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세 불꽃 청춘으로 살다 간 '광주의 넋' 신영일
'민주교육지표' 시위 주도ㆍ들불야학 결성… 5ㆍ18에 큰 영향
입력시간 : 2013. 05.17. 00:00 (전남일보)
신영일 기사-전남일보2013.5.17.hwp
1981년 전남대 교정
5ㆍ18 이후 첫 시위
패배 분위기 깨뜨려
5ㆍ18 진상규명 요구
박관현과 옥중 단식
압제 전두환 정권서
민주화 운동 선봉
그의 열정 재조명
민간차원 움직임 활발
1982년 '5ㆍ18민중항쟁 진상규명과 교도소 내 처우개선'을 요구하며 두 사람이 40여 일간의 단식을 시작했다. 1980년 전남대 총학생회장 박관현(1953~1982)씨, 그리고 25년간 역사 속에 묻힌 또 하나의 '광주의 넋' 전남대 국사교육과 77학번 신영일(1958~1988)씨다.
일생을 민주화 운동에 투신한 신영일 씨는 1981년 9월29일 임낙평(광주환경운동연합 공동의장), 이광호 씨 등과 함께 전남대 시위운동으로 '반제반파쇼투쟁선언서'를 발표했다. 5ㆍ18 이후 광주에서 발생한 최초의 시위로, 5ㆍ18민주화운동 이후의 공포와 패배 분위기를 일순간 깨뜨리기는 사건이었다.
시위 주도로 이듬해 구속 수감이 된 신씨는 같은 해 대학 선배인 박관현 씨의 단식에 이어 '5ㆍ18민주화운동 진상규명과 교도소 내 처우개선'을 요구하는 40여일 간의 단식투쟁에 돌입했다. 1982년 4월 내란중요임무종사 혐의로 체포됐던 박관현 씨는 단식 중에 옥중에서 숨졌고, 신영일 씨는 기적적으로 소생했지만 불과 6년 만인 1988년에 고문 후유증과 과로 등으로 세상을 떠났다.
신영일 씨는 전남대 재학 시절부터 반독재 시위에 앞장선 '광주지역 민주화운동의 선봉'으로 평가받는다.
173㎝ 정도 키에 깡마른 체격의 신씨는 대학 초기 운동권 이미지와는 조금 거리가 먼 모습의 학생이었다고 동문들은 회고 한다. 당시 명문으로 꼽혔던 전남대 사범대학 국사교육과에 입학한 후 통기타를 치며 대학가요제에 자작곡을 만들어 참가하기도 했다. 자유를 갈망하며 노래 부르기를 좋아했던 평범한 청년에게 1978년 발생한 전남대 '민주교육지표사건'은 그의 운명을 갈랐다.
당시 유신의 공포정치에 눌려 위축됐던 학생운동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할 무렵, 1978년 6월27일 전남대 송기숙 교수를 비롯한 11명의 교수(국사교육과 김두진ㆍ홍승기 교수, 사학과 이석연ㆍ이홍길 교수 등)가 '우리의 교육지표' 성명서를 발표했다. 이로 인해 교수들이 구속ㆍ해직되는 사태가 발생한다. 여기에 항의한 전남대ㆍ조선대 학생들은 29일 연행 교수 석방과 유신철폐를 요구하는 교내투쟁과 가두시위를 격렬하게 벌였다. 이에 국사교육과 문승훈(광주전남민주화운동동지회 운영위원장) 등 학생 18명이 구속ㆍ제적되고, 신영일, 박기순 등 국사교육과 학생 10명이 무기정학을 당한다.
민주교육지표사건 시위는 '광주 민주화 시위의 시초'로 평가된다. 신씨를 비롯해 시위에 앞장 선 학생들은 광주 최조의 민주화 시위을 주도, 한국 민주주의 운동에 불씨를 지핀 것이다. 이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박관현 씨 등장 이전의 일이다. '6ㆍ29시위'는 한국 민주주의 물꼬를 튼 5ㆍ18에 큰 영향을 준 들불야학의 결성으로 이어진다. 1978년 7월 박기순(전남대 국사교육과 76학번, 임을 위한 행진공 주인공)과 신영일이 광주 광천동 '들불야학' 창설을 주도했다.
6ㆍ29시위를 계기로 전남대 학생운동의 중심에 선 신영일 씨는 사망 직전까지 민주화운동에 투신했다. 1984년 11월 전남민주청년운동협의회를 창설해 홍보부장으로 활동하면서 5월계승민족민주운동을 이끌었고, 1986년 5ㆍ3인천투쟁 참여, 1987년 전남민주주의청년연합의 부위원장 등의 행보를 이어갔다. 신씨는 1987년까지 대선투쟁의 패배 후 낮에는 직장생활, 밤에는 조직정비 활동에 나서다가 31세의 짧은 생애를 마감했다.
이에 신영일 씨의 민주화 열정을 재조명하려는 민간차원의 조명 움직임이 최근 진행되고 있다. 지난 11일 국립5ㆍ18민주묘지(5묘역 5-36)에서 청년운동가 고(故) 신영일 동문의 25주기 추모식이 열렸다. 광주일고, 전남대 국사교육학과 동문들, 전남대 교육지표사건 동지회(노둣돌), 들불야학, 독서 잔디, 사회조사연구회, 근대사연구회, 전청련, 민통련 지역운동협의회 등 100여 명이 참석해 고인의 넋을 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