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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7/16(주) 주일예배 / 제목 : 염려문제 이렇게 해결하십시오 (마 6:25~34) p.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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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26)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27)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 (28)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29)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30)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31)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32)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33)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34)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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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는 말 / 오늘도 이렇게 주님 앞에 나오신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신령한 은혜와 능력과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오늘은 마태복음 6장 25절부터 34절까지의 말씀을 가지고 ‘염려문제 이렇게 해결하십시오’ 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서론 / 염려거리가 없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도 염려거리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 구주 예수님은 우리 믿는 자들에게 염려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 '염려(念慮)’란‘μεριμνω’(메리나오)라는 말로 '어수선한 마음', '분열된 마음'의 뜻입니다. 우리가 염려를 하게 되면 우리의 마음이 흩어지고 분열이 됩니다. 사실 염려처럼 비생산적인 것이 없습니다. 염려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만 더욱 힘들게 만듭니다. 그래서 내가 어떤 일을 하고자 해도 그 일에 집중을 할 수 없게 됩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주님은 염려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염려하지 말아야할 분명한 이유를 말씀하셨습니다. 과연 우리가 염려하지 말아야할 이유는 무엇입니까?
본론 / 어떻게 하여야 염려를 극복할 수 있는가?
1. 우리는 하나님께서 성도들의 삶을 책임져 주신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25절)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과 같이, 사람에게 목숨처럼 귀한 것은 달리 없습니다. 우리에게 생명과 몸을 주신 이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목숨과 몸을 위해 필요한 양식과 의복을 주실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목숨과 음식 중에 어느 것이 더 소중합니까? 몸과 의복 중에 어느 것이 더 소중합니까? 당연히 목숨이 음식보다 소중하고 목숨이 의복보다 더 소중합니다. 그렇다면 소중한 것을 주신 하나님께서 덜 소중한 것을 아끼실 리 있겠습니까? 우리는 이 같은 이치를 올바로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이해를 돕기 위해 공중의 새를 들어 설명하셨습니다. (26절)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매년 1월 말에서 2월 중순까지 우리나라의 금강하구에 가창오리가 날아와서 월동하는데 그 수가 10만에서 20만에 달한다고 합니다. 이 외에도 여러 지역에 수만 마리에서 수십만 마리씩 날아와 월동합니다. 가창오리는 한국 뿐 아니라 일본, 중국에서도 월동을 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를 찾은 수십만 마리가 넘는 가창오리 떼에게 누가 모이를 공급하는 것일까요? 정부입니까, 아니면 자치단체입니까? 아니면 그 지역에 살고 있는 주민들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먹이를 공급해 주시는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 지구상에는 얼마나 많은 새가 살고 있을까요? 조류학자들에 의하면, 완전히 구분되는 새의 종(種)이 약 일만이나 되고, 지구상에 서식하는 모든 새의 수는 1천억에서 4천억 마리로 어림짐작합니다. 이렇게 편차가 큰 이유는 지구상의 새를 정확하게 계수하기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만약 인간들이 이 많은 새에게 모이를 주어야 한다면 그야말로 일 년 농사한 곡식을 다 풀어도 족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새들은 인간들의 도움이 전혀 없어도 걱정 없이 먹고 살아갑니다.
새들은 농사를 짓지 않고, 곡식을 거두어 창고에 저장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내일 양식을 걱정하는 새들이 있던가요? 그러면 누가 새들을 먹이실까요?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공중의 새들을 먹이신다면 하물며 그의 자녀 된 성도들의 먹고 사는 문제를 소홀히 여기실 리 있겠습니까? 물론 새들도 먹이가 있는 곳을 찾아 힘들여 날아갑니다. 때론 다른 새들과 경쟁하며 다투기도 합니다. 삼켜 소화하는 수고를 합니다.
그러나 그 수고는 보조적인 것에 불과합니다. 하나님께서 다 먹이를 준비해 주셨고, 필요할 때 챙겨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새들을 먹이시기 위한 수고를 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다만 새들은 하나님의 수고의 열매를 먹을 뿐입니다. 그래서 염려란 사람들이 마치 자기들이 먹을 것을 준비하는 것처럼 몸부림치며 땀흘리는 태도를 말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아무런 수고도 하지 않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먹을 것을 얻기 위해 땀을 흘립니다.
농사도 짓고, 돈도 벌고, 밥도 짓고, 음식도 만듭니다. 이렇게 먹을 것을 위해 몸부림치며 땀흘려 노력하는 것을 염려한다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염려라는 것은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수고를 외면하고 자기가 하나님의 수고를 대신하려고 애를 태우고 몸부림치는 것을 염려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오죽하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까마귀를 예를 들었겠습니까? 누가복음 12장 24절을 보면, (눅 12:24) “까마귀를 생각하라 심지도 아니하고 거두지도 아니하며 골방도 없고 창고도 없으되 하나님이 기르시나니 너희는 새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많은 새 가운데 하필 까마귀를 예로 드신 까닭이 무엇일까요? 레위기 11장 15절을 보면, 까마귀는 선민 이스라엘 자손이 먹을 수 없는 가증한 새에 해당합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까마귀조차 하나님께서 먹이신다고 하셨을 때 그곳에 모인 유대인 청중은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대하여 고개를 끄덕이면서 공감했을 것입니다. 그런즉 성도님들은 먹고 사는 문제로 인해 염려하지 마시고 하나님 아버지께 맡기시기 바랍니다.
그뿐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의복을 위해 염려하는 자들에게 들의 백합화를 예로 들어 설명하셨습니다. 28절부터 31절을 보십시오. (28~31절) “(28)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29)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30)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31)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 길쌈: 직물을 짜내기까지 손으로 하는 모든 과정의 일
백합화라고 번역한 이 꽃은 실은 팔레스틴의 들판에 흔히 자생하는 아네모네를 말합니다. 이 꽃은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합니다. 그런데도 이 꽃의 모양은 화려하고 고운 것으로 치자면 솔로몬의 왕복도 이 꽃에 비교할 수 없습니다. 더구나 들풀은 수명이 길지 못하여 오늘 있다가 내일이면 시들어 아궁이에 던져지고 말지만, 하나님께서는 들풀조차도 소홀히 여기지 않으시고 최상의 옷을 입혀주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자녀 된 성도들이야 얼마나 더 귀하게 보살펴 주시겠습니까? 그러므로 성도들이 의복을 위해 염려하는 것은 가당치 않은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사람이 양식과 의복만 있다고 살 수 있는 것이 아니지 않느냐고 반문할지 모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천년 전의 상황으로 돌아가서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 당시, 로마의 지배 아래 있던 유대인들에게 양식과 의복은 생계를 의미하는 표현이었습니다. 지금도 아프리카의 가난한 나라들의 국민들은 대다수가 생계를 걱정하면서 살아갑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1950년대, 60년대만 해도 한국사람 가운데 양식 걱정, 의복 걱정하지 않고 살았던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오죽하면 ‘보릿고개’ 라는 말이 나올 정도이겠습니까? 보릿고개란 예전에 햇보리가 나올 때까지의 넘기 힘든 고개라는 뜻으로, 묵은 곡식은 다 떨어지고 보리는 미처 여물지 않아서 농가의 식량 사정이 가장 어려운 시기를 비유적으로 이르던 말입니다.
먹을 양식이 없어서 ‘보릿고개’ 라는 말이 나왔지만 의복도 없어서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그렇다고 예수님께서 양식과 의복 염려만 하지 말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양식과 의복은 우리 삶에 필요한 것들을 망라한 표현이라는 점을 이해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밥만 먹고 옷만 입으면 살 수 없으며, 머물러 살 집도 필요하고, 자녀교육도 시켜야 하는 등 이 모든 것이 우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십니다. 그래서 이 사실을 믿는 자에게 이 모든 것을 채워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여야 염려를 극복할 수 있는가? 1. 우리는 하나님께서 성도들의 삶을 책임져 주신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2. 염려의 무익함을 알고 삶을 온전히 하나님께 맡기셔야 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성도들의 삶을 책임져 주신다는 사실을 믿는다면 이제는 우리의 삶을 하나님께 온전히 다 맡겨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27절)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고 하셨습니다. 우리 가운데 그 누구도 염려한 덕분에 현재의 키까지 자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아이가 키가 자라지 않는다고 염려해서 아무리 이야기한들 키가 자라는 것이 아닙니다.
잘 먹고 튼튼하게 운동도 하고 잘 자라야 그것이 몸도 건강해지고 키도 자라나는 것이지 염려해서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말씀을 통해서 염려의 무익함을 우리에게 일깨워 주시려고 하신 것입니다. 이와 같은 예는 얼마든지 들 수 있습니다. 우리가 염려한다고 수명을 연장할 수 있을까요? 염려는 여러 가지 질병을 유발해서 오히려 수명을 단축시킬 뿐입니다. 그러므로 염려를 가지고 해결할 수 없는 것이라면 염려하지 않는 편이 낫습니다.
염려하면 정신과 육체가 병에 걸립니다. 잠언 17장 22절에 이르기를 (잠 17:22)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로 마르게 하느니라”고 했습니다. 현대 의학은 약이나 수술적인 방법 외에도 마음의 즐거움이 치료의 효과를 낸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마음을 기쁘게 가지면 뇌에서 몰핀보다 100배나 강한 엔돌핀이 분비되어 질병을 치료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분노하거나 염려에 사로잡히면 나쁜 호르몬인 아드레날린이 생성되는데, 이 호르몬은 몸의 기능을 긴장시켜서 여러 가지 질병을 유발시킨다고 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염려를 어떻게 처리하면 좋을까요? 하나님께 우리의 염려를 맡겨야 합니다. 다윗도 자신의 삶을 다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성경을 보면, 다윗처럼 시련을 많이 겪은 사람도 드물 것입니다. 목숨을 걸고 블레셋의 장수 골리앗과 싸워 위기에서 나라를 구했으나 도리어 사울 왕의 미움을 받아 도망 다니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왕에게 쫓기는 처지가 되자 모든 사람들이 그를 외면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광야 동굴을 전전하면서 숨어 지냈고, 부랑자들 중 하나처럼 되었습니다.
한번 다윗과 입장을 바꾸어 생각해 보십시오. 만약에 그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았더라면 낙심하고 절망하고 염려로 인해 폐인이 되고 말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께 자기의 모든 우환을 고하고 맡김으로써 그 모든 시련을 이겨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고백과 같이 다윗의 모든 짐을 맡아주시고 대적들의 손에서 다윗을 보호해 주셨으며 드디어는 사울 왕을 폐하시고 다윗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도 다윗처럼 염려거리를 다 하나님께 맡기시기를 바랍니다.
베드로전서 5장 7절을 보십시오. (벧전 5:7)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 빌립보서 4장 6절과 7절도 보십시오. (빌 4:6~7)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이 말씀들은 염려할 시간에 기도하고 간구하고 감사를 드리면, 주님께서 책임져주시고 우리들 마음에 평안함을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염려할 시간에 기도하고 감사하고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어떻게 하여야 염려를 극복할 수 있는가? 1. 우리는 하나님께서 성도들의 삶을 책임져 주신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2. 염려의 무익함을 알고 삶을 온전히 하나님께 맡기셔야 합니다.
3.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셔야 합니다.
“그의 나라와 그의 의”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성도들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는 이방인들과 달리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것들은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며,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우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32절) “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그렇다고 해서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이 아무런 소원도 가지지 말라는 말씀은 아닙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많은 소원이 있습니다. 그것이 이루어지기 바라는 간절한 바람이 있습니다. 그 소원과 바람을 이루기 위해 안타까운 마음으로 애쓰고 몸부림칩니다. 그래서 이런 소원을 가지고 있는 것을 가리켜 염려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33절을 보면 (33절)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여기에 우선 순위가 있다는 것입니다. 먼저 하나님 나라와 의에 대한 간절한 소원을 품고 그 다음으로 자신의 소원을 품으라는 것입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자손은 40년 광야생활을 하는 동안 매일같이 만나를 먹고 살았습니다. 만나는 이스라엘 자손이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내려주신 것입니다. 그것도 40년 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매일 아침에 어김없이 만나를 내려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은 안식일을 위해 제 육일에 이틀 분의 만나를 거둔 것을 제외하면 내일을 위해 만나를 저장해 둘 필요가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할 일은 다만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순종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함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삶의 중심으로 삼으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생활의 염려에 사로잡히지 않고,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주님의 몸 된 교회에서 맡은 직분을 잘 감당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해서 많은 사람을 주님께로 인도할 수 있을까를 위해 마음 쓰고 힘쓰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할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우리의 생활을 보살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모든 것”이란 우리의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을 의미합니다. 솔로몬을 보십시오. 그가 하나님께 일천번제를 드린 그날 밤 꿈에,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고 하셨을 때, 솔로몬은 다른 것들을 일절 구하지 않고 오직 선민 이스라엘 백성을 올바로 재판할 수 있도록 지혜를 달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솔로몬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대하 1:11~12) “이런 마음이 네게 있어서 부나 재물이나 존영이나 원수의 생명 멸하기를 구하지 아니하며 장수도 구하지 아니하고 오직 내가 너로 치리하게 한 내 백성을 재판하기 위하여 지혜와 지식을 구하였으니 그러므로 내가 네게 지혜와 지식을 주고 부와 재물과 존영도 주리니 너의 전의 왕들이 이 같음이 없었거니와 너의 후에도 이 같음이 없으리라”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해야 한다는 말은 바로 이런 경우를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왕 기도할 때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한다면 솔로몬처럼 기도제목 말고도 보너스로 생각지도 않은 것까지 받게 되지 아닐까요? 다시 말해서 우리가 염려하는 대신에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한다면 우리의 생활도 보살펴 주시지 않을까요?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의 욕심을 위해 구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해 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가 미처 구하지 못한 것들도 허락해 주십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런 말씀도 하신 것입니다. 34절을 보십시오. (34절)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 이는 염려를 하더라도 내일이라는 시간이 염려할 것이니 너희는 평안하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염려는 그 시간을 반드시 하나님이 하실 것이니 너희가 미리 잡아당겨 염려하고 앉아 있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게 믿음입니다. 믿음이 없으면 내일은 언제나 절망입니다. 그러나 믿음이 있으면 내일은 언제나 희망입니다. 그래서 복음성가에도 [기도할 수 있는데 왜 걱정하십니까] 라는 찬양이 있습니다. 염려가 되시면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결론 / 이제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성도 여러분, 지금도 생활의 염려와 노후의 염려와 자녀의 염려와 건강의 염려로 걱정될 때가 많으십니까? 그래서 일이 손에 잘 안 잡히고 불안 속에서 사십니까? 그렇다면 모든 염려를 다 주님께 맡겨 버리십시오. 그리고 주의 일에 최선을 다하십시오. 그러면 주님께서 우리의 염려를 맡아 해결해 주십니다. 그것도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좋은 방법으로 우리 문제를 해결해 주십니다. 아무쪼록 염려하지 않고 온전히 하나님께 맡기고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성도님들이 다 됩시다.
결론핵심 : 염려하지 말고 온전히 하나님께 맡기고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합시다.
요약정리 / 어떻게 하여야 염려를 극복할 수 있는가?
1. 우리는 하나님께서 성도들의 삶을 책임져 주신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2. 염려의 무익함을 알고 삶을 온전히 하나님께 맡기셔야 합니다.
3.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