망대가 있는 거다. 진가를 안다면 망대가 있는 거다. 성령님의 역사와 악령의 역사를 볼 줄 안다면 망대가 있는 거다. 참 교회와 거짓 교회를 볼 줄 안다면 망대가 있는 거다. 진리지식과 일반지식을 볼 줄 안다면 망대가 있는 거다. 새사람과 옛사람을 볼 줄 안다면 망대가 있는 거다.
시온주의 진리통치 안에는, 말씀통치 안에는 이런 망대들이 수도 없이 많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 믿는 자기에게 망대가 하나라도 있느냐, 전혀 없느냐? 우리교회 교인들은 망대가 있어야 한다. 최소한 하나는 있어야 한다. 그 이치가 하나가 있다면 다 있는 거다. 아직 아무 것도 분별을 못한다면 이 사람은 망대가 없는 신앙이다. 망대가 없는 신앙은 소경과 같다. 주님은 소경의 눈을 고쳐서 보게 했다.
나는 교회에 나간 지 몇 년이나 됐느냐? 왜 여태까지 눈을 못 떴느냐? 주님이 안 고쳐주시느냐, 네가 마다했느냐? 주님은 고쳐서 보게 하여 분별케 하는 분이신데 누가 네가 눈을 못 뜨게 가로막더냐? 네가 막았느냐, 거짓 목자가 막았느냐? 영의 눈이 소경이라서 아무 것도 볼 줄 모른다면 어떻게 인도자 노릇, 사명자 노릇을 할 수 있겠느냐? 소경이 길도 모르면서 뛰어다닌다면 얼굴이고 몸이고 부딪히고 빠지고 만신창이가 되어서 고통만 남게 된다.
소경의 충성봉사, 소경의 시간투자 물질투자 재산투자 노력투자를 누가 다 가져가느냐? 소경이 죽자 사자 해서 자기 집에 가져다 놓으면 이걸 누가 다 가지고 가느냐? 눈 뜬 사람이 다 가지고 간다. 이치가 빤한 거다. 눈을 떠도 훔쳐가는 판인데 소경의 것을 가만 두겠느냐?
그리고 개인적으로 보면 자기의 신앙이 옛사람이 주격으로 되어있으면 육이 자라는 법이지 영이 자라지 않는다. 말씀을 세상생각으로 받아먹고, 세상소원 목적적으로 신앙 믿음을 가지게 되면 세상 쪽으로 자꾸 커지는 법이지 하나님 앞에 영적으로는 하나도 안 커진다. 이렇게 되면 자기의 시간 노력 젊음, 자기의 일생을 다 도적맞은 거다. 어느 쪽으로 도적을 맞은 거냐? 세상 쪽으로 다 도적을 맞은 거다. 세상이 자기 일생을 통째로 가져가 버린 거다. 소경이 되어있으면서 ‘내가 집사인데, 내가 장로인데, 내가 박사인데, 내가 무슨 장인데’ 하며 목에 힘을 주고 다니면 이것이 주님 앞에 통하겠느냐, 마귀의 놀림감이 되겠느냐?
망대가 많은 신앙자가 되고 싶으면 진리통치 신정통치 잘 받으면 된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진리이치를 못 들으면, 진리이치가 아닌 것을 들으면 믿음은 못 자라고 세상성으로만 자란다. 이건 심판이다. 신앙 믿음이 없을지라도 진리이치를 바로 들으면 먼저 귀문이 열린다. 귀문이 열릴 때 남만 쳐다보게 되면 얻어맞는다. 자기를 쳐다봐야 한다.
13절: ‘그 성벽을 자세히 보고 그 궁전을 살펴서 후대에 전하라.’ 망대에서 바로 보지 못하면 적의 공격에 성벽은 허물어지고 궁전은 불타고 만다. 세상에 있는 시온의 성벽이 두껍고 튼튼했지만 적의 공격과 자연의 비바람에 허물어져서 다시 쌓았다. 세상에 있는 가견적 시온성벽은 허물어지고 또 쌓고 한다. 그러나 영적 차원에서 신앙사상이 높은 것이 시온성인데, 이건 안 허물어진다. 자기가 허물지 않으면 안 허물어진다.
시온성은 난공불락의 성이기 때문에 이 성 안에 들어있으면 자기의 신앙정신이 항상 고차원적으로 되어있기 때문에 원수의 공격에 무너지지 않는다. 정복이 되지 않는다. 우리교회 교인들은 신앙수준이 높아야 한다. 매 주일마다 자꾸 올라가야 한다. 그러다 보면 생활로 오는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겠지만 그걸 다 이길 수 있다. 그런 게 별 게 아니다.
세상에 있는 시온성벽 안의 찬란한 궁궐들도 이런 저런 이유로 다 허물어지기 마련이다. 보여지고 무너질 것인데 이것은 보이지 않는 성도들의 영적인 면을 가르쳐 주는 거다. 솔로몬 왕 때 성전을 지은 것, 궁전의 재료, 기둥의 조각, 성벽의 두께와 높이 모두는 상징적이고 모형이다. 영적인 면을 가르쳐 주는 거다. 세상에 있는 것은 다 허물어지지만 우리는 그 속에 든 영적인 차원을 볼 줄 알아야 한다. 느헤미야가 다 허물어진 성벽을 다시 쌓는 것도 영적인 모형이다.
계:21:10에 보면 영원히 허물어지지 않는 성을 볼 수 있다. 흙과 돌이 아니라 금광석 보석들로 되었다. 즉 영적인 차원에서 고차원적인 신앙사상을 말한다. 환난 핍박에도 넘어지지 않는 신앙사상을 말한다. 이것은 세상에 있는 최고의 것을 들어서 실상의 천국을 비유적으로 말하는 것이지만 아울러 성도가 이 땅에 사는 동안 환난과 핍박과 시련의 고통 속에서 진리로 연단된 신앙사상을 말하기도 한다.
진리이치 생명이치 도덕이치 신적 정신으로 만들어진 영적 신앙사상의 성벽은 그 어느 비진리도 감히 정복해서 넘어뜨릴 수 없다. 마귀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을 성경구절을 가지고도 넘어뜨리지 못했다. 주님은 신앙사상의 차원이 높아서 마귀의 속을 훤히 내려다보고 있다. 주님은 모든 면에서 고차원적인 높은 수준이다. 이런 것을 성경에 기록해서 우리로 보게 하는 것은 ‘너희들도 나처럼 되어라’ 하는 거다. 이게 예수 믿는 거다.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한다. 이 세상에 사는 것도 자기의 신앙수준대로 산다. 하루 이틀 믿은 것도 아니고 수 년 수십 년을 믿었으면서, 교회에서 직분까지 얻고서도 세상정신으로 산다면 비진리적 사상에 그냥 넘어지게 되어있다. 직분이 최고냐? 아니다. 직분을 준 것은 그 직분에 합당한 사람이 되라는 거다. 그 직분에서 자꾸 올라가야 한다. 직분을 받았다고 자기가 다 된 것처럼 하는 것은 천하 못 쓴다.
사도들의 신앙사상을 누가 감히 넘어뜨리겠느냐? 사회적 종교적 명예 영광으로 넘어뜨렸느냐? 사도들은 그런 것에 넘어가지 않았다. 그런데 열두 제자 중에 누가 넘어졌느냐? 가롯유다다. 그때의 가룟유다만이 아니라 지금도 가룟유다의 영을 가진 자가 교회 안에 많다. 지금도 물질과 예수를 바꿔치기 한다면 이 사람은 가룟유다다.
사도들의 신앙은 사자 굴에 들어가도, 용광로 속에 들어가도, 산 몸을 톱질을 해도, 십자가에 매달아 화형을 시켜도, 몽둥이에 뼈가 부러져도 그 진리사상의 벽을 넘어뜨리지 못한다. 그런데 우리는 어떠냐? 물질의 경제바람만 불어도 그만 넘어진다. 예수 믿는 내가 이래서야 쓰겠느냐?
신령세계 천국궁전 안에는 보좌가 있고, 열두 가지 보석으로 만들어져 있다. 잠:에 보면 지혜의 보석이 있다. 주님 안에는 무한한 지혜의 보석이 있다. 돈으로 계산할 수 없는 영적 신령적 고차원적 도덕적 능력적인 신령한 보석들이 있다. 이게 뭘 말하는 거냐? 주님은 진기한 보석들을 모두 당신의 사랑하는 자들에게 주고 싶어 하신다. 알고 보면 다 내 것인데 모르니까 못 받는 거다. 사람이 하나님 앞에 속사람이 바로 돼 있으면 이 사람은 보석이다. 하나님이 이 사람을 보석이라고 인정을 하고 붙들고 역사를 해 나가신다. 하나님 당신이 기뻐하는 모든 좋은 일을 이 사람을 붙들고 역사를 한다.
좁은 길을 가는 생명 길, 진리신앙 노선에 욕심을 가져야 내 것이 되고, 내 것이 되어야 진리이치를 전할 수 있는 거다. 모르면 못 전하는 거다. ‘예수 믿고 세상에서 부자로 살아라’ 하는 말은 예수 안 믿는 사람도 할 수 있고, 마귀는 더 잘 한다. 교회 안에 ‘부자 되려면 예수를 믿어라’ 이런 말을 잘 하는 인도자가 없느냐? 많이 있다. 이건 다 성도들을 헛 살게 하는 짓이다.
이방 세상 사람들은 건물을 지으면서 이리 떼먹고 저리 떼먹고 해서 날림으로 집을 지어서 사람의 목숨을 뺏어가는 일이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물질도 주고, 건강도 주고, 시간도 주는 것은 영적인 성전을 잘 지으라는 뜻인데 이 모든 것을 육적으로 쓰느라고 이리 떼먹고 저리 떼먹고 낭비하며 세월을 보낸다면 어찌 되겠느냐? 영적 성전이 바로 지어지겠느냐?
주님께서 신령한 영적 성전을 잘 지으라고 우리에게 기본구원의 터를 닦아주셨다. 예수님의 피 공로로 영 중생을 시켜 놨다. 예수 믿는 사람은 다 이렇게 되어있다. 따라서 예수를 믿는 사람은 주님이 주시는 사건 환경 속에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을 많이 깨닫고 영적 신령한 전으로 잘 만들어져 가야 한다.
계:에 보면 신령천국에 열두 사도의 이름이 있는데, 이것은 곧 열두 사도의 신앙정신과 사상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니 우리도 이 땅에 사는 동안에 그런 신앙사상으로 만들어 가야 한다. 이러면 천국에 가서 보면 자기의 문패도 있는 거다. 이건 신앙사상으로 된 문패다. ‘충성봉사를 많이 하면 천국에 자기의 문패가 있다’ 이런 말에 속지 말아라. 그렇다고 해서 이 말을 듣고 ‘나는 충성봉사를 하지 않고 듣기만 해야지’ 이렇게 나가면 안 된다. 활동봉사 이런 건 구태여 말을 하지 않아도 자기 신앙 믿음대로 따라가는 거다. 따라가는 것은 굳이 해석을 할 필요가 없는 거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