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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5월 25일~ 26일 지리산테마여행
지리산 테마여행 (2일차)
거창군이 자랑하는 최고의 명소 탐방
10편 : 수승대 국민관광지, 남덕유산, 귀경길 이야기
어떤이는 긴 해외여행도 아주 짤박하게 요점만 잘 정리해서 귀에 쏙쏙 들어오게 기행문을 전하는데, 상기인은 겨우 1박 2일 여행을 이렇게 길게 10편까지, 마치 사골국 우려내어 먹듯이 하면서도 잘 표현하지 못하는 것이 그저 많이 미안하고 민망할 따름입니다.
그렇지만 소중한 이들과 함께했던 그 순간 순간이 너무 귀하게 느껴져서 오래 오래 기억하고 또 간직하고 싶었기에 요점 정리를 하지 않고 筆 가는대로 그냥 이렇게 주절 주절 좀 떠들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그때의 일들은 흔히 사소한 것으로 치부하여 쉽게 잊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이런 마음 그저 널리 해량(海量)하여 주십시요.
2013. 5.26. Am 10시 10분, 목적지인 거창 수승대에 도착했습니다. 깊은 산과 깊은 강을 경계로 삼은 이 지역은 옛 삼국시대 신라와 백제의 경제지역으로 양국가가 이곳에서 서로 회담을 했다는 장소답게 정말 환상적인 아름다운 절경이었습니다. 우선 무더운 날씨라서 이 깨끗한 물에 풍덩 뛰어들고 싶은 마음이었습니다만, 위 사진에서와 같이 수영을 절대 금한다는 경고문이 눈에 확~ 띄었습니다.
--------------------------------------- 지난 제9편의 마지막 내용 ------------------------------------
수승대 입구에 도착하면서부터 주변의 아름다운 절경에 자신도 모르게 아~!하는 탄성부터 나왔습니다. 이곳은 지금까지 거창군의 다른 유명한 명소와는 좀더 차별화된 강한 인상의 또다른 감동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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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적지에 도착하여 제일 먼저 들린 곳은 조손 중종때 요수 신권(愼權) 선생이 은거하면서 후진들을 양성하기 위해 건립했다는 구연서원(龜淵書院)을 찾았습니다. 서원의 담벼락은 자연 그대로의 암석으로 이루어졌는데, 모진 풍파를 이겨낸 듯 강한 생명력을 상징하는 거대한 나무가 암벽에 뿌리 내려 있는 모습이 너무도 신기했습니다.
수승대의 구연서원 탐방
구연서원(龜淵書院)내에는 사우(祠宇), 내삼문(內三門), 관수루(觀水樓), 전사청(典祠廳), 요수정(樂水亭), 함양제(涵養齊), 정려(旌閭), 산고수장비(山高水長碑)와 유적비(遺蹟碑) 등이 있었습니다.
구연서원으로 들어가는 입구, 관수루(觀水樓)의 전경입니다.
구연서원의 문루인 관수루는 외관부터 예사롭지가 않습니다.
누각을 떠받친 1층 기둥들이 앞쪽은 곧게 뻗었지만 뒤쪽의 기둥 4개는 휘어지고 뒤틀린 느티나무의 투박하면서도 자연스러운 멋을 그대로 살렸습니다. 특히 첫 번째 기둥은 뒤틀림의 정도가 심해 아예 S라인을 그리고 있으며, 휘어진 기둥도 누각의 무게를 지탱할 수 있다는 치밀한 계산이 맞아 떨어진 건축가의 자존심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여느 누각과 달리 관수루는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도 없습니다. 관수루와 맞닿은 거북 모양의 바위를 계단 삼아 2층으로 올라갈 수 있도록 자연 친화적으로 설계했기 때문입니다.
구연서원 관수루(龜淵書院 觀水樓) 앞의 안내판에는 아래과 같은 내용으로 관수루를 소개하고 있었습니다.
구연서원 관수루(龜淵書院 觀水樓)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422호로 거창군 위천면 황산리 769.
관수루는 요수 신권(樂水 愼權), 석곡 성팽년(石谷 成彭年), 황고 신수이(黃皐 愼守彛) 선생의 정신을 계승하기 위하여 사림이 세운 구연서원의 문루로 1740년(영조 16년)에 건립하였다. 관수(觀水)란 「맹자(孟子)」에 ‘물을 보는데(觀水) 방법이 있으니, 반드시 그 물의 흐름을 봐야한다. 흐르는 물은 웅덩이를 채우지 않고는 다음으로 흐르지 않는다.’고 한 말을 인용한 것으로 군자의 학문은 이와 같아야 한다는 뜻으로 이름 지었다. 누각은 일반적으로 군현의 관아 소재지의 경치가 수려한 곳에 세워서 고을의 현감이나 중앙의 관리들이 일정한 날을 택해 인근 선비들을 불러 시회(詩會)나 연회를 열기도 하고, 평소에는 고을 사람덜이 올라 쉬거나 더위를 피하는 장소로 이용하였다. 따라서 누각은 고을을 상징하는 대표적 건물이 되기 때문에 사찰의 대웅전 앞이나 향교와 서원의 입구에 세워 그 건물의 격을 높이는 역할을 한다.
이 누각은 정면 세칸, 측면 두 칸에 계자난간 팔작지붕이고, 커다란 거북이 형상을 한 자연석 위에 세운 활주와 일부러 휘어지고 굽어 용트림한 형태의 기둥이 자연과의 조화를 추구하는 거창지역 누각의 특징을 잘 반영하고 있다. 라고 게시판에 기술되어 있었습니다.
관수루를 통해 들어간 구연서원은 비록 건물은 낡았으나 옛 서원의 모습이 그대로 있고 울창한 숲이 감싼 뜰에는 여러개의 비석문들이 서 있었습니다. 그중에서 눈에 가장 띄는 것은 큰 거북등에 세워진 산고수장(山高水長)이라는 글귀였습니다.
山高水長(山 뫼산, 高 높을 고, 水 물수, 長 길장)
산은 높고 물은 유유(悠悠)히 흐른다는 뜻으로, 군자(君子)의 덕이 높고 끝없음을 산의 우뚝 솟음과 큰 냇물의 흐름에 비유(比喩)한 말입니다.
산이 깊으면 물 또한 좋다는 건 당연한 이치입니다. 지리산과 덕유산을 비롯해 해발 1000m가 넘는 26개의 거대한 산군(山群)을 주위에 병풍처럼 거느리고 있는 경남 거창, 그곳을 일러 산고수장(山高水長)의 땅이라하는데, 이는 산(山)은 높이(高) 솟았고 물(水)은 길게(長) 흐르는 고장이란 얘기이지요. 이런 산고수장의 고장이라 그런지 벼슬과 출세보다는 자연에 더 마음을 두었던 유명한 두사람의 인물이 있습니다.
앞서 아침나절 우리가 북상면 갈계리에서 견학했던 갈계숲과 이어 이번에 견학하는 이곳 스승대와 연관이 있는 요수(樂水) 신천과 갈천(葛川) 임훈이 그 주인공인데, 이 두사람은 처남매부지간으로 이 두가문의 선비는 어지러운 세상사에서 비켜 앉아 거창의 월성계곡과 위천의 물가에서 자연과 벗하며 마음을 닦았던 진정한 선비들이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후학을 양성하는 길을 걸었기에 더욱 아름답게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우리 한성 조직의 대표인 거창출신 유기종 회장이 머리가 팍~팍~ 잘 돌아가는 것은 분명 이와 무관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관수루를 입구로한 오른쪽에는 구연서원이 있고, 구연서원 담장 앞에는 수령 400년된 수고 25m, 둘레 4.2m의 우뚝선 아름드리 은행나무 한그루가 뿌리를 내리고 있는데, 마치 선비의 절개를 상징하는 듯, 환상적인 아름다운 모습이었습니다.
구연서원과 역사를 함께 이 나무는 본래 열매가 열리지 않는 수나무였으나, 득남을 기원하는 아낙들이 밑둥치를 한주먹씩 잘라간 자리에 우레탄을 발랐는데, 어느 해 부터인가 우레탄의 화학성분에 의해 열매가 열리는 암나무로 변신했다고 합니다.
고사 위기에 처한 古木을 살린다고 바른 우레탄이 나무의 성전환(性轉換)을 초래했다니, 만약 아랫마을에 있는 암나무가 이를 알았다면 아마 너무도 기막혀 했을 것입니다.
한편 산고수장의 아름다운 수승대에는 울창한 나무 숲이 또한 명품이었습니다.
이런 이유에서인지, 거창군에서는 이곳 수승대에서 매년 국제연극제를 개최한다고 합니다. 현대식 유리 건물로 잘 지어진 숲속의 공연장 모습도 정말 아름다웠습니다.
이 행사는 자연 ‧ 인간 ‧ 연극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매년 7월말~8월 중순에 열리는데, 거창 국제연극제는 수승대의 빼어난 절경 속에 낮에는 계곡에서 피서를 즐기고 밤에는 밤하늘의 별을 보며 연극을 관람할 수 있는 최상의 축제일 것 같았습니다.
관람객들의 안전을 위해 인공적으로 물을 가두어 물놀이를 즐기고, 나무 숲 아래 돌계단은 관람석으로 만들어 여기에서는 영화제까지 개최될 예정으로 현재에도 계속 공사중이었습니다. 우리 한성학회의 6인의 戰士들은 교각에서 기념사진을 촬영하면서 거창군에서 조성하고 있는 수중야외 영화제 관람장을 아래와 같이 내려다 볼 수 있었습니다.
우리 인솔 책임자인 거창출신의 유기종 회장께서 위 사진을 박아 주었습니다. 좌로부터 박세영, 이승배, 맹윤재, 임성수, 상기 農心居士(李相卿)입니다.
거북바위(龜淵臺 또는 岩龜臺)
덕유산이 빚어 놓은 거창 제일의 유서 깊은 명소 수승대, 덕유 영봉에서 솟아난 물이 모여 구연폭을 이루고 구연을 만들면서 빚어 놓은 커다란 천연 바위 거북대가 바로 수승대입니다.
그 생김새가 마치 거북과 같아서 구연대(龜淵臺) 또는 암구대(岩龜臺)라고 하며, 한편 수많은 은사들과 현인들이 찾았던 대라하여 '모현대'라고도 부릅니다.
수승대 앞의 너럭 바위에는 스승 앞에서 제자들이 벼루를 갈던 바위란 뜻의 '연반석(硯磐石)'과 수업을 마친 제자들이 졸졸흐르는 물에 붓을 씻던 자리라는 뜻의 '세필짐(洗筆朕 / 짐의 한자에는 앞에 氵이 들어가야함.)'이란 글귀가 새겨져 있습니다. 그리고 너럭 바위 한쪽에 오목한 모양의 구멍이 뚫려있는데, 이곳을 장주갑이라 부릅니다. 이 구멍에는 한말 정도의 막걸리를 넣어 둘 수 있는 크기라고 합니다. 구연서원에서 공부하던 유생들은 너럭 바위에서 詩를 지은 후, 스승으로부터 합격 점수를 얻으면 장주갑에서 꺼낸 막걸리 한 사발씩을 받았다고 합니다.
어떻든 이 거북바위는 옛날 백제가 멸망할 무렵 사신을 이 대에서 송별하였는데, 그들이 돌아오지 못할 것을 슬퍼하여 수송대(愁送臺)라 하였으나, 조선중종38년(1543) 퇴계 이황이 거창을 지나면서 수송대의 내력을 듣고, 이름이 아름답지 못하고 수송(愁送)과 수승(搜勝)이 소리가 같으므로 수승(搜勝)으로 고친다고 시를 지어 보냈다고 합니다. 당시 유학자 신권은 퇴계의 편지를 받자마자 거북바위에 수승대(搜勝臺)라는 글을 새겼지요. 그때부터 이름이 바뀐 것입니다.
거북바위로 불리는 수승대는 10m 높이의 커다란 바위로 사면에는 한시와 이름이 빼곡하게 새겨져있습니다. 이 바위에는 퇴계의 詩와 함께 거창으로 낙향해 후학을 양성하던 갈천 임훈의 화답시도 나란히 새겨져 있습니다.
요수정(樂水亭)
Am 10시 30분, 우리 일행은 구연서원 맞은 편인 강 건너편에 위치한 요수정으로 향해 현수교 다리를 건넜습니다. 신권이 풍류를 즐기며 후학을 양성했던 요수정은 거북바위와 구연서원을 내려다보는 산기슭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댓바위와 그 앞으로 흐르는 강물 그리고 정자 뒤편의 울창한 소나무 숲과 잘 조화되어 이곳의 경관은 그야말로 절경이었습니다.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자연 암반을 초석으로 이용한 요수정은 특이하게도 정자 가운데에 불을 때는 방이 있습니다. 이른 아침에 불을 때면 굴뚝에서 나온 연기가 정자를 감싸 마치 구름 위에 떠있는 것처럼 보였다니, 우리 선인들이 풍류를 즐기기 위해 건축과 과학까지 동원할 정도로 높은 수준이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관수루와 요수정에는 수많은 시인묵객들의 詩가 빼곡하게 걸려 있었습니다. 모두가 하나 같이 수승대의 풍경에 감탄하고 신권을 기리는 시로 글 솜씨가 물 흐르듯 유려합니다.
요수정 뒤에는“세상은 변했지만 물소리는 한결 같다. 수승대 바람결에 선생을 느끼고 골짜기 울리는 물소리에 선생의 음성이 살아나신다”고 노래한 박목월(朴木月, 1916년 1월 6일 ~ 1978년 3월 24일)의 시비가 솔향에 취해 요수정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요수정의 안내판에는 아래와 같이 기술되어 있었습니다.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423호. 경상남도 거창군 위천면 황산리.
요수정은 요수 신권(樂水 愼權. 1501~1573)선생이 풍류를 즐기며 제자를 가르치던 곳으로 1542년 구연재와 남쪽 척수대 사이에 건립하였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고 그뒤 다시 수해를 입어 1805년 후손들이 현 위치로 이건하였다.
요수 선생은 조선시대 유학자로 학문에 뜻이 깊어 널리 성현을 찾아 배웠으며 벼슬을 멀리하고 안분낙도(安分樂道)에 힘썼다. 돌아가신 뒤에는 구연서원에서 배향(配享)하고 있다.
요수정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규로로 자연암반을 그대로 초석으로 이용하였다. 정자의 마루는 우물마루 형식이고 사방에 계자난간을 둘렀다. 종보가 있는 5량 가구로 가구의 짜임이 견실하고, 네곳의 추미에는 정연한 부채살 형태의 서까래를 배치하여 세부장식에서 격조 높은 정자 건물의 양식이 잘 반영되어 있고, 특히 추운 산간지역 기후를 고려하여 정자 내부에 방을 놓는 등 지역적 특성이 잘 반영된 거창 지역의 대표적 건축문화재이다.라고 기술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수승대 관광지에는 유난히 소나무가 많았습니다만, 수승대 소나무 중 으뜸은 단연 요수정 앞 절벽에 뿌리를 내린 두 그루의 낙락장송이었습니다.
마치 용이 꿈틀 거리는 듯한 형상이 소나무는 수승대를 향해 절을 하듯 누워있었는데 행여 비바람에 뿌리가 뽑힐까봐 연리목이 돼 서로가 서로를 붙들고 있는 형상이었습니다. 그리고 거북바위 옆에는 소나무 고사목 한 그루가 전봇대처럼 우뚝 솟아 하늘을 우러르고 있는데, 이는 죽어서 더 꼿꼿한 모습이 옛 거창 선비의 절개를 상징하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2013. 5. 26(일) 오전 10시 35분경, 우리 일행은 구연서원의 맞은편에 위치한 요수정을 둘러보기 위해 다리를 건넜고 다시 출발지점인 구연서원방향으로 되돌아 오면서, 이번에는 다리를 건너지 않고 얕은 바위돌을 징검다리삼아 강을 건넜습니다. 그리고 거북바우로 불리는 수승대를 배경으로 기념촬영을 하였지요. 좌로부터 유기종, 상기 농심거사, 이승배, 박세영, 맹윤재입니다.
Am 10시 40분, 1박2일의 바쁜 여정이라 어쩔수 없이 약 30여분간의 짧은 시간동안 수승대 일대를 둘러 보았지만, 많은 것을 느끼고 배웠습니다.
이 아름다운 곳을 떠나려니 그저 아쉬워서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으나 귀경을 서둘러야만 했습니다.
우리 일행은 Am 10시 45분경, 잘 조성된 수승대 문화 관광단지를 떠나 다음 목적지인 남덕유산으로 하고자 했으나 뒤돌아서면서도 아쉬움 때문인지 떠나면서도 눈길은 계속 수승대에서 머물었습니다.
수승대 문화관광단지내에 현대식으로 잘 건축된 안내 편의시설의 화장실 앞에 게시된 위의 사진이 눈에 확~ 띄어서 카메라에 담아 보았습니다.
남덕유산의 송계계곡과 송계사 탐방
Am 10시 40분, 수승대 문화관광단지를 떠난 우리 승합차는 한적한 시골길을 그냥 논스톱으로 달렸기에 불과 10분만인 Am 10시 50분에 남덕유산 안내소 앞에 금세 도착했습니다.
이른 오전 낮시간 탓인지? 남덕유산 관광안내소 입구는 아주 한적했습니다. 어느 먼 지방에서 관광차 올라온 버스 1대만이 서 있을 뿐이었습니다. 아마도 그 대절 관광객들은 송계사 절에 참배하려온 불자분들로 추정되었습니다.
우리 일행은 이번에도 국내외 여행분야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정보통인 인솔자로부터 덕유산 국립공원의 남덕유산 관리사무실 앞에서 덕유산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들었습니다.
남덕유산 국립공원에서 지리산 정상으로 오르는 등산로가 있었지만, 우리 일행이 이곳으로 온 것은 지리산 등산이 목적이 아니라 그저 송계계곡의 풍경을 보고 시간이 허락한다면 송계사까지는 답사한 후에 서울로 상경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남덕유산 관리사무소 앞 게시판에는 거창의 제13경 수리덤을 소개하는 안내문이 있었는데 그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
위치 : 거창군 북상명 소정리
유래 : 백두대간 덕유산 거봉(居峰) 남쪽 줄기에 안긴 바위 봉우리로 신라때 원효, 의상대사가 세운 영취사(靈鷲寺)가 산아래 있었으므로 영취봉이라고 한다. 영취봉, 수리덤 등의 이름은 불교에서 지혜로움을 상징하는 금시조와 맥락을 같이 한다. 곧 바위 봉우리가 뾰족하여 사람들이 근접할 수 없다는 뜻을 지니며 신령스러움과 신성시 되고 있다.
토템신앙의 대상으로 삼아 수리덤 아래에는 제의에 사용된 제단이 막돌로 쌓여있다. 송계사 계곡 상류에 있는 수리덤은 향적봉과 백련사로 넘는 등산길에서 고고롭게 솟아 있는 아름다운 산봉우리다.
천년 고찰 송계사
경상남도 거창군 북상면 소정리, 덕유산 수리봉 남쪽 기슭에 자리하고 있는 송계사는 대한 불교 조계종 제12교구 본사 해인사 말사이며, 전통사찰로 지정된 신라 천년고찰입니다. 송계사는 신라 진덕여황 6년(652년)에 원호대사와 의상대사가 거창군 북상면에 영취사를 창건하고 5개의 부속 암자를 세웠는데, 그중 한곳으로 송계암을 지었다고 전해 지고 있지요.
그런데 이런 천년고찰인 송계사는 임진왜란(AC 1592년) 때 5개의 암자가 모두 전소되어 폐허로 있다가 숙종(1674~1720년)때 송계암으로 중건했으며, 6·25전쟁 때 다시 전소된 것을 1969년 중창했다고 합니다. 현재의 사찰은 한국 전쟁 이후에 새로 중창한 건물들인데 그것 마져 낡고 오래되어 최근에 모두 새로 지었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천연사찰이라고는 하나 고풍스러운 멋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떻든 천년고찰이며 전통사찰로 지정된 송계사는 규모가 아주 작은 암자 같은 사찰입니다.
우리 가이드인 이곳 출신 유기종 회장의 해박한 역사와 지리 강의에 매료되긴 했으나, 이곳 송계사가 수년전에 화재로 인하여 다시 재건축하였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천년고찰을 기대했는데, 약간은 실망스러웠습니다. 그래서 약 1시간 이상 걸어서 송계사까지 걸어 가기에는 사실 이른 아침부터 금원사를 비롯하여 갈계숲과 월성계곡에 이어 수승대까지 다녀오는 등 너무 강행한 탓으로 힘이 부친 탓에 잠시 송계사로 향하는 길목의 계곡으로 입장하여 땀을 씻으며 휴식을 하다가 결국 송계사 탐방을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남덕유산 송계사 입구에서 약 6Km에 이르는 송계사 계곡이라고하는 소정천이 흐르는 길을 따라 가면 빽빽하게 늘어서 소나무 숲과 깊은 계곡은 여름 피서지로서는 최상으로 뽑힙니다. 하여 우리 일행은 송계계곡에서 위 사진에서처럼 휴식을 핑계삼아 이곳에서 미리 여름휴가를 즐겼습니다.
우리일행 6人의 戰士들은 남덕유산 자락의 송계계곡 일대에서 약 1시간 머물다가 정작 송계사는 탐방하지 못하고, Am 11시 40분경 남덕유산을 떠나 귀경길에 올랐습니다.
남덕유산에서 무주로 향하는 길은 아주 잘 발달되어 있었습니다. 즉 경상남도 거창에서 전라북도 무주까지는 약 50여 Km의 가까운 거리이며, 덕유산 자락의 무주 스키장과 리조트장이 개장되면서 지역일대가 관광지로 발전됨에 따라 자연히 도로망도 잘 발달되었나 봅니다.
그런데 경남 거창군 고제면에서 전북 무주군 무풍면으로 직통하는 터널공사가 한창 진행되고 있었는데, 아마도 금년 연말이면 이 터널공사가 완료 된다면 거창에서 무주까지는 불과 30여분 정도면 가능할 것일 것입니다.
그동안 항상 겨울철 눈과의 전쟁을 치루며 오르 내리던 이 고갯길이 앞으로는 추억의 도로가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치 우리 고향 대관령의 옛길처럼 말입니다.
어떻든 경남 거창군 북상면 소정리 소재의 남덕유산국립공원을 출발한지 20여분만에 우리 승합차는 힘든 고갯길을 넘어 경상남도와 전라북도의 경계지점인 빼재로(신풍령) 정상에 올랐습니다.
빼재로 정상 앞에는 수령(秀嶺)이라는 돌비석이 세워져 있었는데, 이는 한문으로 빼어날 or 높이 솟아날 秀(수)자를 쓴 것을 보면, 유명한 산인 것만은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곳 빼재로는 신풍령으로서 백두대간 보호지역이라는 커다란 표식이 써 있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 일행은 약 10여분간 휴식을 취하면서 멀리 공제선상에 보이는 아침에 답사했던 경남 거창의 금원산 자연휴양림을 비롯한 기백산 등을 바라보면서 아름다운 절경에 잠시 도취되었습니다. 빼재로의 팔각정에는 어느 노인단체의 할머니들이 정자에 둘러 앉아 飮酒歌舞를 즐기고 계셨는데, 참으로 행복해 보였습니다.
Am 12시 5분, 우리는 빼재로(신풍령)를 떠나 무주로 향했습니다.
빼재는 옛날 삼국시대 고구려와 백제 그리고 신라의 접경지역으로 수많은 전투가 일어났고 그로 인하여 수많은 민관군이 목숨을 잃어 뼈를 묻었다하여 뼈재라고 했는데, 경상도 방언으로 빼재라하였답니다. 일요일 오전 낮시간이라서 그런지 거창에서 무조로 향하는 도로는 비교적 한가했습니다. 하여 편안한 마음으로 차창을 통해 주변의 아름다운 경관을 마음껏 음미할 수 있었습니다.
통행량이 적은 관계로 우리 승합차는 그냥 논스톱으로 내달렸기에 무주 리조트 앞을 통과하여 경부고속도로가 합류되는 무주 IC엔 30여분만인 Am 12시 35분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이곳 휴게소엔 해물짬봉을 파는 유명한 중국식당이 있다는 인솔자의 장담에 기대가 무지 컸습니다. 그래서 점심 밥때가 한참 지나 배가 쪼르륵 거렸지만 우리일행은 이를 참고 달려온 왔던 것입니다.
그런데 한편으로 정말 휴게소에 있는 중국식당이 뭐 별꺼라고... 했었는데, 5월 26일(일) 낮은 찌는듯한 더위였음에도 불구하고 무주 IC 입구의 고속도로 휴게소에는 많은 사람들이 붐빈 가운데 특히 천마루 중화요리 집은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줄을 선 손님들 틈에서 겨우 음식주문을 하고 난뒤 약 20여분만에 탕수육이 하나 나왔는데, 그 탕수육이 이미 소화되었을 시각인 한참 끝에 드디어 본 음식인 해물짬뽕이 나왔습니다. 우선 맛보다는 위 사진에서 보다시피 마치 낙지처럼 생긴 큰 쭈꾸미 한 마리와 엄청난 량의 홍합이 짬뽕그릇을 꽉 채워서 기분부터가 무지 좋았습니다.
점심 밥때가 한참지난 시각이라 배가 고픈 탓으로 무조건 맛있게 느껴졌습니다. 이 중화요리집의 컨셉은 홍합을 많이 넣었고 量을 엄청 많게 하여 고객의 기분을 사로잡는 듯하였습니다.
어떻든 무더위 속에 얼큰한 짬뽕으로 민생고를 해결하곤, Pm 13시 20분, 대전~ 통영간의 고속도로를 타고 서울로 향했습니다.
서울에 도착한 시각은 Pm 15시 30분경이었습니다. 비록 짧은 시간의 여행이었지만 가장 소중한 사람들과 소중한 시간과 소중한 곳에서 함께 했다는 사실 만으로도 감사하고 또 행복했습니다.
아름다운 추억을 잊지 않고자 두서없이 현장에서 보고 느낀 것을 모두 주절 주절 생각나는 대로 기술하였습니다. 이상으로 경남 거창군 명소탐방문을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2013. 6. 22(토) 오전 집에서...
농심거사 드림
첫댓글 즐거웠던 여행을 다시금 생각나게 하는 생생한 여행기! 선배님! 바쁘신데도 불구하시고 틈틈히 시간내시어 올려주시어 넘 감사드립니다. 담 여행을 기대해 봅니다. 즐겁고 행복한 나날 되세요~~
감사합니다. 시사성이 떨어진 뒤늦게 북치는 소리를 하였지만, 우리들의 소중한 그 추억을 남기고자 억지를 좀 부렸습니다.
부디 널리 이해하여 주시길 바랍니다. 정말 함께한 이번 여행 행복했습니다. 특히 단합대회 행사에 쩐도 따서 얼마나 민망했는지 모릅니다. 흑~흑~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