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연주곡 20곡 1집♣
호롱불
- 김상훈
석유를 가득히 부은 등잔은
밤이 깊도록 홰가 났다
끄을음을 까--맣게 들어마시며
노인들의 이야기는 죽구 싶다는 말뿐이다
쓸만한 젊은 것은 잡혀 가고
기운 센 아이들 노름판으로 가고
애당초 누구를 위한 농사냐고
이박사(李博士)의 이름을 잊으려 애썼다.
곳집에 도둑이 들었다는
흉한 소문이 대소롭지 않다
이백 석이 넘어 쌓여 있는 곡식이
그들의 아들이 굶어 죽는 데는
아무 소용이 없었던 까닭이다.
암닭이 알을 낳지 않고
술집이 또 하나 늘었고
손주 며느리 낙태를 했다고
등잔에 하소연해보는 집집마다의 늙은이
잠들면 악한 꿈을 꾸겠기에
짚신을 삼아 팔아서라도
부지런히 석유만을 사왔다.
(시집 대열, 1947.5)
* 홰가 나다 : 불이 타오르다.
* 하소 : 하소연의 준말.
김상훈(金尙勳)
1919년 경상남도 거창 출생
중동중학, 연희전문학교 문과 졸업
1946년 김광현(金光現), 이병철(李秉哲), 박산운(朴山雲), 유진오(兪鎭五)등과 전위시
인집을 간행, 해방 직후 조선문학가동맹에 가담
6․25 당시 월북
시집 : 전위(前衛)시인집(1946), 대열(隊列)(1947), 가족(1948)
<감상의 길잡이>
이 시는 해방공간을 살아가는 고단한 민중의 삶을 노인들의 대화를 듣고 있는 시적 화자
의 시점에서 객관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는 작품이다.
노인들은 ‘석유를 그득히 부은 등잔’ 아래서 밤이 깊도록 이야기를 나누지만, 모두 ‘죽구
싶다는 말 뿐이다’. ‘쓸만한 젊은 것은 잡혀가고’ ‘기운 센 아이들 노름판으로 가고’에서
보듯, 그들의 삶을 이끌어 줄 진취적인 힘은 이미 없다. 토지개혁은 이루어지지 않아 소
작농의 신세는 해방 이전과 마찬가지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애당초 누구를 위한 농사냐
고’ 하면서 ‘이박사의 이름을 잊으려 애’쓴다. ‘곳집에 도적이 들었다는 / 흉한 소문이 대
수롭지 않’은 현실, 곳간에는 곡식이 쌓여 있지만 굶어 죽을 수밖에 없는 역설적 현실, ‘
암탉이 알을 낳지 않고 / 술집이 또 하나 늘었고 / 손주 며느리 낙태를’ 하는 비극적 현실
하에 노인들은 잠을 이룰 수 없다. ‘잠들면 악한 꿈을 꾸겠기에 / 짚신을 삼아 팔아서라도
/ 부지런히 석유만은 사’ 와야 하는 모순적인 현실을 통해 시인은 은연중 자신의 정치적
색채를 드러낸다. 그것은 ‘이박사’로 지칭된 당대 우파적 정치 세력에 대한 비난이자, ‘쓸
만한 젊은 것은 잡혀’갈 수밖에 없는 미군정 체제에 대한 비판이다.
이처럼 이 시는 매우 간략한 서술과 역설적 어법으로 일제 잔재․봉건 잔재의 청산이 이루
어지지 못한 데에서 기인하는 민중의 고단한 삶을 효과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