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팟캐스트 ‘책걸상’에서 진행자들이 강력추천했던 책. 일부러 기분좋은 여건에서 읽으려고 군산 여행가방에까지 넣어갔다. 막상 읽고나니, 크리스마스 시즌 용 로맨틱 코메디 영화 같다. 괴팍한 캐릭터가 변해가는 모습, 그 주변에 얽힌 따뜻한 사람들, 유머러스한 대사, 예정된 결말, 그러나 피할 수 없는 눈물. 아쉽게도 문학적 깊이가 있는 작품은 아니었다. (1달에 1권 겨우 읽는 자로서 흡족하지 않은 책을 읽으면 쫌 억울하다.)
그럼에도 재치있는 유머가 시종일관 흐르고(이런 유머를 대화에서 주거니 받거니 하려면 두뇌 회전이 얼마나 빨라야 할까 부러울 정도) 사건은 전형적이지만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다소 놀라운 반전도 있다. 죽음, 폭로, 오래 알고 지내던 사람 간의 결혼, 이 사건들마저 클리셰에서 자유롭지 못하지만, 그때문인지 술술 읽힌다.
서점이 배경이라 책과 관련된 다종다양한 소재와 사건이 전개되고, 첫 작품 외에 이렇다할 성공작이 없는 작가 다니엘의 방만함과 주인공 에이제이의 편협한 독서취향은 지적인 사람들에 대한 풍자이기도 하다.
특히, 섬처럼 고립돼 있던 한 남자가 서점이라는 공간을 통해 아이, 이웃, 그리고 다시 만난 사람과 연결돼 버린다. 그의 인간관계가 점점 확장되어 가는 전체적린 흐름은 성인을 위한 성장소설을 연상시킨달까. 삶의 희로애락이 책 한 권에 강물처럼 흐른다는 사실이 멋드러진다.
이야기에 매듭을 지어주는 각 챕터의 제목(우리에겐 낯선, 그러나 주인공 에이제이가 애호하는 미국 단편소설들의 제목)은 작가의 지적유희로 각 장의 중심소재를 비유한다.
1부.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 양 : 엘리스 섬에 가는 어밀리아
리츠칼른 호텔만한 다이아몬드 : 태멀레인 희귀본 분실
로링 캠프의 행운 : 마야를 맡게 되다
이 세상 같은 기분 : 마야를 키우는 일상
좋은 사람은 찾기 힘들다 : 어밀리아와 재회 (마야 유치원 입학 전), 무용학원장 올렌스카, 어밀리아가 사는 프로비던스에 방문
캘러버레서 카운티의 명물 뜀뛰는 개구리 : 리언 프리드먼의 북토크 파티, 에이제이의 결혼
서머 드레스의 여자들 : 이즈메이의 자살 시도, 귀가길 차 안에서 말다툼, 마야 출생의 비밀
2부
아버지와의 대화 : 마야의 14세 ‘창의적 글쓰기 수업’
바나나피시를 위한 완벽한 날 : 마야의 단편 ‘바닷가 나들이’,
고자질하는 심장 : '대장의 선택 북클럽', 이즈메이의 데이트
무쇠머리 : 할머니 등장, 전자책 단말기, 암 선고, 태멀레인의 행방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 : 태멀레인 낙찰, 수술 이후
서적상 : 새로운 서점 주인
(기껏 제목에 맞는 사건들로 요약해놨지만, 다음에 보면 무슨 말인지 거의 기억이 안 날 듯;;)
p.114
사람들은 정치와 신, 사랑에 대해 지루한 거짓말을 늘어놓지. 어떤 사람에 관해 알아야 할 모든 것은 한 가지만 물어보면 알 수 있어. ’가장 좋아하는 책은 무엇입니까?'
p.138
춤은 신체적으로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중요해요. 마야의 성장이 위축되기를 바라는 건 아니겠지요.
p.139.
눈이 내리기 시작하면서 마야의 수염에 눈송이가 걸렸다. 사진을 찍고 싶었지만, 사진을 찍기 위해 멈춰서고 싶진 않았다.
p.196.
사랑받지 못하리라는 은밀한 두려움이 우리를 고립시킨다. 하지만 고립이야말로 사랑받지 못하리라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유일한 이유다. 언젠가, 언제일지 모르는 어느 날, 그가 혹은 그녀가 거기에 있으리라. 당신은 사랑받을 것이다. 생애 처음으로, 결코 혼자가 아니기에. 혼자가 아니기를 선택했기에.
p.211
빛은, 그녀의 두 눈이 휘둥그레질 만큼 밝다.
경적은, 나른하고 너무 늦다.
금속은 휴지처럼 구겨진다.
몸은 고통스럽지 않다. 이미 어딘가 다른 곳으로 날아갔으므로.
그래, 대니얼은 충돌 직후, 죽음 직전에 생각했다. 딱 그거군. 문장은 그가 생각했던 것만큼 나쁘지 않았다.
p. 231
P.S.네 단편에서 가장 발전 가능성이 엿보이는 부분은 이야기에서 공감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야. 사람들은 왜 그런 행동을 하는가? 위대한 글쓰기의 특징이지.
(이 부분은 우리가 소설을 왜 읽고 있는가를 정확하게 묘파한다. 공감이 가지 않는 소설이라면 적어도 그 독자에겐 실패작인 셈.)
p. 300
방사선 때문에 면역체계가 무너져 면회가 허락되지 않았다. 니콜의 사망 이후 기간까지 포함해서, 이토록 외로웠던 적이 없었다... 마야 이전의 삶, 어밀리아 이전의 삶이 이랬다. 인간은 홀로 된 섬이 아니다. 적어도, 인간은 홀로 된 섬으로 있는 게 최상은 아니다.
p.303~304
죽는 건 겁나지 않아. 그는 생각한다. 하지만, 내 지금 상태는 약간 두려워. 날마다 내 존재는 조금씩 줄어들어. 오늘의 나는 말이 결여된 생각이지. 내일의 나는 생각이 결여된 몸뚱이가 될 거야. 그렇게 되는 거지. 하지만 마야, 지금 네가 여기 있으니 나도 여기 있는 게 기뻐. 책과 말이 없어도 말이야. 내 정신이 없어도 대체 이걸 어떻게 말하지? 어디서부터 어떻게?
...
"마야,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들이 바로 우리야. 우리가 좋아하는 것들이 우리다."
...
"우리는 우리가 수집하고, 습득하고, 읽은 것들이 아니다. 우리는, 여기 있는 한, 그저 사랑이야. 우리가 사랑했던 것들, 우리가 사랑했던 사람들, 그리고 그런 것들이, 그런 것들이 진정 계속 살아남는 거라고 생각해."
p. 311
나는 신을 믿지 않고, 종교도 없다. 하지만 내게 이 서점은 이승에서 교회에 가장 가까운 곳이다.
303쪽을 읽으면서 많이 울었다. 지금 타이핑을 하면서도 눈물이 난다. 말을 사랑하는 내가 '언어가 사라진 나'를 상상해 본다. 존재의 팔할은 의미가 없어질 것만 같다. 한편으로, 태어나서 가장 사랑했던 사람을 잃었으니 더이상 또 무엇을 잃는다 해도 그게 대수일까
첫댓글 아. 이 책 재밌게 읽었었는데. 잊고 있던 감동이 새록새록.
오, 이 책을 알다니!
책걸상 진행자 한 명이 아무런 사전 정보 없이 서점에서 대충 보고 샀다니까 다른 진행자들이 어떻게 이런 책을 발견했냐며 감탄하던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