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바코드 /허영숙
A4용지 한 장의 분량으로
간단한 자기소개서와 이력을 제출하라 한다
마흔 해의 낮과 밤을
그 간격에서 생겨 난 만 갈래의 길을
한 장에 어떻게 다 말할 수 있나
초등학교 졸업이 언제였더라 손가락으로 꼽다가
먹다 만 새우깡 겉봉에 찍힌 바코드를 본다
저 굵고 가느다란 세로 줄에 기록 된 것은
출고 일자 혹은
여기로 오기까지의 경로 표시에 불과할 뿐
봉지 안의 분말로 남은 새우의 길에 대해
등 굽은 파랑의 날들에 대해 모두 말 할 수 없다
어느 겨울 날,
찬물에 돌미나리를 씻으며 울고 싶었던 이유가
시린 손 때문만은 아니라고
한 줄에 다 적을 수 없듯
오래 더듬어야 읽을 수 있는 길
그 위에서 버려진 신발이 몇 켤레였는지
밟아온 길을 일으켜 세워 바코드를 만든다
고음으로 내질렀던 푸른 날의 한 때를
세로로 긋다가 올려다 본 하늘
정오의 햇살이 내 몸의 바코드를 환하게 읽고 간다
섬 속의 섬 /허영숙
배수가 안된 옥상에 빗물 호수가 생겨났다
호수에 사각형의 하늘이 잠겨있다
그 위로 구름이 흘러가고
한 무리의 새떼들이
대열을 하나도 버리지 않고 지나간다
호수는 섬 하나 품고 있다
누군가를 오래 안았으나 이제
절룩거리는 다리를 가진 낡은 의자
구부러진 안테나가 있는 구형 텔레비젼
뭔가 길렀던 흔적이 남은 스티로폴 흙 상자들
끈끈한 지문이 닿아
폐기물 딱지 한 장에 쉽게 보낼 수 없는 것들은
모두 옥상으로 간다
옥상은 낡거나 고장 난 것들이 모여 있는 또 다른 섬
호수 중앙에 물 그림자로 펄럭이는
맞은편 치매병원의 입간판이 보인다
소견서 한 장을 내밀고
늙은 노모를 고독한 섬에 내려놓고
-어머니 낡았으니 이제 여기에 두고 갈게요-
불편한 뒷모습을 서둘러 정돈하고 가는
한 사내도 보인다
낡고 고장난 의자 하나가 병원 창가에 오래도록 놓여있다
파도의 방 /허영숙
누구의 손짓에 저 물길 열리고 닫히나
무창포에 와서 누운 밤
물때를 만난 파도가
서로의 산실로 돌아가는 소리 들린다
만난 적 없는 듯 등 돌려가는 마디마다
어떤 울음이 빼곡하기에 걸음이 저토록 질척거리는가
멀어진 틈의 간격을 메우며
비릿한 물 내를 품고 뜨는 섬
질펀한 그곳에 한 무더기의 별들이
여기가 다시 무덤인 줄 모르고 몸 던져온다
수면에 뜬 아사달의 무늬를 쫒아
물속으로 뛰어 든 아사녀의 그림자가
이루지 못한 것을 찾아 그믐달 속에 서성이는 밤
서로를 떠나서는 그곳이 감옥인 듯싶었는지
이른 새벽 흰빛을 끌고 달려오는
물소리, 물소리
서로의 내밀한 몸속으로 혀끝을 밀어 넣으면
물결 너머 또 물결이 붉은 아침을
저 먼 물금 위에 뜨겁게 띄우겠다
*무창포- 충남 보령 소재. 한달에 두 차례 그믐 사리 때 바다가 열리는 곳
꽃싸움 /허영숙
느티나무 그늘을 펴놓고
할머니 여럿 둘러앉아 꽃싸움을 한다
선이 된 바람이 꽃잎 몇 장 바닥에 깐다
손끝에서 매화가 피고 모란이 피고 국화가 피고
새가 울고 달이 뜨니 창포도 한 꽃대 밀어 올린다
거듭 나는 열두 달
주름의 행간으로 스민 생의 사계가 저곳에 있다
꽃등만 보고도 꽃말을 맞추는 나이
패를 들켜도 두려울 것이 없다
빛날 광(光)에 목숨 걸지 않아
단풍든 시절이 한참 지난 저 싸움엔 패자도 없다
꽃 필 때마다 웃음도 그늘로 거느리고 있는
느티나무 심판관
꽃값을 대신 읽어줘서 하늘하늘 즐겁다
꽃잎끼리 부딪칠 때마다
씨방에서 터지는 꽃 웃음
다시 꽃을 볼 수 있을까
조심스레 마지막 꽃잎을 꺼내는 손끝에 바람도 긴장한다
꺼내놓을 패가 없어 뒤집을 것도 없지만
눈부시게 피던 시절을 지금 저 손끝에 거느리고 있어
봄날이 아니더라도 화투花鬪의 시절엔
꽃 지는 법이 없다
푸른 기와 /허영숙
우체부가 바람을 던져 놓고 가도
아무도 내다보지 않는 집
밤이면 고양이들이 푸른 눈빛을 켜드는
오래된 빈집에
언제부터 들어와 살았나
낡은 전선줄을 타고
지붕을 새로 올리는 담쟁이
땡볕이 매미 울음을 고음으로 달구는 한낮에도
풋내 나는 곡선을 하늘하늘 쌓아올리는
저 푸른 노동
질통을 지고 남의 집 지붕을 올리던 가장家長이
끙끙 신열을 앓으며 뒤척일 때
얼핏 들여다 본 어깨의
멍자국 같은,
저녁의 앙금 /허영숙
산사의 종소리가 노을을 밀어올리면
저녁의 아래에 든 꽃들은
*산화락 산화락 눕고, 사람들은
팽팽했던 시간의 무릎을 접어 바닥에 가부좌를 튼다
하루가 남기고 간 어둠
생의 입자를 물고 흔들리든 것이 가라앉아 이룬
저 묵직한 고요
가라앉는다는 것은
이토록 고요하고 이슥할 때 이루어진다
시간이 버릴 것과 남길 것을 선명하게 갈라놓고 난 후에
비로소 바닥에 닿는 것이다
쇳물의 붉은 혼이 쏟아질 만큼
아프게 떨며 소리를 멀리 보낸 종(鐘)일수록
제 몸 가라앉는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것처럼
너도 저녁이 오고 한참 뒤에야 가라앉았다
저녁의 등뼈를 짚고
쏙독새가 기억의 늑골 근처에 와서 울어도
꽃잎 몇 장 떨어져 어둠에 포개졌을 뿐
이미 쏟아내고 없는 격렬의 시절
그 아래 굳어 버린 너를 무엇으로도 흔들지 못한다
바닥에 압화가 되고 있는 꽃잎이,
모든 윤곽을 지우며 낮게 번지는
이 저녁이
아무런 아픔 없이 혼자 가라앉았겠는가 하고
바닥에 이르른 것들에게 물으면
별들이 내 눈속에 축축한 지층을 이루며
울컥울컥 가라앉는 것이다
*산화락(散花落)ㅡ꽃을 뿌리며 불덕을 찬탄함
사람이 풍경이다 / 허영숙
꽃 시장에는 사람보다 꽃이 더 많다
사람이 꽃을 품은 것이 아니라
꽃이 사람을 품고 있다
자세히 보면 꽃도 사람을 살핀다
꽃 가까이서 향기를 맡으려 할 때는 조심하시라
사람이 꽃의 향기를 맡는 것이 아니라
꽃이 사람의 향기를 맡는 것이므로
꽃눈을 열어
안쪽까지 들여다 볼 수 있으므로
사람이 제 이야기에 맞는 얼굴로
꽃에게 꽃말을 부여하듯
꽃도 사람의 빛깔에 맞는 향기로 부르고 싶어 한다
아름다운 등을 가진 사람 두엇 꺾어다가
곁에 두고 싶어 한다
그래서 사람이 꽃을 들여다 볼 때
허리가 반쯤 꺾이는 것이다
푸른 답장 / 허영숙
바람이 마당에 편지를 두고 간 줄 몰랐습니다
문을 닫고 겨울을 오래 앓고 있었지요
파릇할 때 열어봐야 했습니다. 그동안
산수유가 피었다 지며
겉봉에 쓰인 당신 이름 지우고
목련이 피었다 지며
내 이름이 지워진 수취인 불명의 편지를
꽃 지고 돋아난 잎이 푸르게 흔들고 있었지요
희미한 이름 자국만 당신이 내게로
내가 당신에게로 뜨거운 말, 젖은 말, 동봉하여 보냈던
선명했던 지난날을 겨우 붙들고 있었지요
겉봉을 뜯자
모조리 말라 씨앗이 된 말들이 와르르 쏟아집니다
단단하게 굳는 줄 모르고 내 답장 기다리며
몇 번이고 우체통을 열어 보았을 당신
봄볕이 잘 드는 곳에 씨았을 심었습니다
몇 차례 비가 내리더니
다시 싹을 틔우기 시작합니다
늦었지만
달콤한 슬픔/허영숙
아플 때는 누가 내 이마를 가만히 짚어주었으면
앓느라 뒤엉킨 마음을 감겨주고
방금 딴 솔빗으로 푸르게 빗겨주었으면
낯선 곳에 혼자 떨어져 우는 아이 달래듯
훌쩍 훌쩍 자라는 어깨를 안아주었으면
붉은 앵두 간곡하게 매달린 가지 꺾어다가
마른 입술을 달게 적셔주었으면
그랬으면 아플 때는 그랬으면
다시 너를 기다리는 일도 없이
너로 인해 들끓는 이마를 견뎌야 하는 일도 없이
울음 첩첩 쌓인 통증을 열어 갈피갈피 만져주었으면
한 생 탕진하다 돌아온 사람에게
더운 밥 지어 올리는 우둔한 아낙처럼
말없이 가만 들여다봐 주었으면
그랬으면
꼬박 열흘을 앓고 핼쑥한 웃음을 일으키면
다시 무너지지 않게 누가
내 슬픔의 이마를 달콤하게 짚어주었으면
시집 <바코드> 중에서
저물녘 억새밭에 가다 / 허영숙
억새밭에 쪼그리고 앉으면
허공으로 난 빽빽한 길 위에 선 것 같다
세상의 모든 것이 지워지는 저물녘에는
무수한 저 길도 서러워져서 온 몸을 흔든다
잔광 속으로 하얗게 번지는 울음
흔들릴수록 울음은 더 멀리 번져나가서
저물녘을 예감한 모든 억새가
어둠을 머리끝까지 쓰고 운다
울음으로 들썩이는 들녘
시들어가는 볕에 서 본 적 없는
마디 푸른 것들은 다 듣지 못하는 저 소리
저물어 간 모든 것들은 갈피마다 울음을 품고 있다
저녁에는 사람이 낸 길도 저물어서
슬픔이 서리서리 얹힌 시절을 불러낸다
먼데서부터 빈 대궁을 채우며 오는 기억
그속에는 이제 그만 저물자는 당신의 말에
발목을 접질리며 돌아오던 저녁이 있다
대궁 속에 흥건하게 차오르던 울음을
이불 밑에서 하얗게 흘려보낸 시절이 있다
푸른 길이 아득히 저물어 갈 때
멀리 간만큼 되돌아와야 하는 길은 더 멀고 아파서
어둠은 사람의 발자국부터 천천히 지우며 온다
나무의 필법 / 허영숙
잎의 문장을 다 지운 나무를 들여다보면
가지와 가지끼리 서로 기대며 쓰고 있는
필법은 y다
한 획을 기울여야
또 한 획이 기댈 수 있다고 쓰고 있다
저토록 촘촘한 기울임의 힘으로
잎은 다시 무성해진다
휘면 부러질까 기울인 적 없는 사람의 등은
늘 비어있다
잎을 피울 수 없으므로 그늘도 없다
어딘가에 기댈 수 있다는 것
누군가를 받아 줄 중심이 될 수 있다는 것
바람이 벚나무에 기대어 있는 은혜병원 앞
아픈 사람에게
어깨 한 쪽을 내어 준 사람의 등에 햇살이 번진다
막 눈 뜨기 시작하는 생장점
y의 푸른 순筍이 돋고 있다
파래소 / 허영숙
파래소폭포 앞에 터를 잡은 물푸레나무
좁다란 목구멍에서 쏟아내는 푸념을 듣고 자라
잎 사이사이 내 비치는 그늘이 서늘하다
속까지 다그치고 다그쳐서
움츠려든 어떤 잎은 지극히 소심해졌다
기슭을 돌아오며 살점이 깎이고
흩어졌다 모였다 하는 동안
안으로 둥글게 말아두었던 말
벼랑 끝에 이르러 물은 직설적으로 쏟아낸다
그 소리를 날마다 들어야 하는 물푸레나무
희고 커다란 목소리가 넘치고도 남아
잎은 어질어질 흔들리고
밑동은 반쯤 허물어졌다
할 말 다한 물은
깊은 소沼를 이루어 새로 하늘을 품었다
그 속에 물고기도 키우고 바람도 키우는데
물푸레나무 빗살무늬 잎잎의 젖은 귀에는
흠집만 가득하다
물푸레나무를 보고 온 날 밤
누군가의 푸념을 듣고 나면
왜 그렇게 마음이 자주 허물어졌는지
파래소, 깊은 물색을 보고 알았다
한 컵의 안간힘 /허영숙
마디는 뿌리의 안간힘이다
대를 잘라내고 남은 미나리 뿌리를 컵에 담아두었더니 여린 대가 새로 올라온다 한 컵의 물에 뿌리를 두고 안간힘을 다해 잘려나간 마디를 파랗게 세우고 있다
컵의 물을 숫돌에 뿌려가며 한 손으로 칼을 갈고 있는 남자, 손가락이 모두 잘려나가 뭉툭한 몸뚱이만 남은 나머지 한 손으로 칼등을 단단하게 누른다 남자에게 있어 손은 밥이다 밥이면서 잘려나간 뼈대다 안간힘을 실어 버텨야 하는
하루다 날 선 것들의 중심을 잡기 위해 손등의 힘줄을 다시 세운다 잘려나간 뼈들이 허공 한 채를 단단하게 동여매고 있다
<다시올문학> 2010. 여름호
낮잠 /허영숙
-흉몽
구름이 낮게 내려앉은 날이었다. 마당에선 개가 불안을 컹컹 짖어댔다. 구름과 구름사이가 환하게 열리며
붉은 나비들이 한꺼번에 들이닥쳤다. 꽃들은 놀란 입을 오므리고 바들바들 몸을 떨었다. 나비들은 능숙하게
꽃잎을 떼어가기 시작했다. 꽃의 기억도 뜯겨져 갔다. 어떤 꽃은 뿌리째 뽑아갔다. 동생은 오줌을 지렸고 빈
꽃대를 붙잡고 어머니가 울었다. 애벌레처럼 오래 웅크리고 있던 어머니가 날개를 펴기 시작한 푸른 새벽, 나비
한 마리 조용히 날아가는 것을 숨죽이며 보고 있었다. 나는 빈 허물을 꼭 쥐고 참았던 울음을 터뜨렸다.
이불을 손에 쥔 채 잠에서 깨었다. 울음은 꿈밖으로 번져 나와 철들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동백 피다 /허영숙
아무도 살지 않는 그 집에는 내가 즐겨듣는 노래가 있지 노래가 나오던 문을 열고 들어서면 해마다 바람이
그려놓은 악보들이 마당에 두껍게 쌓여 있지 바랭이, 개망초의 전주곡이 끝난 자리에 이름 모를 풀꽃들이
스스로 지닌 음계를 타고 때로는 빠르게 때로는 느리게 피었다 지고 도돌이표를 따라 한 무리의 별들이 쏟
아져 내리며 합창을 들려주기도 하지
나만 아는 그 집에는 오래 전 당신이 부르던 노래가 있었지 노래가 흘러나오던 입술을 열고 들어서면 잡풀만
무성한 마당, 저음 또는 고음이 가진 당신과 나의 불안한 옥타브를 베어버린 킬링필드, 그 들판에 우리의
노래는 이미 죽고 남은 몇 음절의 노래가 미완으로 남아 있지 달빛만 조명처럼 출렁이었다 사라지는 빈 무대를
바라보며 오래도록 당신의 노래를 기다리고 있던 겨울 날
집과 집의 경계를 깔고 앉아 당신의 지문이 묻은 악보를 뒤적이는데 성성 날리는 눈발이 피날레를 예고하더니
담벼락 밑에 서 있던 늙은 가수 하나가 목울대를 세우고 붉은 노래를 낭창낭창 부르기 시작했지 그 틈을 타고
오래 가두어둔 한 음절을 기침이 쏟아지도록 따라 불렀지 눈발 속에 당신이 붉게 붉게 피고 있었지
나비그림에 쓰다 / 허영숙
닿을 수 없는 곳에 있는 것은 다 꽃길이라 믿었던 시절 득음한 꽃들의 아우성에 나도 한 때 꽃을 사모하였다 꽃을 사모하니 저절로 날개가 돋아 꽃 안의 일도 꽃 밖의 일도 두근거리는 중심이 되었다 꽃술과 교감했으므로 날개 접고 앉은 자리가 모두 꽃자리였다
꽃길을 날아다녔으나 꽃술을 품었다고 흉금에 다 아름다운 분粉을 지닌 것은 아니었다
겹눈을 가지고도 읽지 못한 꽃독에 날개를 다치고 먼 남쪽 다산에 와서 앉는다 낮달이 다붓하게 따라온다 주전자에는 찻물이 끓고 *꽃 밖에서 훨훨 날아다니고 꽃술을 사모하여 맴돌지는 말아라 오래 전 날개를 다치고 이곳에 먼저 와서 앉았던 사람이 더운 붓끝으로 허공에 쓰고 있다
*정약용의 시 “題蛺蝶圖” 에서 인용
~~~~~~~~~~~~~~~~~
허영숙 시인
경북 포항 출생,
부산여자대학 졸업
2006년 『시안』 신인상으로 등단하여 작품 활동 시작,
현재, 시마을 동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