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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문제에 대해 비난하기보다 자비심을 내야 한다.
뉴스기사를 보면 온갖 일들이 다 있다. 사회적으로 복잡한 내용부터 안타까운 내용까지
분노, 슬픔 등 다양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분노와 슬픔을 일으키는 것은 내 안에 분노와 슬픔이 있기 때문이다.
뉴스기사 댓글을 보면 사람들의 의식이 복잡함을 들여다볼 수 있다.
내 안의 부정적 감정을 해결하지 않은 상태에서는 사회 문제나 타인의 모순 등이
나의 감정의 배출구로 이용될 수 있다.
비난받을 만한 일에 대해 마구 비난을 쏟아내기만 한다면 그 뿐이며 개인과 사회가 바뀌지 않는다.
사람의 모든 말은 자기 내면의 것을 드러내는 것이다.
제 3의 대상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더라도 주어가 바뀌어 있을 뿐 모두 자기 자신에 대한 이야기이다.
타인이나 사회를 비난함은 자신을 비난하는 것이며
자기 자신을 충분히 사랑하지 못하는 상태에 있음을 나타낸다.
자기 사랑이 부족하다는 것은 영적 자아, 순수한 존재함으로써의 자신을 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우리 안의 영적 존재는 있는 그대로 그러할 뿐 좋고 나쁜 것이 없다.
바른 분별을 갖는다는 것, 올바르게 시비를 판단하는 일은 이기심을 떠나야 가능한 일이다.
개인적인 감정, 기억을 떠나서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어야 한다.
곧 영적 자아의 시각에서 치우침 없이 사리를 분별하는 것이다.
영적 자아가 드러나려면 먼저 잡념, 망상들이 정화되어야 한다.
구름이 물러날수록 태양이 밝게 드러난다.
마음이 정화되고 잡념이 적은 상태, 곧 영적으로 깨어 있는 상태에서
사회 문제나 주변 사람의 모순을 대한다면 비난이 아닌 사랑이 올라올 것이다.
우리의 가슴에서 자비심, 연민심이 우러나오며 그것이 현실을 바르게 창조하는 힘이 된다.
국가 지도자, 정치인, 사회 지도층, 재벌 세력 등에 대해
증오심을 가지고 비난하는 것은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그들은 우리 자신의 또 다른 얼굴이다. 내면 깊은 곳에서 그들은 나와 하나이다.
온갖 부정한 일을 보았을 때 우리는 분노하기보다는 가슴에서 참회 기도를 올려야 한다.
그리고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으로써 사회가 바르게 되기를 소망해야 한다.
이 소망이 진실할수록, 많은 사람이 진실한 마음을 낼수록 현실에서 실제로 그렇게 될 것이다.
사회의 문제는 사람들 내면의 증오심, 두려움 등이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에 존재한다.
우리의 현실은 우리의 정신이 창조한 결과이다.
현실의 문제 그 자체에 집중하고 비난, 증오의 마음을 일으키는 것은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으며 반대로 그 일이 지속되도록 힘을 실어주는 셈이 된다.
오직 내가 가장 바라는 이상적인 사회를 꿈꾸고 신념을 강화해나가야 한다.
이것은 현실을 외면하고 정신적 자위를 하라는 뜻이 아니다.
영적으로 바른 소망이 일어나고 신념이 강화되었을 때
자연스럽게 우러나와 현실 참여도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현실 참여는 저항하고 싸우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마하트마 간디가 그러했듯이 비폭력, 무저항으로 영적 의지를 가지고 현실의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
* 부정적 감정에 공감하기보다 긍정적 씨앗을 심어주어야 한다.
안타까운 일에 대해 동정심을 느끼고 슬퍼하거나 괴로워하는 것은 자기 내면의 고통을 반복하는 일이다.
동정심이나 동병상련은 영적으로 볼 때 바람직한 자세가 아니다.
대상에 대해 공감과 이해가 필요하지만, 거기에 대해 같이 괴로워한다는 것은 그들의 고통을 더해주는 일이다. 부정적 카르마를 가진 자들에 대해 부정적 카르마를 더해주게 된다.
우리 몸은 죽어도 영적 자아는 영원하다. 영으로서 우리는 죽음을 초월하는 마음을 지녀야 한다.
어떤 억울한 사연이나 고통, 사회 문제에 대해서도 같이 괴로워하거나 분노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것은 그것을 무시하고 외면하는 것과 다르다.
'기쁜 일은 함께 기뻐해주고 슬픈 일은 함께 슬퍼해준다''라는 것, 공감해주는 것이
예의라는 문화적 관념이 영적으로 볼 때는 장애물이다.
예를 들어 어떤 친구가 직장 상사 혹은 가족 때문에 괴롭다고 호소할 때
같이 제 3자에 대한 욕을 해주는 것이 도와주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문화적으로 깊게 박힌 관념이라 공감해주지 않는다면 친구는 불쾌해하거나 실망할 것이다.
하지만 진실로 도와주기 위해서는 같이 욕을 해서 공감해주는 일은 좋지 않다.
그 친구가 고통을 받는 것은 본인이 영적 교훈을 얻기까지 가지고 가는 숙제거리이다.
그 교훈은 바로 그 미운 사람에 대한 증오심을 거두고 사랑하는 일, 곧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일이다.
깊은 무의식의 세계에서는 자타의 구분이 없으며 자기 사랑과 타인 사랑은 동일하다.
자신과 타인을 사랑하는 마음을 얻게 될 때에 그 사람의 고통은 사라진다.
그렇다고 원수를 사랑하는 마음을 내어보라고 강요할 수도 없는 일이다.
다만 친구의 마음을 진정시키고 마음에서 그 친구가 나아지기를 바라는 정도가 최선일 것이다.
억울한 일, 슬프고 안타까운 일에 대한 뉴스를 대했을 때
우리 마음에서는 기쁜 일을 대했을 때와 똑같이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가 우러나와야 한다.
어떤 일을 겪더라도 모든 영혼은 동등하고 소중한 존재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들의 영혼을 존중한다면 오직 자비심을 내어 그 영혼들을 위해 빌어주어야 할 것이다.
그런 사랑의 마음이 실제로 도움을 줄 수 있다.
* 집단 카르마의 해결 - 개인의 양심을 일깨우고 집단적 성찰을 일으켜야 한다.
개인의 카르마를 해결하려면 외면했던 진실을 바라보고
자신의 이기심을 참회하고 영적 교훈을 깊이 새김으로써 벗어날 수 있다.
사회적 카르마, 집단 카르마의 문제도 이와 같다.
집단이란 규모가 클 뿐 개인들의 집합이다.
개인들의 참회가 모아져야 사회적 자아 성찰과 변화가 일어날 수 있다.
개인의 문제에 대해서는 참회하면서 참회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 문제들이 있는데,
그것은 사회에서 받아들인 집단적 관념의 문제이다.
다른 사람들도 다 그렇게 살기 때문에 당연하다고 생각하기 쉽다.
내가 돈을 벌기 위해서는 적당히 거짓말을 할 수도 있고,
내가 잘 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이 고통스러워해도 그냥 두어야 한다고 믿는다.
이런 이기심과 분리의식이 사회적인 거대한 질병으로 나타난다.
사회적인 카르마가 터지는 일이 바로 집단적인 재앙이다.
자연 재해, 대형 사고, 질병의 유행, 전쟁, 정치적 혼란, 금융 위기, 불경기가 지속되는 일 등이
모두 집단 카르마가 나타난 것이다.
개인이나 사회나 카르마에 대해서는 '소 읽고 외양간 고치는 격'이 되기 쉽다.
고통을 겪어야 비로소 잘못을 깨닫고 성숙하게 된다.
집단카르마를 해결하는 길은 개인 카르마를 해결하는 절차와 마찬가지이다.
잘못을 깨닫고 뉘우치고 변화를 일으키는 일,
이런 의식적인 작용들이 하나둘씩 모여 전체의 변화를 일으키게 된다.
그렇게 될 때에 수동적이며 낮은 의식수준에 있는 사람들도
집단의식의 상승에 의해 조금씩 끌려올라갈 수 있다.
개인 카르마를 해결하기 위해 자아 성찰하는 습관이 중요하듯이
사회 문제에 있어서도 집단적 성찰과 논의가 빈번하게 일어나야 한다.
우리 사회의 문제점은 어떤 영적 문제에서 비롯되었는지를 깨닫고 토로하며
앞으로의 사회의 모습에 대해 새로운 그림을 그려내야 한다.
가장 우선적인 일은 사회 구성원들이 개인적 삶에 국한된 의식을 벗어나
사회에 대한 적극적 관심을 가지는 일이다.
개인이 사회의 일원이기에 사회가 잘 되어야 개인이 잘 된다는 관념에서 더 나아가서,
사회와 개인은 결국 하나이고 모두가 운명 공동체임을 깊이 자각해야 한다.
가족에서, 소속 집단에서, 지역 사회에서, 국가에서, 전 인류를 통틀어,
그리고 모든 생명과 지구와 함께, 전 우주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운명 공동체임을 통찰해야 한다.
그러한 통찰로부터 나의 삶을 바꾸고 집단의 삶을 개혁하는 변화를 이끌어나갈 수 있다.
나만 잘 되고 내가 속한 집단만 잘 되어야 한다는 생각은 망상이다.
나와 내가 속한 집단 뿐 아니라 모든 존재들을 두루 이롭게 하는 것이 선(善)이고
전 우주의 의지에 따르는 일이다.
현대의 정치와 자본주의는 개개인이 사회에 관심을 가지는 일을 어렵게 만들어놓았다.
많은 사람들이 고생해서 돈을 벌고 그 돈을 쓰고 욕망을 채우는 데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다.
일하고, 먹고, 쓰고, 놀고, 즐기고, 희희낙락하기에 바빠서
자기 자신을 성찰할 시간도 적고 사람들끼리 의견을 교환하여 집단적 성찰을 일으킬 기회도 적다.
<매트릭스> 영화와 같은 이런 시스템을 벗어나서 진실을 보기 위해
우리는 미디어에서 관념을 주입받는 코드를 빼내고 내면의 지성을 일깨워야 한다.
어디선가 만들어져 내 귀에 들어오는 관념이 아닌,
오로지 내 안의 양심과 진심으로써 나 자신과 사회의 모습을 성찰해 가야 할 것이다.
자아 성찰과 참회는 머리의 지식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가슴의 진심으로 이루어진다.
진심으로 느낄 때에 영적 교훈이 가슴에 새겨지며 삶에서 체화되어 실현된다.
머리로만 알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과 일치하는 삶, 언행일치와 지행일치가 된 삶으로 나타난다.
개인의 삶에 대해서도, 사회에 대해서도 깨어서 바라보며 가슴으로 느끼고 실행하는 삶을 살아야 하겠다.
(펌)http://cafe.daum.net/SecretMaster/7UOC/439
첫댓글 유행성 질병은 집단카르마를 넘어 영적 진동수의 상승으로 해결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앞으로 메르스보다 더한 것들도 나타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