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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서오경 四書五經 춘추 (중국 고대 유가의 전적 중 하나) 春秋 (中国古代儒家典籍之一)
출처:바이두백과 소스:이페어케이
《춘추》는 《춘추경》으로, 《인경》이나 《인사》 등이라고도 하며, 우리나라 고대이다.역사 문학 작품. 후에 《춘추》에 기록된 역사를 보충하고 해석하며 밝혀낸 작품들이 많이 생겨나 '전(傳)'이라 불렸다.대표적인 작품은 춘추삼전(春秋三傳)으로 불리는 좌전(左傳) 수양전 곡량전이다.
《춘추》는 기사 작성에 쓰이는 언어는 매우 간결하나, 거의 모든 구절에 비난을 내포하고 있다.춘추필법(春秋筆法) '미언(微言)의 대의(大義)'라는 뜻이다.중국 고대 유가의 전적 '육경' 중 하나로 우리나라 최초의 편년체 사서이자 주나라 시대 노나라의 국사이며, 현존 판본은 공자가 수정하여 만든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2019년 2월 보도로 해혼후묘에서 5200여 점의 서신이 출토되어 전문가 석방이 이루어졌다.읽어보니 《춘추》를 비롯한 유가 경전과 그 훈전이 있었다. [1]
작품명 춘추작품은 별명이 "춘추경", "인경", "인사"작이다. 자는 공자의 창작 시대 춘추 문학 장르의 사서인 유경이라고 전해진다
카테고리
1 작품 소개
2 창작 배경
3) 작품성
4 후대 영향
5 춘추삼전
6 동기의 사서
7 고고학적 발견
작품 소개
춘추공양전
춘추공양전
일부 문학 저서에 따르면 늦어도 서주부터는 태사가 국가 대사를 기록한다고 한다.《춘추》는 노나라 사관이 많은 양의 제후, 대부, 국인 등의 결례를 기록한 것이고, 노나라 사관도 다른 제후국 공후 대부 등 결례와 결례된 일을 수집하여 제후국 공후 후간대부 등의 서신 내용을 기록하는데, 예를 들면 진숙(秦叔)이 정국자에게 주형서에 관한 서신을 생산하였다[2].국사관이 진기록으로 피살된 사건[3] 등등.
매 시즌의 시작에는 보통 봄에서 겨울까지 사계절의 계절을 쓴다.옛날의 역법은 먼저 봄과 가을, 후에 여름과 두 시로 나뉜다.그래서 국사 기록을 춘추라고 불렀는데, 이것이 춘추라는 역사 책의 이름으로 된 이유일 것이다.현존하는 《춘추》는 노은공에서 노애공에 이르기까지 12대 임금에 이르기까지 이백사십사십사년(<수양전>과 《곡량전(谷梁傳)》에 실려 있는 것으로부터 14년 후인 이백사십이년에 이르러서는 《수양전( 公陽傳)》이다.'좌전(左傳)'은 2년 남짓. 기본적으로 노(盧) 국사서의 원문이다.
《춘추》의 서적은 공자의 손에서 나온 것으로, 옛날에는 "문왕이 구류하여 주역·중니를 연기하였다.어이작춘추'라는 말을 들었다.그러나 후대에는 청인 원곡방 《춘추서예론(春秋書藝論)》이 "춘추"라고 한 사람, 노사야라는 설도 있다.노사씨의 책은 공자가 기록하여 소장하여, 후세에 전해진 것이다.석함옥 《독학려초고·춘추론》도 "춘추"자는 노사의 옛 글이다.《춘추》는 모두 12 공의 일이다.이백사십 년을 두고 글을 쓰는 자는 더 수십 명이 되리라이 수십 명의 사람은 집에서 스승으로 섬기고, 사람이 스스로 배우면 그 서법이 어찌 똑같을 수 있겠는가?춘추의 저자가 논란이 있지만 공자의 손을 거쳐 고쳐 쓴다면 크게 다르지 않다.사실 춘추는 일노국의 사서로서 그 역할이 사서 범위를 벗어나서 춘추를 사구절절하였다.'자침(字 。)'은 독특한 문풍(文風)이 되어 춘추필법(春秋筆法)으로 불리며 역대 문대 사가(史家)를 경전(經典)으로 받들었다.
《춘추》에 기록된 것은 이백사십여 년의 춘추 각국의 대사이다.1만6천여 자가 넘었지만, 위나라 때의 장옌과 만당 때의 사람인 서언인 《춘추설(春秋說)》에 따르면 모두 1만8천자(장설견 《사기·태사공자서·집해》의 인용, 서설견 《공양전·소공 12년소(昭公十二年疏)》의 인용)를 알 수 있듯 《춘추》의 원문은 삼국시대부터 천여 자가 누락되었다.허다한 대사 누락이 많다.
창작 배경 편집
공자가 "작춘추"를 한 이유는 사기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태사공) 들은 것.동생이 가로되 `주도는 쇠폐하고 공자는 노사구라, 제후들은 해를 끼쳤으며, 대부가 옹지하였다.공자가 말하기를, 도를 행하지 않는 것은, 시비 이백사십이 년 동안, 천하의 계기를 폄하하고, 후를 물리치고, 대부를 구걸하고, 왕의 일을 달성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라고 말하면서, '내가 말하기를 '나는 보고 싶은 빈말을, 보다 보고 행하는 것이 더 명백하다.'고 하였다.사마천은 춘추에 대해 부춘추, 상명삼왕의 도를 내려 인사의 기율을 달리하고 혐의를 달리하며, 시비를 분명히 하고 주저하고 선악 악을 미워하며, 현명하고 천박하고 멸망한 나라를 이기고, 폐허를 보하고, 왕도의 큰 자를 보한다. 그러므로 춘추는 예의의의와 같다.부례금연 전에 이미 법이 시행된 후 법지가용자는 보기 쉽지만, 예물이 금지된 곳은 알기 어렵다.
학술계는 《춘추》의 사학 가치에 대해 의문을 품고 있다.호적은 "'춘추'그 책은 공문정명주의의 참고서로 볼 뿐, 하나의 모범적인 사서로 볼 수는 없다.후의 사가가 《춘추》를 작사의 모범으로 삼았으니 큰 잘못이다.왜냐고요? '진실을 말하고 사실을 기억하라'는 것이 역사의 취지니까요.《춘추》의 취지는 사실을 기억하는 데 있지 않고, 단지 마음속에 있는 사실에 대한 평론을 쓰는 데 있다.판. 서복관 선생도 "공자가 《춘추》를 수필한 동기와 목적을 오늘에 와서 '사학'이라 부르지 않고 고대의 양사를 발휘하여 신의 심판을 사의 심판으로 대신하는 장엄한 사명을 가질 수 있다.이는 사학 이상의 사명이므로 사가 아니라 경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사료 기록에는 춘추의 역사 기록에 대한 의구심은 없다.두예는 '춘추좌전 집해·서'에서 "중니는 노사책의 책으로 진위를 따져 그 의식을 행하고, 위로는 주공의 유제를 따르며, 아래로는 장래를 밝히는 법을 세웠다"고 말했다.주희는 "성인은 '춘추'를 만들지만, 그 일을 곧이곧대로 말하고 선악은 저절로 안다"고 했다.
《춘추》기사의 필법은 《사기》와 다르다.사마천은 '여칭'이라고 명시했다.그 전래의 내용을 정연하게 서술하는 것은 작(作)이 아니라 춘추에 비( 。)하는 것이 잘못이다."그렇다고 춘추의 '미언의 대의'가 실체가 없는 말은 아니다.장 교수는 "양사·실록이 고대사학의 기본 원칙을 대변했다면, '미언 대의'는 고대사학을 대표하는 가장 큰 원칙"이라고 평가했다.이 때문인지 좌전(左傳)은 "'춘추(春秋)'는 미현(微賢)이고, 뜻이 어두우며, 완곡하게 글을 지어 더럽히지 않고, 악을 응징하고 선을 권하는 성인이 아닌, 누가 이를 고칠 수 있겠는가?“
작품성 편집
공자가 지은 《춘추》는 저자의 깊은 정치 사상을 내포한 정치학 저작이다.이것은, 선진의 맹자, 순자에서 양한마까지, 반의 여러 집안에서 일치된 견해이다.양한 이후, 현재의 문경학은 쇠퇴하였고, 학자들은 고문경학에 관한 견해에 많이 영향을 받아 《춘추》를 역사학 저서로 보기 시작하였으며, 이로 인해 오랫동안 논쟁이 분분했던 《춘추》의 성격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역사학 저술이냐 정치학 저술이냐를 놓고 천여 년이 흘렀다.이후 다음과 같은 세 가지 관점이 형성되었다.
전통적인 금문경학자의 관점은 바로 《춘추》를 정치학 저서로서, 이 설을 가지고 있는 자이다.청인 피석서, 근인 서복관, 여사면, 호적 등
고문경학자 및 근대 "고사변"파 학자의 관점은, 바로 "춘추"를 역대로 여겼다.사학의 저작은 고문경학자들이 여진인두예, 근인 전현동, 구힐강, 유절 등과 같은 사람들이 이런 견해를 견지하고 있다.
조화설, 즉 《춘추》는 《역경역사》라고 생각하는데, 이것을 가진 자는 챈무, 레고와 같다.《역경역사》라는 설에 대해 찬목은 《춘추》를 《역경역사의 일가언》으로 여겼는데, 그 이유는 고무경사(古無經史)의 구별, 경사(經史)의 구분은 후대에나 있을 법한 관념이라는 것이다.
"춘추를 굳이 경비사(經非史)라고 한다면 이는 후대(後代)를 위한 의견일 뿐이다.고대의 저서를 두고 다투는 것은 아무래도 긁어 부스럼을 만들지 못할 것 같다"고 말했다.그러나 '경사불분별설'과 관련해 종조붕 선생은 1960년대 한 글에서 중국의 고대 경사가 유별나고 역사가 앞선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후대 영향 편집
봄과 가을의 창시자는 어느 모로 보나 변명의 여지가 없다.
그것의 편년체 예는, 사학의 세 가지 대략적인 예 중 하나이다. "는 해와 달과 다음의 해이며, 그 해는 그 다음이다.이어"수범천추의 모범을 보인 데 이어 자치통감(資治通監)이 가장 뛰어나다.
그것의 비밀스런 성격으로, 관변 대 사학의 독점을 깨뜨려, 제자 백가쟁명의 선례가 되었다.음. '26사'의 3분의 1에 달하는 개인 수료자도 그 인솔에 의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의 춘추 필법은, 아무리 많은 후인이 견강부회한 곳이 있더라도, 그 자체가 분명하다.용감무쌍하고 사심 없이 강직하다.
중국 사맥은 지금까지도 끊임없이 이어져 왔으며, 공자가 당초 부여한 그 강인한 기개와도 같다.관련성이 있다. 성인은 시들하지만 춘추는 시들지 않는다.《춘추》를 애독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가장 민간에 익숙한 것은 아마도 공성인과 함께 이름을 떨친 관성인 관우였던 삼국지일 것이다.그대는 한 폭의 대련 유운은 듣지 못하노라.
공자, 관자, 만세양부자
수춘추, 학춘추, 천고일춘추.
어찌 관제를 배워서라도, 등불을 켜고 밤을 새워 《춘추》를 읽으랴. [4]
춘추삼전편집
《춘추》는 문장이 너무 간질적이어서, 후세 사람들이 이해하기 어려워, 해석작들이 잇따라 출현하였다.책에 실린 기재를 해석하고 설명하는 것을 '전(傳)'이라고 한다.이 가운데 좌구명 춘추좌씨전, 공양고 춘추공양전, 곡량적 춘추곡량전을 합쳐 춘추삼전이 유가 경전에 포함되었다고 한다.
현재 《춘추》 원문은 일반적으로 《좌전》에 합쳐져 "경"으로 쓰이고, 《좌전》은 새로 추가되었다.용은 '전(傳)'이다. 《한서·예문지(藝文志)》에 의하면 춘추작전(春秋作傳)을 쓴 사람은 모두 5개이다.
《좌전》 30권.
공양전 11권
곡량전 11편
추씨전 11권
협씨전 11권.
춘추곡량전
춘추곡량전
이 중 뒤의 두 가지는 이미 존재하지 않는다.공양전과 곡량전은 서한 초년에 전해져, 그때에 정통하였다.행의 예서는 금문이라고 한다.좌전(左傳)에는 공자의 옛집 벽에서 진나라 옛 글씨로 쓴 것을 고문(古文)이라 하고, 전국시대 순경(純京)에서 유래한 것이 있다.
춘추삼전의 치중에는 차이가 있다.《곡량》과 《공양》은 측중천원이다.'춘추'의 '미언대의'를 보내고, '좌전'은 역사의 세부적인 보완에 치중한다.
이학근 선생은 "'춘추 대의'를 찾으려면 '공양' '곡'을 찾아야 한다.량.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그런 점, '공양' '곡량'의 연구가 유가의 중요한 관점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분명히 해 줄 것이기 때문에 '좌전'이 오히려 어렵다는 점도 오늘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5]
동기사서편집
'맹자·이루'는 "'시'가 망하고 '춘추'가 그 뒤를 이었다.진의 '타다', 초의 '도올올', 노의 '춘추'가 하나였다.
당시 (전국시대) 각 제후국의 사서들은 일반적으로 《춘추》라고 불렸다.'춘추'라는 제목을 붙이지 않고 진국·초국이 스스로 이름을 붙였다. [6]
고고학발견편집
2019년 2월 보도로 해혼후묘에서 5200여 점의 서신이 출토되어 전문가 석방이 이루어졌다.읽어보니 《춘추》를 비롯한 유가 경전과 그 훈전이 있었다.해혼의 약본 『춘추』는 현재 100여 점이 남아 있다.서한에는 《춘추경(春秋經)》에 대한 주석이 달린 것으로 《좌전(左傳)》 《공양전(公陽傳)》과 《곡량전(谷梁傳)》이 전해내려온다.
연구원들은 글이 비교적 선명한 20여 개의 죽간을 근거로 하여, 약문의 내용을 초보적으로 판단하였다.오늘날 《공양전》과 《곡량전》에서 함께 보기도 하고 《공양전》에서만 보기도 한다.그 내용이 문구에 현재본과 상이하거나 없는 경우도 있다.
해혼의 간본 《춘추》와 《춘추공양전》은 관계가 밀접하여 한대에는 공양학이 성행하였다.심지어 한동안 치국의 기본원칙으로 해혼간본 《춘추》의 발견은 춘추경전의 출토유물 중 최초 발견으로 《춘추》경의 최초 실물을 제공하여 그 역사를 이해하기 위한 귀중한 자료이다. [1]
春秋 (中国古代儒家典籍之一)
《春秋》即《春秋经》,又称《麟经》或《麟史》等,是我国古代史类文学作品。后来出现了很多对《春秋》所记载的历史进行补充、解释、阐发的作品,被称为“传”。代表作品是称为“春秋三传”的《左传》、《公羊传》、《谷梁传》。
《春秋》用于记事的语言极为简练,然而几乎每个句子都暗含褒贬之意,被后人称为“春秋笔法”、“微言大义”。它是中国古代儒家典籍“六经”之一,是我国第一部编年体史书,也是周朝时期鲁国的国史,现存版本据传是由孔子修订而成。
2019年2月报道,从海昏侯墓出土简牍5200余枚,专家释读后发现包括《春秋》在内的儒家经典及其训传。 [1]
作品名称春秋作品别名《春秋经》、《麟经》、《麟史》作 者相传是孔子创作年代春秋文学体裁史书儒经
目录
1 作品简介
2 创作背景
3 作品性质
4 后世影响
5 春秋三传
6 同期史书
7 考古发现
作品简介编辑
春秋公羊传
春秋公羊传
据一些文学著作记述,至迟自西周起,就有太史记载国家大事。《春秋》是由鲁国史官记录大量当时本国诸侯,大夫,国人等失礼非礼之事;鲁国史官也会收集其他诸侯国公侯大夫等失礼非礼之事,会记录诸侯国公侯间大夫等间书信内容,比如晋叔向与郑国子产关于铸刑书的书信 [2] ,其中记录了齐国史官因为保持真实记录而被杀掉的事件 [3] 等等。
在每一季的开始,一般要写“春”到“冬”四季的季节。古时历法先有春秋,后分冬夏二时。因此把国史记载叫做《春秋》,这可能是“春秋”作为史书名的来由罢。现存《春秋》,从鲁隐公记述到鲁哀公,历十二代君主,计二百四十四年(依《公羊传》和《谷梁传》载至哀公十四年止,为二百四十二年,《左传》多二年),它基本上是鲁国史书的原文。
相传《春秋》之书出于孔子之手,旧时有“文王拘而演周易、仲尼厄而作春秋”之说。但后世亦有不同说法,清人袁谷芳《春秋书法论》说:《春秋》者,鲁史也。鲁史氏书之,孔子录而藏之,以传信于后世者也。石韫玉《独学庐初稿·春秋论》也说:《春秋》者,鲁史之旧文也。《春秋》共十二公之事,历二百四十年之久,秉笔而书者必更数十人。此数十人者,家自为师,人自为学,则其书法,岂能尽同?虽然春秋之作者有争议,但其经过孔子之手修而改之,则无大异。事实上,春秋作为一鲁国的史书,其作用早已超出史书范围,春秋用词遣句“字字针砭”成为独特的文风,被称为春秋笔法,为历代文代史家奉为经典。
《春秋》所记,是二百四十多年的春秋各国大事,现所存全文,不过一万六千多字,但据曹魏时的张晏和晚唐时人徐彦引《春秋说》,都说是一万八千字(张说见《史记·太史公自序·集解》引,徐说见《公羊传·昭公十二年疏》引),可见《春秋》原文,从三国以后脱露了一千多字。很多大事遗漏记。
创作背景编辑
孔子“作春秋”的原因,史记中是这样记载的:“余(太史公)闻董生曰:‘周道衰废,孔子为鲁司寇,诸侯害之,大夫壅之。孔子知言之不用,道之不行也,是非二百四十二年之中,以为天下仪表,贬天子,退诸侯,讨大夫,以达王事而已矣。’ 子曰:‘我欲载之空言,不如见之於行事之深切著明也。’“司马迁对《春秋》极为推崇:”夫春秋,上明三王之道,下辨人事之纪,别嫌疑,明是非,定犹豫,善善恶恶,贤贤贱不肖,存亡国,继绝世,补敝起废,王道之大者也。……故春秋者,礼义之大宗也。夫礼禁未然之前,法施已然之后;法之所为用者易见,而礼之所为禁者难知。
学术界对于《春秋》的史学价值存在质疑。胡适认为:“《春秋》那部书,只可当作孔门正名主义的参考书看,却不可当作一部模范的史书看。后来的史家把《春秋》当作作史的模范,便大错了。为什么呢?因为历史的宗旨在于‘说真话,记实事’。《春秋》的宗旨,不在记实事,只在写个人心中对实事的评判。”徐复观先生也说:“可以断定孔子修《春秋》的动机、目的,不在今日所谓‘史学’,而是发挥古代良史,以史的审判代替神的审判的庄严使命。可以说,这是史学以上的使命,所以它是经而不是史。”
然而史料记载中并没有对《春秋》的历史记载产生怀疑。杜预在《春秋左传集解·序》中说:“仲尼因鲁史策书成文,考其真伪,而志其典礼,上以遵周公之遗制,下以明将来之法。”朱熹说:“圣人作《春秋》,不过直书其事,善恶自见。”
《春秋》记史的笔法与《史记》不同。司马迁明确指出:”余所谓述故事,整齐其世传,非所谓作也,而君比之于春秋,谬矣。”但《春秋》的“微言大义”并不意味着其“言”是失实的。张京华有这样的评价:“如果说‘良史’、‘实录’代表了古代史学的基本原则,‘微言大义’则是代表了古代史学的最高境界。”也许正因如此,《左传》才会说:”《春秋》之称,微而显,志而晦,婉而成章,尽而不污,惩恶而劝善,非圣人,谁能修之?“
作品性质编辑
孔子所作的《春秋》是一部蕴涵着作者深刻政治思想的政治学著作,这是从先秦孟、荀到两汉马、班诸家一致的看法。两汉以后,今文经学衰微,学者多受古文经学门户之见的影响,开始视《春秋》为历史学著作,并由此引发了长期以来聚讼纷纭的《春秋》性质之争。
围绕《春秋》是历史学著作还是政治学著作这一问题,千余年来先后形成了以下三种观点:
传统今文经学家的观点,即以《春秋》为政治学著作,持此说者如清人皮锡瑞,近人徐复观、吕思勉、胡适等;
古文经学家及近代“古史辨”派学者的观点,即认为《春秋》是历史学著作,古文经学家如晋人杜预,近人钱玄同、顾颉刚、刘节等人坚持这种看法;
调和说,即认为《春秋》“亦经亦史”,持此说者如钱穆、雷戈。就“亦经亦史”的说法,钱穆认为《春秋》是一部“亦经亦史的一家言”,理由是古无经、史的区别,经、史之分是后代才有的观念,
“若我们定要说《春秋》是经非史,这实在只见其为后代人意见,据之以争古代之著作,未免搔不着痛痒”。然而关于“经史不分”之说这点,钟肇鹏先生曾在上世纪60年代的一文中专门加以辨析,并阐明了中国古代经史有别、史先于经的观点。
后世影响编辑
无论从哪方面考量,《春秋》的开创之功都是无可争辩的。
它的编年体例,为史学三大体例之一,“系日月而为次,列时岁以相续”,垂范千秋,继之者众,《资治通鉴》最称出类拔萃。
它的私修性质,打破了官方对史学的垄断,成为诸子百家争鸣的先声。而“二十六史”中,私修者多达三分之一,亦可说是受其引领所致。
它的春秋笔法,姑且不论有多少后人穿凿附会之处,但其本身所彰显的史学精神却勿庸置疑,那便是勇敢无畏,刚直无私。
中国史脉能绵延至今而不断,与孔子当初所赋予的那股坚韧之气息息相关。圣人其萎,而《春秋》不老。爱读《春秋》者,代不乏人。最为民间所熟悉的,恐怕就是三国那位与孔圣人齐名的关圣人关羽了。君不闻一幅对联有云:
孔夫子,关夫子,万世两夫子;
修春秋,读春秋,千古一春秋。
何妨一学关帝,挑灯清夜读《春秋》! [4]
春秋三传编辑
《春秋》因文字过于简质,后人不易理解,所以诠释之作相继出现,对书中的记载进行解释和说明,称之为“传”。其中左丘明《春秋左氏传》,公羊高《春秋公羊传》,谷梁赤《春秋谷梁传》合称《春秋三传》列入儒家经典。
现《春秋》原文一般合编入《左传》作为“经”,《左传》新增内容作为“传”。据《汉书·艺文志》记载,为春秋作传者共5家:
《左传》30卷;
《公羊传》11卷;
《谷梁传》11篇;
《邹氏传》11卷;
《夹氏传》11卷。
春秋谷梁传
春秋谷梁传
其中后两种已经不存。公羊传和谷梁传成书于西汉初年,用当时通行的隶书所写,称为今文。左传有两种,一种出于孔子旧居的墙壁之中,使用秦朝以前的古代字体写的,称为古文;一种是从战国时期的荀卿流传下来的。
“春秋三传”的侧重是有区别的。《谷梁》、《公羊》两传侧重阐发《春秋》中的”微言大义”,《左传》则侧重历史细节的补充。
李学勤先生坦承:“要找‘春秋大义’的话,要找《公羊》、《谷梁》。我个人认为,从一定意义上来说,这一点,今天还必须承认,因为《公羊》、《谷梁》的研究肯定会提供我们对于儒家很多重要观点的认识,这一点可能是《左传》反而做不到的。” [5]
同期史书编辑
《孟子·离娄》说:“《诗》亡然后《春秋》作。晋之《乘》,楚之《梼杌》,鲁之《春秋》,一也。”
当时(战国时期)各诸侯国的史书一般都叫《春秋》,“只是鲁国就叫《春秋》,没有加个专名,而晋国、楚国自己加了专名。······《春秋》就是个共名。” [6]
考古发现编辑
2019年2月报道,从海昏侯墓出土简牍5200余枚,专家释读后发现包括《春秋》在内的儒家经典及其训传。海昏简本《春秋》现存100余枚。西汉流传对《春秋经》进行注释的有《左传》《公羊传》和《谷梁传》。
研究人员根据文字较清晰的20余枚竹简初步判断可知,简文内容多同见于今本《公羊传》和《谷梁传》,也有仅见于《公羊传》者。其内容文句与今本有出入,也有不见于今本者。
海昏简本《春秋》与《春秋公羊传》关系密切,汉代公羊学盛行,甚至在一段时间内作为治国基本原则,海昏简本《春秋》的发现是春秋经传在出土文献中的首次发现,提供了《春秋》经的最早实物,为了解这段历史提供了宝贵的资料。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