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심 / 최미숙
어느새 달력 다섯 장을 넘겼다. 벌써 그늘이 기분 좋은 계절이다. 집에 있는 날이 많다 보니 화장하고 옷 갖춰 입을 일이 별로 없다. 옷장에 줄줄이 걸린 철 지난 옷이 빛을 잃었다. 거울을 보며 얼굴에 주름이 하나둘 늘고 탄력이 없어진 피부를 보니 그새 후딱 가 버린 시간이 아쉽다. 그래도 이젠 한가한 생활이 그런대로 익숙하고 즐길 만하다. 지나간 5개월 동안 괜찮은 시간을 보냈는지 물었다.
글을 쓴 지도 어느덧 8학기째다. 가끔 한 주 건너뛰고 싶은 유혹도 있었지만 그동안 나름 지켜 왔던 일과를 무너뜨리고 싶지 않아 꾸역꾸역 썼다. 그래도 어쨌든 이번 학기에만도 열두 편을 완성했다. 스스로가 기특하면서도 능력의 한계를 느낀다. 침체기에 빠진 것은 아닌지 싶었다. 4년째인 올해 가장 심하다. 글에 깊이가 없고 언저리만 맴돌고 있는 것 같아 답답했고 글을 내놓을 자신이 없다. 많이 알수록 두렵다더니 그 말이 맞았다.
이번 주는 그나마 시간이 많았는데도 손도 대지 못한 채 무거운 마음으로 보냈다. 성격상 무슨 일이든, 글쓰기도 웬만해선 미루지 않고 후딱후딱 해치우는데 주말이 돼서야 겨우 노트북을 열었다. 머릿속은 깜깜한데 하필 허리까지 말썽이다. 보통은 며칠 있다 좋아지더니 이번에는 심상치 않다. 동생이 보내준 약을 먹었다. 오래 앉아 있지를 못하고 누웠다 일어나다를 반복했다.
그런데도 선뜻 팽개치지 못하고 다시 매달린다. 그렇게 또 하루를 보냈다. 그동안 글을 쓰면서 비로소 나를 발견하고 생산적인 무언가를 하고 있다는 희열을 알아 버렸다.
이른 새벽에 눈을 떴다. 일어나 거실 화단으로 향한다. 빽빽하게 자란 식물 사이로 작년에 심었던 낮 달맞이가 분홍 꽃을 달고 여기저기서 고개를 내민다. 씨앗이 떨어졌는지 식구가 늘었다. 여리디여린 줄기가 늘씬하다 못해 휘어지기까지 해 동정심이 인다. 내 눈 즐기자고 데리고 온 게 미안할 뿐이다. 어떻든 간에 그래도 지금 내 앞에 있다. 며칠째 글 한 편 완성하지 못해 끙끙대며 힘겨워하던 나를 무장 해제 시킨 존재다.
식물을 보며 글 쓰기와 맞닿아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눈곱만 한 씨앗이 어두운 땅속에서 해내는 일보다 경이로운 예술이 또 있을까? 그 조그마한 몸에서 싹을 틔우고 실처럼 가는 뿌리 끝을 땅에 댄 채 몸을 지탱하고 있는 것을 볼 때면 경이로워서 힘들다는 말을 감히 할 수가 없다.
스마트폰으로 열심히 무언가를 찾던 남편이 부른다. 혹시 글 쓰는 데 도움이 될지 모른다며 여러 장소를 검색해 시간 날 때마다 한 곳 한 곳 가자고 한다. 하루는 함안 강나루 생태공원, 또 어느 날은 순천 와온 가야 정원에 들렀다. 넓은 밭에 형형색색 핀 작약꽃과 푸른 청보리밭이 눈길을 끈다. 남편은 사진사를 자처하며 부지런히 스마트폰을 들이댄다. 조그만 배려가 고맙다.
요즘 들어 글쓰기를 쉴까 말까 갈등의 연속이었다. 그러다 한 번 손을 놓으면 다시 잡지 않을까 봐 마음을 다잡았다. 유명 작가가 될 것도 아니니 그냥 즐기면서 하려는데 그게 또 쉽지 않다. 잘 쓰고 싶다는 욕심을 버리고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자는 결론에 이른다.
아침부터 홀짝이던 커피가 바닥을 드러냈다. 아픈 허리 때문에 노트북을 들고 자리를 옮겼다. 다시 한 잔을 탔다. 향과 함께 뜨거운 물이 목젖을 타고 내려간다. 마시는 동안 무슨 생각이든 채워지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