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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4편 *다윗의시,영장으로 현악에 맞춘 노래*
"1:내 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를 때에 응답하소서 곤란 중에 나를 너그럽게 하셨사오니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의 기도를 들으소서"
새벽 4시경에 이 첫 문장을 읽는 순간 다윗의 믿음에 전률을 느끼며 누워서 심중으로 묵상하다 다시 잠들었습니다. 죽은 믿음엔 전률이 없습니다.
그 기도의 첫마디에서 느끼게 된 전률은 "내 아버지!"도 아닌 "내 의의 하나님!"을 부르면서도 아들 그 이상의 당당함으로,마치 빚독촉을 하듯이 응답을 강청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가하면 다윗은 내 의의 하나님을 부르면서도 자기를 곤란 중에 너그럽게 하셨사오니 자기를 긍휼히 여기사 기도를 들어 달라는 겸허한 자세도 함께 보여줍니다.
솔직히 저는 다윗처럼 "내 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를 때에 응답하소서!"라고 강청하기보담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 은혜를 구하는데 익숙한 자입니다. 그러다보니 은혜 받아 누림에 뻔뻔한 얼굴로 변한건 아닌지 돌아 봅니다.
주의 말씀대로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해야 하는데 왜 은혜를 구하는 자가 된 것일까요?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고자 한다면 내 나라와 내 의를 십자가에 못 박아야하는 고통이 싫어서일까요?
사실 다윗이 내 의의 하나님을 부르며 응답해 달라함은 다윗 왕국 현장에 하나님의 의가 이루어지기를 강청하는 것입니다. 이는 기름부은 자를 미워하며 모함하며 죽이기 위해 대적하는 불의한 자들에게는 대단히 위협적인 기도입니다
그래서인지 의의 하나님께 빚독촉하듯 강청하는 자세에 이어 자기를 긍휼히 여기사 기도를 들어 달라는 매우 낮은 자세로 탄원하는 모습도 보여줍니다
왜 그랬을까요? 어쩜 그는 내 의의 하나님을 부르며 기도의 응답을 독촉하면서 불현듯 지난날 자신의 기도에 응답해주신 것이 자신이 의로와서가 아니라 자기를 긍휼히 여기사 곤란 중에 너그럽게 해 주셨음을 깨달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니깐 의의 하나님을 부르면서도 긍휼의 하나님을 기억하며 기도드린 셈입니다.
그런 맥락에서 다윗이 부르는 내 의의 하나님은 율법의 하나님이면서도 긍휼과 은혜가 풍성한 복음의 하나님이라는걸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율법의 의가 아닌 복음의 의를 입은 자라는 걸 깨달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선 이렇게 당신의 은혜를 깨닫는 다윗의 마음을 당신 마음에 합한 자라고 누누이 자랑하십니다.
"이 복음은 이미 너희에게 이르매 너희가 듣고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너희 중에서와 같이 또한 온 천하에서도 열매를 맺어 자라는도다" 골1:6
"2:인생들아 어느 때까지 나의 영광을 변하여 욕되게 하며 허사를 좋아하고 궤휼을 구하겠는고(셀라)"
다윗은 자기 의로 의로 삼지 않고 자기를 위해 예비해 주신 한 몸,즉 그리스도를 자기 의로 삼은 것처럼, 자신의 왕됨을 영광으로 삼지 않고 자신을 택하사 왕의 기름을 부어주신 주 여호와를 나의 영광이라고 이스라엘 앞에서 선언했습니다(시편3:3)
따라서 다윗의 영광인 여호와를 묵상하며 즐거워하지 않는 인생들을 가리켜 여호와를 욕되게 하며 허사를 좋아하며 궤휼을 구한다 합니다.
"3:여호와께서 자기를 위하여 경건한 자를 택하신줄 너희가 알지어다 내가 부를 때에 여호와께서 들으시리로다"
허사를 경영하며 궤휼을 구하는 인생과 다른 인생을 소개해주는데 이들은 여호와께서 들으시는 기도를 하는 자들로 여호와께서 택하신 경건한 자들이라 합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경건여부와 상관없이 누구라도 선택받은 백성들입니다. 그런데 기여코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 가운데에서 경건한 자들을 다시 또 택하십니다.
열 두 지파가운데 레위지파를 특별히 택하사 성전 업무를 위임하셨습니다. 성전 업무엔 하나님과 백성과의 의로운 관계 유지를 위한 제사와 분향 드림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을 당신의 이름을 두신 성전 안으로 택하신 목적은 여호와 당신 자신을 위해서라 하십니다. 이는 당신을 위한 구속사인 복음의 역사를 그들의 기도를 통해 이루어 나가시기 때문입니다.
경건한 자들의 기도를 들으사 구속사를 완성해나가신다는게 얼마나 경이롭습니까?
"4:너희는 떨며 범죄치 말지어다 자리에 누워 심중에 말하고 잠잠할지어다(셀라)"
시편 2:11절에 보면 여호와와 그 기름 부음 받은 자를 대적하여 그 맨 것을 풀고 그의 결박을 벗어 버리려는 자들을 향하여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지어다"라고 권면하는 목소리가 등장합니다.
시편4:4절은 그 말씀의 연장선 같습니다.
"죽는 날까지 하늘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대한민국인들이 윤동주의 서시를 좋아하는 것은 불가능한 줄 알면서도 그렇게 살아야함이 마땅하다는 것을 암암리에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여린 바람에도 떠는 잎새처럼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부어주신 기름이 성령의 바람 따라 움직이는 미세한 양심의 소리 앞에서도 떨며 범죄하지 않겠다는 목소리를 탄생시킵니다.
범죄하고도 떨지 않는 자들은 정말 어떻해 된 것일까요? 귀신들도 살아계신 하나님이 두려워 떠는데 말입니다. 근데 한 때 범죄하고도 떨지 않았던 자가 바로 다윗이었고 나였고 우리였다는 것을 기억하고 살면 참 좋겠습니다.
이런 자들은 정말 언행을 삼갑니다. 굳이 저 높은 하늘 보좌의 절대자 앞까지 가서 무릎 꿇지 않고도,이 낮고 낮은 지면에 누워 심중에 대고 말만해도 들끓는 육신의 생각들이 잠잠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는 아들의 음성을 듣고 허물과 죄로 인해 죽었던 영이 되살아나 아들을 영접했기 때문입니다.
이로인해 아들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께서 되살아난 성도의 영을 거처 삼아 거주하심으로서 무엇이 거룩이고 무엇이 부정인지를 분별케하사 거룩으로 부정을 삼킬 수 있는 거룩한 능력을 경험시켜주시기 때문입니다.
죄인들을 위하여 보혈의 뿌림과 보혈로 덮혀 언약의 피로 보호해주는 기도는 사하시기를 즐거워하시는 아버지 마음 안으로 기도하는 당사자를 들어가도록 하사 아버지의 즐거움에 젖어 살게 하십니다.
그러니깐 사람을 볼 때 한번도 죄를 안지은 사람으로 볼 수 있는 깨끗한 시력이 창조된 셈입니다.
예수님께서 자기 죽음을 담보로 아버지와 아들이 누리는 영광 안으로 우리를 초대해 달라고 기도하신 응답의 열매인 것입니다.
"5:의의 제사를 드리고 여호와를 의뢰할지어다"
성도들은 속죄제물이시며 속건제물이시며 화목제물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를 얻은 자들이 되어 그리스도 안에서 의의 산제사를 드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자신을 드린데라곤 여호와 한 분뿐인즉 여호와외 누구를 의뢰할 것입니까?
아버지!
당신외 그 누구에게 올인하겠나이까?
감사합니다
아멘!
마라나타!
첫댓글 아멘
감사드립니다 샬롬