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양문화원에서 발행하는 칠갑문화 30호에 넘긴 원고입니다. 여러분의 질정을 바랍니다.
청양인의 꿈 –청정 청양에 보리를 심자!
정구복(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
1. 머리말:
고도로 발달한 현대의 과학문명과 기계 중심의 산업화는 굶어 죽는 식량문제를 해결하고 인간의 생명을 연장시켜 100세 시대를 만들었고, 교통과 통신이 발전해 도시와 농촌의 격차를 크게 줄였다. 그러나 그 결과는 자연환경을 파괴하고 자연과 인간의 조화를 깨쳐 인간이 지구상에 살 수 없을 정도로 큰 재앙을 가져왔다. 그 중 하나가 코로나19라는 세계적인 전염병이다. 이는 인간으로 하여금 문명사적인 반성을 하게 하여주는 자연의 엄중한 경고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청양인의 꿈을 과거로부터 그 인연의 꼬리를 찾아내 현재로 연결시키고, 그 열매를 미래에 얻게 될 청양인의 꿈을 그려보고자 한다.
2. 청정한 청양:
청양 군청의 홈페이지에는 청정 청양이란 로고가 CC로 그려져 있다. 청정이란 구호는 칠갑산에서 발원한 냇물이 맑고 깨끗하다는 데서 연유한 것이다. 청정은 청양만이 아니라 전국토가 청정했으면 좋겠다. 자연을 청정하게 하려면 우리는 울창한 숲을 산림으로 가꾸어야 할 것이다. 울창한 숲을 만드는 것은 우리들의 꿈으로서 마을이나 면단위가 주체가 되어 지속적으로 추진되어야 할 것이다. 청정은 자연의 청정만이 아니라 인간의 몸과 말과 행동과 뜻과 마음 씀이 청정해야 한다. 자연과 인간의 청정함은 둘이 아니라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의 청정함은 예절바름, 부모의 은공에 감사함, 겸손함, 친절함으로 나타날 수 있다.
3. 청양의 상징: 칠갑산
청양하면 칠갑산을 연상한다. 칠갑산이 도립공원을 지정되어 충청남도 도민과 외지에서 찾아오는 등산객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칠갑산 7부 능선에 위치한 칠갑산 광장에는 ‘칠갑산’ 노래 비석과 ‘어머니 상’, ‘콩밭 매는 아낙네 상’이 세워져 있고, ‘어머니길’이 지정되고 그 안내판에는 어머니의 희노애락과 사랑을 그림과 함께 애틋한 시가 써 져 있어 산 교육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칠갑산은 그 높이가 해발 561m로 그리 높은 산은 아니지만 군의 중앙에 우뚝 솟아 있다. 백제의 수도 부여 낙화암에서 동북쪽으로 바라다보면 30리 거리에 칠갑산이 보인다. 이에서 발원하는 많은 시내는 예나 지금이나 굽이굽이 흘러 금강으로 들어간다. 이 산 아래 골짜기와 냇가에는 수백 년 또는 천여 년 전부터 마을이 형성되어 조상 대대로 농사를 지으면서 살아오고 있다.
칠갑산 아래 마을 농민들의 선조들은 정상의 산신령을 매년 제사지내면서 마을의 안녕과 풍년, 그리고 복 받기를 기원해오면서 신성시했다. 그런데 외지인은 차에서 내려 한 두 시간 안에 정상에 올라 산을 정복했다고 자랑하고 있다.
4. 청양인의 꿈 :
청양인은 청양에 살고 있거나 그 곳에서 자라 기억 속에 고향 개념을 가지고 있는 사람과 그 자손을 통칭한다. 우리는 모두 농부의 자녀로 태어났다. 우리가 태어남은 부모님은 물론 먼 선조의 큰 공덕이 심어져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매일매일 한 순간도 끊임없이 이곳의 공기를 들어 쉬며 살았고, 이곳의 물을 마시며 살았으며, 주위의 논밭을 일구어 식량으로 삼고 살아왔다.
농부는 온 종일 논밭에서 자연과 접한다. 그래서 농부의 마음은 순박하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는 자연의 진리를 믿고 그대로 살아왔다. 농사짓기는 가족만이 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이웃과 협동으로 일을 하면서 고락을 함께 했다. 법정은 “우리가 인간다운 인간이 되려면 무한한 관계 속의 자신을 투철히 인식하고 즐거움과 고통을 이웃과 함께 나누어 가질 때에 비로소 그 지평이 열린다”고 설파했다. 우리의 이웃은 이웃집에 사는 사람만이 아니라 비록 멀리 떨어져 있어도 이웃이 될 수 있고 이웃은 국경과 민족을 초월한다.
청양에서 보리밭이 없어진지 오래다. 보리는 우리 조상들이 3천 년 전부터 재배해온 작물이다. 가을에 심으면 싹이 터서 한 뼘쯤 자라 눈비와 혹독한 얼음의 추위를 이겨내고 봄에 왕성하게 자라난다. 이에서 생명력의 굳셈과 청정함 그리고 경이로움을 느낄 수 있다. 보리는 많은 노인들이 앓고 있는 고혈압 당뇨병에 좋은 식량으로 알려져 있다. 군에서는 보리연구소를 열어 그 경작을 활성화하여 준다면 칠갑산 사방 주위의 논밭 다랑이에 파랗게 자라서 누렇게 익어가는 장관은 아주 아름다울 것이다.
농부는 농사를 잘 지으면서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 취미활동은 음악, 그림그리기, 글쓰기, 음식 조리하기, 생물의 은근한 비밀을 알아내는 일등이 될 수 있다. 이런 농부를 한마디로 ‘멋진 실천적 농부’라고 칭할 수 있다. 실천적 농부는 농촌에 많이 있다. 우리가 이런 농부를 몰라보기 때문에 숨어 있는 것이다.
칠갑산 주위에 살고 있는 이런 농부들의 진솔한 이야기는 인생이 무엇인가를 알고 싶어서 참다운 지혜를 얻으려고 찾아다니는 소년 소녀들의 스승이 될 것이다. 가을에 보리의 씨를 뿌리는 부부 농부는 해를 넘겨 보리가 잘 자라기를 바라면서 외지에 나간 자식들의 복을 기원하고 사회의 평화와 즐거움이 되기를 기원한다. 이런 멋진 모습을 그림으로, 글로, 음악으로, 그리고 영화로 만들면 세계적인 최고의 작품이 될 수도 있다.
보리씨를 심는 농부의 마음은 자연처럼 청정하고 그 기도와 기원의 마음은 순수하고 높으며 이웃을 적극적으로 포용하기에 이는 원자탄으로도 부술 수 없으며, 악마의 저주도 작동하지 못한다. 하늘과 땅, 그리고 인간이 모두 함께 축복해주고 함께 도와주기 때문이다. 울창한 숲과 밝은 태양이 내려쬐는 이런 평화스러운 청양의 논밭에서 보리를 심는 부부 농부의 숭고한 모습을 꿈으로 그려 본다.
첫댓글 귀한 옥고 잘 읽었습니다.
'칠갑문화' 책자에 존경하는 정 박사님 옥고가 소개됨을 동향인의 한 사람으로서 기뻐하고 축하합니다.
윤선생의 덕분에 써 본 글입니다만 부족한 점이 많습니다. 감사합니다.
청양은 저의 유년시절을 기억하는 고을입니다
보리 농사를 짓는 이상적인 농촌 사회는 하늘과 땅 그리고 인간의 협조 하에 이뤄질 수 있다는 신선한 글을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우리말 보리는 보리도 지칭하지만 이에는 불교의 근본 교리인 보리를 뜻하기도 합니다. 복선생과 박선생의 평론 감
사합니다.
낙암선생의 글 '청양인의 꿈'을 읽었다. 그는 청양을 청정하다고 표현하였다. 인간이 살고 있는 토양이 청정하고 그를 에워싸고 있는 공기가 청정한 것은 커다란 축복이다. 따라서 청양은 축복을 받은 고장이다. 그런데 그 청양의 청정은 곧 칠갑산에서 연원을 찾을 수 있다. 칠갑산은 해발 561미터라고 한다. 그러나 그것이 결코 낮은 것은 아니다. 그 어느 곳에서 바라보아도 칠갑산의 자태는 우뚝한 것이다. 나는 오래 전에 친구들이 "칠갑산 산마루에 .........."라고 노래하는 것을 보고 은근히 감동을 받은 바 있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칠갑산을 따라 부르면서 즐거움을 느끼고 마음의 평정을 느끼기도 하였다. 비록 청양인이 아니라도, 칠갑산이 어디에 있는지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도 칠갑산을 가슴 속에 품게 되는 노래이다. 그런데 낙암선생은 그 칠갑산 기슭에 보리를 심자고 주장한다. 가을에 추수를 끝내고 시퍼렇게 올라오는 보리싹은 가관이다. 그러나 그것이 엄동설한을 이기고 봄볕을 받으면서 새로운 기운을 발산하며 올라오는 모습은 더욱 가관이다. 그리고 "님''부르는 소리가 들려 온다. "보리밭 사잇길로 걸어가면 님부르는 소리 있어....." 낙암선생이 그 아름다운
칠갑산 기슭에서 날아오는 푸른 보리의 향기를 마시며 행복을 느끼는 아름다운 모습을 상상하게 된다. 나는 낙암선생의 "청양인의 꿈"은 곧 나의 꿈이기도 하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내가 항상 바라보고 우러르기도 하는 충북 증평군 송산리의 두타산도 청양의 칠갑산을 방불케 하는 아름다운 모습이다. 두타산의 대아봉 기슭은 아버지가 보리를 심고 그 향기를 맡으시며 풀을 뽑으셨던 곳이다. 칠갑산과 두타산은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서로 웃음을 던지며 보리밭의 향기를 말하고 행운유수의 자연을 창조 할 것이다. 칠갑산이여! 두타산이여! 아름다운 우리들의 고향이여! (지교헌)
동촌 선생님 아주 좋은 찬사와 평을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동촌선생의 고향이 두타산이라고 하니 한번 꼭 모시고 가고 싶은 곳입니다.
두타산은 검소한 불교 수행자를 상징하는 아주 좋은 이름입니다.
제 글을 읽으시고 요모조모 해석하여 주신 점 감사합니다.
제가 쓴 글이 젊은 사람들에게는 늙은이의 향수심만을 담은 것
같은 글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이 글은
12월 말 간행이라고 하니 문장을 수정하여 다시 써야 할 것입니다.
낙암선생의 글은 <칠갑산문화>에 게재할만한 매우 적절한 글이라고 생각합니다.
"문장을 수정하여 다시 써야하겠다"고 한 것은 너무나 겸손한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하기야 무슨 글이라도 글쓰는 사람들은 누구든지 초고를 쓴 다음에 여러 번 고치고 고치고 하기 때문에
적어도 몇 차례씩 퇴고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일상적인 글쓰기에도 너무나 자신이 없어서 한심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논문도 쓰고 잡문도 쓰던 버릇이 있어서 남에게 부끄럽기도 하고 스스로도 불만스럽지만
훌륭한 동지들과 벗님들과 소식을 끊을 수도 없어서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아무 글이나,
특히 수필이라는 이름으로 발표하게 됩니다.
그 동안 써서 발표한 수필 가운데 수필다운 수필은 너무나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오늘 보내드린 ' 정 구복 교수가 지은 <<우리 어머님>> 을 읽고 ' 는
최근에 책을 구하여 읽고나서 독후감이라는 이름으로 쓴 것인데
필자의 고귀한 뜻을 제대로 나타내지는 못한 것 같아서 미안하고 부끄럽기만 합니다.
한 번 훑어보시고 지적하여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만 줄입니다. 2020. 10. 24 지교헌
우리어머님에 대한 독후감을 메일로 읽어보고 너무 과분한 평가를 해주셔서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메일로 답을 올린 후에 카페글을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