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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입니까? 본문 24 - 25절을 보시면, 자기 백성을 돌보시는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돌보다”는 단어의 히브리어는 “파카드”입니다. 그 의미는, “세다, 계수하다, 돌보다, 시찰 혹은 방문하다, 임명하다”입니다. 그래서, 주로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감독하고 돌아본다는 의미로, 아랫사람의 환경에 중요한 변화가 일어나도록 조처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고통 가운데 있을 때, 그들을 방관하지 않고, 그들에게 찾아오셨고, 돌보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하이델베르크 신앙문답 제 27문을 보시면, “하나님의 섭리란 무엇입니까?”라고 합니다. 이에 대한 답은, “섭리란 하나님의 전능하고 언제 어디서나 미치는 능력으로, 하나님께서 마치 자신의 손으로 하듯이, 하늘과 땅과 모든 피조물을 여전히 보존하고 다스리시는 것입니다”입니다. 이스라엘은 출애굽하여, 가나안에 들어가기까지 40년이라는 세월을 광야에서 배회했습니다. 이 때가 이스라엘에게 가장 매우 힘들고 어려운 시기였습니다. 하지만, 긍정적으로 보면, 이 때야 말로, 하나님의 은혜가 가장 충만하게 임했던 시기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이때, 이스라엘에게 하늘의 양식인 “만나”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광야에서 그들이 원하는 고기와 산해진미를 먹은 것은 아니었지만, 세상에서는 먹지도 볼 수도 없는 하늘의 양식인 만나를 먹으며 살아간 것입니다. 또, 40년 동안 광야를 배회했지만, 옷이 해어지지 않았고, 그들의 발이 부르트지도 않았습니다. 이 모두가 하나님께서 직접, 그들을 먹이고 입히며 그들의 발걸음을 인도하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세상에서 이렇게, 우리를 돌보고 인도해 줄 사람은 그 누구도 없습니다. 하지만, 시 121: 4에서의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이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는 고백처럼,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돌보고 인도함에 있어서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은, 성도인 우리를 찾아오셔서 돌보시고 살피십니다. 본문의 요셉은 이러한 하나님을 믿고 의지한 삶을 살았고, 애굽의 총리로 지내면서도, 그의 허물이 단 한 가지도 기록되지 않았던, 성경에 기록된 인물 가운데, 가장 성결하고 지혜롭게 살았습니다. 그러한 요셉이, 본문에서 후손들에게 강조하는 것은, “하나님의 돌보심”입니다. 이것은 또한, 하나님께서 자신을 비롯하여, 후손들을 돌보신다는 것에 대한 확신이요, 소망이었습니다. 요셉은 항상 하나님을 인정하고 높이며, 증거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출 13: 19절을 보시면, 요셉은 후손들에게 “하나님이 반드시 너희를 찾아오시리니”라는 하나님의 돌보심에 대한 소망을 심어주었습니다. 이러한 고백을 시 8: 4에서 다윗도 합니다. 보시면,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라고 합니다. 또, 렘 15: 15에서는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오니 원하건대 주는 나를 기억하시며 돌보시사 나를 박해하는 자에게 보복하시고 주의 오래 참으심으로 말미암아 나로 멸망하지 아니하게 하옵시며 주를 위하여 내가 부끄러움 당하는 줄을 아시옵소서”라고 합니다. 그리고, 벧전 5: 7에서는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된 우리도 삶 속에서 힘들 때, “주께서 나를 돌보신다”는 사실을 잊지 말고 언제나 우리를 돌보시는 하나님을 따라 믿음으로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22 - 23절을 보시면, “요셉이 그의 아버지의 가족과 함께 애굽에 거주하여 백십 세를 살며 에브라임의 자손 삼대를 보았으며 므낫세의 아들 마길의 아들들도 요셉의 슬하에서 양육되었더라”고 합니다. 성도는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요셉은 진실된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지극한 사랑을 받았지만, 형제들에 의해 애굽의 노예로 팔리는 고통과 배신 그리고, 억울한 누명으로 인한 감옥생활에도 불구하고 한결같이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본문 22절을 보시면, “요셉이 그의 아버지의 가족과 함께 애굽에 거주하여 백십 세를 살며”라고 합니다. 그는 야곱이 죽은 후 56년을 더 살았습니다. 이것은, 그의 조상인 아브라함, 이삭과 아버지인 야곱에 비해 매우 짧은 삶이었지만, 요셉의 생애는,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그의 이름 그대로, 더해진 삶이었습니다. 또, 본문 23절에 의하면, 그는 이 세상에서 고손, 즉 손자의 손자인 현손까지 보는 기쁨을 누렸으며, 그들이 “요셉의 슬하에서 양육되었더라”고 합니다. 이는, “요셉의 무릎 위에서 출생하였다”라는 의미로서, 그들이 요셉의 그늘 밑에서 행복을 누렸다는 겁니다. 창 37: 2에 의하면, 17세에 꿈을 꾸고 그로인해 애굽으로 팔려가 그 곳에서 약 90년을 살았으므로, 거의 평생을 애굽에서 살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요셉은 애굽에 거주하며 아버지와 형제들과 함께 함으로, 애굽에서 권력을 쥔 자로 있었지만, 고센에 있는 그의 형제들과 가까이 하면서 지냈습니다. 요셉은 이렇게, 일생동안 억울함과 고난 속에서 하나님과 동행하기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랬기에, 애굽의 총리로 영화를 누렸고, 고손자까지 보는 귀한 축복을 누렸던 겁니다. 이것이, 요셉이 살아 계신 하나님과 동행하며, 믿음으로 살았음의 증거입니다. 18세기 프랑스의 계몽주의 철학자 “볼테르”는 무신론자였습니다. 그는, 프랑스의 대표적 문화상품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았습니다. 그랬기에, 프랑스의 극작가이자 소설가인 “빅토르 위고”는, “이탈리아에는 르네상스가 있었고, 독일에 종교 개혁이 있었다면, 프랑스에는 볼테르가 있었다”라고 했습니다. 이런 극찬을 받은 볼테르는, “앞으로 50년 안에 기독교를 완전히 파멸시키고 말겠습니다. 그리고, 100년이 지나면 이 땅에 더 이상 기독교도, 성경도 존재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들도 기독교를 믿는 어리석은 짓은 더 이상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삶의 최후의 순간이 되자, 두려워하며 의사에게 “부디 나를 6개월만 더 살게 해 주십시오. 그러면 내 재산의 절반을 당신에게 주겠습니다”라며 애원했지만, 의사는, “죄송합니다. 내게는 그럴 능력이 없습니다. 인간의 생명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6시간도 채 남지 않은 것 같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가 죽은 후, 그의 집은 스위스의 제네바 성경공회에서 매입하여, 인쇄한 성경을 보관하는 창고로 사용하였습니다. 창 15: 6을 보시면,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라고 합니다. 아브람은 하나님을 믿고 또 그 말씀을 믿었습니다. 현실적으로 자녀를 가질 수 없었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자녀를 가질 수 있다고 하기에 그는 믿었던 겁니다. 하나님은 말씀대로,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주었고, 또, 하나님에 대한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셨습니다. 성경에서의 “의”는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의”가 아니라, 하나님을 믿고, 나사렛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겁니다. 이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신뢰하는 겁니다. 그러기에, 믿음은 성도로 살아감의 증거입니다. 성도된 우리는 이와 같은 믿음으로, 그의 백성을 돌보시는 하나님을 굳게 믿고 의지하여, 요셉과 같이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 가운데 거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24 - 25절을 보시면, “요셉이 그의 형제들에게 이르되 나는 죽을 것이나 하나님이 당신들을 돌보시고 당신들을 이 땅에서 인도하여 내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하시리라 하고 요셉이 또 이스라엘 자손에게 맹세시켜 이르기를 하나님이 반드시 당신들을 돌보시리니 당신들은 여기서 내 해골을 메고 올라가겠다 하라 하였더라”고 합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성취됩니다.
요셉이 애굽의 총리로 지내다가 애굽에서 죽지만, 그는 하나님께서 그의 후손들을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약속의 땅인 가나안으로 인도하실 것을 확신했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후손들에게 훗날 자신의 해골을 메고 약속의 땅으로 올라가라고 했습니다. 요셉이 이렇게 말한 것은, 요셉은 철저하게 하나님을 믿었고, 하나님의 말씀이 반드시 성취된다는 것을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의 후손들을 애굽에서 이끌어 내시는 것에 대해, 본문 24절에서, “당신들을 돌보시고 당신들을 이 땅에서 인도하여 내사”라고 합니다. 이를 새번역으로 보시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너희를 돌보시고, 너희를 이 땅에서 인도하여 내셔서”라고 합니다. 여기서, “돌보시고”는, “그가 정녕 방문하여 조사하리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은 하나님께서 반드시 이스라엘에게 오셔서 그들의 형편을 조사하듯 주밀하게 살피고 돌보신다는 겁니다. 이것은, 마치 노아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세상에 커다란 홍수가 있을 것임을 확신한 것과 똑같은 겁니다. 이것이, 요셉의 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에 대해, 비록, 현실적으로 믿기 어렵다 하여도, 하나님께서 말씀하셨기에 그것에 대해 확신을 하였던 겁니다. 요셉의 이러한 확신처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약속의 땅으로 이스라엘을 인도하실 때, 출 1: 6을 보면, “요셉과 그의 모든 형제와 그 시대의 사람은 다 죽었고”라고 합니다. 요셉을 아는 사람들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분의 약속을 신실하게 이루셨습니다. 그래서 요셉은, 하나님이 후손들을 돌보는 그 일에 대해, 일일히 찾아보시며, 보살펴 주실 것임을 확신했던 겁니다. 그러기에, 민 23: 19절을 보시면,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 인생이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하지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하지 않으시랴”라고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성취됩니다. 얼마 있으면, 성탄절입니다. 성탄은 하나님의 약속과 예언의 성취의 증거입니다. 마 1: 22을 보시면, “이 모든 일이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라고 합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성취되는 것을 경험하고 확신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요셉의 확신이 있자마자, 출애굽이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출애굽이 있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때가 있었고, 또, 애굽에서의 고통이 있었습니다. 그 속에서, 요셉의 후손들은 요셉과 같이, 하나님 말씀의 성취를 믿고, 인내함으로 기다렸던 겁니다. 그러기에, 성도의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기다림과 확신으로 표현됩니다. 그러므로, 영원하신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성취된다는 것을 확신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돌보심을 받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26절을 보시면, “요셉이 백십 세에 죽으매 그들이 그의 몸에 향 재료를 넣고 애굽에서 입관하였더라”고 합니다. 성도는 영원하신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야 합니다.
요셉의 일생을 한 줄로 요약하면, 하나님께 삶의 소망을 두었다는 겁니다. 이렇게, 오직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던 요셉은 더 이상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일생동안 함께 하셨던 하나님, 요셉이 확신했던 하나님의 돌보심은, 요셉이 세상을 떠난 이후에도 계속 되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영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하신 것을 이루셨음을 증거하는 것이, 본서에 이어 이어지는 출애굽기의 내용입니다. 아담이후로 사람이 몇 년을 살든, 사람들은 세상에 왔다가 세상을 떠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떠나지도 않고, 하나님의 돌보심은 중단되지도 않습니다. 창세기에서 신실하심으로 그의 백성들을 돌보신 하나님께서는, 이후 출애굽기에서도, 사사기에서도 또, 왕정시대에서도 동일하게 신실하심으로 그의 백성들을 돌보셨습니다. 그리고, 구약에서 뿐 아니라, 신약을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도 하나님은 신실하심으로 영원토록 성도된 우리를 돌보고 계십니다. 그러기에, 성도된 우리의 소망은 바로 이러한 하나님께 있어야 합니다. 요셉이 하나님을 바라보고 살았듯, 우리도 요셉처럼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살아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 주변에서 발생하는 일들이나 우리의 삶 속에서 일어나는 행복과 고통, 기쁨과 슬픔, 억울함을 하나님의 편에서 바라보는 겁니다. 곧, 하나님께서 왜 나로 하여금, 이 일을 겪게 하시는 지를 내가 중심이 되어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중심이 되어 바라보는 겁니다. “캄캄한 항아리 속에서 쥐들이 얼마나 견딜 수 있을까?”라며, 과학자들이 실험을 했습니다. 그리고는, 캄캄한 항아리 속에 쥐를 넣었더니 3분을 견디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반대로, 캄캄한 항아리 속에 쥐를 넣고, 한줄기 빛을 비추었더니, 쥐가 36시간동안 살아있었습니다. 캄캄한 항아리 속의 쥐가 3분을 견디지 못하고 죽은 것은, 체력이 떨어져 죽은 것이 아니라 “절망”으로 죽었던 겁니다. 하지만, 한줄기 빛을 비춘 항아리에서 36시간을 살 수 있었던 것은, “소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독일의 마르크스 철학자 에른스트 블로흐는 “소망은 모든 인간의 행위 속에 들어 있는 하나님의 힘이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소망이시며, 모든 인류의 소망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자에게 복이 있습니다. 시 146: 5 - 7을 보시면, “야곱의 하나님을 자기의 도움으로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자기의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 여호와는 천지와 바다와 그 중의 만물을 지으시며 영원히 진실함을 지키시며 억눌린 사람들을 위해 정의로 심판하시며 주린 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시는 이시로다 여호와께서는 갇힌 자들에게 자유를 주시는도다”라고 합니다. 여러분, 성도된 우리는, 어떤 고난이든, 절망적이든, 힘들고 어렵든 그 속에서,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하나님의 돌보심을 기대하며, 요셉과 같이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살아야 합니다. 성도된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돌보심 가운데 있음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소망을 이루어주시는 은혜가 우리의 삶 가운데 가득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