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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궁극이
55편 9절-17절: 내가 성 내에서 강포와 분쟁을 보았사오니 주여 저희를 멸하소서 저희 혀를 나누소서 저희가 주야로 성벽 위에 두루 다니니 성 중에는 죄악과 잔해함이 있으며 악독이 그 중에 있고 압박과 궤사가 그 거리를 떠나지 않도다 나를 책망한 자가 원수가 아니라 원수일찐대 내가 참았으리라 나를 대하여 자기를 높이는 자가 나를 미워하는 자가 아니라 미워하는 자일찐대 내가 그를 피하여 숨었으리라 그가 곧 너로다 나의 동류 나의 동무요 나의 가까운 친우로다 우리가 같이 재미롭게 의논하며 무리와 함께하여 하나님의 집 안에서 다녔도다 사망이 홀연히 저희에게 임하여 산 채로 음부에 내려갈찌어다 이는 악독이 저희 거처에 있고 저희 가운데 있음이로다 나는 하나님께 부르짖으리니 여호와께서 나를 구원하시리로다 저녁과 아침과 정오에 내가 근심하여 탄식하리니 여호와께서 내 소리를 들으시리로다.
9절: ‘내가 성 내에서 강포와 분쟁을 보았사오니 주여, 저희를 멸하소서. 저희 혀를 나누소서.’ 조직화된 폭도들이 없어지려면 그들의 주장성들이 나눠져서 하나가 되지 않으면 그들의 일이 성사되지 않는고로 모두 해체가 돼버린다. 만일 그들의 일이 성사가 되면 그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은 필연적인 사실이고, 성도들의 성화구원도 안 되는 것이고, 진리의 성도들에게는 큰 환난이 되는 거다.
악한 자들의 모의들이 모두 멸해진다면 성도들의 이룰구원은 하나님과의 의사단일로 잘 되리라고 보아진다. 그러나 교회 안에서 무슨 의논을 하는데 인본주의 사고방식, 세상 속화된 일반적인 사고방식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면 하나님의 뜻대로 하려는 것은 말살이 돼버린다. 옳은 것을 이루지 못하게 된다.
물론 믿는 우리는 이렇게 하나 저렇게 하나 하나님 앞에 진리양심대로 바로만 하면 된다. 그런데 그렇지 못한 일들이 너무나 허다하다. 교회의 후임자를 세우는 문제에 있어서도 진리 신앙자를 세워야 한다. 목사의 아들이라고 해서 후임자가 못 되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 없게 하려니 아들 대신 진리를 잘 받은 사람을 후임으로 세우는 게 좋다. ‘너희들끼리 의논해서 세워라’ 하게 되면 싸움판이 될 수밖에 없다.
교회 안에 인본주의 사고방식의 사람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으면 목사님이 진리말씀을 따라 어떤 일을 하려고 해도 그게 잘 안 된다. 왜냐하면 인본주의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은 민주주의로 한다고 하면서 다수결로 정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회 안에 인본주의 사고방식을 가진 자들이 주류가 되어있으면 이 교회는 악의 무리가 돼버린다. 이렇게 되면 그 교회 성도들의 이룰구원은 중단이 돼버린다. 이런 교회는 하나의 종교적인 사업을 목적적으로 해 나가게 된다. 이런 일은 하루아침에 되는 게 아니다. 그래서 인도자의 세계는 항상 심사를 해야 한다.
10절-11절: ‘저희가 주야로 성벽 위에 두루 다니니 성 중에는 죄악과 잔해함이 있으며 악독이 그 중에 있고 압박과 궤사가 그 거리를 떠나지 않도다.’ 하나님의 성 예루살렘 안에 폭도들이 주인이 되어서 죄의식조차 없이 악한 짓을 공공연히 하고 있다고 한다. 완전히 그들의 세상이 돼버렸다는 거다. 사울 왕의 세상, 압살롬의 세상, 아합의 세상, 가인의 세상, 소돔 고모라의 세상이 돼버린 거다. 특히 다윗 때는 사울 왕의 세상이 되었다.
진리통치를 받아서 새사람이 주격이 되어 살아야 할 예루살렘에 옛사람, 육이 주격이 된 왕이 들어서면 이방의 뜻이 슬슬 끼어들게 된다. 교회에 세상적인 목사가 서게 되면 이 교회는 세상적인 사고방식이 슬슬 들어온다. 그러면 이것이 그 교회의 주류가 돼버린다. 이런 교회는 사회적 명예가 있거나 돈이 많은 사람이 들어오면 이런 사람에게 직분을 빨리 준다. 왜냐? 종교적인 일을 크게 많이 하려니까. 그러니 결국은 그런 자들이 주류가 되는 거다. 예루살렘 성 내에서 악한 자들이 주인이 되니 하나님의 도성이 완전히 사망운동을 하는 그들의 세상이 돼버렸다.
12절-14절: ‘나를 책망한 자가 원수가 아니라 원수일찐대 내가 참았으리라. 나를 대하여 자기를 높이는 자가 나를 미워하는 자가 아니라 미워하는 자일찐대 내가 그를 피하여 숨었으리라. 그가 곧 너로다. 나의 동류 나의 동무요 나의 가까운 친우로다. 우리가 같이 재미롭게 의논하며 무리와 함께하여 하나님의 집 안에서 다녔도다.’ 가까이 있는 사람이 다윗의 원수가 됐다고 한다. 예루살렘 성 안이 육적 세상적 종교적으로 돌아가니 다윗의 절친한 친구까지 하나님 앞에서 의사적으로 반역이 되어 돌아가는 것을 보게 된 거다. ‘나는 당신을 반대합니다’ 이렇게 하는 게 아니라 의사적으로 슬며시 다윗과 하나님의 반대쪽에 가서 선 거다.
다윗이 잘못했다고, 옳지 못하다고, 다윗이 생각하고 말하는 것이 현실을 무시하기 때문에 신앙이 아니라고 책망을 하는 자가 누구냐? 악한 자들이다. 다윗을 책망을 한다는 것은 나이가 그만큼 있다는 건데 이 책망을 하는 자가 누구냐? 이방인이겠느냐? 평소에 다윗의 원수가 아니라, 육적으로 다윗을 미워하는 자가 아니라 다윗의 동류요 늘 가까운 친구라고 한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집에서 하나님의 일을 재미있게 의논하고, 같이 하고, 늘 같이 다니던 사람이라는 거다.
삼하15:12에 보면 아히도벨의 반역을 볼 수 있는데, 이 아히도벨은 다윗과 늘 같이 다닌 자다. 그런가 하면 돈 때문에 예수님을 배반한 가룟유다는 돈 때문에 예수님을 배반했다. 돈 때문에 진리를 배반했다. 또한 데마는 세상을 사랑하여 사도바울을 떠난 것을 볼 수 있고, 이 외에도 교회의 인도자들 세계에서 진리와 생명의 말씀을 버리고 넓은 길 세상으로 돌아가는 자들을 흔히 볼 수 있다. 세상 마지막 때는 심지어 온 집안 식구가 진리성도와 원수가 된다고 했다. 이럴 때는 먼저 의사적으로 대립이 된다. 하루아침에 대립이 되는 게 아니라 먼저 의사적으로 대립이 돼 들어간다.
여기서 우리는 정신을 바싹 차리고 자기의 원수관을 바로 세워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육적으로 맺어지는 원수만 내 원수로 보지 말고, 또한 자기 개인적인 신앙의 원수만 보지 말고 그것보다 ‘누가 하나님 앞에서 원수노릇을 하느냐?’ 이걸 봐라. ‘누가 진리이치의 말씀에서 하나님께 원수노릇을 하느냐?’ 이것을 볼 줄 알아야 바른 원수관을 가질 수 있다. 이걸 볼 줄 모르면 자기는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 살고 있으면서도 남만 쳐다보며 ‘네가 나를 미워하니 너는 나의 원수다’ 라고 하게 된다. 이것은 일반적인 사고방식이고, 일반적인 사고방식이란 일반적인 사람의 때를 못 벗었다 그 말이다.
우리는 육적인 원수를 맺으면 안 된다. ‘얼마나 진리로 바로 서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니, 사람이 바로 서려고 하다가 넘어질 수도 있고 실수할 수도 있는 건데 이게 아닌 믿는 사람임에도 아예 진리를 붙잡지 못한 채 다른 것을 주장한다면 이건 하나님의 원수가 돼버린다. 이건 나의 원수도 되는 거다.
그러면 이런 원수는 누가 만들었느냐? 첫째는 인간 자기가 만들었다. 자기의 생각이 짧고 성격 성질이 좋지 않아서 다른 사람을 원수로 삼는 게 많다. 자기의 육에 속한 것을 좋게 해 주면 이 사람이 자기를 좋아하는 친구처럼 보이고, 육적인 면을 해롭게 하면 원수처럼 보이는 이런 사고방식은 이방인들의 세계에서 삼는 원수다. 이런 건 지나다 보면 고쳐질 수도 있고, 예수를 믿을 수도 있는 것이니 우리는 이런 임시적인 것으로 원수를 삼아서는 안 된다. 믿는 우리의 원수는 이런 임시성의 원수가 아니라 영원적인 원수가 진짜 원수다. 하나님의 구원도리를 헐어버리는 게 진짜 원수다. 이 원수는 불신자가 아니라 제일 가깝게는 목사들 중에 있다.
가룟유다의 경우 진리가 싫어서 돈을 받고 예수를 팔아먹은 거냐, 돈이 좋아서 돈을 받고 예수를 팔아먹은 거냐? 후자다. 어느 쪽이 강한 거냐? 돈이다. 돈을 좋아하고 사랑하다 보니 예수님을 희생시킬 수밖에 없는 거다. 교인이 이런 일을 저지르고 난 후에 ‘어쩔 수 없이 그랬습니다’ 라고 하면 주님이 용서해 주시겠느냐?
베드로가 주님에게 ‘형제가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를 하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리이까?’ 라고 물으니까 주님께서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 라고 말씀을 하셨다.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를 하라는 것은 임시성적인 이 땅의 것이 아닌 거기에서 더 나아가 영원에까지 해당되는 용서를 하라는 거다. 7은 흔히 말하기를 완전수라고 하는데, 베드로가 ‘일곱 번까지 하리이까?’ 라고 물었을 때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를 하라’고 하시는 것은 이 땅이 아닌 더 나아가 신령적인 하나님 앞에서의 죄를 사하는 걸 염두에 둔 말씀이다.
그 다음에 두 번째는 민족적 원수, 즉 국가 대 국가의 원수가 있다. 이건 개인적인 원수와는 다르다. 이 원수의 경우는 서로 더 뺏으려고 싸우고, 안 뺏기려고 싸운다. 이럴 때 그 나라에 인재가 없으면, 똑똑한 지도자가 없으면 다 빼앗긴다. 또 하나는 무기나 군대가 없으면 빼앗기게 된다. 우리는 이것을 정신과 사상 면을 염두에 두고 신앙적으로 깨달아야 한다. 신앙 면에서 하나님 앞에 쓰임을 받는 독특한 인물이 하나님 교회의 인재다. 하늘의 군대다. 이건 굉장히 강하다.
세 번째는 하나님께서 보시는 진리성도의 원수가 있다. 하나님께서 보실 때 하나님의 본질인 진리이치대로 하나님의 의사에 맞추느냐, 아니면 세상사람들이 주장하는 그 의사에 맞추느냐? 하나님께서는 이걸 보시고 사람을 원수로 보시기도 하고 친구로 보시기도 한다. 따라서 하나님을 믿는 우리도 하나님께서 보시는 그 눈을 가지고 그 신앙의 차원에 올라가서 원수를 봐야 한다. 즉 하나님과 같은 의사성을 가지고 원수를 봐야 한다. 이걸 좁혀서 보면 성도의 원수는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항상 가까이 있다. 집안 식구 중에도, 동료들 속에도, 주의 일에 수종을 드는 목사들 중에도, 내 자신 속에도 있을 수 있다.
믿는 사람이 하나님과 잘 사귀려고 하면 인간에게 밉보이고, 인간과 잘 사귀려고 하면 하나님에게 밉보이게 된다. 여기서 하나님과 인간이 절반씩 뒤로 가서 하나로 합치면 하나님과 인간이 화평이 되겠느냐? 안 된다. 어느 쪽이던 한 쪽으로 붙어야 한다. 인간과 화평을 하려면 인간 쪽으로 붙어야 하고, 하나님과 화평을 하려면 하나님 쪽으로 붙어야 한다. 그런 다음에 자기가 하나님과 화평이 되고 안 되고는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보시는 원수관을 가져야 한다.
15절: ‘사망이 홀연히 저희에게 임하여 산 채로 음부에 내려갈찌어다. 이는 악독이 저희 거처에 있고 저희 가운데 있음이로다.’ ‘사망이 홀연히 저희에게 임하여 산 채로 음부에 내려갈찌어다.’ 우리 기독자들이 하나님께서 보시는 성도의 원수관을 바로 가지지 못해서 사망의 성질인 비진리에게 잡히면 영적 활동, 생명적 활동을 못하고 사망으로 내려가게 된다는 거다. 사망적인 비진리에게 붙잡히면 산 채로 음부에 내려가는 것과 같다. 이렇게 되면 그 다음의 것은 빤한 것이기 때문에 말할 필요가 없는 거다.
하나님께서 보시는 성도의 원수는 하나님의 본질인 진리가 아닌 세상적으로 가르치는 자들이다. 비진리적 세상적인 가르침은 성도를 넓은 길, 사망 길, 세상 길로 인도하여 이룰구원 면에서 성장을 멈추게 하여 죽게 만드는 일을 한다. 이게 거짓 종들이 하는 일이다. 마귀가 거짓 종들을 붙잡고 하는 운동들이다.
‘음부’란 ‘무덤 혹은 죽음’을 말한다. 그러면 음부로 내려가는 신앙은 어떤 상태가 되겠느냐? 깨달음이 자꾸 둔해져가고 마음은 자꾸 세상 쪽으로 기울어진다. 이렇게 되면 자기 검토가 아니라 자꾸 밖의 것에 신경을 쓰게 되고, 그러니 스트레스가 슬슬 올라오고 걱정 근심이 자꾸 파고 들어오게 된다. 이것이 산 채로 음부로 들어가는 신앙상태다. 자가의 마음상태 정신상태를 잘 알아야 한다. 예수 믿는 사람이 왜 이렇게 될까?
‘이는 악독이 저희 거처에 있고 저희 가운데 있음이로다.’ ‘거처’는 자기가 활동하며 사는 곳이다. 악독이 가득한 곳에 붙어있는 이유는 자기 속에도 그런 악독한 것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그런고로 믿는 우리는 ‘조직이 크다, 작다. 일이 잘 된다, 안 된다’ 이게 문제가 아니라 자기의 신앙사상의 질을 먼저 진단해야 한다. 모르면 잡히고, 잡히면 잠식되고, 이렇게 되면 자기의 신앙의 성장성은 죽는다.
16절: ‘나는 하나님께 부르짖으리니 여호와께서 나를 구원하시리로다.’ 성도다윗은 악독한 자들 속에 있으면서 악독한 자가 되면 자기 신앙의 성장성이 죽는다는 것을 알고 누구에게 부르짖느냐? 하나님께 부르짖는다. 하나님께 부르짖는 것은 자기의 이룰구원이 시급하기 때문이다. 신앙생명이 성장 면에서 죽는 것이 싫다는 거다. 죽으면 자라나지 못한다. 그러니까 자라나지 못하는 것은 죽은 거다. 영이 죽었다는 게 아니라 영적인 면에서 성장할 그 면이 죽었다는 거다.
본 절에서 다윗이 말하는 구원이 무슨 구원이냐? 우리 성도들은 다윗이 어느 면의 구원을 염두에 두고 기도를 하는지 알아야 한다. 다윗은 성도의 이룰구원을 염려 걱정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이뤄드리려고 한다. 이 이룰구원은 진리통치, 신정통치라야 만이 된다. 그래서 다윗은 자신은 물론이고 백성들을 통치하면서 이 일이 잘 되길 바라면서 이를 위해 기도를 하는 거다.
예수를 믿으면서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을 닮지 못한다면 이방신을 믿는 것과 다를 게 뭐냐? 아무 효력이 없다. 그렇다면 예수 믿는 내가 이 면에 대해 원통하게 여기고, 뼈아프게 여기고, 사람이 죽은 것처럼 슬퍼하고 괴로워한 일이 있느냐? 이 기도는 들어주시고 구원해 주신다.
17절: ‘저녁과 아침과 정오에 내가 근심하여 탄식하리니 여호와께서 내 소리를 들으시리로다.’ 시간을 정해놓고 기도를 한다는 게 아니라 저녁과 아침과 정오에 기도하는 내용이 구원의 기도로 정해놨다는 거다. 그리고 저녁과 아침과 정오에 기도를 한다는 것은 하루에 세 번씩 기도를 한다는 말이 아니라 밥을 하루 세 끼 꼬박꼬박 챙겨먹듯이 잊지 않고 늘 구원의 기도를 하겠다는 것을 강조하는 거다.
다윗은 하루 세 끼를 찾아먹는 것보다 구원에 관한 소원성이 더 크기 때문에 이 구원을 위해서 근심과 탄식을 하며 기도를 한다는 거다. 영적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이 구원이라는 것이 그렇게 중요하다는 거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이 기도를 들어주시겠느냐, 안 들어주시겠느냐? 예수 믿는 내가 구원에 대해 이런 근심과 탄식을 해 보았느냐? 다윗의 기도를 들으면서 자기를 향해 자문자답을 해 봐라.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