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의 고향을 찾아서
임미숙
내 나이 여섯 살이던 무더운 어느 여름날, 군인 장교셨던 아버지의 전근으로 우리 가족은 이사하게 되었다. 그 날 따라 계속 비가 주룩주룩 내렸다. 내 책임으로 맡겨진 두리반 상으로 우산을 대신하여 비를 피하기도 하면서 전라도 광주에서 머나먼 인제군에 있는 용대리까지 오게 된 것이다.
용대리 생활은 군인 관사에서 시작하였다. 관사가 나란히 이웃하고 있어서 그 쪽 군인아저씨네 가족과 친하게 지냈다. 나와 동갑으로 같은 반인, 별명이 ‘만두’인 남자친구와는 정말 많이도 싸웠다. 학교가 놀러 다니는 곳으로 생각하고 있던 어린 나는 공부가 많이 뒤처지고 숙제도 자주 안 해가서 선생님께 벌을 설 때가 있었는데 이런 일들을 고스란히 우리 어머니께 고자질을 하여 아주 얄미웠다. 만두도 지금쯤 어느 하늘 아래에서 한 가정의 가장으로 살고 있겠지?
관사는 동네 끝자락으로 높은 산 바로 밑에 있었는데 비만 오면 배가 빨간 조그만한 개구리들이 마당 한 가득 나와서 개굴개굴 울어 제꼈다. 나는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만져봤다. 이상한 냄새와 함께 고춧가루를 만지는 것같이 매웠다. 다시는 만지고 싶지 않았다. 관사에서 내려다 보이는 이웃집은 어린 내가 보기에도 너무 가난했다. 돌담으로 둘러싸여 있는 방 한 칸의 오두막이었는데 부엌에서 무엇을 하는지 다 알 수가 있었다. 그 집은 주식이 감자와 옥수수였다. 큰 무쇠솥에서 나오는 무럭무럭 김 오른 옥수수와 감자가 맛있어 보여서 동생과 함께 담쟁이덩쿨로 가득 덮힌 돌담에 기대어 내려다보면서 침을 꼴깍꼴깍 삼켰다. 돌담집 아주머니께서는 우리가 안 돼 보였는지 옥수수를 한 자루씩 주셨다. 난 얻어 먹은 옥수수가 너무 맛있어서 어머니를 졸랐다. 생각다 못해 어머니께서는 그 집에 쌀을 갖다 주고 옥수수를 바꾸어 오셨고 다음 해에는 관사 뒷마당에 옥수수를 많이 심으셔서 실컷 먹을 수 있게 해 주셨다. 큼직하고 쫄깃쫄깃한 그 때 먹은 옥수수를 생각하니 지금도 입에 침이 고인다.
깊은 산 속에 자리잡은 그 마을은 자연 그 자체가 우리들의 놀이터였다. 친구들과 장화를 신고 뒷산에 가서 산딸기를 따고 이름 모를 열매들도 많았는데 대부분 우리들의 먹거리였다. 친구들은 산과 친해서 어디로 가면 어떤 열매가 열려 있고 이것은 먹을 수 있고 저것은 먹어서는 안 된다고 자세히 가르쳐 주었다. 그 친구들이 너무 똑똑해 보였고 부러운 생각까지 들었다.
용대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 먼 길을 친구들과 함께 다녔다. 등교할 때는 아버지께서 트럭 한 대를 보내 주셔서 우리 동네 초등학생들이 모두 타고 갔다. 나는 친한 친구인 마리아와 운전석 옆에 탔다. 다른 학생들은 군인 트럭 뒤에 타고 갔다. 등굣길에는 내가 대장이나 마찬가지여서 내게 서운하게 했던 아이들은 못 타게 하였다. 그런데 학교에 와서 차에서 내려 보면 내가 못 타게 했던 아이들도 모두 타고 왔다. 내가 그들에게 기세등등하게 대해서 그들은 내가 참 얄미웠을 것 같다. 그렇다고 내게 대들면 또 트럭 못 타게 할까봐서 아무 말도 못하고 눈치를 봤을 것이다.
많은 세월이 흘러 항상 마음 속에 그리워하던 용대리를 가족과 함께 찾아가게 된 때는 큰 딸이 초등학교 1학년 때었다. 내가 입학했던 용대초등학교를 똑같은 나이의 딸을 데리고 갔을 때 가슴이 뭉클하면서 눈시울이 붉어졌다. 학교의 건물들은 모두 재건축이 되어서 옛날 모습은 눈 씻고 봐도 찾아볼 수 없었고 오직 학교 뒷산만 옛 모습 그대로였다. 산을 바라보니 우리 반 친구들과 식물채집을 하려고 올라갈 때 자꾸 굴러내리는 자갈 때문에 발이 미끄러져서 올라가기 힘들었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뒷산 어디에 어린 나의 흔적이 조금이라도 남아있나 찾아보려고 눈길을 이리저리 돌렸다. 그 날 따라 이름도 모르는 선생님과 친구들이 무척 그리웠다. 나는 신기하게 초등학교 일학년 선생님 성함만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
용대리는 부근에 백담사가 있다. 내가 살던 어린 시절에는 존재 자체를 몰랐다. 전두환 전 대통령이 가게 되면서 세상에 더 알려지게 되었는데 나도 그 때서야 학교 가까이에 백담사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백담사는 삼국시대에 자장율사에 의해 세워진 고찰로 님의 침묵으로 유명한 한용운이 출가한 절이다. 하지만 백담사에 온 많은 사람들은 전두환 전 대통령이 머물렀던 곳에 가장 관심을 갖고 둘러보는 어처구니없는 현실이 되었다. 3년 전 가족 봄나들이로 백담사를 가보게 되었는데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맘 속으로 ‘어디 어디?’ 하면서 제일 먼저 그 곳을 찾아보게 되더라. 옛 고승들의 절터를 잡는 안목에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백담사도 다른 절들과 마찬가지로 천혜의 비경 속에 자리 잡고 있었다. 특히 앞을 흐르고 있는 계곡 물은 너무 맑아서 절로 뛰어가서 발을 담그게 한다. 바닥의 작은 조약돌까지 보였다.
우리는 백담사를 나오면서 어린 시절 살았던 군인관사도 찾아가 보기로 했다. 지금도 있을까하는 의구심을 품으면서 옛 기억을 더듬으며 차를 몰아 마을로 들어갔다. 차를 마을 공터에 세워 두고 얼마 쯤 걸어 가니 산 아래 허름하고 조그만한 집 두 채가 나타났다. 처음에는 이게 맞나 의심할 정도로 내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던 당당한 관사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건물도 나이를 먹으면 이런 모습으로 변하는지 아니면 어른이 되어서 큰 빌딩들을 많이 보면서 내 눈 높이가 커졌는지 너무 초라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몇 십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 자리에 있어 준 것만 해도 고마웠다. 많은 생각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다시 돌아가고 싶어도 돌아갈 수 없는 그 시절이 가슴 시리게 그리웠다. 난 어린 시절 2년 동안 살았던 관사 앞에서 약속했다.
“가까운 시일 내에 꼭 다시 올게. 그 때까지 이 자리에 있어줘.”
내 마음 속의 영원한 고향은 용대리이다. 지금도 용대리라는 이름이 떠오르기만 해도 나는 봄날 아지랑이가 아른거리는 따스한 들판을 내달리는 두근거림이 있다. 너무도 아름다운 추억들이 송알송알 맺혀 있는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절이었다.
2014년 5월 12일
첫댓글 나의 어린 시절, 서울 매동 초등학교 다닐 때 생각이 나네요.
추억은 늘 아름답지만 어릴 때의 추억은 더욱 애잔하고 감회가 깊어요.
재미있게 잘 읽었어요.
계속 좋은 글 발표하기 바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