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보복
바닷가에 서서 끊임없이 밀려왔다 밀려가는 파도를 바라본다. 먼 태고적 숨결을 지닌 채 지칠줄 모르고 지평선으로부터 밀려와, 늘 그 자리를 그렇게 맴돌다가 돌아가는 파도를 보고 있노라면, 그리고 그렇게 서성거리다간 바위에 부딪혀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의 슬픈 노래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문득 머리를 스쳐지나가는 생각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사랑, 바위처럼 굳어져버린 인간의 마음을 감싸안으며 지칠줄 모르고 조수처럼 밀려오는 하나님의 사랑이다. 타락한 인간을 향해 끝없이 밀려오는 한없는 하나님의 사랑...
인간은 늘 “받고” 싶어한다. 사랑 “받고” 싶어 하고, 위로 “받고” 싶어 하고, 관심을 “받고” 싶어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주고” 싶어 하신다. 사랑을 “주고” 싶어 하시고, 위로해 “주고” 싶어 하시고, 항상 관심을 “주고” 싶어 하신다. 그런데 그렇게 늘 “주고” 싶어 하시는 사랑의 하나님께서, 그분의 자녀인 우리가 남에게 “해 주기” 를 원하시는 아주 중요한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곧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어떤 “보복”(?)을 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이다. 그것도 보통 “보복”이 아닌 아주 멋진 “보복”을... 그 보복은 다름이 아닌 “사랑의 보복”이다. “사랑의 보복!... 그것은 굉장히 어렵기도 하고 한편으론 굉장히 쉽기도 하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하기를 바라시는 그 “사랑의 보복”에 대하여 로마서 12장 20절에는 이렇게 쓰여있다.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얼마나 멋진 보복인가! 나를 괴롭히는 그렇게도 얄미운 원수의 머리 위에 뜨겁게 핀 숯불을 놓을 수 있다니!...
가까운 곳에 있는 작은 원수들
많은 경우에 우리는 그렇게 큰 원수를 가지고 있지 않다. 물론 어떤 사람은 평생 가슴에 상처를 남긴, 자신에게 큰 해를 끼친 원수를 가지고 있을런지 모른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게 큰 원수를 가지고 있지 않다. 어떻게 생각해보면 우리의 원수는 큰 원수가 아니라 작은 원수, 곧 우리의 가까이에서 우리를 어렵게 하는 우리의 이웃들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르는 사람에게서가 아니라, 바로 우리가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에 의해서 어려움과 상처를 당하는 때가 많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들은 우리가 사랑하고 있는 사람들, 남편, 아내, 자녀, 아니면 친구, 교우들일런지도 모른다.
우리의 마음 속에 상처를 주는 사람, 가슴이 미어지도록 우리를 섭섭하게 하는 사람, 우리의 기대를 저버리고 철저히 실망시키는 사람, 우리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고 우리의 마음을 짓밟는 사람, 우리에게 슬픔을 주고 괴롭히는 사람, 우리의 희망을 비틀어 꺼버린 사람... 그런 사람들은 바로 아주 가까이에 우리와 함께 있는 우리의 이웃들, 곧 우리의 마음을 그렇게도 섭섭하게 하고 괴롭게 하는 작은 원수들이다.
때때로, 우리는 우리의 가까운 사람으로부터 마땅히 받아야 할 대접을 받지 못할 때 슬프거나 섭섭해질 때가 있다. 더우기 우리가 기대하고 있는 사람이 그렇게 했을 때는 더욱 슬퍼진다. 또한 우리는 우리가 정말로 그러지 않으리라고 믿었던 사람이 그렇게 행동하거나 우리에게 상처를 주었을 때 너무 당황하게 되고 충격과 슬픔에 싸이게 된다. 또 비록 일상생활에서 겪게 되는 아주 사소한 일일지라도, 누군가가 자꾸 우리의 마음을 자근 자근 짓밟으며 상하게 하면 무척 속상하고 화가 나기도 한다. 이런 모든 것들은 가까이에서, 우리가 기대하고 사랑하는 사람들로부터 받는 어려움과 괴로움이기 때문에 그 상처가 더 크고 아프며, 더 쓰라릴 수 있다.
사랑의 보복
이렇게 우리에게 많은 상처들이 생길 때, 그리고 너무나 부당하게 받은 대우 때문에 마음이 상할 때, 그리고 우리의 꿈과 희망을 비틀어버린 사람 때문에 우리의 마음이 고통스러울 때, 그리고 한번도 아니고 여러번씩이나 자존심을 짓밟은 사람 때문에 마음이 끓어 오를 때... 그 때, 우리는 유혹을 받는다. 우리가 받은 그대로 상대방에게 보응해 주고 싶은 유혹을... 그가 한만큼 나도 갚아주리라는 유혹을... 그리고 내가 받은 만큼의 상처를 그대로 주고 싶은 유혹을...
비록 그것이 그렇게 큰 보복이 아닐지라도, 또 그렇게 나쁘거나 심한 대응 방법이 아니더라도, 그리고 그것이 미처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의 아주 작은 대응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무의식 중에 자신이 받은 만큼의 상처를 그대로 남에게 보복하려는 경향이 있다.
“사랑의 보복”! 그것은 이런 투쟁과 갈등으로 우리의 마음 속이 산란할 때, 넘쳐나는 울분으로 마음이 끓어 오를 때 행하라고 하나님께서 가르쳐주신 아주 좋은 보복의 방법이다. “네 원수가 주릴 때 마시우고 먹이라”. 그러면 그것이 너를 괴롭힌 원수의 머리 위에 “뜨거운 숯불”을 놓는 것이 되리라! 그런데 이 말씀은 성경에 한번 나오지 않는다. 잠언 25장 21~22절에, 그리고 마 5장 44절에, 아니 성경 전체의 흐름을 통해 이 사랑의 메세지는 전달되고 있다.
그런데 그것이 정말 가능한 일일까? 사랑이 없이는 할 수 없는 그 보복을 과연 우리는 할 수 있을까? 우리는 과연 사랑의 숯불을 우리를 슬프고 괴롭게 한 원수의 머리 위에 올려 놓을 수 있을까?
위로받기보다는
유대인의 탈무드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와 있다. 어떤 사람이 선지자에게 와서 물었다. 이 성 안에서 어떻게 하면 메시야를 찾을 수 있겠느냐고, 어떻게 메시야를 알아 볼 수 있겠느냐고... 그러자 그 선지자는 이렇게 대답했다. 성 안에 들어가면 많은 사람들이 있을 것이라고, 그런데 사람들은 모두 자기의 상처만 싸매느라고 바쁠 것이라고, 그런데 어떤 한 사람이 있을텐데 그 사람은 자신의 상처가 아닌 다른 사람의 상처를 싸매어 주느라고 바쁠 것이라고... 그런데 바로 그 사람이 곧 메시야라고...
인간은 이기적으로 태어 났다. 우리는 늘상, 나의 상처만 아프고, 나만 위로 받아야 하고, 나만 외롭고, 나만 슬프고, 나만 사랑 받아야 할 사람처럼 행동하고 생각한다. 그리고 어쩌다 사랑을 베풀려고 해도 자신이 받은 만큼만 주려는 이기적인 속성을 나타낼 때가 많다. 어쩌면 우리는 부인하고 싶을지 모르지만, 이방인보다도 못한 사람들인지도 모른다. 자기에게 잘 하는 사람만, 자기 마음에 드는 사람만 사랑하려고 하니까...
위로받기보다 먼저 위로하고, 사랑받기보다 먼저 사랑하고, 관심 받기를 바라기보다 먼저 관심을 베풀어 줄 수는 없는걸까? 아니, 우리를 괴롭게하고 우리의 마음에 잔뜩 상처를 준 작은 원수들에게 사랑으로 먹이고, 사랑으로 마시우게 할 수는 정말 없는 것일까? 그래서 그 사람의 머리 위에 뜨거운 사랑의 숯불을 올려놓을 수 있도록... 사랑없이는 할 수 없는 그 멋진 “보복”을 우리는 정말 할 수 있을까?...
마음 속에 거하는 그리스도의 사랑
로마서 5장 5절에는 이런 좋은 말씀이 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이 말씀에는 우리를 “사랑의 보복”을 할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는 비결이 나와 있다.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통하여 우리 마음속에 거하시면, 우리의 마음은 그분의 사랑으로 충만해지고 만족을 느끼기 때문에, 남의 동정과 배려를 받으려는 욕망이 사라진다. 그뿐 아니라 오히려 마음 속에 충만히 거하는 하나님의 사랑이 흘러 넘치게 되어 이상한 기적, 곧 우리를 아프게 한 작은 원수들에게 멋진 “사랑의 보복” 을 할 수 있는 기적을 만들어낸다. 원수를 보는 우리의 눈이 사랑의 눈으로 바뀌어 지고, 정죄와 편견의 안경이 사랑의 빛을 잔뜩 지닌 기적의 안경으로 바뀐다.
그러나 이보다도 더 한 것은, 우리가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 굴복할 때 인간의 지혜로는 할 수 없었던 일들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기적을 보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한때 냉랭하고 벌어졌던 마음들이 세상의 어떤 줄보다 더 튼튼하고 오래 견디는 줄, 곧 어떤 고난이라도 견디어 낼 수 있는 사랑의 황금줄로 연합되는 기적이다.
오늘도 하나님의 사랑의 기적으로 원수의 머리 위에 올려 놓는 우리의 숯불이 더 뜨거운 사랑의 숯불이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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