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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의 목을 비틀다
----이원형의 시세계
황정산(시인, 문학평론가)
들어가며
구조주의 언어학자 야콥슨은 “시적 언어는 일상 언어에 가해진 조직화된 폭력”이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이는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이 시의 가장 중요한 기능으로 말하는 ‘낯설게 하기’를 설명하는 말이기도 하다. 습관화되고 상투화된 일상어의 반복된 사용은 우리의 의식을 자동화시킨다. 반면 시적 언어는 일상 언어의 규범을 파괴하고 소통을 지연시키고 이런 일탈을 통해 사물에 대한 지각을 새롭게 한다. 시적 언어는 일상어의 낯설게 하기를 통해 이 지각의 자동화로부터 사물을 구해내는 것이라고 이들은 말한다.
그런데 최근 우리 시에서는 이 낯설게 하기가 오용되고 있다. 문법과 논리를 벗어난 절제되지 않는 난삽한 언어들이 낯설게 하기라고 주장하며 파괴된 언어의 파편들을 양산하고 있다. 시는 길어지고 이미지와 시적 의미는 파편화되어 그것으로 만들어진 말의 새로움도 지각의 새로움도 찾기 힘들어지고 있다. 낯선 언어의 새로움보다는 언어의 파편으로 이루어진 미로를 헤매게 할 뿐이다. 이런 시들에서는 낯설게 하기가 이루어지기보다는 ‘낯섬의 상투성’이 반복되어 또 다른 의식의 자동화를 만들어낸다.
이원형 시인의 이번 시집의 시들은 낯설게 하기로서의 시적 언어가 무엇인지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해주는 귀한 작업들이다.
2. 언어를 비틀기와 세상의 이면
이원형 시인은 시를 써야 할 자기 나름의 이유를 다음과 같이 얘기하고 있다.
가슴 덥힐 일 하나로 충분한
감흥이 없다면
감나무 푸른 옷소매를 적시던
달은 없다
달빛은 말할 것도 없고
달력은 쓸데없고
별이 빛나는 밤 같은 건
애저녁에 없고
그날그날 일용할 날日은 덧없고
흰 손수건 떨어트리던 목련의 수작은
멋쩍고 빛이 바래고
여기,
달력에 동그라미를 치며
홍시紅詩를 쥐어 줄까 하는
시월의
가슴 물컹한 애인은 없고
연애도 없고
아,
이마저 없다면
시마저 없다면
- 「시월詩月」 전문
10월은 가을이 시작되며 모든 살아있는 것들이 생기를 잃기 시작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시인은 바로 이 시기에 시를 생각한다. 그래서 10월은 ‘시월詩月’이 된다. 그런데 시인이 시를 생각하게 되는 것은 이 10월처럼 뭔가 많은 것들이 사라져가고 없기 때문이다. 그 없음을 시인은 “달력은 쓸데없고”라는 심정적 언어로 표현하고 있다. 달력이 필요 없다는 것은 일상이 상투화되어 그날이 이날이고 이날이 그날인 자동화된 의식 속에서 사는 삶의 모습을 보여준다. 거기에는 “별이 빛나는 밤” 같은 예술적 감흥도 “흰 손수건” 같은 연애의 설렘도 없다. 이 없음의 세계, 모든 것이 상투성 속에, 일상의 자동화 속에 사라져 버린 그곳에서 시인은 시를 생각한다. 시는 이 모든 상투화를 거부하고 우리의 의식을 새롭게 일깨울 단 하나의 방법이기 때문이다.
이원형 시인은 그 방법으로 언어 비틀기를 자주 사용한다. 이원형 시인의 시들에서 말들은 모두 긴장하고 있다. 그의 시들에서 말은 원래의 의미를 떠나 다른 말이 되고자 항상 준비하한다. 그렇게 해서 말들은 언제든 자신에게 부여된 의미를 벗어나 새로운 의미 맥락에 놓이기를 갈망하고 있는 듯 보인다. 이 갈망을 통해 시인은 잊힌 우리의 꿈과 희앙과 욕망을 부추기고 일상에 매몰된 우리의 의식을 뒤흔든다. 그러기 위해 그가 가장 많이 쓰는 방법은 동음이의어나 유사어를 이용한 언어유희이다.
염소의 뿔은 뿔이 깊은 나무
제법 제멋대로 자란 나무가
옴짝달싹 못하는
염소좌 별자리를 찍어먹고
달랑 하나 남은 달마저 콕 찍어먹어
하늘이 텅 비게 되었는데
이게 다
밤눈 어둔 별이 달이
나무를 들이받아서라고
털 검은 짐승은 지레짐작한다
뿔에 받힌 달
뿔에 받힌 별
뿔이 깊은 짐승의 샛강을 궁시렁궁시렁
온몸으로 굴러가는
알약 한 알
알약 서너 알
더부룩한 뱃속이 휘황찬란하시겠다
- 「뿔이 깊은 나무」 전문
시인은 “뿌리 깊은 나무”를 “뿔이 깊은 나무”로 변용한다. 그렇게 해서 ‘뿌리’와 ‘뿔’이라는 발음은 비슷하지만, 전혀 다른 속성의 두 사물을 동시에 보여준다. 뿌리는 땅을 파고들고 뿔은 하늘을 향해 솟아있다. 뿌리는 깊을수록 든든하지만, 뿔은 깊이 박힐수록 상처와 고통의 원인이 된다. 그런데 시인은 뿌리가 뿔이 될 수 있고 뿔이 뿌리가 될 수 있음을 생각한다. 뿌리를 가진 나무가 뿔이 되어 별빛을 삼키고 달을 삼킨다. 든든히 세상을 버티고 있어야 할 뿌리는 타인을 들이받는 뿔이 되어 세상에 고통을 준다. 그 고통을 줄이기 위해 우리는 알약을 받아 먹는다. 이 알약으로 우리의 뱃속은 항상 더부룩하다. 어찌 보면 우리가 사는 세상은 든든한 뿌리에 근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뿔들의 공격을 알약 같은 잠시의 처방에 의존하는 그런 삶을 강요하고 있다고 시인은 우리에게 넌지시 말해주고 있다.
아버지가 빚 보증을 선 후로
드디어 우리 집에도 빨간불을
켤 수 있게 되었다
뒤꼍의 감나무가 필사적으로 쥐고 있던
불안감 한 알
한 그릇 까치밥으로 남아도 좋았을
오지랖 넓은 각서의 대미를 장식한
설익은 불안감은
무르익어 홍시가 되었다
집안의 근심거리였던 홍일점
뼈대 있는 가문의 낙관이어도 좋았을
불콰한 그 지점이
내 시의 본적지다
불안감을 먹고 자란 아들은
보증을 서지 않는다
내 시에는 보증인이 없다
- 「홍시」 전문
이 시는 “감”이라는 말의 언어유희를 보여준다. 빨갛게 익어 매달린 감의 모습을 흔히 ‘불알감’이라는 속어로 말하기도 한다. 시인은 이 감을 보고 “불안감”을 떠올리고 이 불안감의 근원에 홍시처럼 집 앞에 매달려 있는 붉은 차압통지서에 있음을 생각한다. 그리고 이런 삶의 불안감이 자신에게 시를 쓰게 했다고 고백한다. 삶의 고통이 세상에 대해 예민하게 반응하는 성정을 만들고 그것 때문에 시를 쓰게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불안감의 근원은 아버지의 보증 때문이었다. 무엇을 보증한다는 것은 확실한 믿음의 근거가 아니라 파멸과 근심의 원천이다. 우리에게 부과된 법이나 질서 등, 보증들 모두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것은 안전을 보증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불안하게 만드는 구속과 폭력의 수단이었음을 시인은 고발하고 있다. 시는 이 보증을 불안하게 만들어 뒤흔드는 것이다. “내 시에 보증인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시는 어쩌면 이 불안감으로 가지 끝에 흔들리고 있는 “홍시” 같은 언어이다.
언어는 사물을 지칭하고 설명하지만 또 한편 그것은 사물의 모습을 감추기도 한다. 이원형 시인은 시들은 이 감춰진 부분을 뒤척여 우리에게 드러낸다. 이렇듯 이원형 시인의 시는 언어를 비틀어 언어가 감추고 있는 삶의 이면을 보여준다.
책을 읽어내려가다 보고싶지 않은 대목에선
건너 뛰거나 덮어버린다
이 세계는 손수 창간하신 크나큰 책
책장을 넘기며 기쁘다 하셨을 하느님도
어느 대목에선
눈 질끈 감아버렸으면 싶으셨겠지
엎어버리고 싶으셨겠지
차마 그럴 순 없고
매끄럽던 하늘이
미끄럽기 그지 없다면 때가 된 것
얼음장 같은 하늘을
설설 기며 내려오다 날개 부러진
애송이 천사들이
엎친 데 덮쳐서 이룩한 눈부신 체위를
사람들은 뭣도 모르고
폭설이라 난리법석이다
엎어버릴 수 없어서 덮어버린
하느님의 독설인 줄은 모르고
- 「하느님의 독서」 전문
폭설을 독설을 독설을 독서를 불러온다. 이 세 개의 유사어를 아주 재미있게 구사한 작품이다. 시인은 폭설로 세상이 하얗게 덮여 있는 광경을 보고 그것을 하느님이 세상을 읽다가 덮어버린 독서의 과정에서 나온 일종의 사건 사고라고 상상한다. 그런데 왜 하느님을 자신이 만든 책장을 덮어버렸을까? 마음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엎어버리고 싶었으나 차마 그럴 수 없어 덮어버린 것이고 그래서 폭설이 내린 것이라 시인은 동화적으로 상상한다. 그런데 이런 상상의 배후에는 세상에는 하느님까지 감추고 싶은 숨겨진 이면이 존재한다는 생각이 놓여 있다. 시는 이 감춰진 이면을 찾아가는 작업이다. 오염된 세상 때문에 하느님마저 감춰버린 그 이면의 진실을 찾아내서 태초에 있었던 하느님의 말씀을 찾는 일 그것이 바로 시인의 사명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3. 아이러니로 세상 보기
이렇게 동음이의어나 유사어를 이용한 언어유희는 단순한 말장난에 그치지 않고 이원형 시인이 세상을 바라보는 아이러니한 시각과 연결된다. 아이러니는 사물의 양면을 함께 보는 것이고 삶의 다양성을 받아들이는 인식 태도에서 나온다. 서로 다르거나 반대되는 것들이 공존하며 생긴 그 긴장을 고스란히 견디며 그 경계에서 사고할 때 아이러니가 생성된다.
오늘의 기후를
오늘의 기분으로 읽어도 무방하다
수문 활짝 열어놓은 하늘
비를 쏱아부으려는지 이부자릴 펴고 드러눕는
구름의 잠버릇은 때때로 고약해서
드르렁으르렁 코 고는 소릴 우레라고
얼버무리는 기상청이 있고
내 이럴 줄 알았다
막무가내 뛰어내리는 비 때문에
비 온다 빨래 걷어라
목청 돋구던 할미꽃 같은 할매는
허청허청
구름 타고 장으로 가시고
오십 미리는 족히 오겠습니다
우산까지 들고 나와 호들갑 떠는 아가씨에게 건넨
철썩 같은 믿음은 종종
과녁을 빗나가 내가 나를 실망시키고
겉만 번지르르한 구름 탓일까
겉 다르고 속 다르잖아욧
비를 파종하는 척 슬그머니 꼬리를 감추는
늙은 여우 같은 하늘과 한 판 붙고 싶은
- 「오늘의 기분」 전문
시인은 “오늘의 기후”라는 일기예보를 통해 삶의 아이러니함을 경험한다. 빗나간 일기예보처럼 예상을 벗어나거나 대비하진 못한 일들이 도처에서 일어난다. 하나의 단일한 질서와 그것을 예측할 수 있는 확실한 안목은 누구에게도 없다. 기상청이라는 국가 기관에도 항상 가족을 염려하는 나의 사고 속에서도 그런 확실한 믿음의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도 때도 없이 변하는 기분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 그것은 다양성의 세계이고 흔들림의 세계이다. 규정하고, “오십 미리”라고 수치화할 수 없는 불완전한 세계이다. 이 불안한 아이러니를 견지하며 “늙은 여우 같은 하늘” 즉 알 수 없는 세상과 “한 판 붙고 싶은” 것이 바로 이원형 시인의 시적 세계가 아닌가 한다.
너를 보면 꽂고 싶어
쪽쪽 빨고 싶어
그렇고 그런 고백의 배후에
삐닥하니 버티고 섰는 그것이 바로
입술의 버팀목입니다만
한 입으로 두 말 하지 않아요
한 번 쓰고 버리지 않아요
비록 일회성 생을 살지만
일회용은 사절합니다
목이 마르군요
꽃차나 한 잔 할까요
제멋에 겨워 가는 단골집
꽃다방에 주문을 넣습니다
타는 목마름으로 꽂고 빨고
꽃은 꽃에게 돌려주고
연장은 둘둘 말아 넣어두기로 합니다
취한 기분으로 길을 나선다고
누가 뭐라겠어요
참, 깜박했군요
쓰고 또 쓰고 다시 쓰는
빨대의 기쁨
빨대의 순정을 아시는지요
- 「빨대의 순정」 전문
‘갈대의 순정’이라는 노래의 제목을 “빨대의 순정”으로 재미있게 패러디했다. 그런데 유사어을 통한 패러디가 언어의 유희만을 노리고 있지는 않다. 빨대는 발음도 그렇지만 그 긴 외관이 갈대를 연상하기도 한다. 그래서 갈대처럼 가볍고 쉽게 흔들리고 또 아무 생각 없이 버릴 수 있는 것으로 간주된다. 하지만 빨대는 ”타는 목마름“을 달래주고 “쓰고 또 쓰고 다시 쓰는” 언제든 필요한 사람들에게 자신의 몸을 내어주지만 여러 사람에게는 쉽게 허락하지 않는 그런 순정을 가지고 있는 존재이기도 하다. 아무것도 아닌 빨대에서 세상에는 이미 사라지고 없는 인간의 가치를 발견해 내는 시인의 안목이 반짝이는 작품이다.
잊을만하면 나타나곤 한다
시의 행간에 목 빼고 앉아 먼 산 바라보는 목련
그녀 흰 목덜미에 마음이 흥하여
꽃이나 보러 갈까 하는 당신의 유혹
따라나설까 하는 이 마음의 유흥
수국나라 수문장 같은 당신
꽃보다 유창한 헛꽃의 말인 줄 알지만
내 시에 쏟아 붓는 살가운 환대로 받아
시냇물처럼 졸졸 따라나서지
이꽃 저꽃 시를 쓰는 창가
당신은 또 벌처럼 징징거리지
암술과 수술이 그러하듯이
이 생에 한 번은 해봄직한 신방을 차리고
시의 웃자란 말을 다듬어주는 동안
당신은 꽃에 물을 주고 켰다 껐다 하고
꽃의 흐린 말에도 귀가 솔깃한 당신에게
책상 모서리처럼 지루한 시를 이해시키느라 하루가 터무니없고
내 시를 오해하느라 한 시간이 하루 같은 당신
나무가 꽃을 버린 건지 꽃이 나무를 떠난 건지 분분하지만
그들이 그러하듯이
그놈의 시 때문에
우리 헤어질까 하는 말 꺼내지도 못하네
당신은 꽃을 쓰세요 나는 시를 썰테니
- 「당신은 꽃을 쓰세요 나는 시를 썰테니」 전문
시인은 꽃과 시를 대비하고 있다. 거기에다 쓰다와 썰다를 함께 가져와 일종의 언어유희를 만든다. 이 두 말이 언어유희가 될 수 있는 이유는 ‘시를 쓸 테니’라는 말을 경상도 방언으로 발음하면 “시를 썰 테니”가 되기 때문이다. 꽃을 보러 먼길을 떠날 수 있는 사람은 여유 있고 아름다움을 즐길 수 있는 따뜻한 사람이다. 하지만 그런 사람에게도 시를 설명하는 것은 쉽지 않다. “꽃의 흐린 말에도 솔깃한 당신”이지만 “내 시를 오해하느라 한 시간이 하루 같이” 많은 시간을 허비하고 있다. 시인은 이런 대비를 통해 꽃이 쉽게 시가 될 수 없고 너무 쉽게 꽃 같은 시를 찾거나 만들고 있는 태도를 은근히 비판하고 있다. 그래서 결국 자기가 시를 쓰는 행위를 시를 썬다고 표현한다. 시는 쓰는 게 아니라 칼날의 긴장감으로 언어를 썰어내는 것이라는 점을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4. 맺음말
이원형 시인의 시들은 재미있다. 한편 한편이 모두 말의 재미를 느끼게 만들어 준다. 시에 등장하는 말들은 그 어느 것도 상투적인 일상어의 쓰임에서 벗어나 있다. 그 말들은 애초에 그 말들이 지칭했던 사물의 생생함을 다시금 환기해 준다. 그래서 우리가 자동화된 의식 속에서 지우고 있던 사물과 그 사물들의 세상이 가지고 있는 본모습을 다시금 우리에게 일깨운다. 그것들은 이미 세상에 만연한 편견과 선취된 개념들을 뒤흔들어 우리를 각성시킨다. 시인의 재치와 말의 재미에 웃다가 가슴을 누르는 말의 무게를 감지하며 나를 돌아보고 내 삶을 돌아보고 내가 사는 세상을 돌아보게 된다.
닭은 죽어
꽃이 될 수 있다
그러니까 맨드라미는 닭의 후생
- 「그러니까 맨드라미」 부분
상투와 권태의 세상에서 생기를 잃은 언어의 목을 비틀어 다시 맨드라미 꽃으로 후두둑 살아나게 하는 이 마술이 이원형 시인의 시의 힘이라고 해도 과찬은 아닐 것이다.
황정산 : 1993년 『창작과비평』으로 평론활동 시작. 2002년 『정신과표현』으로 시 발표. 저서로는 『주변에서 글쓰기』, 『쉽게 쓴 문학의 이해』, 『소수자의 시 읽기』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