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산사를 둘러보았지만 김제에 와서 귀신사를 순례하지 않으면 김제를 들렸다고 말 할
수 있을까?
대적광전이 보수중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백제계의 석탑, 풍수지리와 민간신앙의
복합체인 석물이 있고, 무엇보다도 예전에는 금산사를 말사로 거느릴만큼인 큰 신라
화엄십찰의 하나로 알려진 귀신사는 세월의 무상함을 간직한 체,백제 지역의 피지배층
민중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반발을 가슴에 안고 그렇게 가는 숨을 내쉬며 마을 윗자락에
다소곳이 앉아 있다.
화엄십찰에 관해서 거두절미하고 얄팍한 나의 식견으로 간략하게 기술하자면, 한반도
에서도 가장 약소국이던 신라는 삼국통일 후 고구려,백제지역의 민초들의 위무책의 일환
및 조직적 반발이 예상되는 변방에 이른바 화엄십찰을 세우게 된다.
신라로서는 국가권력이 미치지 않는 옛 고구려,백제 지역에 정신적 사상의 통합이 절실
했고,고토회복을 꿈꾸는 유민을 효과적으로 융화하며,왜구 및 이민족이 경주로 침입하는
전방루트에 국방목적의 전초기지 역활 등 일석삼조의 기대치를 가지고 화엄십찰을 운용
했던 것이다.
그 즈음에 귀신사는 신라 왕조의 지원을 등에 업고 김제 지역에 사세를 확장해 나갔겠지만,
화엄사상인 일즉다 다즉일(多卽一,一卽多)을 거부하고 백제계의 유민들은 옛 영화를
간절히 기원하며, 미륵하생을 염원하며 새롭게 김제지역에 진표율사가 창건한 미륵신앙의
금산사로 발길을 돌리게 되었을 것이다.
그런저런 상념으로 귀신사에 도착해 가람배치를 잠시 살펴보면, 이어지는 석축의 구성에
따른 전각으로 신라의 흔적을 발견해 볼 수도 있지만 중수중인 대적광전을 피해 주전각
뒤의 3층 탑과 석물을 보기위해 가는비를 흥겹게 받아들이며 돌계단을 오른다.
밑에서 볼 때는 석탑의 위치가 의아스럽지만 계단을 올라서면 충분히 수긍이 갈 만큼
넓은 터가 나타나기에,옛시절의 가람배치를 추측 가능하며,순한글로 표기한 안내문이
정겨운 삼층탑은 1층 몸돌의 방형 받침으로 고려시대 탑인 줄 알 수 있지만 목탑에서
석탑으로 바로 넘어간 백제계의 양식의 특징인 많은 부재의 사용,정림사지 탑과의 유사성
으로 백제계 석탑에 충실한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석탑 앞 쪽에는 많은 화제거리를 제공하는 개,사자등으로 추론되는 돌짐승이 등에 야릇한
성기 모양의 남근석을 지고 누워 있다.
풍수학자들은 귀신사의 혈세가 암캐의 성기 즉 구순혈(狗脣穴)이라 염승의 목적으로
숫캐의 성기를 조성했다고 하고, 민속학자들은 아들을 바라는 민속의 기자신앙에 의한
것이라 하지만 어떤 목적이든 사찰안에 이러한 석물이 조성된, 조성할 수 있었던 이해
관계자들의 상생의 화해무드가 눈물겹도록 고맙다.
더구나 자기자신의 영욕과, 조직의 이기심이 팽배하여 상생의 삶을 찿아 보기힘든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많은 것을 시사해주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