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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리산과 제일가람
법주사를 다녀와서!
대는
속리산(俗離山)
충청북도 보은군·괴산군과 경상북도 상주시에 걸쳐 있는 산.
속리산은 오래전부터 광명산(光明山)·지명산(智明山)·미지산(彌智山)
·구봉산(九峯山)·형제산(兄弟山)·소금강산(小金剛山)·자하산(紫霞山)
등의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다.『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에는 “속리산(俗離山)은 봉우리 아홉이 뾰족하게 일어섰기 때문에
구봉산(九峯山)이라고도 한다. 신라 때는 속리악(俗離岳)이라고 일컬
었다.”라고 되어 있다.『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는 “속리산은
산세(山勢)가 웅대하고 꼭대기는 모두 돌봉우리가 하늘에 나란히 솟아서,
옥부용(玉芙蓉)을 바라보는 것 같아 세속에서는
소금강(小金剛)이라 부른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높이는 1,058m이다. 태백산맥에서 남서 방향으로 뻗어 나온 소백산맥
줄기 가운데 위치한다. 속리산의 지질은 화강암을 기반으로 하여 변성
퇴적암이 군데군데 섞여 있다. 변성퇴적암은 깊게 패이고, 화강암은
날카롭게 솟아올라 깊은 계곡과 높은 봉우리를 이룬다. 최고봉인 천왕봉
(天王峯)을 중심으로 비로봉(毘盧峰)·길상봉(吉祥峯)·문수봉(文殊峯)·
보현봉(普賢峯)·관음봉(觀音峯)·묘봉(妙峯)·수정봉(水晶峯) 등 8개의
봉(峯)과 문장대(文藏臺)·입석대(立石臺)·경업대(慶業臺)·배석대(拜石臺)
·학소대(鶴巢臺)·신선대(神仙臺)·봉황대(鳳凰臺)·산호대(珊瑚臺) 등 8개
의 대(臺)가 있다.대부분의 봉과 대가 보은 쪽에 있는 반면, 은폭동(隱瀑洞)
을 제외한 용유동계곡(龍遊洞溪谷)·쌍룡폭포(雙龍瀑布)·오송폭포(五松瀑布)
·장각폭포(長角瀑布)·옥량폭포(玉梁瀑布)·용화온천(龍華溫泉) 등은 상주
쪽에 있다. 속리산에는 정이품송(正二品松, 천연기념물 제103호)·망개나무
(천연기념물 제207호) 등 1,055종의 식물이 서식하고 있다. 또한 까막딱따
구리(천연기념물 제242호)·하늘다람쥐(천연기념물 제328호) 등 희귀동물을
포함하여 1,831종의 동물이 서식하고 있다.봄에는 산벚꽃, 여름에는 무성한
녹음, 가을에는 아름다운 단풍, 겨울에는 설경으로 계절마다 장관을 이루며
등산로도 잘 닦여 있어 많은 등산객들이 찾는다. 1984년에는 속리산의 줄기
인 화양동도립공원과 쌍곡계곡 일대가 속리산국립공원에 편입되었다. 추가로
편입된 괴산군 청천면의 화양동계곡에는 송시열(宋時烈)이 은거하며 필적을
남긴 화양구곡(華陽九曲)과 이황(李滉)이 찾아왔다가 도취되어 노닐었다는
선유동구곡(仙遊洞九曲)이 있다. 박대천(博大川)의 지류인 화양천(華陽川)을
따라 좌우로 산재한 경승지를 화양구곡이라 하는데, 한줌의 흙도 보이지 않는
흰 반석에 맑은 물이 흐르고 있으며 울창한 숲과 조화를 이룬 모습이 장관이다.
화양구곡은 경천벽(擎天壁)·운영담(雲影潭)·읍궁암(泣弓岩)·금사담(金沙潭)·
첨성대(瞻星臺)·청운대(淸雲臺)·와룡암(臥龍岩)·학소대(鶴巢臺)·파관(巴串)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또한 선유동구곡은 선유동문(仙遊洞門)·경천벽(擎天壁)·
학소암(鶴巢岩)·연단로(鍊丹爐)·와룡폭(臥龍瀑)·난가대(爛柯臺)·기국암(碁局岩)
·구암(龜岩)·은선암(隱仙岩)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속리산은 수려한 경치와 다양한 동식물, 대규모 사찰인 법주사와 여러 암자가
있어 1970년에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법주사는 신라 진흥왕 때 의신조사
(義信祖師)가 창건한 절로 경내에는 쌍사자 석등(雙獅子石燈, 국보 제5호)·팔
상전(捌相殿, 국보 제55호)·석련지(石蓮池, 국보 제64호)·사천왕 석등(四天
王石燈, 보물 제15호)·마애여래의좌상(磨崖如來倚坐像, 보물 제216호)·대웅보전
(大雄寶殿, 보물 제915호)·원통보전(圓通寶殿, 보물 제916호)·신법 천문도 병풍
(新法天文圖屛風, 보물 제848호)·괘불탱(掛佛幀, 보물 제1259호)·소조비로자나
삼불좌상(塑造毘盧遮那三佛坐像, 보물 제1360호)·목조관음보살좌상(木造觀音
菩薩坐像, 보물 제1361호) 등이 있다. 법주사 일원은 명승 제61로 지정되어 있다.
그 외에도 복천암(福泉庵)·중사자암(中獅子庵)·상환암(上歡庵) 등의 암자와 여덟
개의 석문(石門)이 있다. 법주사 입구 내속리면에는 호텔을 비롯한 숙박시설·
상가 등이 밀집하여 관광취락을 형성하고 있다. 여기에서 법주사까지 이르는
약 2㎞의 길을 오리숲[五里林]이라 하며 계절에 따라 변하는 경치가 일품이다.
속리산의 특산물로는 머루주와 송이버섯이 유명하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한국관광자원총람』(한국관광공사, 1985)
법주사(beopjusa.or.kr)속리산국립공원(songni.knps.or.kr)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속리산 문장대태백산맥(太白山脈)에서 갈라져 남서방향으로 뻗어 내려오다
영남과 호남지방의 경계를 이루는 산맥. 큰 암석이 하늘 높이 치솟아 흰 구름과
맞닿은 듯한 절경을 이루고 있어 운장대(雲藏臺)라고도 한다.
면적 283.4㎢. 1970년 3월 24일 지정되었으며, 1984년 충청북도 괴산군 화양동
(華陽洞)도립공원이 편입되었다. 속리산은 예로부터 한국 팔경(八景)의 하나인
유명한 경승지로, 제2금강(金剛), 또는 소금강이라고도 한다. 법주사(法住寺)를
중심으로 4km 가량의 반경으로 호를 그리면서, 북쪽에 관음봉(觀音峰)이 있고
이어 문장대(文藏臺)·신선대(神仙臺)·입석대(立石臺)·비로봉(毘盧峰)·경업대
(慶業臺)·천왕봉(天王峰:1,058m) 등 해발고도 1,000m 이내의 산봉이 솟아 있는
데 최고봉은 천왕봉이다. 속리산국립공원의 입구는 보은군 속리산면 사내리
(舍乃里)이며 법주사의 사하촌(寺下村)으로 발달하였다. 이 사하촌은 속리산이
국립공원으로 지정되면서 옛 마을이 철거되고 청주나들이골이라는 곳에
새로이 관광촌이 조성되었다. 법주사는 신라 진흥왕 때 의신조사(義信祖師)
가 지었다고 하는데 임진왜란 때 전소되었고, 그 후 그 유지(遺址)에 옛 모양
을 되살려 재건한 것이 현재의 건물이다. 경내에 쌍사자석등(雙獅子石燈:
국보 5)·팔상전(捌相殿:국보 55)·석련지(石蓮池:국보 64)·사천왕 석등(四天王
石燈:보물 15)·마애여래의상(磨崖如來倚像:보물 216)·정이품송(正二品松:
천연기념물 103)·속리산 망개나무(천연기념물 207) 등이 있고, 법주사
일원은 사적 및 명승 4호로 지정되어 있다.
또 법주사의 남쪽에는 남산약수(南山藥水)가 있고, 북쪽 가까이에는 수정암
(水晶庵) 석문(石門)과 여적암(汝寂庵)이 있다. 법주사에서 천왕봉으로 오르
는 사내천(舍乃川) 계곡에는 탈골암(脫骨庵)·복천암(福泉庵)·학소대(鶴巢臺)
·하환암(下歡庵)·상환암(上歡庵)·중사자암(中獅子庵) 등의 여러 암자가 있고
, 이들을 지나 경북과의 경계에 오르면 전망이 뛰어난 경승지인 문장대에
이른다. 문장대는 2개의 봉우리로 되어 있는데 철책으로 등반로가 만들어져
있다. 상주시 화북면(化北面) 용유리(龍遊里)로
내려가면 견훤성(甄萱城)이 있다.
출처: (두산백과)
속리산 문장대[文藏臺, Munjangdae]
충청북도 보은군의 속리산면과 경북 상주시 화북면 경계에 있는 속리산
의 한 봉우리이다(고도:1,028m). 지명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속리
산은 산마루에 문장대가 있는데 층이 쌓인 것이 천연으로 이루어져 높게
공중에 솟았다."라는 기록으로 등장하고 있다. 이후 『해동지도』에는 속
리산 능선에 '문장대(文壯臺)'가, 『대동여지도』에는 '문장대(文壯坮)',
『1872년지방지도』에는 '운장대(雲壯臺)'로 표기되어 있다. '문장'의
한자 표기방식을 문헌마다 달리 하였다. 『조선지지자료』에는 "문장대
(文藏臺)[언문:문장]는 속리면 대법주사 동쪽에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비로소 현재에 통용되고 있는 표기자가 등장하고 있다. 이후 『한국
지명총람』에도 '문장대(文藏臺)'로 표기되어 있다. 이 문헌에는 문장대를
"속리산에서 으뜸 되는 봉우리이다. 여러 바위가 한 덩어리가 되어 높이
솟아 대를 이루었는데 그 꼭대기에 30명이 앉을 만하고 돌이 패어서 샘이
되었는데, 가물어도 물이 줄지 않고 비가 와도 물이 넘치지 않는다고 전해
진다. 그 물이 세 갈래로 갈라져서 동쪽으로 낙동강이 되고 남쪽으로 흘러
금강, 서쪽으로 흘러 한강이 된다고 전해진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속리산 관광특구(俗離山觀光特區)
속리산국립공원을 중심으로 한 속리산관광특구는 수려한 자연경관과
휴양시설이 조화를 이루는 곳이다. 해발 1058m의 속리산은 한국 8경 중
하나인 명산으로 높고 깊은 봉우리와 계곡이 절경을 이룬다. 법주사
에서 시작해 속리산의 다양한 절경을 감상할 수 있는 다양한 등산 코스
가 있다. 속리산국립공원 주변으로 다양한 숙박 시설을 포함한 관광단지가
조성되어 있으며 법주사와 서원계곡, 만수계곡을 비롯해 솔향공원 등을
둘러볼 만하다. 또 속리산에는 하늘다람쥐, 망개나무 등 희귀 동식물이
서식하고 있어 자연 자원의 보고로 불린다. 속리산 관광특구는 접근성도
좋다. 동서를 연결하는 당진~영덕 간 고속도로가 지나고, 청주국제공항
에서 30분 남짓한 거리에 자리했다. 덕분에 내국인 뿐 아니라 중국이나
타이완, 싱가포르 등에서 찾아오는 외국인 관광객의 접근도 편리하다.
속리산국립공원은 계절에 따라 속리축전, 속리산단풍가요제, 속리산등
반축제 등 다양한 축제가 열리며 특히 단풍이 절경을 이루는
가을에 관광객이 많이 찾는다.
* 속리산 관광특구 현황
1) 범위 : 충청북도 보은군 속리산면 사내리, 상판리, 중판리, 갈목리 일원
2) 면적 : 43,745,528㎡
3) 관광특구 지정일 : 1997년 1월 18일
* 속리산 관광특구 시설 현황
서원계곡, 법주사, 만수계곡, 화양구곡, 속리산
천왕봉, 문장대, 삼년산성, 솔향공원 등
출처: (대한민국 구석구석, 한국관광공사)
충청북도 보은군 속리산면 사내리 속리산(俗離山)에 있는 신라시대의 절.
대한불교조계종 제5교구 본사이다.
1. 창건
553년(진흥왕 14)에 의신(義信)이 창건하였고, 그 뒤 776년(혜공왕 12)에
진표(眞表)가 중창하였다. 절 이름을 법주사라 한 것은 창건주 의신이 서
역으로부터 돌아올 때 나귀에 불경을 싣고 와서 이곳에 머물렀다는 설화
에서 유래된다. 그러나 이 절은 진표와 그의 제자들에 의하여 미륵신앙의
중심 도량이 됨으로써 대찰의 규모를 갖추게 되었다. 즉, 금산사(金山寺)
를 창건한 진표는 제자 영심(永深) 등에게 속리산으로 들어가서 길상초
(吉祥草)가 난 곳을 택하여 가람을 이룩하고 교법을 펴라고 하였다. 이에
영심 등은 속리산으로 들어가 길상초가 난 곳을 찾아 절을 세우고 절 이
름을 길상사(吉祥寺)라 하였다. 그 뒤 1101년(숙종 6)에는 숙종이 그의
아우 대각국사(大覺國師)를 위하여 인왕경회(仁王經會)를 이 절에서
당시 3만 명의 승려들이 모였다. 1281년(충렬왕 7) 왕이 절에 행차하여
산호전(珊瑚殿)에 배향하였고, 뒤이어 충숙왕도 절을 다녀갔다. 1363년
(공민왕 12) 왕이 절에 들렀다가 통도사(通度寺)에 사신을 보내 부처님의
사리 1과를 법주사에 봉안하도록 하였다. 조선시대에는 태조가 상환암
(上歡庵)에서 기도하였고, 세조는 병을 요양하기 위하여 복천암(福泉庵)에
와서 3일 동안 법회를 열기도 하였다.
2. 중창
신라 영심의 중창 이래 이 절은 왕실의 비호를 받으면서 8차례의 중수를
거쳐 60여 동의 건물과 70여 개의 암자를 거느린 대찰이 되었으나, 임진
왜란으로 전소된 것을 1605년(선조 38)부터 1626년(인조 4)에 걸쳐 유정
(惟政)이 팔상전을 중건하였다. 1624년(인조 2)에도 벽암(碧巖)이 중창
하였으며, 그 뒤 수차례의 중건·중수를 거쳤다. 1851년(철종 2) 영의정
권돈인(權敦仁)의 주선으로 국가적 규모의 중수가 이루어졌으며, 1872년
(고종 9) 지금의 청동대불 자리에 있었던 2층의 용화보전이 헐렸다. 1967
년 태전(太田)이 중수하였으며, 1974년 정부의 지원으로 대대적 중수가
있었다. 그 뒤 1990년 청동미륵상을 중수하고 그 좌대 아래 지하에 성보
전시관인 용화전을 지으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1. 당우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보전·팔상전(捌相殿)·명부전(冥府殿)·원통보전
(圓通寶殿)·약사전(藥師殿)·천왕문(天王門)·금강문(金剛門)·능인전(能仁殿)
·진영각(眞影閣)·사리각(舍利閣)·염화실(拈華室)·삼성각(三聖閣)·응향각
(凝香閣)·진해당(振海堂)·궁현당(窮玄堂)·명월료·정제당 등이 있다.
① 대웅보전
이 가운데 대웅보전은 1624년(인조 2)에 벽암이 중창할 때 건립한 것으로,
총 120칸에 건평이 170평, 높이가 61척에 달하는 대규모의 건물이다. 보물
제915호로 지정되어 있다. 다포식(多包式) 중층건물로서 무량사(無量寺)
극락전, 화엄사 각황전(覺皇殿) 등과 함께 우리나라 3대 불전(佛殿)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내부에 모셔진 삼존불은 벽암이 중창할 때 조성한 것으로 중앙
에는 법신(法身)인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 좌측에 보신(報身)인 노사나불
(盧舍那佛), 우측에 화신(化身)인 석가모니불이 봉안되어 있는데, 각각의 앉은
키가 5.5m, 허리둘레만도 3.9m에 이른다.
② 팔상전
국보 제55호인 팔상전은 5층 목탑으로서 우리나라 목탑의 연구에 중요한 자료
가 된다. 이 팔상전은 신라 진흥왕 때 의신이 세웠고, 776년에 병진(秉眞)이 중창
하였으며, 정유재란 때 소실된 것을 1605년(선조 38)에 재건하였다. 내부에는 8
폭의 팔상탱화(八相幀怜) 앞쪽으로 나한상(羅漢像)을 3열로 배치하고, 중앙에는
본존불을 봉안하였다.
③ 능인전
능인전은 사리탑의 계단을 오르는 곳에 위치한 아담한 전각으로서 내부에 500
나한을 안치하였다. 이 전각은 1624년에 벽암이 중창한 건물로서 건평이 16평이다.
④ 원통보전
원통보전은 정방형의 특이한 건축양식을 갖춘 건물로서 의신(義信)이 창건하고
진표가 중창하였으며, 벽암이 1624년에 삼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내부에는
높이 2.8m, 허리둘레 1.9m의 관세음보살좌상이 안치되어 있는데, 머리에는 수려
한 보관을 쓰고 얼굴에는 옅은 미소를 담고 있는 거대한 목상(木像)이다. 원통보전
은 보물 제916호로 지정되어 있다.
⑤ 일주문과 금강문
일주문은 정면 1칸의 건물로서 ‘호서제일가람(湖西第一伽藍)’이라는 현판이 있다.
금강문은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내부에는 금강역사상(金剛力士像)과 사자를 타고
앉은 문수보살(文殊菩薩), 코끼리를 타고 앉은 보현보살(普賢菩薩)을 안치하였다.
천왕문은 국내의 천왕문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것으로서, 1624년 벽암이 중창
하였고 1974년에 새롭게 단청하였다.
⑥ 진영각과 사리각
진영각은 이 절을 거쳐간 고승들의 영정을 봉안한 곳으로서, 일명 선희궁원당(宣喜
宮願堂)이라고도 한다. 이 같은 이름이 붙은 까닭은 조선 제21대 영조의 후궁이었던
영빈 이씨(映嬪李氏)가 사용하던 원당(願堂)이었기 때문이다. 내부 중앙에 개산시조
(開山始祖) 의신과 전법초조(傳法初祖) 태고화상(太古和尙)의 영정이 있고, 좌우로 이
름을 알 수 없는 2인의 영정을 비롯하여 세홍(世弘)·함월(函月)·명찰(明察)·정준(靜俊)·
장신(莊信)·도홍(道弘)·홍민(弘玟)·지영(智榮)·영린(玲璘)·진하(震河)·탄응(坦應)·석상
(石霜)·금오(金烏)·명일(冥一)·보흔(普欣)·충은(衝恩)·법영(法英) 등 모두 24인의 영정
이 봉안되어 있다. 사리각에는 석가모니의 사리를 모신 사리탑과 이 탑을 조성하게 된
연기(緣起)를 적은 세존사리비(世尊舍利碑)가 있다. 1650년(효종 1)에 건립한 세존사리
비에는 이 사리탑이 1362년(공민왕 11)에 세워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당시 공민왕이
이 절에 행차하였을 때 왕은 사신을 통도사로 보내 석존사리 1립
(粒)을 옮겨오게 하여 봉안하였다고 한다.
⑦ 염화실과 응향각
염화실과 응향각은 대웅전 서쪽에 있는 일련의 건물로서, 모두 선원(禪院)에 부속된
것이다. 예전에는 대향각이 있었으나 현재는 총지선원(總持禪院)이라는 이름을 가진
선원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리고 선원 위에 있는 염화실은 조실(祖室)이 기거하는
곳이며, 응향각은 노전(爐殿)이라는 직책을 맡은 승려가 거처하는 곳이다.
⑧ 용화보전
이 절에 있었던 유지(遺址)로는 용화보전(龍華寶殿)이 있다. 이 용화보전은 법주사의
정신을 상징하는 중심 법당이었다. 용화보전은 산호전이라 불리었고 산호보광명전
(珊瑚普光明殿)이라고도 불리었는데, 산호전이라는 명칭은 이 전각의 후면 암석을
산호대라고 불렀기 때문에 붙여진 명칭이다. 「사적기」에 의하면, 용화보전은 2층
으로 되어 있었고, 크기는 35칸으로 대웅전 28칸보다 더 크고 웅장하였음을 알 수 있다.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이 전각 안에는 금색의 장륙상(丈六像)이 안치되어 있었
다”고 한다. 그러나 1872년(고종 9)에 대원군이 경복궁 복원을 위한 당백전 주조의 명목
으로 불상을 압수하라는 명을 내려 불상은 압수되고 용화보전은 헐리게 되었다. 현재에도
옛터에는 당시의 초석과 미륵삼존불의 좌대 3기가 있다. 이 용화보전 터에는 1964년 시
멘트로 만든 미륵불입상이 조성되었으며, 1986년 이를 헐고 청동 160t을 들여서 1989년
사월초파일에 높이 33m의 청동미륵대불이 점안(點眼)되었다.
2. 문화재와 산내 암자
이 절의 국가지정문화재로는 국보 제5호인 보은 법주사 쌍사자 석등(法住寺雙獅子石燈)
을 비롯하여 국보 제64호인 보은 법주사 석련지(法住寺石蓮池), 보물 제15호인 보은 법주사
사천왕 석등(法住寺四天王石燈), 보물 제216호인 보은 법주사 마애여래의상(磨崖如來倚像),
보물 제848호인 보은 법주사 신법 천문도 병풍(新法天文圖屛風), 보물 제1259호인 법주사
괘불탱, 보물 제1417호인 보은 법주사 석조희견보살입상 등이 있다.충청북도 유형문화재로는
제16호인 보은 법주사 세존사리탑을 비롯하여 제46호 보은 법주사 사천왕문, 제70호인 보은
법주사 석조(石槽), 제71호인 보은 법주사 벽암대사비(碧巖大師碑), 제79호인 보은 법주사
자정국존비(慈淨國尊碑) 등이 있다. 이 가운데 미륵대불 앞에 위치하는 석조희견보살입상은
향로를 머리에 이고 굳건히 서 있는데 향불을 머리에 이고 부처님께 공양하는 모습이다. 이것
은 진표나 영심 등이 대성(大聖)의 수기를 얻기 위하여 개인의 일신을 아끼지 않던 법상종 특
유의 신앙형태를 조형적으로 나타낸 의미심장한 걸작이다. 즉, 부처님을 향한 믿음이 굳건하
므로 머리의 뜨거움, 손의 뜨거움을 잊고 일심으로 향로를 받드는 모습이다. 또한 자정국존비
는 1314년(충숙왕 1)에 세운 것이며, 절에 이르는 길가에는 세조의 어련(御輦)이 지나갈 때 길
을 비켰다는 정이품송(正二品松, 천연기념물 제103호)이 있다.현존하는 산내 암자로는 수정암
(水晶庵)·복천암(福泉庵)·중사자암(中獅子庵)·여적암(汝寂庵)·탈골암(脫骨庵)·상환암(上歡庵)
·상고암(上庫庵), 근래에 중건된 동암(東庵) 등이 있다.
『삼국유사(三國遺事)』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법주사사적(法住寺事蹟)』
『전통사찰총서 11』충북의 전통사찰Ⅱ(사찰문화연구원, 1998)
『사지』(충청북도, 1982)『한국의 사찰 5』법주사(한국불교연구원, 일지사, 1976)
[報恩 法住寺]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속리산법주사일원(俗離山法住寺一圓)
충청북도 보은군 속리산면 사내리에 있는 법주사를 중심으로
속리산의 천황봉(天皇峰)·관음봉(觀音峰)을 연결하는 일원.
명승 제61호. 지정면적 19,224,542㎡. 속리산 일원은 우리나라 8경 중의
하나로, 제2금강 또는 소금강으로 불리는데, 4계절의 변화에 따른 경치
와 기암·괴석은 절경을 이루고 있고, 대소사찰이 곳곳에 있어 많은 문화
유산을 간직하고 있다. 특히, 법주사는 553년에 천축(天竺 : 지금의 인도)
으로부터 불경을 가져오던 의신(義信)이 이곳에 이르러 산세가 웅장하고
사방이 험준함을 보고 속세를 떠나 불법의 진리를 펼 곳이라 생각하고 큰
절을 세워 법주사라 하였다고 전한다. 법주사 경내에는 국보 제5호인
쌍사자석등(雙獅子石燈)을 비롯하여 팔상전(捌相殿, 국보 제55호)·석련지
(石蓮池, 국보 제64호)·사천왕석등(四天王石燈, 보물 제15호)·마애여래의상
(磨崖如來倚像, 보물 제216호) 등의 많은 문화재들이 보존되어 있다. 일원에
는 사적 제235호인 삼년산성(三年山城)과 정이품송(正二品松), 천연기념물
제103호)·백송(白松, 천연기념물 제104호)·망개나무(천연기념물 제207호)
등 천연기념물이 분포하고 있다. →법주사.
『내고장전통가꾸기』(보은군, 1981)『한국(韓國)의 사찰(寺刹)
-법주사(法住寺)-』(한국불교연구원, 일지사, 1976)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속리산 법주사 자연관찰로
[俗離山法住寺自然觀察路]
속리산국립공원 매표소 근처에서 법주사 입구까지 이르는 길은 두 곳인데
하나는 시멘트에 황토를 깔아 놓은 숲길이고, 다른 하나는 속리산 계곡에서
이어지는 사내천을 따라 가는 흙길인 자연관찰로이다. 두 길 모두 ‘오리숲’
이라고 불리는 숲을 지나게 된다. 자연관찰로에는 숲 이야기, 속리산의 동물
들, 참나무·단풍나무·소나무 이야기, 계곡에 사는 생물들, 곤충 이야기, 버섯
의 역할 등 16개의 주제로 이루어진 해설판이 있다. 속리산의 자연을 감상하
고 생태를 관찰하면서 자연학습을 할 수 있는 오솔길이다.
솔향기에 몸 씻고 산사에서 마음을 닦는다
지금은 터널이 뚫려 말티재를 넘지 않아도 속리산 법주사에 도착할 수 있지만
구불거리는 산길의 묘미를 느끼려면 말티재를 선택하는 편이 낫다. 말티재는
고려 태조 왕건이 법주사를 찾아 가는 길에 닦은 길이다. 이후 조선 세조가 법
주사를 찾아갈 때 길에 얇은 돌을 깔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말티재를 넘어
서 조금만 더 가면 도로 왼쪽에 오래된 소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정이품송이다.
세조가 말티재를 넘어 법주사로 가는 길에 가지가 늘어진 소나무 때문에 연
(임금이 타는 가마)이 지나가지 못할 것 같아 ‘소나무 가지에 연(임금이 타는
가마) 걸린다’고 말하자 나무가 스스로 가지를 올려 지나갈 수 있었다. 이를 기이
하게 여긴 세조는 그 나무에 정2품의 품계를 내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정이
품송은 수령이 약 800여 년이며 천연기념물 103호로 지정됐다.
정이품송의 기품을 느끼고 속리산 법주사로 향했다. 사내리 상가지역 초입 주차
장에 차를 세우고 걷기 시작했다. 속리산버스정류장 앞 도로를 따라 걷는다. 상가
단지를 벗어나면 잔디밭이 나오고 잔디밭에는 조각품들이 있다. 속리산 법주사 ‘
오리숲길’이 이곳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오리숲길’이라는 이름은 사내리 상가
거리부터 법주사까지의 거리가 10리(4킬로미터)의 반인 2킬로미터 정도 되기 때문
에 붙은 이름이다. 숲길 옆에 황톳길을 만들었다. 황톳길을 걸으면 노화를 방지하
고 만성피로나 성인병 예방 등에도 좋다는 내용의 알림판이 발길을 유혹한다. 황톳
길은 그래서 맨발로 걸어야 한다. 솔 향의 싱그러움과 함께 황톳길을 걸으며 이른
봄을 느낀다. 작은 물길을 건너 아름드리 침엽수길을 걷는다. 법주사의 일주문이
여행자를 반긴다. 일주문 앞 기상 높은 소나무 한 그루가 눈길을 끈다. 일주문을 지
나 ‘자연관찰로’로 접어들었다. 소나무 전나무 잣나무 생강나무 고로쇠나무 참나무
조릿대 등 수 많은 종류의 나무가 빽빽하게 들어섰다. 숲길 옆 계곡 물소리를 들으
며 부드러운 흙을 밟으며 걸으니 마음이 평화롭다. 자연관찰로를 벗어나면 하늘을
가린 키 큰 소나무숲길로 이어진다. 솔 향으로 온 몸을 씻어내는 느낌이다. 그렇게
걸어 도착한 법주사는 솔숲과는 또 다른 세상이었다.
법주사를 상징하는 것 중 하나인 팔상전. 건물의 모양이
화려하면서도 늠름하다. 국보55호로 지정됐다.
숲길 끝에 절로 들어가는 작은 다리가 있다. 그 아래로 흐르는 푸른빛 시냇물이
정토의 세계로 들어가는 사람들의 마음을 씻어주는 것 같다. 법주사는 553년 의
신 스님에 의해 세워졌으니 그 역사가 1500년 가까이 된다. 이후 776년에 진표
스님과 영심 스님이 중창을 했다. 60여 동 70여 개의 암자를 거느렸던 큰 절이었
는데 임진왜란 때 거의 모든 건물이 불타 없어졌다. 전쟁이 끝나고 승병을 이끌던
사명대사와 벽암 스님 등에 의해 다시 절이 지어졌고 그 이후 약간의 증개축을
거쳐 지금에 이르고 있다. 법주사는 불법의 은혜가 큰 절이라고 여겨 고려 시조
왕건은 물론 고려의 공민왕, 조선의 세조 등 여러 임금이 찾았던 절이다. 절이
가장 번성했을 때는 절에 머무르는 스님만 3천명이 넘었다고 전해진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경내에 높이 120㎝, 지름 270㎝, 두께 10㎝의 대형 솥이 놓여
있다. ‘철확’이라고 하는 이 무쇠 솥은 수천 명이 먹을 국을 끓일 수 있는 크기다.
이 밖에도 팔상전, 미륵대불, 쌍사자석등, 마애여래의상 등은 꼭 봐야 한다.
법주사 곳곳을 돌아보며 마음을 씻고 돌아 나오는 길, 다시 오리숲길을
걸어 사내리 마을로 나왔다.
아! 가을인가
나운영:노래
김수경 작사
오현명:노래
아아~~ 가을인가 봐
물동이에 떨어진 나뭇잎 보고
물긷는 아가씨 고개 숙이지
♥
아 가을인가, 아 가을인가
아아~~ 가을인가 봐
둥근 달이 고요히 창에 비치면
살며시 가을이 찾아오나 봐
2017-10-16 작성자 청해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