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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홍 초대전 ''깨어나는 몸, 다시 서는 거인''
10월 26일(목) ~ 11월 26일 (일)
오프닝 초대 : 10. 26(목) pm 5:00
깨어나는 몸 다시 서는 거인
홍경한(미술평론가)
1.
1980년대 활발히 타오른 ‘민중미술’은 본래 여러 근본적인 한계를 안고 출발했다. 그 한계란 강령으로 내세운 ‘민중’ 이라는 개념의 실체적 모호함, 대치적 개념의 계급투쟁에 이은 유물변증법적 인식과 관점에서의 편향적 민중성 등이다. 여기에 미적 자율성 상실, 예술사고의 경직성, 정치노선에 예속되는 치명적 결함 등은 10년도 지나지 않아 스스로의 발목을 잡는 원인이 되었다. 특히 1994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민중미술 15년> 전을 통한 제도권으로의 진입은 논리 모순과 양식화에 젖어 제 맥락을 놓친 채 표류하던 민중미술의 위치를 여실히 보여주는 장면으로 꼽힌다.
이후 민중미술은 가녀린 숨을 내쉬며 연명했다. 일부는 그토록 비판하던 제도권 권력으로 빠졌고, 또 다른 일부는 포스트민중미술이라는 용어로도 묶기 어려울 만큼 다양성을 의식한 상태에서 집단적 동일성을 찾는 대신 각자의 방식으로 사회에 침투하거나 그곳에서 삶을 영위하는 이들을 외면하지 않은 채 자신의 예술을 이어 나갔다.
요 몇 년 사이 민중미술은 ‘리얼리즘’으로의 개명을 시도하며 다시 한 번 부흥을 노렸다. 전시 수도 다소 늘었다. 하지만 고달픈 삶을 살아가는 ‘당대 민중’을 복기할만한 기회는 제공하지 못했다. 어느 한쪽은 여전히 과거에 박제된 회상의 미술, 대중과 제도권이 제공하는 달콤한 ‘성공의 정치학’ 아래 놓였다. 2016년부터 갑자기 ‘리얼리즘의 복권’이라는 이름으로, 사회 속 미술이라는 명제로 재-발화를 꿈꿨지만 80년대의 낡은 언어로는 동시대적 개연성이 희미하다는 지적을 피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 중 강력한 시그널을 발산했던 ‘성공의 정치학’은 상업적 이익을 우선하는 대형 화랑들의 머릿속에서 나왔다. 미술시장이 건국 이래 최대 활황이었다는 2007년 이후 극사실주의, 팝아트, 단색화까지 잘 팔아먹었으나 이윤의 지속창출을 염원하던 그들은 그 이상을 필요로 했고, 일단의 세속적 부류는 썩 괜찮은 아이템으로 ‘리얼리즘’을 선택했다. 여기에 저명한 평론가와 몇몇 국공립 미술관이 이론적 토대와 실질적 알리바이까지 제공했다. 이에 착시가 생겼다. 새로운 민중미술시대(리얼리즘미술시대)가 도래한 것 같은 착각 말이다. 결과적으론 실패로 끝났다. 세속적 부류는 ‘민중미술 띄우기’를 민중미술의 역사의식과 시대정신을 표어(標語)화 하는 방식으로 가리려 했지만, 결국 단물 다 빼먹은 이전의 콘텐츠에 이은 화랑들의 장삿속에 승차하는 방식으론 극복하기 힘든 ‘벽’에 부딪혔고, 장사치들과 결합한 자들의 상술임을 눈치 챈 전문가들, 대중들의 반응 역시 시큰둥했다.
그건 민중미술의 계보를 잇는 것도, 대중과 소통하는 미술의 사회적 역할을 강조하는 것도 아니었다. 동시대 대한민국의 사회적, 경제적 불평등과 권력 부패 등을 비판하며, 민중의 삶과 역사를 조명하는 작품들과는 거리도 멀었다. 뿐만 아니라 사회적 변화를 이끌어내는 데에서도 어떤 역할조차 못했다. 개념은 진부했으며 목적은 얄팍했다. 결과물 또한 공동체 취향에 적당히 부합하는 것이었다.
2.
‘민중’이 아닌 ‘대중’의 안락함에 거처하길 원하는 이들과 관계없이 현재의 정치사회적 양태를 미술로 소환하는 이들이다.그들은 외부에서 부여해온 민중미술 작가라는 프레임에 안주하지 않는다. 이론가나 평론가들 또한 특정한 방향에서의 질서화를 부담스러워 한다. 장르 간 학제 간 경계 없는 시대에서 그러한 정의(定義)는 전근대적· 미적계급의식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이다.
예술가의 가치는 세상을 바라보는 미적 태도에서 비롯된다. 오스트리아의 작가 고트프리트 헬른바인(Gottfried Helnwein)의 말처럼 누구나의 가슴 속에 있지만 결코 말할 수 없었던 것들에 대한 발언이 전제된다. 그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예술적 과제에 관한 신념을 방향의 기준으로 삼으며, 경험적·본질적 역사를 직관하고 감성과 오성을 통해 당대를 인식한다. 그런 점에서 언제나 실존적 질문과 압도적 무관심에 고심하는 존재로서의 위치를 점해온 김재홍은 눈여겨봐야할 작가로 손색이 없다.
필자는 1987년 치른 첫 번째 개인전 이후 김재홍의 예술이 줄곧 인간 고통의 깊이와 정신의 회복력을 담아내며 당대를 포함한 역사적 경험에 대한 지속적인 증거로 작용해왔음을 알고 있다.1 그건 80-90년대의 격변기를 체험한 자연인 김재홍으로서,암울한 시대상을 통찰하는 작가로서의 몫이었고 아직 ‘남겨진 자의 책무’였다.
김재홍의 대표적인 작업은 워낙 많아 일일이 거론하기 힘들다. 국립현대 미술관 소장품인 <하늘>(1991) 외에도 <근정전-혁명의 역사>(1994), <아버지>(2003~) 연작 등은 자타 공인 주요 작이다.
이 중 <하늘>은 암울한 정치적·사회적 현실의 절망과 희망을 원형의 캔버스에 담은 것이고, <근정전-혁명의 역사>는 조선고종 31년(1894)에 동학교도 전봉준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 반봉건·반외세 운동이자 구한말 근대사의 시작인 ‘동학농민혁명’2에 관한 작품이다. <아버지> 시리즈는 (철조망에서 유추되듯) 분단국가의 현실과 고통에서 한발 더 나아가, 삶과 죽음을 통한 삶의 진정성과 더불어, 절망과 희망이 교차하는 동시대 보편적 초상을 읽을 수 있는 의미적 작품에 속한다.
이 밖에도 역사화의 새로운 장을 연 <근정전-죽우>(1994)를비롯해, <가보세 가보세-日砲輪1>(1994), <검은강>(1997), <대지>(1997) 연작, <거인의 잠>(1998~) 시리즈 등도 그의 화사(畫史)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작품에 속한다.
이번 정문규미술관 초대전에 선보이는 <꽃>(2022~) 연작도 마찬가지다. 이들 작업에는 역사의 맥박과 현실 참여적 인식을 텃밭으로 한 서정적 비애가 관통한다. 코맥 맥카시(Cormac McCarthy’s)의『더 로드』(The Road, 2006)를 들여다보듯 길고 긴 역사 속 권력과 외세에 의한 침점-탄압의 자국들, 주체적 민중의식에 덧대어 사회적 불의, 인간 조건3에 뿌리를 둔다. 그래서일까, 그의 작품에는 군주제의 몰락과 정권에 의한 고통 등의 격동의 사건을 담은 할레드 호세이니(Khaled Hosseini)의 『연 날리는 사람』 (The Kite Runner, 2003)을 떠올린다. 그곳에도 생존을 위한 투쟁과 현실 앞에 놓인 황량한 풍경을 헤쳐 나가는 사람들이 있고, 억눌려 핍박받는 인간에 관한 슬픔이 배어 있다. 죽었으나 좀비처럼 살아 있는 자들과 살아야 했으나 죽을 수밖에 없었던 모든 것들이 공존하는 비극적 생태까지 내재되어 있다.
김재홍은 정치적·사회적 관계망 속에 거주하는 실존이 겪는 삶의 냉혹한 현실을 기록하고 시대의 긴급한 사회적 문제들을 품격 있게 다룬다. 그의 또 다른 역사화로 <근정전>을 잇는 <안타까운 유산>(2023)에서처럼 그의 작품들은 그 자체로 강력한 ‘논평’이 된다. 물론 또 다른 특징도 있다. 바로 그의 작품은 형식상 사실주의적 경향을 따르지만 입체적 상상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입체적 상상은 상징적인 요소에 의한다. 작가는 상징을 통한 직관성을 회피하는 대신 작품마다 시어(詩語)를 심으며 현실 인식과 성찰의 행간을 만든다. 예를 들어 폭탄에 의해 깊은 웅덩이가 들어선 대지 혹은 자연의 일부처럼 보이는 몸을 그린 <거인의 잠>, <야만의 흔적>(2022~) 연작은 거칠고 험난한 질곡의 역사를 다룬 진혼곡이다. 몸에 새겨진 크고 작은 기록과 생채기들은 엄혹한 현실의 투영이면서 나의 의지와 무관하게 각인될 수밖에 없었던 익명의 상흔이다.
특히 <아버지-고목>(2004) 시리즈의 주름진 손은 질곡의 역사를 지나온 이에 대한 존중과 애도를 사색의 상태로 보여준다. 보다 넓게 보아 그의 <아버지> 연작은 인간성의 원초적 본질과 절망, 삶의 지층, 현존의 가장 고통스럽고 어두운 구석과 마주토록 하지만 묵묵히 감내한 채 살아가는 동시대 한 인간을 넘어 공동체의 정서적 풍경과 진배없다.
여기에 각 나라의 국화 (國花)를 폭발 하듯 묘사한 <꽃>(2022~) 연작 중 일부는 세계를 지배하고 재단하는 살아있는 권력의 함수를 암시적·은유적으로 다룬다. 상처 입은 신체가 각인된 <거인의 잠>은 현재를 살아가는 ‘생존자들’의 마음속 피폐함을 반영한 초현실적 여운이 없지 않다면, 근래 제작된 <꽃> 연작은 어딘가 아름다우면서도 섬뜩하고 이상하게 매혹적인 ‘감정’을 불러온다.
김재홍은 무너져가는 세상을 헤쳐 나가면서 관계의 복잡성을 파헤친다. 시대모순과 불안한 평화의 한반도, 현대인의 끝없는 욕망, 치유 불가능한 지경에까지 이른 자연, 노동착취를 통한 잉여가치를 창출하는 자본주의 등에 대한 비판과 동시대인의 삶에 대한 대안을 자신만의 문법으로 풀어낸다.
겉보기엔 어둡다. 감성적 음울함이 있다. 하나, 궁극적으로 그것은 나와 우리를 둘러싼 허무주의적인 존재 속에서 연약한 희망의 불씨가 된다. 절망에 직면한 것들을 부각시키면서 놓을 수 없는 유대를 엮어낸다. 그렇게 그의 작품들은 목적이 없어 보이는 세상에서도, 지옥이 지옥을 생산하는 현실 속에서도 우리가 어떤 길을 갈 것인가에 대한 사유의 틈을 보여준다. 진실의 힘이다.
긱주.
1 미대생 시절 그의 작품들을 보며 작품자체가 논의의 무대였음을 실제 목도하곤 했다.
2 농민들이 궐기하여 부정과 외세에 항거한 ‘동학농민혁명’(반봉건, 반외세)은 갑오개혁과 1919년 3·1운동에 영향을 주었지만 정부는 민란 관련자들을 역적죄로 몰아 혹독하게 탄압한 역사를 갖고 있다.
3 오늘을 살아가는 필자에겐 유독 ‘인간 조건’에 시선이 간다. 가난할수록 비싼 대가를 치루는 소시민의 삶을 포함한 노동의 현실, 주체로서의 자각을 상실한 자들의 고통, 정의롭지 못한 사회, 갈수록 심해지는 빈부격차와 불공정, 군부독재와 색깔만 달라진 형태의 왕권정치 및 현재행형인 분단의 상황 속에서 억압받는 민초들, 그리고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국민들을 사지로 몰아넣는 것조차 아무렇지 않은 모순되고 부당한 권력 등이 그의 작품 구석구석 녹아 있는 탓이다.
3.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 얼마 안 된 시점에 집필한 조지 오웰(George Orwell)의 소설 『1984』(1949)는 권력유지를 위해 감시와 선전, 사상통제를 남발하는 전체주의 정권을 묘사한다. 억압적인 정부에 환멸을 느끼고 그것에 대항하기 위해 노력하는 하급 당원인 윈스턴 스미스의 눈을 통해 폭력적 역사와 정권이 만든 체제에서 개인들이 겪는 고통, 의식과 양심이 통제되는 과정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큰 틀에선 민중을 배척해온 위선자들에 의한 비인간화 효과, 개인성의 상실, 권위주의의 위험성과 정치가 인간 정신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경고 등을 발견할 수 있다.
필자는 소설 『1984』와 김재홍의 작품 <안타까운 유산>과 무엇이 다른지 구분하지 못한다. 문학과 시각예술이라는 표현방식의 간극 뿐, 우리 역사와 정치에서 느끼는 인간 경험에 대한 의미와 윈스턴 스미스의 감정이 어떻게 다를 수 있는지 의문이다. 보다 확장적으론 우리 사회는 과연 조지 오웰이 묘사한 디스토피아적 세계와 얼마나 다른지 되묻게 된다. 차이가 있다면 김재홍의 시적이고 품위 있는 작품은 ‘사회생태계 위기의 역사지리적 풍경’4, 그 어둠 속에서 무언가를 발견하게 되는 불꽃으로 남아 소멸 직전의 세계를 염원의 상태로 되돌려 놓는다는 점이다. 그의 이미지는 경험적·사회적 실천의 산물이기도 하나, 의미를 담는 기호로 확장된다는 것도 구분점이다.
이 밖에도 황량함 앞에 드리운 것들을 고민하도록 관람객을 초대하며, 우리 영혼의 어두운 영역까지 비추는 예술의 영원한 힘의 증거로 우뚝 서고 있다는 것, 그리고 우린 그의 작품을 접하며 정치적·경제적·사회적·역사적 논쟁적 사안들에 대해 공감하고 ‘공론의 장’에 참여하게 된다는 사실도 일정한 거리감을 유지한다.
그는 인용 부호를 피하는 방식으로 독자성을 개척한다. 긴박감과 긴장감을 높이는 의식의 흐름 속에서 다중 지성과의 대화를 이어간다. 그래서 김재홍의 작품은 문학성을 띤다. 때문에 시각예술이라기 보단 문학적 서사로 규정해도 무방하다. 그러나 필자는 특정 범주화에 앞서 미술이 이 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한 그의 고뇌 가득한 철학을 중시한다. 실존의 현실에 대한 묵상으로 해석한다.
성공의 정치학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는 미술환경이 심화되고 있다. 작가들도 돈만 쫏는다. 시스템에 의한 작가와 구조 간 예속 관계는 가중되고, 실험적 장의 퇴출과 맞물린 시장논리와 자본논리가 미술을 포함한 문화 영역에 영향을 끼치면서 직접적 사회담론은커녕 훼손되어서는 안 될 작가들의 각기 다른 개성 및 움직임마저 둔화시키고 있다. 또한 자기검열의 징후를 낳는 정치검열, 예술 검열은 우리가 수십 년간 투쟁해 얻은 자유가 실종된 과거로의 회귀를 우려케 한다.
이런 상황에서 사실적인 세상을 통찰의 눈과 깨어있는 정신으로 ‘미술의 사회적 역할’을 실천적으로 구현해주길 바라는 건 어쩌면 욕심일 수 있다. 그럼에도 우린 고답적 명성의 박제화와 성공의 정치학 사이에서 자신만의 언어로 쓰고 짓고 낭독하는 작가들을 본다.
김재홍도 그 중 한명이다. 그는 지금까지 불안하고 폭력적인 사회현실 속에서 미술가의 역할을 재정립하려 했으며, 당대 민중의 상식과 괴리되지 않은 발언으로 미술의 기능을 회복하고자 했다. 2004년 이후 그림책작가5로 활발하게 활동하던 당시도 그랬다. 그리고 이러한 지향성, 인간 삶과 장구한 역사를 배경으로 한 서사화는 현재도 이어지고 있다. 깨어나는 몸, 다시 서는 거인이다.
각주.
4 2022년 발간된 『그림의 새로운 시작』(부제: 문명 전환과 다성적·민중적 리얼리즘의 감각과 서사, 심광현/유진화 공저) 중 김재홍을 내세운 두 번째 챕터의 소주제이다.
5 김재홍은 그동안 그림책 『동강의 아이들』(2000)을 포함해 『고양이 학교』(2001~), 『영이의 비닐우산』(2005) 등의 작품을 발표했다. 2004년에 『동강의 아이들』로 ‘에스파스앙팡상’(스위스)을, 2006년엔 『고양이 학교』로 ‘앵코륍티블상’(프랑스)을 2007년엔 2007BIB-어린이심사상‘(슬로베니아)을 받았다. ‘에스파스앙팡상’은 스위스 발레주(州)에 본부를 둔 어린이문화재단 에스파스앙팡이 어린이의 정신적 발달에 도움을 주고, 어른과 어른 사이의 의사소통을 지원한다는 취지로 1987년 제정되었으며, ‘앵코륍티블상’은 프랑스의 서점관계자들이 제정한 권위 있는 아동문학상이다.
김재홍
Kim Jaehong / 金宰弘
개인전
21년-나무화랑-‘김재홍 개인전‘
18년-나무화랑-‘살’전
06년-La Chapelle des Penitents Bleus- 프랑스 라시오타시
04년-사비나 미술관-‘야만의 흔적’전
99년-갤러리 사비나-‘그림속의 숨은그림’전
98년-갤러리 사비나-‘거인의 잠’전
97,98년-오픈 스튜디오-파주 하제마을
94년-예술의 전당 한가람 미술관
91년-갤러리 인데코
89년-그림마당 민
89년-한강 미술관
87년-백송화랑
단체전
23년-“후쿠시마 조삼모사”전-갤러리 아르떼숲
23년-“UTOPIAACE”전 –포츠담미술관- 독일
23년-“세계혁명예술”전-전북대 삼성문화회관 건지아트홀
23년-“씨앗페”-갤러리인디프레스
22년-“그림의 새로운 시작”전-삼육빌딩
22년-“남북평화미술”전-한반도생태평화종합관광센터(파주임진각내)
21년-“김윤수선생3주기 기념전”-인사아트프라자갤러리
21년-“하제”전-정문규미술관
21년-“전방前方”-오두산 통일전망대 기획전시실
21년-“판화와 회화의 조응전“-해움미술관
20년-“인간전”-정문규미술관
20년-“김윤수선생2주기추모전”-인사아트프라자갤러리
19년-“광장”전-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
18년-“민족예술,다시 날아 오르다!“전-관훈갤러리
18년-“78 동행”전-갤러리 올
18년-“핵의 사회”전-대안공간 무국적
18년-“오! Real?"전-나무화랑
18년-“언땅이 풀리고”전-나종희갤러리
17년-“균열전”-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
17년-“청년의 초상”전-국립역사박물관
14년-“얄궂은 풍경”전-경남문예회관
13년-“자이트가이스트 시대정신”전-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12년-“여기 사람이 있다”전-대전시립미술관
11년-“2011-함께하는 경기도미술관”-스톤앤워터 석수아트터미널
11년-“회화속 가족일기”전-안동문화예술의전당 ...등 90여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