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라는 문화적 코드[제3편]
1항, 2항, 3항 그렇게 10항까지 써나간 수학 선생님이 점 딱 찍고 ‘지방’이라 발음하는데 웃겼어요. 왜? 여고생이니까. 고향이 충청도라는 거? 몰랐어요. 허리 디스크 수술이요? 제가 왜 무시를 해요. 마누라도 아닌데. 다시는 ‘시방’ 때문에 웃지 않겠습니다, 칠판 앞에 서서 반성문을 읽어나가는데 뭐시냐 또 웃기지뭐예요. 풋 하고 터지는 웃음에 다닥다닥 잰걸음으로 바삐 오시는 선생님, 부디 서둘지 마세요 했거늘 저만치 앞서 밀려나간 슬리퍼를 어쩌면 좋아요. 좀 빨기라도 하시지 얻어맞아 부어오른 볼때기에 발냄새가 밸까 때 타월로 문지르니 그게 볼터치라 했고, 내 화장의 역사는 그로부터 비롯하게 된 거랍니다.
- 김민정, 「김정미도 아닌데 ‘시방’ 이건 너무 하잖아요」 전문
김민정 시에서 읽은 것은 ‘소녀’라는 텍스트다. 이것은 “모든 텍스트는 그 외부에 의해 접힌 주름 위에 씌어진다”라는 의미의 맥락에서 그것을 둘러싼 외부의 주름이다. 그 외부성은 악의 속물성이다. ‘소녀들’은 속물성에 감싸인 채 숨쉬고 살아간다. 그것은 무엇을 생산하는가? ‘소녀들’은 순수, 순결, 귀여움 따위의 정념들을 생산한다. 진실을 말하자면, 이것은 당위가 낳은 관념이고 실체가 없는 허상이다. ‘소녀들’은 가부장적인 국가와 사회의 보호 관리망에 포섭되는 존재들이다. 시는 여자고등학교의 ‘수학 교실’을 비춘다. 수학 선생의 ‘지방’이라는 말에 꺄르륵 웃음을 터뜨린 소녀는 반성문을 쓰고, 그 반성문을 읽다가 다시 웃음을 터뜨린다. 소녀들의 발랄함은 비억압성의 발현이다. 소녀의 웃음에는 악의가 없지만, 수학선생은 모욕받았다고 느끼고, 여학생을 때린다. 체제 재생산의 억압이 드리워진 교실에서 힘의 비대칭이 폭력 사태를 빚고, 그런 공간이 권력장으로 탈바꿈하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다. ‘선생’은 왜 불같이 화를 내고 반성문을 쓰게 하고 폭력을 행사했을까? “다시는 ‘지방’ 때문에 웃지 않겠습니다”라는 반성은 얼마나 웃기는가! 존재를 모욕한 것은 소녀의 웃음이 아니라 그것에 폭력으로 대응한 ‘선생’이 아닌가, 소녀가 의식했건 하지 못했건 간에 웃음은 권위/권력에 맞서는 일이다. 교사는 불가피하게 더 큰 권력의 대리인이자 수호자, 체제 재생산의 전위(衛衛)다. 웃음은 이 체제 재생산의 권력에 대한 저항이다. ‘소녀들’은 폭력의 흔적을 ‘볼터치’로 바꿔버리면서 폭력의 역사에 대한 응전으로서 화장의 역사가 비롯되었다는 익살스러운 시적 전언을 날린다.
정직함이라는 측면에서 김수영 시의 여성적 버전으로 읽힐 수도 있는 김민정의 시는 박남철의 전략적 해체주의, 김영승의 범한자문화권의 가부장 교양주의와 다르고, 김언희와 황병승의 노골적인 섹스 모티브 시와도 차별화되는 지점에서 오롯하다. 김민정 시의 중심 화자가 ‘소녀들’이라는 점을 주목하자. 김민정이 소환한 ‘소녀들’은 김행숙의 ‘사춘기’ 여자들, 이근화의 ‘소녀들’과 마찬가지로 여자 이전의 여자다. 이들은 아버지의 지붕 밑에서 양육된다는 점, 그리고 이들에게는 약탈하고 짓누르는 남근주의 권력의 억압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닮았다. 시에 펼쳐진 ‘소녀감성’은 발랄, 천진, 솔직함 그 자체다. 김민정이 불러낸 ‘소녀들’은 세상과 만나면서 ‘처음 느끼’는데, 그 느낌의 실체는 추악과 비루함이라는 지점에서 두 시인과 미묘한 차이를 드러낸다. ‘세상’은 여러 ‘선생들’이고, 모욕을 주는 수녀 교장이며, 페니스를 권력의 표상으로 전유하는 ‘폭력’ 남편이나 오빠들이나 남자 친구들로 이루어진다. 시인은 ‘세상’에게 당한 기분 나쁜, 치사한, 비참한 ‘느낌들’을 채집하고 진설한다. 한 패거리로 미시권력을 휘두르며 뺨을 때리고, 모욕하고, 코딱지를 먹이는, 남근주의 ‘세상’의 풍속과 행태에 물든 위선을 까발린다. 그 까발림의 한 항목이 “날 일으켜준다더니 그 손으로 자빠뜨리.는 오빠”(「오빠라는 이름의 오바」)라는 폭로다. 시인은 ‘소녀들’과 ‘세상’ 사이에 엄존하는 적대와 비호감, 불화와 어긋남으로 불거지는 모멸감을 독자에게 일러바친다. 순진, 발랄, 풋풋함은 소녀의 덕목인데, 이것은 짓밟히고, 깨지며, 흩어진다. “피에 젖은 채 돌돌 말린 수십 개의 생리대마다/아름답다, 빨간 리본이 묶여 있었다”(「그녀의 동물은 질겨」) 등등 ‘소녀유적’들은 불태워지거나 가차없이 버려진다. 이 버려짐의 방식으로 소녀들은 토벌당한다. 용케도 살아남은 것은 뻔뻔한 여자들, 생리를 하고 변비를 앓는 서른 살의 여자들이다. 김민정은 서른 여자의 시점에서 자신들이 거쳐온 ‘소녀들’을 소환한다. 그 시적 어조는 신랄하고 뾰족하고 그로테스크하면서도, 유머러스하고 천진하고 발랄하다.
우리는 김민정의 시들을 통해 ‘소녀들’과 만난다. 이 젊은 시인은 성적 금기의 해체라는 맥락에서 ‘소녀들’을 호명한다. 그동안 ‘소녀’는 문화적 코드를 갖지 못하고 소외된 채 과보호될 수밖에 없는 나약한 존재, 그저 대중매체로 유포되는 생리대나 초콜릿 광고 속에서 ‘순결성’의 기호로나 소비되는 존재, 정념의 지층 외부에서 욕망 없이 떠도는 비주체였지만, 이제 ‘소녀들’은 어른과 아이, 이것과 저것, 기표와 기의 따위의 이항적 대립을 뚫고 나아가는 탈주선의 다른 이름이다. 그것은 질료적 존재가 아니라 이항적 대립을 삼켜버리는 속도의 별칭이다. 소녀들은 탈주선을 타고 달아난다. 소녀들은 가부장제 사회라는 지층으로 영토화되는 것을 거부하면서 탈영토화한다. 그걸 ‘일탈’이라고 부르든 ‘반항’이라고 부르든 상관없다. 그 탈주선의 현실태는 김민정의 「소녀닷컴」이란 시에 따르면, 웨이브 펌의 가발 걸치기, 진하게 화장하기, 초미니스커트 착용하기 따위다. 이것을 ‘어른 흉내내기’라는 의미로 단순화해서는 안 된다. ‘소녀들’은 기성의 가치체계에 지층화되어버린 ‘어른 세계’를 모방하거나 재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그 너머로 가고자 한다. 지층화된 것들을 흔들고 교란하는 욕망이라는 점에서 이것은 새로운 지도 그리기'다. 다시 말해 억압에 대한 저항이자 금기에 대한 의도적 위반이다. 프랑스 철학자들의 용어를 빌리자면 “코드의 포획이고, 코드의 잉여가치”를 체화해내는 것이다. 이 ‘소녀들’은 경계와 불균형을 품은 개별자인데, 이 불균형에 대해 한 문학평론가는 이렇게 말한다. “이 불균형은 아이와 어른, 순진과 유구(有垢), 초짜와 계명 워리 사이의 긴장이다.” ‘소녀들’은 이질적인 가치항의 어느 한쪽에 소속되기를 거부한다. ‘소녀들’은 ‘뿌리줄기’같이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어느 마디에서나 뻗어나가고, 흐르는 물을 가둔 “두 둑을 무너뜨리고 중간에서 속도를 내는 개울”이다. ‘소녀들’이 곧 리좀이다. “리좀은 출발점이나 끝이 아니다. 그것은 언제나 중간에 있으며, 사물들 사이에 있는 간(間)존재 간주곡이다.”(질 들뢰즈, 펠릭스 가타리, 「천 개의 고원」) 김민정 시에서 ‘소녀들’은 항상 ‘중간’에 있고, ‘간주곡’으로 제 존재를 드러낸다.
장석주 「은유의 힘」
맹태영 옮겨 적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